'법칙'의 시대

바벨의 법칙

 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일, 평화와 안전의 상징이었던 중립국을 무너뜨릴 기세로 솟아난 ‘탑’. 사람들의 걱정과 관심이 쏠리지 않을리 없었다. 심지어 지난 1년 사이 ‘탑’에 관련된 이슈도 끊이지 않았다. 공략 가능, 새로운 자원 발견, 길드와 기업의 이어지는 기싸움, 그것을 종결시킨 ISMA 본부의 결정, ‘탑’ 공략 전문 팀 바벨.

오늘은 그 관심이 이어지다 못해 끓어넘치게 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균열 공략 101주년 기념일, 바벨의 공식적인 발족식이 개최된 날이었다.


화려한 축제가 막을 내린 뒤에는 언제나 귀찮고 짜증나는 뒤처리가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인력은 그런 뒤처리를 피하기 위해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내빼는 편이었다. 일반인들이야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도 가능하면 며칠씩 중립국에 머무르길 바라지 간부들이 중립국에 발 붙이고 있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본부 건물에서도 가장 큰 강당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다들 각종 단체에서 한 자리씩 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번에 본부에서 발표한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바벨과 ‘탑’에 대한 1차 보고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본부에서 기를 쓰고 막아왔던 ‘탑’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세워진 바벨에 대한 정보. ISMA가 최초로 숨기기를 원한 그 정보를 얻기 위해 각국 정부, 기업, 길드, ISMA 지부까지 모였다. 자리가 부족해 카메라와 드론, 아이템에 스킬까지 동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강당은 부산스러울지 언정 시끄럽지는 않았다. 각자 방금 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자신의 아군에게만 비밀리에 공유하느라 바쁠 것이다.

이번에 본부에서 공유한 정보는 바벨의 팀 구성과 ‘탑’에서 발견된 새로운 환경, 자원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탑’이 ‘인간에게 피해를 입힐 일은 없다’는 골조의 설명은 몇 마디 붙었으나, ‘탑’의 구조나 공략법,  앞으로의 계획 등, ‘탑’ 자체와 관련된 세부정보는 없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기업과 길드에서 궁금했던 것은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자원이었고, 국가에서 궁금했던 것은 그 자원과 ‘탑’의 안정성이었으니. 세부정보가 빠졌다는 것은 다들 눈치챘으나, 그 정보가 딱히 그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 주체가 ISMA였다. 몇 십년 동안 인류를 균열에서 지키고 규칙을 잡아온 단체. ‘법칙’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일단 ISMA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의심하는 순간 잃게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작게는 개인의 안정감부터 크게는 사회적 신뢰까지. 예측할 수 있으면서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예견된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자본이었다.

ISMA의 본부장은 단상 앞에서 사람들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물러났던 본부장은 장내가 보다 정돈된 분위기로 보이자  큼,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오늘의 보고 사항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추후 연구 진척 속도와 ‘탑’ 공략 속도에 따라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파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제야 조용히 부산스러웠던 사람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본부장은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지 않고 곧바로 단상에서 내려섰다.


“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저렇게 안달일까.”

배은하는 강당 벽에 기대 본부장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본부는, 본부장은 무엇을 숨기고 싶은 걸까. 

배진이 ISMA와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이어온 거의 유일한 길드이자 기업이다 보니, 본부장과는 여러모로 안면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ISMA의 본부장인만큼 인간성이 되먹지 않았다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해가 될 의도는 아닐테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서 의심인지 흥미인지 모를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런 사람이 그뿐만은 아닌지 구석에서 속닥거리를 사람들도 몇 보였다.

‘탑’이란 말이지. 은하는 가볍게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그제야 강당을 떠났다.


“진짜 그게 끝이라고요?”

본부 건물 앞에서 만나자마자 아르마에게 내용을 전해듣고, 레온타인이 찝찝한 얼굴을 했다. 제논은 별 생각 없는 표정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을 거다.”

