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故

비형랑 설화 기반 자작 캐릭터 과거 설정

秘史 by 史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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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형은 15세에 집사(執事)가 되었는데, 밤마다 궁성 밖으로 나가 놀았다. 이에 왕이 병사를 보내어 살펴보니,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의 황천(荒川) 언덕 위에서 귀신들과 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이 사실대로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그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귀신들을 부리어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게 하였다. 또한 귀신 가운데 정사를 도울만한 자를 추천하라는 왕의 요구에 따라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이에 길달은 각간(角干) 임종(林宗)의 아들이 되어 집사의 직무를 충직하게 수행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나므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다 비형의 집이라고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비형랑 中


"비형랑."

"길달."

고요한 저편에서 낮게 목탁 소리가 메아리쳤다. 흥륜사, 이 엄숙한 분위기의 사찰은 발을 들이는 사람들을 자연히 진중하게 만들었다. 자못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받은 두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리가 둘 사이를 메웠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는 소리. 키득키득, 한쪽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으악, 이게 무슨 체면치레야! 됐어, 됐어. 넌 몰라도 난 이런 거랑 안 어울려. 그냥 평소대로 말할래."

못 참겠다는 듯 숨을 터트린 쪽은 올해로 열아홉이 된 비형이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인상, 장난스러운 입매. 고급스러운 원단과는 달리 자유로이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리고….

"여긴 흥륜사입니다. 신경 써서 나쁠 게 있습니까?"

강건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입을 연 쪽은 비형과는 상극으로 보이는 길달이었다. 꽤 다부진 몸의 소유자로 키는 팔 척에 달하는 장신.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 살짝 찌푸려진 채로, 길달은 비형을 내려다보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편한 언동을 꺼리는 태도였으나,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단 듯 비형은 말을 이었다.

"너도 참 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아니, 귀신 하나는 추천 잘했다니까. 이렇게까지 잘 적응할 줄은 몰랐는데. 이젠 주변 사람들 눈치도 볼 줄 알다니!"

이런 귀여운 놈! 비명을 내지르며 길달을 끌어안은 비형이 길달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길달은 인상을 쓰면서도 난리를 치는 비형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조곤조곤 말했다.

"문 한가운데서 이러시면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그랬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흥륜사의 남문, 길달문 한가운데였다. 안 그래도 장신인 길달이 비형에게 붙잡힌 채 가운데를 막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피해갔다. 비형은 그제야 길달에게서 떨어졌다. 잠깐을 두리번대더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당히 말했다.

"내가 벗하고 좀 우애를 다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문도 넓은데 알아서 피해가라지. 게다가 여긴 네 집이잖아!"

"집 아닙니다. 빌려서 쉬는 겁니다."

"네가 지어놓고 네가 여기서 자면, 네 집이지!"

"여긴 흥륜사 사유지입니다."

절대 굽히지 않는 길달에 비형은 혀를 내둘렀다. 못마땅해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길달을 보던 비형은 이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만 보면 나보다 네가 더 말을 잘해. 할 말은 다 한다니까.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이런 얘긴 그만하자. 요즘엔 어때? 일은 할 만해?"

"늘 같습니다. 정해져 있고, 행합니다. 그뿐입니다."

둘은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문루 위로 올랐다.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한눈에 보였다. 하나같이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고민거리, 절박함, 간절함, 그런 것들. 그들은 번뇌를 잊기 위해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문을 통과해 나아갔다. 봄바람도 같이 문루를 스쳐 지났다. 가만히 난간에 기대어 있던 비형은 한 손으로 바람을 가늠하며 툴툴거렸다.

"딱딱한 녀석. 사찰에 있다 보니 더 돌덩이 같아졌어. 봄이란 말이야, 봄. 이 바람이 안 느껴져? 저 강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리냔 말이야!"

"안 들립니다."

"난 들려!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이 강으로 들로 행차해 주십시오, 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고! 월성 밖을 나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분명 산도깨비들이 날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길달은 비형을 빤히 보았다. 저렇게 시끄럽게 말을 늘여도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같이 놀러 가자.

비형은 본래 자유를 사랑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출생이 비범한 그에게는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귀신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선왕의 혼이 내려준 아이. 비형을 둘러싼 사람들의 입방아는 끊이질 않았다. 임금의 배려로 궁에서 살게 된 뒤에도 비형과 놀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귀신을 볼 수 있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비형은 사람보다는 귀신과 훨씬 친해졌다. 걸핏하면 월성을 나가 귀신과 어울렸다. 다들 괴이하게 여기거나 무섭게 여겼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귀신들은 어떨 땐 사람보다 친절했고 솔직했으며, 편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줬다.

