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창작 시리즈

[나페스]장마 

[민윤기x기선례, 김석진x기선례]

 

 

장마가 오면 과거의 사랑이 잊지 않고 찾아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됐다. 열어둔 베란다 문을 닫으려 선례가 발걸음을 재촉하다 멈춘다. 비 오는 소리는 그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삼 개월 전 이사한 집은, 제법 크고 안정적이다. 깔끔한 아일랜드 식탁, 광택이 나는 갈색 소파와 85인치 TV. 선례의 눈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보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창백한 흰색의 콘크리트 벽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기 선례는 인천 송도에서 얼마 전까지 살다 서울로 발령받은 남편(김석진)을 따라왔다. 1살 연하인 남편은 맞선으로 만났지만, 은행장이라는 직책과 안정적인 직업이 맘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잘생긴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아재 개그를 좋아했다. 선례와는 개그 취향이라든가 성향이 전부 반대인 석진이었지만 그가 주는 성실함과 안정감이 선례의 마음을 무엇보다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한데 장마 때가 되면 왜 자꾸 그 시절의 그가 자꾸만 미련처럼 떠오를까.

선례는 안쪽으로 들어오는 비 때문에 나중에 물때가 끼면 바닥 청소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을 닫지 못했다. 지난날의 사랑은 마치 비처럼 여자의 안정적인 삶을 방해라도 하듯 흘러들어왔다.

어느새 바닥은 조금씩 빗물로 젖어 들었고 그녀는 멀거니 서서 그와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아침 일기예보를 보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선례는 피할 곳을 두리번두리번 찾았다. 비를 피해 찾은 건물은 이미 선례 말고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신과 똑같이 비를 피하러 들어왔던 그들은 비좁은 상가 건물 앞에서 비에 젖지 않으려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떤 여자들은 조금이라도 남자와 닿지 않으려 몸을 움츠렸고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짝다리를 한 채 서 있었다.

선례가 다른 곳이 아닌 이 상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들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지며 신경질 그리고 짜증에 주춤하며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하나, 할 때 그가 불쑥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비를 많이 맞으신 거 같은데, 제가 다른 곳으로 갈 테니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졸리거나 건들거리는 말투, 흡사 술에 취한 말투였다. 하지만 발걸음은 비틀대지도 휘청이지도 않는다. 그는 그러고는 선례의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떠나버렸다. 서로 비를 피하면서 누군가는 양보하고 누군가는 짜증을 낸다. 선례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에 푹 젖은 선례 때문에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어어. 조심해요, 라며 쓴 소리를 했다. 남자가 나가고 넉넉해진 공간은 선례가 들어감으로 다시 꽉 찼다. 자리를 바꾸며 우연히 스치듯 마주한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그에게 매료된 순간은 3초도 되지 않았다. 그가 선례를 사로잡은 건 3초로 충분했다.

선례와 그가 다시 만난 것은 어느 카페에서였다. 그는 군대에 다녀온 지 얼마나 안됐는지 머리가 까까머리였다. 까슬까슬한 밤톨 같은 머리에도 그의 외모는 기하학적인 수에 가까운 귀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고 손님으로 온 선례와 2년 반 만에 다시 만났다. 선례와 그는 동시에 얼굴을 보자, 아, 그때 그 사람 맞죠 라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금방 친해졌고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름이 민윤기라는 것도 나이가 3살 아래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윤기와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었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선례가 먼저 고백했었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끝을 내는 것도 선례가 했었다. 시작과 끝을 정확히 끝맺었음에도 선례는 장마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윤기를 떠올렸다. 아니, 장마가 찾아오면 윤기와의 추억을 불러왔다. 그래서 선례는 늘 장마가 시작하면 그를 떠올렸고 장마가 끝나면 추억도 끝났다. 마치 잊혀진 순간들을 잊지 말라는 듯이. 장마처럼 습하고 진득하게 붙었다.