아르마도 일말의 찝찝함이 남은 표정이긴 했으나, 일단 본부의 결정에 불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나마 남은 찝찝함도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명백할 때 느끼는 답답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본부장의 판단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기념식 때마다 거기에 굴려지는 것과는 별개로.

하지만 레온타인은 쉽게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다지 인간을 신뢰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지만, ‘탑’에 관해서는 유독 찝찝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찝찝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도 짐작이 어렵다는 점이다.

레온타인이 영 표정을 풀 생각이 없어보이자, 아르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레온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본부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일 없게 하려고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야. 너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 괜한 걱정 하지 마라.”

제가 앤 줄 아세요, 레온타인이 뾰로통하게 반박했으나 아르마는 어깨만 으쓱이고 돌아섰다. 기념식과 발족식의 뒤처리가 남아있었다. 불쌍한 행사 준비위원들은 행사가 끝난 후에도 야근 확정이었다.

“가서 쉬어라. 일도 잘 하고 있고.”

“빨리 오세요, 팀장님!”

“과로를 하실거면 팀에 복귀해서 하세요, 이런 데서는 적당히 하시고.”

제논과 레온타인의 짧은 인사를 받고 아르마는 곧장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절대 팀장 달지 말아야지, 지부장 눈에 들지 말아야지, 제논과 레온타인의 들리지 않는 다짐은 덤이었다. 

아르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레온타인은 곧장 제논의 팔을 잡고 숙소 앞으로 이동했다. 본래라면 ISMA의 공무원들은 중립국에서 묵는 것을 썩 선호하지 않는다. 뒤처리를 떠맡게 될 위험성에 더해 본국 비상상황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SS급 서포터 레온타인이 있는 이상 그정도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중립국에서 1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 기회도 지부 내에서 피터지는 혈투를 통해 얻어낸 귀한 기회였다.

“저희는 내일 복귀죠?”

“너만 내일 복귀. 나는 하루 더 놀다 갈거야.”

제논이 기지개를 켜며 한 말에 레온타인이 태연하게 답했다. 제논은 그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온타인의 멱살부터 잡았다.

“엑, 그런 게 어딨어요! 저희가 놀 시간이 어디있다고!”

“꼬우면 너도 휴가 쓰렴. 물론 우리 팀에서는 이미 내가 빠져서 못 쓰겠지만.”

레온타인은 멱살을 잡히고서도 무서워 하는 기색 없이 얄밉게 웃었다. 제논이 울분에 차서 쨍알거렸지만 딱히 레온타인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레온타인은 몇 마디 더 제논을 놀리다가 순간이동 스킬을 적당히 응용해서 제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닫힘 버튼 누른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약이 바짝 오른 제논의 표정이 보였다. 레온타인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물흐르듯 제논을 놀려먹고 훌륭하게 도망치기까지 했으나, 사실 레온타인은 내내 다른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탑’이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본부장님은 어제 출국하셨습니다. 당분간은 근처엔 안 계실 거예요.”

새벽이 밝기 무섭게 제논부터 미국에 떨어뜨리고 온 레온타인은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아무래도 ‘탑’이 여러모로 신경 쓰여 물어보려고 했는데, 본부장이 자리에 없단다. 사실상 위치야 알면 거리는 레온타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까지 쫓아갔다는 사실은 조금 문제가 될 터였다.

말을 남기고 싶냐고 묻는 비서에게 고개를 젓고 레온타인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그런 애매한 느낌은 실체를 확인하기보다 그냥 막연한 느낌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괜히 들쑤셨다가 진짜로 수상쩍고 불안한 실체라도 나오면 어떡할 건가? 안타깝게도 레온타인은 아르마처럼 남을 위해 몸뚱이를 던지고 싶진 않았다. 위험을 쫓아가는 스릴 중독자 부류도 아니었고. 사실 어디다가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주지도 않을 테니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레온타인은 결국 대강 포기하고 쉬기나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이 인간만 만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 퍼질러 잤을 지도 모른다. 코너를 돌다가 만난 배은하는 레온타인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쪽도 궁금하지? ‘탑’.”