사람들은 비형이 귀신을 부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원래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귀신과 친해지며 알게 된 잡지식들과 각종 주술을 종합해 터득한 '기술'이었다. 이 기술로 귀신들을 부리니 사람들은 그제야 몰려들어 신통함을 칭찬했다. 그러더니 멋대로 관직을 내리고 일을 시켰다. 그러니까, 그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다. 비형은 그냥 놀고 싶었다. 친구들과 같이.

그런 비형의 사정을 잘 아는 길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성이 자유로운 사람이니 내가 이해하긴 힘들겠지. 그런 생각으로 재잘대는 비형을 쳐다봤다. 자신이야 단순한 생각으로 살아가므로 일을 시키면 그저 잠자코 할 뿐이었다. 노는 데에 흥미도 없었으니, 발 뻗고 잘 곳만 있다면 온갖 궂은일도 묵묵히 해냈다. 비형이 길달을 천거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우리 애가 일을 꿋꿋하게 잘해요, 라는 뜻.

하지만 길달을 진골 귀족의 양자로까지 들여 일을 시킬 줄은 몰랐던지 최근 비형은 길달에게 미안한 눈치였다. 아마 오랜만이랍시고 찾아와 지금 이렇게 객기를 부리는 것도 자신의 철없음을 핑계로 길달을 쉬게 해주려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길달이 이상했던지 비형은 속사포로 늘어놓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라고 묻는 듯한 눈길에 길달은 생각했다. 하여간 마음 씀씀이는 좋아서.

"귀 아픕니다."

그 말을 듣고 비형은 반색하며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핀잔처럼 보이겠지만 비형은 알 수 있었다. 저건 길달식 승낙이다.

"그럼, 지체하지 말고 출발하자! 하루는 짧다고!"


비형이 길달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단석산 중턱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길달은 비형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어쩌니, 강산이 어쩌니 해도 결국엔 여길 오기 위함이었다.

"다비! 네 서방하고 나 왔다!"

"비형랑!"

있는 듯 없는 듯 나무들 사이에 묻혀있는 작은 암자. 수수하지만 고아한 암자에서 한 여인의 모양새가 어른거리더니, 금방 둘의 앞으로 휙 다가왔다. 비형은 질겁하는 시늉을 하곤 여인의 양손을 잡아챘다.

"다비, 오랜만이라고 내가 넘어갈 줄 알아? 너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런 거에 놀라겠어?"

"오랜만이니까 한 번쯤 놀라주지 그랬어?"

다비, 라는 여인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비형은 잡아챘던 양손을 놓아주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같이 웃었다. 길달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다비는 손각시였다. 길고 우중충한 생머리에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 곡소리를 내며 구천을 떠돌던 다비에게 비형이 나타난 것은 기연이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했던 5살 내기의 비형은 다비를 처음 보곤 놀라 나자빠졌다. 그러나 결코 도망을 가진 않았다. 다비는 그것이 신기해 비형을 자주 찾아갔다. 비형이 성장할수록 귀신과 자주 어울렸으므로, 다비를 보고 놀라는 일도 점점 줄었다.

다비는 원귀였다. 비형은 다비가 원과 한으로 뭉쳐 성불도 못 하고 세상을 떠도는 것이 안타까웠다. 비형은 무당이 아니었지만, 사정을 들어보고 해결책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비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비형에게 호감을 느꼈다. 둘은 친해졌고, 서로가 꽤 괜찮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즈음 비형은 길달과 안면을 텄으므로, 다비에게 한 가지 처방을 내렸다. 바로 길달과의 혼인이었다. 길달은 담백하고 단순해서, 그저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다비는 갑작스러운 결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곧 길달의 곧은 성정을 흠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형은 길달과 다비를 위한 아늑하고 작은 암자를 단석산 중턱에 숨겨놓았다. 처마 끝엔 풍경을 달아 풍경 소리를 듣고 오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진을 만들었다. 단석산에도 사찰이 있었으므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가려져 귀를 잘 기울이지 않으면 풍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연의 한 부분이었다. 비록 길달이 천거되어 길달문에서 숙식을 해결하긴 하지만, 이렇게 가끔 시간을 내어 암자를 방문하면 다비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을 풀고 자연과 노닐게 된 다비는 단석산의 정기 아래 그 누구보다 생기 넘치는 여인이 되었다. 비형은 그것이 기특했다.

"통 안 오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대?"