 윤기와 선례의 공통점은 늘 비였다. 비가 내리는 날 만났고 비가 내리는 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윤기와 사귀면서 선례는 마음속에 한 가지 걸림돌이 생겼다. 구름이 낀 하늘처럼 그들의 장래도 우중충하고 어두웠다. 윤기는 가난함을 기본으로 깔고 사는 예술가(작곡가)였고 선례는 이제 취업한 지 3년이나 됐지만 학자금대출과 빚 때문에 변변치 않은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윤기와 선례의 사랑은 어느 소설에서 본 로맨스의 도입부와 같았고 미술로 치자면 예술과 같았다. 첫 만남부터 마치 운명적인 인연처럼 느껴졌고 다시 만나면서 연인으로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 확실시되었다. 서로의 세계를 알아가며 많은 순간을 함께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례는 자신의 꿈과 가치관이 그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윤기는 나른하고 게을러 보여도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도전을 좋아했고 선례는 안정과 성실함을 원했다. 윤기는 성실했지만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세했지만, 붙어있는 시간이 길면 길 수록 점점 더 많은 차이와 격차를 벌려놨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간극이 도저히 메꿔지지 못할 정도로 벌어졌을 땐 그들은 이별을 결심했다. 아니, 선례의 일방적인 통보로 그들은 헤어졌다.

윤기를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선례를 슬프게 만들었다. 울며 매달리는 그에게 매몰찬 말을 하면서 선례는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날 바로 그와 살던 집을 나왔다. 윤기의 집에 있던 물건들이 아깝기는 하지만, 일단 그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까, 자신의 선택을 번복할까 봐 들어가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과거의 그를 끊어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와는 다르게 현재의 석진과의 새로운 가정에서의 생활은 선례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하다 중요한 파일이 노트북에 있다는 걸 기억한 선례는 한참을 고민하다 윤기에게 어렵게 연락했다. 윤기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첫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선례는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서 애정을 느꼈지만, 손톱이 손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뒤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윤기의 들뜬 목소리는 착-하고 가라앉았다. 모래가 물에 젖어 힘을 못 쓰는 것 같은 그럼 음성은 처음 들어봤다. 

그날 저녁 윤기는 선례의 말대로 노트북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왔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살도 빠지고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윤기는 선례에게 일부로 농담도 하고 웃으며 밝게 행동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선례는 그 점을 말하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카페 안은 한적했다. 멀리 떨어진 커플이 손장난하며 놀고 어깨에 기대고 쓰다듬고 아주 애정을 듬뿍 나누고 있었다. 반면에 자신은 생면부지 사람처럼 윤기를 대했다. 선례의 손에는 따뜻한 허브차가 있었고 윤기의 눈에는 감정을 파도가 치솟고 있었다. 그가 막 잔을 드니 얼음들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선례는 눈을 지그시 깔아 모른 척했다. 한참을 떠들던 윤기는 차만 마시는 선례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고 있으면서 윤기는 자꾸만 불행해지는 선택지를 골랐다.

 

"우리, 뭐가 문제였을까요. 어디서 잘못된 거죠."

"문제도 잘못도 없어.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같은 꿈은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다는 거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야. 너는 도전과 열정이었지만 나는 안정과 평온을 원했어."

"그러면 내가 누나가 바라는 안정과 평온을 선택할게요."

"…."

"나는 누나를 잃고 싶지 않아! 내가, 누나가 바라는 안정과 평온을 줄 테니. 제발.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 문제가 뭐든 내가 해결할게요. 네?"

"미안하지만, 노력이라면 우리는 이미 진절머리 나게 했어. 그리고 난 이제 지쳤어. 나는 네가,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준다고 해도 이젠 원하지 않아. 윤기야, 우린 각자 길을 걸어야 할 때야."

 

선례는 차갑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잠시 멈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 네가 돈을 많이 번 다면 또 맘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이런 말 하는 건 우습지만, 너도…. 나 없이 행복할 수 있길 바랄게. 잘 있어."

 

선례는 카페를 완전히 떠나고 한참 만에 돌아봤다. 윤기는 아직 카페에 앉아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였다. 하지만 좀 전에 그녀가 한 말처럼 그와는 여기서 끝이었다. 선례가 했던 말이 만약 윤기에게 희망 고문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하지만 (윤기가 돈이 많든 없든) 이미 선례는 그가 없는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

 

 

선례는 윤기와 헤어지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K 장녀로 두 남동생 뒷바라지에 학자금 대출과 빚까지 갚아나가려면 연애는 사치였다. 선례는 회사가 끝나면 잠을 쪼개서 쿠팡 알바를 뛰며 악착같이 살았다. 하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눈덩이처럼 더 불어났다. 그 사이 엄마 아빠가 선례가 이름으로(선례가 20살이 되기 전에)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렸다는 걸 알자, 선례는 처음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모조리 던지며 뒤집어엎어 버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분노로 온몸이 발발 떠는 선례에게 아빠는 손을 올렸고 엄마도 합세해 머리채를 잡았다. 두 남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망할 집구석이라며 소리치며 나가버렸다. 두들겨 맞은 몸이 아팠지만, 눈물을 흘리며 깨진 밥그릇을 치우던 선례는 결심했다. 이 집구석 나가고 만다고. 하지만 선례의 직장은 이미 부모님 두 분이 다 아셔서 쉽사리 이직을 준비할 수도 없었다. 이미 제2금융권에서 선례의 월급을 몽땅 압수된 상태였다. 