배은하도 아침 일찍 본부에 찾아왔다가 거절당한 사람 중 하나였다. 사실 오늘 그렇게 거절당한 것이 레온타인이나 은하, 한 두명은 아니었다. ‘탑’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본부장일 수밖에 없다. 

바벨 팀은 이미 어제 보고 때, 본부에서 신원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으니 접근할 생각 말라며 경고를 들었다. ISMA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터였다. 애초에 팀장 이름이나 간신히 아는 정도라 찾을 방도가 마땅치 않기도 하고.

지부나 국가에게까지 숨길 정보라면 일반 협회원이 알고 있을리도 없다. 결론적으로 찾아간 본부의 간부급 인사들은 하나같이 현재 ‘탑’이나 타국에 나가 있어 만날 수도 없고 연락도 어렵다고 한다. 사실상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본부의 무언시위나 다름 없는 행동이다.

그렇게 꼭두새벽부터 퇴치된 사람의 수가 삼십 명 언저리를 향해갈 때쯤까지도 은하는 본부장의 사무실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물론 은하는 이미 일찌감치 퇴치당한 부류에 속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워서 뭉그적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직 재미와 자극을 따라 살아가는 은하가 목적 없는 지루한 기다림을 오래 견딜리 없었다. 슬슬 소득 없는 짓은 그만두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은하의 눈이 반짝 뜨였다. 복도 저편에서 잠깐 보인 사람. 시야 한 구석에 잠깐 걸린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울. 한때 ISMA 대한민국 지부의 공무원이었고, ‘탑’이 생기자마자 국적부터 버리고 ‘탑’으로 달려간 또라이였으며, 현재는 바벨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사람. 바벨 팀에 접근하는 건 위험하지만, 균열에서 자주 마주쳤던 옛 동료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닥 위험한 일도 아니다.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씨익 웃은 은하는 곧장 자리를 박찼다. 느긋하게 걷던 울의 뒷모습을 포착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은하가 울을 부르려 하기 무섭게, 울이 은하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흐려졌다. 순간이동 특유의 아지랑이 같은 일렁임이 남았다.

“저 자식 언제부터 순간이동 있었냐?”

아니, 그보다 저 자식 나 비웃었지? 순간 당황한 은하가 중얼거렸다. 공무원 시절의 울에게 순간이동 스킬이 있었던가? 그때 울의 창을 본 기억으로는, 아니었다. 하긴 그것도 최소 1년 전이니 그새 새 스킬을 얻었다고 해도 이상할 점은 없었지만. 문제는 은하에게는 순간이동 스킬이나 추적 스킬이 없어 울을 쫓기가 힘들다는 것 정도겠다.

어쩔까. 정말 슬슬 포기해야 하나? 쯥, 불만스럽게 입맛을 다신 은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본부장의 사무실 앞으로 돌아갔다. 역시 저 인간을 털어서 조지는 게 제일 편한데 말이야, 괜히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군.

적반하장 격인 생각으로 돌아간 시선 끝에 또 본부장을 찾아온 사람이 보였다. 조금 낯익은 사람이다. ISMA 미국지부의 S팀 서포터, 그 이름도 유명하신 레온타인 킹스턴. 헌터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알만한 유명인사였다. 최초의 SS급 서포터니까. 게다가 현존하는 각성자 중에서는 가장 거리가 길고 쿨타임은 짧은 순간이동 스킬을 보유-.

습관적으로 타인의 프로필을 읊던 머릿속이 순간 멈췄다. 그래, 순간이동 스킬 보유자. 지금 그에게 필요한 사람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같은 타이밍에 본부장의 사무실을 찾아온 것을 보면 그도 본부장, 특히 ‘탑’에 볼일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 역시 나는 운도 좋고 머리도 좋은 천재라니까. 이 잘난 사람을 어쩌면 좋지. 은하가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레온타인의 앞에 고개를 들이민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쪽도 궁금하지? ‘탑’.”