"비형랑이 오자고 했어."

"아니, 내가 언제? 네 서방이 오늘 봄바람을 한 번 딱 맞더니, 네가 보고 싶다고 나한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잖아! 그래서 내가 못 참고 데리고 왔지."

능청스럽게 말을 내뱉는 비형을 보고 다비는 폭소했다. 하나도 안 변했네, 이 주둥이! 비형의 코를 쥐어박고 다비는 길달에게로 눈을 돌렸다. 잠시 허공에서 맞붙는 시선이 애틋했다. 비형의 결정으로 이어진 둘이었으나 서로에 대한 진심은 아사달과 아사녀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았다. 쥐어박힌 코를 매만지던 비형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챈 탓이었다.

"흥륜사에서 여기까지 왔더니 배가 고파서 아귀 되겠네! 산 아래 주막에서 뭘 좀 사 올 테니까 둘은 암자에 가 있어."

스스슥, 비형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아마도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길달과 다비는 웃으며 비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마주 보았다. 암자로 걸어가는 두 걸음에 애정이 넘쳤다.

귀신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

오늘 하루는 짧을 것이다.


"너 이 자식,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흥륜사 길달문. 다짜고짜 문루에 오른 비형이 소리를 질렀다. 평소였다면 길달은 아무렇지 않게 비형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잠든 밤중이었다. 심지어 길달 자신도 잠시 졸고 있지 않았던가? 보는 눈이 없으니 자동으로 편한 말이 튀어 나갔다.

"지금 밤이다."

"알고 있어."

"그럼 조용히 해."

"조용히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너, 역시 저번에 놀러 갔을 때 그런 거지?"

"무엇을?"

"시치미 떼기는! 방금 내가 무슨 전령을 받았게?"

길달은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로 비형을 쳐다보았다. 비형은 길달이 그렇게 보든 말든 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얼마나 서둘렀던지 쪽지를 떨어트릴 뻔했다. 비형은 의기양양하게 쪽지를 펼치고는 문루의 난간에 기대어 길달을 향해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비형랑, 조만간 조카가 생기겠네. 축하해!"

길달의 무정한 검은 눈이 순간 빛났다. 비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쪽지를 길달에게 건넸다. 쪽지는 역시나 익숙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보낸 이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비형은 눈을 찡긋했다.

"다비가 너한테는 안 보냈구나? 하기야 나한테 보내면 너한테 갈 테니까. 날 전령 취급하는 건 좀 아니꼽지만, 이번엔 특별히 넘어갈게!"

"...그러고 보니 어제 황금 방울이 굴러오는 꿈을 꿨다."

"어이쿠, 태몽 하나 복스럽네. 그냥 방울도 아니고 황금 방울? 금덩이야, 금덩이!"

길달의 무미건조한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본 비형은 덩달아 미소지었다. 그래, 귀신의 몸으로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은 이 정도면 되었다. 애초에 귀신의 세계에 있어야 할 이에게 관직을 내리고 인간 세계로 끌어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상소를 올려 길달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청하자. 그러면 길달은 다비와 조카와 함께 행복한 나날들을…

나날들을…

…그럼 나는?

비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길달이 비형을 마주 보았다. 분위기가 어색해 질까 봐 비형은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자 길달은 다시 고개를 숙이곤 쪽지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않았다. 비형은 몸을 돌려 문루의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런 경사 앞에서 친구의 안위를 시기하다니? 이러고도 내가 길달의 친구인가?'

비형은 처음 겪는 감정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오래 묵혀뒀던 감정이 깨어난 것이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부러움이었다.

잠시 인간사에 얽매였다고는 하나 길달은 귀신이었다. 육신에 얽매이지도,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천거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비와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오곤 했다. 미안함도 있었지만, 근본에 있는 것은 부러움이었다.

'나도 자유로이 살아가고 싶다. 귀신들과 어울리며, 한평생을 유랑하며….'

한 번 터진 생각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길달을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가 없지 않은가? 비형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길달을 보며 말했다.

"달아, 난 내일 다시 와야겠다. 자려다가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왔더니 조금 피곤하네. 일찍 나가봐야 할 일도 있어서."

길달은 천천히 비형에게 시선을 두었다. 비형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진 않은 건지, 생각하며 올린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비형을 보던 길달이 입을 열었다.

"잘 가."

"그래. 잘 자라."

문루를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 비형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당분간 제대로 달이를 볼 수 없겠다.


