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일상

무지개같은

무지개

“신님! 미쳤어요?! 어떻게 계약할 사람이 없어서 사기꾼이랑 계약을 해요!”

“어허, 그렇게 개념보고 차별하면 안돼.”

“아니, 그럼 계약서라도 좀 꼼꼼히 읽던가요! 갚을 능력 판단을 그 사기꾼이 하면 노동력으로 값는다는 조항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또 신력은 왜이렇게 많이 빌려줬어! 나중에 그 신이 그걸로 뭘 할 줄 알고! 책임질 자신 있어요?!”

“에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 걱정해봤자 의미 없어.”

괜찮다며 자꾸 나를 달래려고 드는데 혈압이 올라 절로 뒷목이 잡혔다. 나도 이해한다. 신이 자신의 개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본능을 이겨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이 정도로 호구잡히면 좀 달라질 법도 하지 않나?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면 좀 남을 의심하는 법을 배워도 되지 않아?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여타 다른 신들과 교류가 생기기 전에는 나도 신님처럼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끼리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다른 신들은 우리를 언제든지 배신하고 방관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킬 수 밖에 없어. 나라도 열심히 해야지.

"레이? 괜찮- 레이!“

어? 왜 세상이 빙글빙글 돌지?

털석-

헉! 어… 그러니까, 신님이랑 이야기 하다가…

“레이! 괜찮아?”

“신님… 전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왜…”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신님이 잠깐이었지만 눈썹이 잔뜩 찡그러졌었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레이? 왜 그래?”

신님은 늘 그래왔던 생글생글 부드러운 표정이셨다. 내가 요즘 너무 피곤했겠거니 했다. 그런 신님이 평소와 같은 웃는 얼굴로 폭탄 선언을 하셨다.

“레이, 우리 다시 옛날처럼 우리끼리만 살까?”

“예? 예에?!”

너무 예상치도 못 한 말이라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야… 신들과의 교류를 가장 반긴건 신님이었으니까. 게다가 친구를 사귀었다며 기뻐하던 신님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신님이 갑자기 칩거 선언이라니? 신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던데!

“신님! 벌써 수명이 다 되신 거에요?!”

내가 막내긴 하지만 신님도 그리 오래 사신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벌써 세대 교체가?! 어, 어떡해! 일단 언니, 오빠들한테..!

내가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가자 신님이 내 손목을 낚아채셨다. 달려나가는 나를 빙글 돌려 내 양 어깨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꽉 붙잡아 진정하라며 내 눈을 바라보셨다. 나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신들 중에서는 신님이 거의 막내나 다름없다고 했지. 그래, 진정하자.

내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어필하자 신님도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도 네가 걱정할만한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은 못 하겠어. 하지만.

아예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네가 걱정할 만한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겠지. 무지개는, 우리는 걱정을 많이 하면 안돼. 걱정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본능에 반하는 행위는 생각보다 우리 몸에 많은 영향을 끼쳐. 신인 나는 괜찮지만 신이 아닌 너희들은 위험해. 기력이 쇠약해지니까.

이런 나라서 미안해. 그래도 최선을 다할테니까-“

“잠깐 잠깐!”

그러니까… 지나치게 걱정하는 내가 걱정되서 아예 밖이랑 연을 끊겠다고? 진짜 자연계 신 아니랄까봐. 아주 그냥 속 터지게 하는데는 선수지! 겨우 가라앉힌 흥분이 재발되었다.

“신님! 저는 신님이 아무런 사고를 치지 않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저도 그 정도로 불가능한 걸 바라지는 않아요.”

1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신님의 당황한 표정에 도대체 날 얼마나 어리게 생각한건지에 대해 욱하다가도 여기에 진짜 욱하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 앉혔다.

“저는 신님이 사고를 치고도 걱정하지 말라고 숨기는 게 싫은거에요. 오늘같이 사기꾼이랑 계약할 수 있죠. 그래도 신력을 걸만큼 중요한 계약을 저한테 숨기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가 없잖아요. 우리는 오롯이 신님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인데 정작 신님이 그걸 숨겨버리면 우린 뭐가 되요.”

신님도 내 마음을 알아주셨는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내가 이렇게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신님한테 잔소리하는 이유도 다 신님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럼 저번에 불공정의 신이랑 약속하나 한 거 있는데 용서해 줄꺼지?”

신끼리의 약속은 그저 그 말 자체로 강제성을 지닌다. 그저 말뿐인 약속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머리가 차게 식었다. 계약은 부숴버리면 그만이지만 약속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내용을 약간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 뿐이고, 약속 여하에 따라 제아무리 강력한 신이어도 부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침착하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머리에 열이 올랐다. 신님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무지같은 신님이 진짜! 신님, 신인거 몰라요? 신이 할 게 없어서 약속을 해! 약속을!”

“어어… 레이,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앞에 강조 부분이 이상하다?”

“지금 그게 문제에요?! 빨리 언니, 오빠들 총집합부터 해요!”

역시 신님이 변하는 것 보다는 내가 홧병으로 자연에 돌아가는 쪽이 더 빠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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