이 사실도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통장 보자는 선례의 말에 엄마가 끝내 보여주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선례가 소리치며 화를 냈기에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선례는 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와 통장관리는 엄마가 했기에, 선례는 빛이 착착 줄고 있을 거로 생각해서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선례는 교회에 나가 멍하니 앉아 예수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예수님, 예수님, 제가 큰 욕심을 부렸나요. 아니면 제가 행복해지는 게 싫으신가요?'

 

하지만 예수는 자애로운 미소로 내려다볼 뿐 선례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선례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집안에 마귀 새끼가 들어앉았다며 새벽기도를 가지 않는 선례를 욕했지만, 선례는 그들이야말로 사탄이고 마귀일 뿐이었다.

 

 

*

 

 

죽은 듯이 일만 하고 살던 선례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익숙한 번호였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례는 끊으려고 했지만, 빗물에 손이 미끄러져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는데 숨 참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선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윤기였다.

 

"안녕. 아니, 오랜만이네요. 누나가 내 전화를 받고 별로 기뻐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받았네. 헤헤. 아, 이 말 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고 누나에게 꼭 들려줄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저 작곡가로 성공했어요. 그래서, 우리 지금 만나지 않을래요."

 

자연스럽고 덤덤했지만 미리 적어놓은 듯 흘러나오는 멘트와 쑥스러운 말투에 선례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윤기와 재회한 그날도 비가 내렸다. 예전에 윤기와 이별했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건 자리와 늦은 시각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윤기는 성공해 있었다. 아이돌 작곡가로 꽤 잘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윤기는 자기가 피처링하고 작곡한 아이돌 곡 제목도 알려주었다. 그 음악들은 선례도 거리를 오가며 들었던 곡이었다. 설마, 그 곡이 윤기가 작곡한 곡이었을 줄이야. 축하한다는 짧은 말을 전하니 그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윤기가 선례의 근황을 물었다. 선례는 입을 다물더니, 아, 나는… 아주 잘 지내. 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날 선례는 그와 가볍게 만나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늘 인생이란 제멋대로였다. 원하지 않을 때 붙잡고 원할 때 떠났다. 잔뜩 술에 취해서 깨어난 순례는 낯선 천장에 몸을 벌떡 일으키다 억 소리를 내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숙취로 속이 쓰리고, 아팠다.

한참 선례가 아픈 위를 부여잡으며 끙끙대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윤기의 모습이 보였다.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선례를 보자마자 그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위 아프죠. 잠시만요."

 

선례는 하얘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지에서 약이랑 물을 가져왔다.

 

"숙취해소제랑 위에 좋은 거 사 왔어요. 마셔요. 왜요?"

"…."

"누나, 술 마시면 위 안 좋아서 늘 고생했잖아. 약은 식사 안 하고 먹어도 된다고 해서 지금 먹어도 되는데…."

 

아픈 위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선례는 윤기가 주는 걸 받아마셨다. 윤기가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선례를 여전히 쪼그린 상태였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 꼼지락대다 보니 아픈 위 통증도 어느새 조금 줄어든 거 같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기가 또다시 쪼르르 봉지 안에서 죽을 꺼내 내민다. 뚜껑을 여니 달걀을 푼 야채죽이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억하는 윤기를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볼을 붉히며 모른 척 윤기는 눈을 피하며, 어서 먹자고 수저를 쥐여준다.

선례는 숟가락으로 살살 계란을 뜨며 식사했다. 부드러운 달걀이 속을 달래준다. 반쯤 먹고 나니 배가 불러오자, 선례는 어제 일이 떠올랐다. 윤기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다른 건 기억에 없지만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했다. 술에 취하기 전까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는데, 취한 뒤에는 집안 사정과 자신의 빌어먹을 상황들을 낱낱이 다 고해바쳤다.