그로부터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정말 정형적인 표현이지만,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침략으로 인해 국경의 성이 흐트러졌고, 수리해야 했다. 전에 신원사 북쪽에 귀교(鬼橋)를 잘 쌓은 전적이 있었으므로, 비형은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할 때 항상 불려 나갔다.

도중에 길달의 일을 건의해 보려 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비형 자신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도 시기를 털어낼 수 없어 키워 갔다. 쪽지를 받고 기뻐하던 길달의 얼굴이 생생하여 죄책감이 날로 비형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어느 날, 길달이 비형을 찾아왔다. 문지기처럼 문루에 붙어 명령이나 임무가 아니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길달이, 지박령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해도 순순히 수긍하던 그가. 비형이 지내는 전각에 찾아왔다.

왕명으로 진골의 양자가 되었으니 원칙상 그도 진골이다. 그러나 궁 안의 여러 사람은 길달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귀신 주제에 천거를 받아 운 좋게 귀족이 되었다는 시선이 길달에게 박혔다. 길달은 그답게 괘념치 않았지만, 비형은 혹여나 길달이 입궁하면 그런 시선을 받을까 봐 부러 찾아올 일이 없도록 했다. 바쁘지 않으면 먼저 달려가고, 할 말이 있다면 스님에게 부탁해 전령을 보내라 일러뒀다. 길달도 그런 비형의 배려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궁에 찾아온 것이다.

비형은 직접 차를 우리며 앞에 앉은 길달을 바라보았다. 한 치도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비형을 향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비형은 지난 두 달간의 심리적 고생이 떠올라 마음이 콕콕 찔려왔다. 과장된 목소리로 괜스레 먼저 운을 뗐다.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 길달이 나를 먼저 찾아오다니. 웬일로 내 얼굴이 보고 싶었어?"

그러나 길달은 아무 말도 없이 비형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만으로 비형은 칼로 저며지는 기분을 느꼈다. 견딜 수 없어 또 말을 꺼냈다.

"달아, 길달! 오랜만에 입궁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하긴, 네가 안 온 동안 월성이 좀 많이 변했어? 월성도 이제 거의 초여름,"

"왜 안 오셨습니까?"

숨이 턱, 막히는 물음이었다. 비형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웃으며 답했다.

"입궁했다고 경어 쓰는 거야? 힘이 아주 빡 들어갔네! 왜 안 왔냐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알겠어, 알겠어. 일단 차부터 마셔."

차가 다 우려졌다. 비형은 길달의 잔에 차를 따르고는 제 잔에도 차를 따랐다. 그러나 길달은 차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은은히 퍼져나가는 향은 아주 좋았으나 비형의 마음속은 갈라져 가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다시 오겠다고. 그런데 안 오셨습니다."

"아, 그거? 미안, 요 근래에 좀 바빴거든. 나도 내가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지 뭐야?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슨 일입니까."

쿵.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비형은 분명 말했다. 바빴다고. 길달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길달은 물었다. 비형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언가 지독하게 앓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슨 일이냐니? 임무 말고는 다른 일 없어. 말했듯이 내가 좀 많이 바빠서 다른 일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단 말이지."

비형은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다. 길달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알고 지낸 지가 십 년이 넘어가므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무덤덤해도 비형의 감정은 민감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평생 숨기는 것 없이 솔직히 살아왔던 비형이, 길달에게 말 못 하는 것이 있다. 길달은 그것만으로 속이 쓰렸다. 자신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면 혼자 얼마나 속을 썩였던 것인가.

"다비의 일 때문입니까?"

비형은 초조했다. 이 감정을 전해봤자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길달과는 언제나 득실을 따지지 않고 행해왔지만, 이것만큼은 서로에게 실밖에 되지 않을 것이 명백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이다. 전할 필요 없다.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다비에게는 가 봤어? 나에게 오기 전에 다비에게 갔어야지."

"이미 갔다 왔습니다."

"어?"

"가서 물었습니다. 만약 비형랑이 우리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고."

"야야. 너는 임신한 이한테 그런 걸 왜 물어, 묻기는?"

"매일 꿈에 나와서 실토할 때까지 목을 조른다고 했습니다."

"..."

내용은 농담이었으나 둘 모두 웃지 않았다. 비형은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댔다. 목이 타들어 가서 찻잔을 거의 비웠다. 다른 얘기로 돌려도 좀처럼 포기하지를 않는다. 아무래도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절대 가지 않을 성싶었다.

비형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길달."

"네."

"나는 네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네."

"다비도 마찬가지야. 아주 소중한 친구지. 그래서 난 너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자유롭게 말이야, 여길 떠나서. 훨훨…."

"..."