“그렇긴 한데… .”

“선울, 저쪽. 방금 순간이동.”

레온타인은 조각난 정보로도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할 만큼 똑똑한 편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무언 협정은 순식간에 체결되었다.


세계 최초의 SS급 서포터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순간이동 스킬 보유자는 이름값을 했다. 추적에는 아이템의 도움도 있었지만 애초에 레온타인이 순간이동 스킬을 다루는 능력이 아니었다면 눈뜨고도 놓칠 뻔했다. 간신히 뒤를 잡았을 때는 오히려 울이 훨씬 지쳐있었다. 은하가 멋대로 턱, 손을 올려놓은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하아, 배은하 이사님, 이렇게 질척대는, 하,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몰랐냐?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겠네.”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인데요.”

“그럼 저랑은 어떠세요? 선울 팀장님.”

레온타인까지 나서자 울은 후,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돌아섰다. 더 이상 도망가는 것은 포기한 듯 했다. 

“미국 지부 S팀 소속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마주치게 될지는 몰랐지만요.”

“세상 일이 언제는 뜻대로 됐나요. 이런 색다른 만남도 나름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레온타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곤 자연스럽게 악수까지 나눴다. 울은 이미 기가 다 빨렸다는 표정으로 두 손까지 들어보였다.

“킹스턴 씨만 아니었으면 안 잡힐 자신 있었는데. 운이 나빴네요.”

“본능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치곤 움직임이 괜찮더라고요.”

“아직 얻은지 얼마 안돼서요. 의도치 않게 훈련까지 했네요.”

“겨우 이정도 가지고 훈련이라뇨. 나중에 기회되면 진짜 훈련 한 번 봐드릴게요.”

한국 지부도 만만치 않기는 했지만, 미국 지부의 훈련법도 유명했다. 인력이 부족하니 굴릴 수 있는 사람은 굴릴 수 있을 만큼 굴린다는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다. 단시간에 쓸모있는 인력을 만들기 위한 훈련은 당연히 살벌했다. 울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뇨, 괜찮은데요.”

“사양하지 마세요. 그 선울 팀장님이신데, 그정도는 해드려야죠.”

그 선울 팀장님, 에 강세가 들어갔다. 은하가 당장 사고칠 불길한 얼굴로 쫓아올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그 말에는 좀더 노골적인 용건이 내포되어 있었다. ‘탑’.

후우, 울은 한 번 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뒤에서 강적을 만났다는 듯 히죽거리는 은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물어볼 게 있으신거겠죠?”

“알면서.”

은하는 여전히 실실 웃으며 대답했고, 레온타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울이 손목을 들었다. 스마트워치 화면이 켜져 있었다. 본부장의 메시지였다. 언제 보냈는지, 은하와 레온타인 두 사람에게 기밀을 말해도 되겠냐는 물음에 허락의 의미를 담은 답신이 도착해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그 답신을 확인했고, 울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자리를 좀 옮기죠.”


울이 안내한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본부 건물과 굉장히 가까운 위치에 세워진 오피스텔이었다. 본부에서 제공하는 숙소라고 했다. 삼십 층이 넘어가는 고층 건물이었는데, 거의 한 층을 한 명이 통째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은하와 레온타인은 소리가 울릴 정도로 넓은 거실에 혀를 찼다.

“역시 본부가 제일 돈이 많다는 게 헛소문이 아닌가 보네요?”

“웬만한 거 다 틀어쥐고 있는데 돈이 없을리가. 그래도 지부에도 그만큼 뿌리지 않냐?”

“그렇긴 하죠. 지부에서는, 특히 우리는 균열 처리하느라 이런 건물까지 지을 여력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요.”

울은 두 사람 사이에 굳이 끼어들지 않은 채 자리를 권했다. 거실 한 가운데에 가죽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뭐라고 본부 욕을 몇 마디 더 주고받는 동안, 울은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몇 개 꺼내왔다.

“손님 대접이 영 별론데?”

“양심 있으십니까? 댁들은 손님이 아니라 협박범이잖습니까.”