아~! 빌어먹을. 윤기가 얼마나 고소해할까. 안 그래도 잘난 척 떠난 여자가 별 볼 일 없어졌으니. 윤종신의 노래가 떠올랐다. 떠난 연인이 절대 행복하지 말아 달라는 그 노래 가사가 재수 없게 왜 지금 떠오른 걸까. 

어쩌면 윤기도 그 가사처럼 생각할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위가 다시 따끔하고 아파지자, 선례는 명치 부근을 손으로 살살 살 만졌다.

 

"아직도 아파?"

"너 왜 은근슬쩍 반말이야."

 

걱정하는 윤기를 보며 배알이 꼴린 건지 모르겠지만 선례는 반말하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말 하니,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걱정해 줘도 뭐래, 라며 툴툴댄다. 그래봤자 속상하다는 게 다 보인다. 저럴 거면 말이랑 표정 좀 제대로 하라고.

죽도 다 먹고 위도 나아지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 선례는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하고 있던 윤기가 벌써 라고 했지만, 선례는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현관 앞에서 운동화를 신으며 선례는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윤기는 뭐가 불만인지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자세도 삐딱하게 벽에 기대서는 불량한 태도로 말했다.

 

"누나. 누나가 진 그 빚 내가 다 갚았어."

"…. 뭐?" 선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냐고 되물었다.

"내가 누나 빚 다 갚았다고. 악! 때리지 마. 아파. 아파."

"야…. 너! 이 미친놈이 뭔 짓을 한 거야?"

"뭔짓이라니. 빚 갚는데 이유가 있어? 그냥 아무 의미 없어. 누나는 모르겠지만 나 이제 그 정도 벌고 능력도 있거든. 그리고 누나도 원했잖아. 그 캐피탈이랑 학자금 대출 빛 있는 거 죄다 까발리길래 나한테 도움 요청하려고 상호랑 알려준 건가 싶어서 내가 갚은 건데. 내가 실수한 거야? 난 누나가 나한테 도움 필요로 하나 싶어서…. 한 건데."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네가 지금 뭔 짓을 한지나 알고 있어."

"아. 씨. 그만 때려. 아파. 악. 자. 잘못했어. 근데, 화나더라도 그냥 좀 받으면 안 돼. 흑. 나 진짜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단 말이야."

 

윤기의 눈물에 선례는 손을 허공에 멈칫한 채 네가 왜 우냐는 얼굴을 했다. 윤기가 닭똥 같은 눈물을 후드득 흘리며 말했다.

 

"훌쩍. 나 그동안 누나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단 말이야. 누나, 나 안 받아줘도 되니까, 그 돈 갚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훌쩍. 그 돈 그냥 받아주고 나 미워하지 마. 훌쩍훌쩍."

 

선례의 손바닥만큼이나 윤기의 얼굴도 시뻘갰다. 한참을 훌쩍대며 울던 윤기는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벌게진 볼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들은 아직도 신발장 앞에서 청승이란 청승과 매질 등 별 우스운 짓거리는 다 했다.

 

"누나…."

"왜. 또. 뭐."

"나 안 받아 줘도 되는 건 사실 뻥이야. 훌쩍. 그래도 안 되지? 내가 이렇게 빌어도, 말해도 누나 나는 안 되는 거지."

"윤기야…."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그냥 안 되는 거 아니까 나 위로해 줘. 지금 나 또 실연 받았잖아. 나 상처받았으니까. 토닥토닥해 줘. 훌쩍."

 

선례는 윤기의 말에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한참 울던 윤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마지막엔 미소를 지으며 또 연락해도 되냐고 미련스러운 질문에 선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워 선례는 얼굴을 한참 매만져 줬다.

윤기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선례는 캐피탈과 은행에 전화했다. 진짜 빛이 하나도 없었다. 선례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하루아침에 증발한 빛에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발발 떨던 선례는 집으로 곧장 향했다. 거실 바닥에 누워 과자나 까먹고 있던 두 남동생은 취업이 안 돼 저렇게 매일 같이 TV나 보며 하루하루를 실속 없이 보내고 있었다.

 남동생들은 선례에게 너 어젯밤 외박해서 엄마, 아빠 화났으니 이따 부모님 오시면 싹싹 빌던가 죽을 각오하라고 낄낄댔다. 동생들의 말에 선례는 부모님이 지금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재빨리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통장과 도장 그리고 한쪽 구석에 먼지 쌓인 트렁크를 꺼냈다. 