"그래서 난 말하고 싶지 않아, 달아. 네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네가 내 친구라면, 부탁을 들어줘. 돌아가서 다비와 함께 살아. 내가, 내가 청을 올릴 테니까…."

"자유."

길달은 내뱉었다. 묵직하게, 조용하게, 단단하게.

"자유, 비형랑이 바라는 것."

비형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길달은 그 움직임까지도 포착하며 말을 이었다.

"비형랑께서 저희의 행복과 자유를 원하듯이, 저희도 비형랑의 행복과 자유를 원합니다."

"...길달."

"동시에 비형랑께서도 자신의 자유를 원하십니다."

"달아."

비형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경사를 목전에 둔 친구에게 이 무슨 추한 꼴이란 말인가. 시큰해져 오는 코끝에 비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길달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형의 소망, 그리고 자신의 소망. 자유를 사랑하는 비형, 주어진 일을 해낼 뿐인 자신. 짧은 생각을 마친 길달이 낮은 성음을 내었다.

"비형아, 나와 몸을 바꾸자."

뭐라고? 비형의 표정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씻겨나갔다. 누가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은 표정으로 비형은 길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길달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어차피 정해진 육신이 없는 몸이니, 제 혼백을 그 육신에 잡아두시고 비형랑께서는 훨훨 날아 떠나십시오. 그럼 비형랑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비형은 벌떡 일어나 길달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의 여파로 소반이 엎어졌다. 길달이 입을 하나도 대지 않은 찻잔이 맥없이 바닥을 적셨다.

길달은 미동도 없이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너무나도 진실해서, 마치 엄청난 비밀을 실토한 사람의 눈빛 같았다. 진실이 실토 된 사람은 그가 아닌데도.

비형은 실소했다. 길달, 내 친구야.

"그게 진심이라면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야. 그런 말은 허투루 뱉는 게 아니라고. 몸을 바꿔? 자유롭게 날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허투루 뱉은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아닙니다. 비형랑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길달, 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나오면 다비는? 다비의 아이는? 아버지로서 네가 해야 할 책임은?"

비형은 말할수록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스로 되뇌는 말 같았다. 자유를 욕심내는 자신에게, 길달의 생에 혹하는 자신에게. 너무도 이기적이고 책임감 없는 자신에게.

길달은 혼란스러워하는 비형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언제든 비형랑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슥한 밤. 익숙한 솜씨로 순찰 망을 벗어나 월담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흥륜사 남문을 향해 능숙한 발걸음을 놀렸다.

"길달."

길달은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상소를 올렸고, 대등께도 말씀드렸어."

"그래."

"...네가 너무 일을 잘했나 봐. 다비의 존재를 숨겼더니 특별한 이유 없이는 널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예상했다. 나는 아주 좋은 꼭두각시니까."

"길달,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마."

"귀신을 부릴 수 있는 비형랑께서는 부디 권한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제발, 넌 내 친구라고 했잖아."

길달은 그제야 뒤를 돌았다. 비형을 보는 눈빛이 허물없이 순수했다.

"비형아, 넌 예전부터 하나에 매여 있기보단 밖으로 나가 놀길 택했지. 자유를 사랑하는 것이 네 천성이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너도, 나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길달이 비형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이어 다른 손으로 비형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 손은 자유를 찾는 손이다. 그렇게만 생각해 줘. 네가 자유로워지면 난 그걸로 됐다."


왕과 대등이 청을 승낙하지 않았으므로 길달은 공식적인 은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비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둘의 의견이 일치했다. 괜히 다비를 언급했다가 다비에게 어떤 불똥이 튈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결국, 야반도주밖에 방법이 없었다. 비형과 길달의 육신을 바꾸어 길달은 비형인 채로 살아가고, 비형은 멀리멀리 도망쳐 자유롭게 사는 것. 다비에게 상의하니, 지금처럼 암자에서 살다가 가끔 비형의 육신을 가진 길달이 들러주면 그걸로 됐다며, 비형의 죄책감을 한층 가라앉혀 주었다.

형체를 갖춘 비형의 육신에 귀신인 길달이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비형의 령이었다. 비형의 령이 육신을 나오면 당연히 비형의 외모를 가지고 나온다. 평생 살아온 령에 체득된 외모를 하루아침에 바꿀 순 없었다.