은하의 투정에 울은 눈썹을 들썩이며 황당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은하와 레온타인 두 사람은 모두 양심이라곤 균열에 두고 나온 인사들이었기에 더 시비를 걸 수 있었으나, 지금은 들을 말이 있으니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은하가 곧바로 본론을 던졌다.

“그래서, 대체 본부장이 그렇게 숨기고 싶어하는 ‘탑’의 비밀이 뭔데?”

울은 흠, 콧소리를 내며 잠시 침묵했다.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레온타인이 울에게 캔을 하나 넘겨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탑’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 그런 거라도 돼요? 본부장님 성격에 오히려 그런 일이었으면 대비책 마련하고 전 세계 사람한테 알려줬을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레온타인에게 작게 대답하곤 울이 캔을 땄다. 경쾌한 소리.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간 유리창 너머의 '탑'을 응시하던 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덜 중요한 것부터 말씀 드릴까요, 제일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이런 건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어야죠.”

“엉, 앞에 설명 빠지면 재미 없으니까 차근차근 해봐라.”

레온타인과 은하도 캔을 하나씩 집으며 대꾸했다. 덜 중요한 것,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을 보니 ‘탑’에 대해 숨기는 것이 한 두개는 아닌 모양이었다. 울은 할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법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튀어나온 말은 다소 엉뚱했다. 은하와 레온타인은 그 의도를 짐작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혹시 사전적 의미의 법칙 말하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 법칙'이요. 100년 동안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라. 너무 광범위하지 않나요?”

“애초에 무슨 질문이냐? ‘탑’이랑 ‘법칙’이 관련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의도를 잘 모르겠는데.”

울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가 그러니까, 하고 잠시 말을 끌었다. 말하기 싫어서 시간을 끄는 건지, 그저 정말 말하기가 곤란한 건지는 잘 구별되지 않았다. 은하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울은 가볍게 한숨 쉬었다.

“‘법칙’이 정말 법칙일까요?”

여전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은하와 레온타인이 뭔가를 눈치채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이 헛소리 좀 그만하라는 표정을 짓자 울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 ‘법칙’도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법칙들처럼 어떤 의지나 목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작용하는 것 뿐이라고 믿으십니까?”

은하와 레온타인은 그제야 그 질문의 의도를 눈치챘다.

“‘법칙’에 의지나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군요?”

“적어도 ‘탑’에는요.”

“딱히 새로운 주장도 아니잖냐. 그렇게까지 숨겨야 할 얘기인지 모르겠는데.”

‘법칙’이 의지를,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 믿음이나 가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법칙’이 나타난 초기에는 그것이 정설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뒤바꾼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던 연구와 실험이 밝혀지고 난 후에는 미신과 비슷하게 치부되곤 했다.

‘현재 지구’와는 달랐던 다른 세계, 소위 제2세계와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법칙’이었다. ‘법칙’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란 말이었다. 우리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아마 다른 세계에서는 당연했을 것. 마치 우리 세계의 법칙처럼.

“하지만 그때도 밝히지 못했던 것은 많았습니다. 제2세계가 어떤 세계였는가, 그곳에는 어떤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들이요.”

“이제와서 밝혀 내긴 어려운 것들이죠.”

레온타인이 덧붙인 말에 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저희는 세계의 끝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맥락없이 사이비 종교에서나 할 법한 짐작이 나오자 두 사람은 맥이 탁 풀렸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조금이나마 긴장했던 것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사이비 탈출은 빨리 하는 게 좋다.”

“벌써 헌금부터 갖다 바친 건 아니죠?”

은하와 레온타인이 본부장의 정신건강과 통장 걱정을 시작했다. 본부의 자금 걱정에 협회원 걱정, 울의 정신건강 걱정도 물론 딸려 나왔다. 울은 캔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듣고 있다가, 당황한 기색 없이 말을 잘랐다.

“상당히 수상쩍은 발언처럼 들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희도 아무런 논리 없이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아니라서요.”