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두 남동생이 거실에서 배고프다며 라면을 끓여 달라는 소리쳤지만, 대꾸도 하지 않고 트렁크를 열어 재빨리 옷을 던지다시피 넣는데 문을 발로 뻥 차며 욕설을 내뱉으며 위협적이던 두 녀석이 어디 여행 가게? 하며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도 선례가 대꾸하지 않고 계속 제 할 일만 하고 있으니 동생 하나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위협적으로 손을 들었다. 짝 소리 나게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맞았음에도 선례는 평소와는 다르게 남동생을 밀치고 재빨리 트렁크 지퍼를 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문을 향하던 선례는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싶어 멍청한 얼굴을 하는 두 남동생에게 말했다.

 

"병신들. 평생 그따위로 살아. 빚은 다 갚았어. 그러니 앞으로 생긴 빛은 나랑 상관없고 우린 영원히 모르는 사이야. 엄마, 아빠한테 전해. 내 이름으로 또 빚 만들면, 이번엔 진짜 가만 안 있을 거라고. 변호사를 쓰든 경찰에 신고하든 어떻게든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니까. 내 이름으로 빚 만들지 말라고. 그리고 나 찾지 마라.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그리곤 찜질방으로 향했다. 직장도 관뒀다. 언제 부모가 선례를 또 찾아와 빚을 질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선례는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찜질방에서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결국 선례는 이번에도 윤기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입을 떼기 어려웠지만 이대로 계속 찜질방에서 머물 수는 없었기에 눈을 딱 감고 집 나왔으니 100만 원만 꿔달라고 말했다. 집 나왔다니까 하는 말이 자기 집에서 살라던 윤기에게 그냥 끊을게, 말하자마자 다이렉트로 돈을 넣어주고 거주지나 연락할 수 있는 번호를 알려달란다.

어쩐지 잘만 이용하면 호구하나 잡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순진한 윤기의 태도에 선례는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제일 싼 고시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로 윤기와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

 

 

다시 한번 윤기와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던 선례를 잔뜩 골이나 윤기가 찾아왔다. 언젠간 만날 걸 알았기에 선례는 놀라지 않았다. 그게 윤기를 좀 더 화나게 했다. 선례의 거처와 직장은 윤기의 집에서 가까웠다. -선례의 새 직장은- 그들이 헤어진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윤기가 느꼈을 당혹감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례는 그 작은 고시원에서 나무를 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윤기가 분명 잠적한 자신을 찾으리란 걸 알았기에 선례는 숲에 숨는 걸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윤기가 3년에 걸린 것만 봐도 제대로 판단한 거였다.

윤기와 재회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말에 선례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부모가 자신을 찾을까 봐 핸드폰 개통도 하지 않고 거주지도 몇 번이나 옮겼다고. 거처는 고시원에서 원룸이 되었고 최근 핸드폰도 새로 만들었다. 선례의 이야기를 듣던 윤기는 그러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자기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선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윤기가 왜요, 라고 말했다.

선례는 윤기가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선례는 이미 그때 선을 본 김석진과의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석진은 자상하고 좋은 남자였다. 비록 개그나 취향은 좀 맞지 않더라도 은행원이라는 그의 안정감 있는 직장은 선례를 안심시켰다.

부모님의 사정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말했을 때도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그는 선례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다정하게 그녀의 마음을 먼저 챙겼었더랬다.

윤기는 선례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은 왜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지 슬픔과 애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고 욕했다. 그리고 선례의 결정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농담이었다며, 선례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앞으로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축하해요, 누나. 이번엔 진짜 행복해지길 바랄게요. 참. 청첩장은 언제 나와요."

"이미 나왔어."

"줘요. 내가 진짜 누나 결혼식에서 제일 비싼 축의금 낼 거야."

"그러지 마. 너에게 빚진 것도 많은데. 나 그때 너랑 약속 어겼잖아."

"그런 생각하지 말라니까! 내가 뭐, 아직도 돈도 못 버는 옛날의 민윤기 인 줄 알아. 나 이제 예전보다 더 큰 물에서 논다고요. 글로벌~ 작곡가예요. 얼마 전엔 제 곡으로 미국에서 뜬 빙그레소년단 몰라요. 그 곡 내가 썼잖아."

 

윤기의 곡이라면 선례도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성공했고, 얼마나 잘나가는지. 하지만 선례는 그가 부자이건 작곡을 얼마나 썼건 벌었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윤기의 직업이 선례에겐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기에겐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윤기는 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보단 선례의 꿈을 위해 살아갈테니까.