그래서 비형은 둔갑술을 택했다. 언젠가 산에서 만났던 구미호의 덕을 톡톡히 보아, 여우로 둔갑하기로 했다. 여우 정도라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속도가 느린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딱 좋았다. 둔갑술을 쓰고 월성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안전한 곳에 숨어 수양해 차차 겉모습을 바꿔 나갈 셈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계획을 세우면서도 내내 망설였다. 길달도, 다비도 동의한 일이지만 이게 맞는 건지 몰라서였다. 고작 자신의 자유를 찾자고 둘, 아니 다비의 뱃속 아이까지 셋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럴 때마다 길달은 괜찮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길달은 원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길달의 말에는 묘하게 힘이 있었다. 안정되고 신뢰감 드는.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은.

그렇게 계획은 진행됐고,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비형은 육신을 바꾸는 진을 그렸고, 길달은 그에 응했다. 둘의 영혼이 공중으로 스르르 떠올랐다. 길달의 령은 비형의 육신으로 들어갔고, 비형의 령은 여우로 둔갑했다. 그러나 비형은 보지 못했다. 길달이 진의 한 부분을 살짝 고치는 것을.


비형은 달렸다. 여우의 모습을 한 채 쉼 없이 달렸다. 밤새도록 달렸던지 어느새 동이 텄다. 곧 있으면 누군가 길달의 부재를 알아챌 시간이었다. 오늘은 길달의 임무가 없는 날이었으므로, 부재를 알아채더라도 누군가에게 알려 찾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의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비형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월성의 포위망을 벗어났더라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자신이 도망친 걸 알게 된다면, 문죄의 권한은 비형에게 있으므로 비형의 몸을 한 길달을 시켜 저를 쫓을 게 뻔했다. 일단 거기에 잡히면 아무리 길달이라도 대충 처벌을 내릴 수 없었다. 관리의 의무를 진 이가 왕명을 어기고 달아났으니, 무거운 처벌을 내릴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사람이 아니라 요마에 가깝지 않은가? 다른 처벌은 없었다.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설상가상으로 하나 더하자면, 쫓는 이들이 관군일 리도 없었다. 비형은 평소에도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귀신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상시에 동원할 사람 따위는 없었으므로, 자연히 길달이 저를 쫓을 때도 귀신을 부리겠지. 귀신은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의 기동력보다 빨리 저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여우의 모습을 한 비형은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애초 인적이 없는 산길로만 골라 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소비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몸에 험한 산행. 비형은 이를 악물고 바위 그늘로 몸을 숨겼다. 잠시만 쉬어가자, 자유를 얻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거야. 아직 여기까진 오지 못했을 테니까, 조금만 숨을 돌리고…

비형은 색색 대는 숨결을 고르고 웅크렸다. 눈을 감기도 전에 피로가 몰려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웅크린 곳의 풀 냄새, 흙냄새가 멀어져갔다. 감각이 차단되고, 깊은 잠이 찾아왔다.

희미하게 방울 소리가 들리는 꿈을 꾼 것도 같았다. 멀리서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길달은 이제 눈을 뜨고 문책을 받아라!”

쩌렁쩌렁한 성음이 대낮의 숲을 가르고 날아왔다. 비형은 눈을 번쩍 떴다.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후각이었다. 눈을 감기 전 느꼈던 흙냄새, 풀 냄새가 그대로 코를 찔러 왔다. 다음은 시각. 점점 초점이 잡히며 여러 형상이 하나로 모였다. 눈앞에는 울창한 숲과 바위, 자신을 겹겹이 둘러싼 귀신들이 있었다. 비형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룻밤 새 무리를 한 탓에 너무 오래 쉬어버렸구나. 길달이 삶을 내주면서 얻은 기회인데, 결국 잡혔어. 비형은 찢어지는 가슴을 억누르고 미간에 손을 짚었다.

...잠깐, 손?

비형은 기겁하며 얼른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익숙한 몸이었다. 여우 둔갑술이 풀린 건가? 그럼 비형의 몸을 가진 길달과 마주하면 안 됐다. 비형이 둘이라니, 남들이 보면 괴이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비형을 둘러싼 귀신들에게선 아무런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긴 비형은 그제야 다시 주변을 눈에 담았다. 귀신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모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길달이 있었다.

“제 죄를 알고 있습니다. 비형랑께서 주시는 모든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비형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길달과는 육신을 바꿨다. 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분명 바위 그늘에서 잠을 청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여우의 몸이었다. 감히 육신을 바꾸는 위험한 주술을 행한 것도 자신이고, 도망을 꾀하여 잡혀야 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눈앞에는 길달이 죄인처럼 포박당해 있으며, 자신은 본래의 몸으로 돌아와 그런 길달을 추포하는 구도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산처럼 밀려와 비형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갖춰진 무대에서 비형의 이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비형의 뒤에서 야속하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죄인 길달은 하해와 같은 임금의 은혜를 받들어 귀물의 몸으로써 백성을 위해 힘쓰는 관리로 등용되었음에도 제 안위에 눈이 멀어 명을 어기고 야반도주를 꾀하였다. 이에 비형랑에 이르니, 지혜로운 안목으로 판단하여 죄인의 죄질에 알맞게 처리하라.”