“사이비도 사이비 나름의 논리는 있겠지.”

“제2세계에 대한 것들이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그나마 밝혀졌다고 믿는 것도 추측에 가깝다는 점은 아실 겁니다. 그러니 제2세계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것도 사이비에서 자주 써먹는 거 아니였어요?”

완전히 집중이 끊겨 늘어진 은하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린 레온타인의 방해에도 울은 그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제2세계가 하나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조금 색다른 주장이었다. 100년 전 그 연구소에 남은 자료에 따르면, 발견된 외부 세계는 단 하나라고 했다. 그때 이어졌음직한 세계도 하나였다. 통로를 여는 에너지가 어쩌고 저쩌고. 관련 연구를 한 사람들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전문적인 이야기가 역사 교과서에 실렸던 때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제1세계와 제2세계, 단 두 개의 세계가 융합되었다고 믿는다. 1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가 융합되었다느니 하는 사실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많았고. 은하는 여전히 늘어진 자세였지만, 눈만은 다시 울을 향했다.

“가능하냐?”

“어쩌면요. 100년 전 연구도 정확하지는 않고, 이쪽 분야 연구는 아직까지도 잘 진척은 되지 않아서 이것도 추측입니다. 하지만 ‘탑’ 내부를 본 사람들은 반쯤 확신하고 있죠.”

우리 세계와도, 균열과도 전혀 다른 풍경이 너무 많거든요. 울은 나직하게 덧붙였다. ‘탑’ 내부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단연 울일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가장 확신하는 사람도 어쩌면 울. 은하와 레온타인은 잠시 울을 보며 침묵했다. 조용히 생각하던 레온타인이 다시 질문했다.

“확실히 지금 학계를 뒤집을 만한 주장이긴 한데요, 여전히 왜 숨겼는지는 모르겠거든요. 세계의 끝 얘기가 왜 나온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세계가 많이 융합하면 뭐 수명이 줄어들기라도 하는 건가요?”

“세계의 갯수보다는 종류가 문제일 겁니다. 최근에 복구된 100년 전 연구 가설 중 하나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목적성이 있는 세계의 존재 여부’에 대한 가설이었죠.”

은하와 레온타인은 굳이 말을 끊지 않고 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떤 정해진 결말, 끝, 혹은 그 끝의 조건이 있는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야기, 소설 책 같은 거겠죠. 특정한 조건이 달성되면 이야기처럼,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겨 덮은 것처럼 결말이 나며 끝난다는 겁니다.”

두 사람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소설 책 같은 세계. 그런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100년 동안 이런 세계가 자리잡으며 사라진 장르였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현대판타지’, ‘헌터물’이 존재했다. 각성자나 헌터 같은 명칭도 그런 장르의 소설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 

한때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지만, 한순간 현실과 너무나 비슷해진 가상의 소설 속 세계. 한때 사람들은 제2세계가 그런 소설 속 세계가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이 세계에 끝이 정해져 있다느니, 결말이 있다느니 하는 주장은 사이비에서나 쓰였다. 그야 이것은 현실이었다. 현실은 다르지 않은가. 현실의 끝이라고 해봐야 내가 죽는 것 뿐이겠지.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고, 그렇게 믿고 있다. 현실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런 세계가 정말 존재했다면? 지금 이 세계가 그런 세계와 융합되었다면? 이 세계에도 어떤 결말이 존재하겠죠.”

“그냥 가설이잖아.”

“가설이죠. 하지만 제2세계에 대해 우리가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없는 만큼 어쩌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요. 더군다나 ‘탑’ 같은 게 나타난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결국 ‘탑’이다. 아니, 아직도 ‘탑’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다. 은하는 슬슬 괜히 발을 들였다는 생각을 했고, 레온타인은 아파올 것 같은 머리를 짚었다.

“그래, 그래, 그 ‘탑’, 그 얘기 하려고 온거였지.”