어느덧 가을이 왔고 선례는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은행장인 남편은 대학 동창들과 직원들로 하객을 맞기 바쁜데, 선례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에겐 당연히 연락하지 않았고 청첩장은 윤기 한 명에게만 줬으니 올사람은 윤기외에 아무도 없었다. 전통혼례복을 입은 선례는 아름다웠다. 고요한 장미처럼 붉은색과 화려한 전통 자수들이 선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윤기가 보면 분명 잘 어울릴 거라 할 게 분명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윤기를 기다렸지만, 그날 선례는 신부대기실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식장으로 올라가면서도 선례는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직원의 재촉에 문 앞에 섰을 때까지 선례는 윤기가 혹시 식장을 못 찾거나 뒤늦게라도 찾아올 걸 대비해서 핸드폰과 말까지 해놨는데 윤기는 식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신혼여행도 선례가 윤기를 기다리면서 지체하는 바람에 비행기도 결국 놓치고 말았다.

석진은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이 망쳤음에도 괜찮다며 선례를 위로했다. 윤기가 선례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들었기에 -사귄 사이였다는 건 모르고 있다.-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애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선례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연락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윤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오다가 사고가 난 건 아닐까 싶어 걱정도 했지만 수많은 축의금 봉투 속에서 윤기의 축의금을 발견한 선례는 윤기가 자신을 보지 않고 축의금만 내고 그냥 갔다는 사실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석진의 위로를 받으며 그녀는 날아오르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선례의 가게로 -윤기가 언젠가 자신을 찾을 걸 생각해 전에 일하던 곳을 인수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는 빠듯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 윤기의 친구 지민이 찾아왔다. 지민은 윤기의 펜팔 친구로 아주 오랫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선례는 윤기가 예전에 이메일로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 내고 아, 그 친구가 당신이었군요 하며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지민에게서 윤기의 최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선례가 결혼한 그날 윤기는 고국을 떠나 지민이 사는 곳으로 올 생각이었다. 윤기는 과거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었다고 했다. 선례는 충격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선례는 윤기가 자신을 완전히 잊기로 결심했다는 지민의 말에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애써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음에 나올 말이, 더 큰 충격이 선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가 탑승한 비행기가 그날 추락했다는 이야기였다. 선례는 비행기 추락 소식을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들었다. 이 때 사고가 꽤나 커서 tx뉴스로 오래 나왔기에 선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탑승객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했었다. 석진과 선례도 유가족들을 위해 작은 모금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지민의 말에 선례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선례는 처음으로 윤기가 자신을 잊지 못한 게 아니라 자신이 윤기를 잊지 못하고 만들었고 놓아주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또 윤기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말하지 못했는지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돌이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외면했는지도 알았지만 이제 그걸 알려줄 윤기는 이 세상에 없었다. 가슴과 목이 시꺼먼 불을 삼킨 듯 뜨겁고 괴로웠지만 그것들을 가만가만히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떠나고 선례는 충격 속에서 조용히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온 몸이 뜨거운 불구덩이에 던져진 듯 했다. 화차였다. 불타는 마차에 타고 달리는 선택지만 남자 선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되었고 어떤 선택지를 골랐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윤기를 잊어야 했다. 

물론 선례는 석진에게든 누구에게든 윤기의 존재를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존재했던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윤기는 앞으로 선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사는 피터 팬처럼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은 20대 후반의 청년으로밖에 남아있을 것이란 것이 선례를 누구보다 슬프게했다.

하지만 기억이란 늘 불확실하며 잊는 것을 우선으로 해왔기에 선례는 윤기를 기억하기보다는 잊어버릴 때가 더 많았지만, 장마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항상 윤기를 떠올렸다. 비는 선례에게 윤기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데 필요한 단서처럼 느껴지게 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고요한 베란다 앞에서 쪼그려 앉아 선례는 그때 나왔던 모든 대화를 떠올리게 하고 장면들을 테이프처럼 반복해서 보고 있다.

비의 향기는 향수처럼 그들이 함께한 순간들을 생생하게 만든다. 선례는 비가 오는 날마다 윤기를 마음 깊이 간직하며, 그의 삶이 자신이 죽는 그날에야 안식에 취할 것임을, 끝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비는 그들의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 선례의 삶에 영원히 간직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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