비형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았다. 비형과 길달의 친분은 온 나라가 다 아는 것이었다. 공정한 심판을 내릴 수 있게 왕의 눈이 따라붙었다.

비형은 다시 눈을 돌려 길달을 보았다. 보는 눈이 있으니 사정을 물을 수가 없었다. 길달은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애타게 설명해보라는 눈짓을 했으나, 죄인이 되어버린 길달에게 닿지 못했다. 비형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비형, 명을 받들겠나이다.”

왕의 눈은 매서운 눈초리로 비형을 바라보았다. 길달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비형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크게 뜨인 눈이 안 봐도 생생히 떠올랐다. 그럼에도 아마 이번엔 명을 어길 수 없겠지. 최소한 영원히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길달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비형이 육신을 바꾸는 진법을 행한 날, 그러니까 바로 어제, 길달도 그 진에 손을 대었다. 진법은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었으나, 비형의 옆을 십 년 넘게 지킨 길달은 어느 정도 진을 다룰 줄 알았다. 그래서 수정했다. 비형이 보지 않는 사이에, 육신을 바꾸는 기한을. 본래였다면 영영 바뀌어야 했던 육신을, 비형이 위험에 처할 때면 다시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면 비형이 도망치다 잡혀 벌이 내려지더라도 그 형벌에서 자유로워질 테니까. 자신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것이 비형과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라 믿었으니까.

비형은 일그러진 얼굴로 길달에게 걸어갔다. 어디서부터 꼬인 실타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자신이 훌륭한 친구를 이렇게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까짓 자유가 뭐길래. 가질 수 없는 자유를 소망한 대가는 선연하게 처참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유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혐오스러웠다. 형을 집행할 두 손이, 누구에게로 향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죄인 길달은 확실히 왕명을 어기는 중죄를 저질렀습니다. 저 비형이 그 죄질을 따져본바, 참형에 달하는 죄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길달이 온전치 못한 혼백의 몸으로 그동안 백성을 위해 노력한 공훈을 인정하여 장형으로 참작하기를 아뢰옵니다.”

비형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어떻게든 목숨을 살리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 한 번 내놓은 생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눈은 엄격하고, 단호했다.

“비형랑은 들어라. 길달은 이례적인 사례로 무려 진골이라는 신분을 얻어 혜택을 누려왔다. 그런 자가 감히 조정을 능멸하고 서라벌 한복판을 가로질러 도주했다. 이 일을 본보기 삼아 다시는 요사스러운 존재들이 서라벌을 제 입맛대로 할 수 없음을 알려야 할 것이다.”

혜택은 무슨. 비형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길달을 보는 궁의 시선이 어땠는지 톡톡히 기억한다. 여러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이것은 경고였다. 왕의 눈으로 대표되는 신라 왕실의 경고. 감히 귀신 따위가 함부로 여길 왕실이 아니다. 내키는 대로 행했다가는 반드시 엄벌을 내릴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 무조건 멸해야 한다. 비형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몇 번이고 누르고 삼켰다. 펄펄 끓는 솥에 빠진 것처럼 속이 벌겋게 타들어 갔다.

“비형이 명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자리에서 길달에게 일체의 관직을 박탈하고 참형을 내린다.”

길달의 머리가 땅으로 내려갔다. 천천히 이마가 땅에 닿았다. 흙이 차가웠다. 풀 냄새가 고약했다.

“언제든 비형랑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세간에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길달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공표되었다.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질겁하여 달아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비형의 이름을 대문에 써 붙여 잡귀를 막고 안위를 도모했다.

비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 처사가 옳았는지 다시 복기했다. 눈을 감으니 아직도 귀에 선했다.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때의 그 공기가.

쌔액.

길달이 땅에 몸을 드리웠다. 숲은 기꺼이 길달의 몸을 받쳐 주었다. 왕의 눈은 흡족해하며 뒤를 돌았다. 같이 온 귀신들이 몸을 벌벌 떨며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았다. 아니, 둘이 남았다.