“네, ‘탑’. 보통 ‘탑’에는, 그러니까 그런 건축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잖습니까. 옛날 그 소설들에도 ‘탑’은 결말을 위해 공략해야 할 대상으로 나옵니다. 그 ‘탑’을 전부 공략함으로써 일정한 보상을 얻거나, 결말이 나거나 하거든요. 실제로 지금 나타난 ‘탑’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고요. 한 층씩 공략 가능하고, 그 층을 공략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런 형식이요.”

“그러니까, 그 ‘탑’을 전부 공략하면 이 세계도 끝이 날거다?”

“그런 추측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레온타인은 한숨 섞어 물어봤지만, 대답하는 울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은하는 기가 차다는 듯 허어, 하는 소리만 내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울은 다 비운 캔을 버리면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하는 김에 말한다는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두 분이 ‘탑’에 들어오실 생각도 없어 보이고, 어디 밖에 말을 나를 사람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 ‘탑’을 담당한 쪽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웬만하면 헛소리 취급할 만한 가설인데, 하필 주장한 게 이쪽에서는 꽤 알아주는 학자라서요. 사이비도 아니고요.”

“결국은 집안 싸움이었나요.”

“뭐, 그렇죠. 이게 그대로 바깥에 알려질 경우에는 온 지구적 싸움이 될지도 모르고, 라는 것이 본부장님의 의견입니다.”

가볍게 덧붙인 말에 은하와 레온타인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실이 퍼지다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꽤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불안해질테고, ‘탑’에 대한 의견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 의견에 의한 대립이 생길지도 모르고.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제 제일 중요한 건데요.”

“아직도 뭐가 남았냐?”

은하가 지긋지긋하다는 목소리로 곧장 반문했다. 레온타인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울은 혼자 덤덤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울이 덜 중요한 것부터 분류해서 차근차근 설명하느라 힘들었다고 가볍게 불평했다.

“아까 ‘탑’의 내부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었죠. 제가 제2세계가 하나가 아닐거라고 추측하게 된 건, 어떤 층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풍경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층들은 균열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잠깐, 균열과 연결되어 있다고요?”

“균열이랑 연결?”

지쳐서 늘어졌던 은하와 레온타인이 동시에 튀어올랐다. 균열은 닫히면 사라진다. 흔적도 사라지고, 외부형 균열의 괴물이 나오는 일도 없고, 내부형 균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나온 일도 없다. 연락이 되었다는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균열과 연결되어 있다니? 앞에서 들었던 머리 아픈 가설까지 싹 다 잊히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아는 사람 몇 없는 극비입니다. 일부러 본부장님이랑 직속 연구팀 말고는 보고도 안 올렸거든요.”

“그런 걸 지금 태연하게…?”

“본부장님이 허락하셨으니까요.”

울은 덤덤하게 덧붙이고는 다시 ‘탑’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모르는 풍경들의 층이 몇 개 있었고, 5층이 처음으로 익숙한 대기를 가진 층이었습니다. 지구였죠. 그곳이 100년 전에 열린 첫 내부형 균열과 똑같은 풍경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100년 전, 중립국에 처음으로 열린 균열. 그때 열린 것은 한 두개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처음보는 현상에 괴물이었는데 그 수까지 적지 않으니 나라 한 개 규모의 땅이 박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던 시절에 열렸던 내부형 균열 중 하나와 똑같은 풍경. 은하와 레온타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냥 모습만 똑같았던 걸지도… .”

“그 안에서 사람의 유해를 발견했습니다. 정확히 100년 전에 중립국 위치에 살던 사람의 DNA와 일치했습니다.”

두 사람은 침묵했다. 지금까지 균열에 갇혀 사라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가. 균열이 그대로 닫히는 것이 아니라면, 연결된 창구가 존재한다면, 그들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인가.

“30층까지 공략한 결과로는 100년 전 첫 균열부터, 내부형 균열이 차례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당시 휘말렸던 건물의 잔해나 유해가 그대로 남아 있고요.”

“그럼 빨리 공략만 하면, 최근 균열들에서는 구조도 가능한 것 아니냐?”

하지만 애석하게도 울은 은하의 물음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했지만, 여러모로 불가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단 100년 전 첫 균열부터 거슬러올라가는데, 그 수만으로도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균열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어진 층도 많습니다. 공략 속도에도 한계가 있으니 최근의 균열까지 도달하려면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죠.”

“그럼 사실상 아까 말한 가설은 쓸모 없는 것 아닌가요? 균열은 또 얼마든지 생겨날 텐데요.”

“학자는 ‘탑’에 끝이 존재할거라고 봅니다. 아마 ‘탑’이 솟아난 100주년 기념일의 그 균열이 마지막층 아니겠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황 한 번 더럽게 꼬아놨네.”

은하는 결국 혀를 찼다. 하필 숫자도 딱 떨어지는 100이다. 사람들을 현혹하기 너무 좋은 숫자다. 이런 가설과 사실이 평소처럼 전부 공유되었다면 ‘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금처럼 점잖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정도면 차라리 ‘탑’이 본부가 관리하는 중립국에 솟아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나마 현시대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ISMA의 본부니 이정도로 정보와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집단이었다면 ‘탑’의 구조를 파악하는 동시에 극렬한 의견 대립 사이에서 짜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은하와 레온타인의 가벼운 호기심과 찝찝함 정도는 짜부러졌을지도. 한 단체의 짜부러짐에서 두 사람의 별 볼일 없는 감정의 짜부러짐으로 격하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은하는 별 의미 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레온타인도 대강 생각 정리를 마쳤는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더럽게 꼬인 상황에서 협회의 방침은요?”

“일단 내부 의견 정리가 우선이죠. 이후에는 아마 어떻게든 정보를 공유할겁니다. 본부장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현 본부장은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소수의 윗 사람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자신이 그 소수의 윗 사람이 된 상황에서도 그랬다. 그는 웬만한 정보를 웬만한 사람들과 전부 나눴고,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해결방안을 찾고 대비책을 만들면서까지 정보를 나눴다. 어쩌면 그가 본부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은하와 레온타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하나의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부장의 방식. 정보는 최대한 나눈다. 그리고 비밀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최선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합당한 대가니까. 즉, 비밀로 숨겨진 정보를 끝까지 들춰냈다면 그에 따르는 일감도 함께 떠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본부장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다.

“솔직히 이정도일 줄 모르고 듣겠다고 한건데 말이야.”

“저도요. 이런 정보면 할 일도 더럽게 많을 거 아니에요.”

울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동정의 눈빛이 두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행동은 가차없었다.

“두 분 핸드폰으로 자료와 지침 전송해 두었습니다. 웬만하면 인쇄 후 인벤토리 보관 및 파일 파기를 추천드립니다.”

“아, 이정도면 본부장이 노리고 낚시한 거 아니냐?”

“참고로 킹스턴 씨는 미국 지부 소속이신 거 감안해주신대요.”

“감사해서 기절하시겠네요.”

“두 분은 바벨 외부 지원팀으로서 기밀 유지와 자료 수집 등에 동원될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팀으로 통할 거고요. 두 분 다 소속이나 능력은 확실하니, 꾸며내는 것도 어렵지 않겠네요.”

은하와 레온타인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도 울은 별 반응 없이 제 할말이나 마쳤다. 그에게서는 오히려 한 시름 놓았다는 안도감과 후련함이 보였다. 은하와 레온타인은 앓는 소리를 냈다. 기껏해야 1~2주 시달리다 놓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도 규모의, 이정도로 복잡한 상황이라니. 단순한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 것 치고는 대가가 너무 컸다. 아무도 들어줄 일 없는 변명이라는 것이 가장 서글펐다.

“이건 사기야... .”

“공무원 워라밸은 어디로….”

“꼬우면 뇌 세척 받으십시오.”

애처로운 은하와 레온타인의 중얼거림은 울의 한 마디에 묵살되었다. 비공식 바벨 외부 지원팀의 기분좋은 출발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