비형은 길달을 죽이지 않았다. 귀신은 주술을 불어넣은 검으로 베거나 부적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죽일 수 없었다. 왕실은 그걸 몰랐다. 비형은 그걸 알았다. 간단한 눈속임이었다. 상황을 잠시 모면하기 위한 눈속임. 비형은 길달을 일으켰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도 모르고 널 죽일 수 없어. 다만 시간을 벌었을 뿐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들어.”

길달은 시킨 것을 잘 이행하는 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였다.

“공식적으로 나는 널 여기서 죽였어.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지겠지. 근데 난 널 도무지 죽일 수가 없어.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왕께 마지막 청을 드릴 거야. 목숨 대신 그와 맞먹는 정도의 잔혹한 형벌로 참작해 달라고.”

길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의 맑은 눈에 슬픔이 방울져 맺혔다.

“이제 내가 너에게 내릴 것은 일종의 저주이자 주박이야.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끈질기게 너를 괴롭힐 거야. 어쩌면 그냥 죽는 것이 편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 날 죽도록 원망하고, 저주해도 좋아. 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해도 좋아.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네가 살아서 다비와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어. 난 네가 어딘가에서 살아갈 것을 상상하면서 이 월성 안을 살아가고 싶어. 널 편히 보내주지 못하는 것도 이기적인 내 천성일까? 길달아, 나 정말 못돼먹은 천성을 가졌다. 넌 이런 친구를 사귀게 되어서 마음껏 후회할 수 있겠어, 하하.”

길달은 가만히 비형의 울음 섞인 말들을 들었다. 비형이 자신에게 내릴 끔찍한 형벌이 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길달은 이것만은 알았다.

“후회도, 저주도, 원망도, 누가 내게 시킨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하지 않아. 나는 그저,”

길달이 비형의 슬픔을 닦아내었다.

“시키면 한다. 네가 주는 것이 무엇이든 하겠다. 설령 지옥 같은 시간이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 싶은 고통을 지속시켜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할 테다.”

비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손을 들어 거대한 진법을 그렸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주문이 비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웅대한 돌풍이 둘을 감쌌다.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길달은 빙긋이 웃으며 바람 소리에 스러질 말들을 내뱉었다.

“주어지면 행한다. 그게 내가 잘하는 일이니까.”

잠시 후 돌풍이 뚝 멎었다. 비형은 몇 번을 돌아보며 그 자리를 떠났고, 길달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길달이 가는 모든 자리에 방울 소리가 째지게 울려 퍼졌다.


미물조차 잠든 밤, 전국 방방곡곡의 요괴가 드나드는 귀문(鬼門). 그 앞에 휘황찬란한 황금 방울을 온몸에 걸친 이가 있었다. 눈은 동공이 없이 멀리서도 형형한 빛이 돌았고, 강건한 몸집이 떡 벌어져 보는 이의 기를 눌렀다. 어둠 속에 미동 없이 서 있는 검은 그림자는 그렇게 한참을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편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동공도 없는 눈이 돌아갔다. 작은 초롱 불빛을 이고 웅성웅성, 네댓 명의 사람들이 귀문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눈동자만 굴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귀문 바로 앞까지 올 때까지 주시했다. 이윽고 사람 중 하나가 귀문 앞에 선 정체불명의 대인(大人)을 눈치채고는 소스라치며 멈춰 섰다.

“이 밤에 게 뉘시오? 사람이오, 요괴요?”

시체같이 핏기없는 입매가 천천히 벌어졌다. 시커먼 그가 말을 건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자, 상반신에 달린 방울들이 온통 진동하며 천지를 뒤흔들 만큼 울려댔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이었다.

“사람을 막는 요괴다.”

멈추지 않는 방울 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쓰러졌다. 그러나 수백 개의 방울을 달고 있는 장본인은 익숙한 듯 표정의 변화 없이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아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주어진 대로 행할 뿐이지.”

아주 오래전의 길달과 아주 닮은 모양새로, 그는 묵묵히 사람들을 귀문과 멀리 떨어진 인가에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가는 걸음마다 방울 소리가 울려댔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더니, 아까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다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어진 대로 행한다. 그것은 오랜 세월 수백 개의 방울에 몸이 묶여 대대로 귀문을 수호해 온, 길 씨의 성을 가진 문지기들에겐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치의 불만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 일을 시켰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잊었을지도 몰랐다. 움직일 때마다 수백 개의 방울이 고막을 찢는 듯 울리고, 그것들을 몸에서 일각도 떼어놓을 수 없는 저주에 걸렸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행한다. 천성이 그러하므로.


공미포 13,83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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