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지속 가능한 삶의 형태에 대하여

늑대인간 au (w.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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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숲의 곳곳에서는 이곳이 누군가의 영역임을 알리는 체취가 풍겼다. 영역의 주인도 모르게 타 개체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은 때로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중대한 사안이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간간히 눈앞을 희부옇게 만드는 눈폭풍이 숲의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며 낮게 울부짖을 때마다 회색 늑대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멈춘 채 몸을 떨었다. 피를 너무 많이 잃었고, 부상이 너무 심했다. 싸늘한 기온에 얼어붙은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얼마 더 걷지 못한 회색 늑대의 몸이 어느 침엽수 아래에서 허물어진다. 두텁게 쌓인 눈은 쓰러지는 몸체를 소리도 없이 가분하게 받아냈다. 설핏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옅은 숨이 간간히 흘러나와 부서지길 반복한다. 밝은 호박색 눈이 느릿하게 굴러 혹한의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침엽수의 잎을 더듬는다. 늑대는 훌쩍 다가온 죽음을 예감했다. 더 이상 자력으로 이동하는 것은 힘에 부쳤다. 몸의 욱신거림은 이제 그닥 선명히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시체를 물어오지도 못한 제 짝의 곁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콧등의 희게 센 털 한 줄을 제외하곤 온통 짙은 회색 일색인 늑대의 영역은 혹한의 땅 바로 아래였다. 한때 무리를 이끄는 알파였고, 남은 생을 함께할 짝을 만난 이후로는 제 바로 아랫서열에게 알파의 자리를 넘겼다. 무리의 일원들이 유난이라는 눈빛을 보내긴 했다만 회색 늑대는 무리를 통솔하는 것보다 제 짝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 더 정성을 쏟고 싶었으므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짝과 다정히 붙어 앉아 서로를 핥아주고 몸을 기대어 따뜻한 온기와 기꺼운 무게감을 느끼는 별 것 아닌 일조차도 행복했다.

 

만물이 생명력을 한 몸 가득 품어내는 여름이 지나고 점차 건조하게 메말라가는 가을이 왔다. 그즈음 회색 늑대의 짝은 새끼를 뱄다. 아직은 몸을 움직이는 데에 아무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이른 시기였음에도, 제 짝이 일어나 움직이려 하면 회색 늑대는 그 주변을 맴돌며 불안한 듯 굴었다. 그 유난을 참다못한 짝이 주둥이를 콱 깨문 다음에야 회색 늑대는 본래의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회색 늑대는 무리의 영역을 가볍게 산책하려 하는 짝을 따라 나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꼬리를 무는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두 늑대는 숲길을 걸었다. 문득 바람을 타고 날려 와 코끝을 스치는 화약의 매캐한 냄새와 사슴의 피 냄새, 인간과 사냥개의 냄새에 두 늑대는 귀를 쫑긋 세우며 멈춰 섰다. 오래지 않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역 안에 인간이 들어와있다. 인간이란 것들은 좀처럼 다른 생명의 영역을 존중할 줄 몰랐다. 하여 아무렇지 않게 영역을 침범했고, 저들 멋대로 휘저은 다음 떠나가는 것이다. 불쾌한 듯 이를 드러내는 회색 늑대의 곁에서 짝이 코끝을 가벼이 부벼왔다. 울음소리를 내 무리에게 위험을 경고하기엔 이쪽의 위치 또한 발각될 염려가 있었으니, 두 늑대는 조용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쯤부터였다. 인간들이 무리의 영역을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 머릿수는 서넛일 때도 있었고, 대여섯일 때도 있었다. 하나같이 총신이 길쭉한 소총을 들고 사냥개를 세 마리 데리고 돌아다니며 숲에서 다양한 것을 사냥해갔다. 곧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먹을 것이 부족해지는데 인간들이 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통에 겨울을 대비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무리는 영역 내에 마련해둔 몇 군데의 고정 거처로 자리를 옮겨가며 인간들을 피했다. 무리에는 아직 어린 늑대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일 역시 마냥 수월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수 없었다. 인간들의 행동을 지켜본 바 사냥하는 손속에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눈발이 희미하게 날리는 날이었다. 무리는 또 한 번의 거처 이동을 했다. 와중에 어린 늑대 하나가 낙오되어 회색 늑대가 녀석을 주우러 가는 길이었다. 원체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라 아마도 무리를 따라오다 잠시 시선이 닿지 않은 사이에 다른 길로 샌 것 같았다. 냄새를 좇아 길을 거슬러가던 회색 늑대가 고개를 들며 귀를 쫑긋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제 짝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따라 나왔냐는 무언의 잔소리에 애교스럽게 머리를 툭 부딪쳐온다. 그 때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린 늑대의 깽깽거림, 네 개의 귀가 일제히 쫑긋 서고, 두 늑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내달렸다.

 

가까워질수록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듯 했다. 궁지에 몰려있는 어린 늑대, 합심하여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냥개들. 그것을 부추기는 인간들의 음성에는 희열이 섞여 있었다. 회색 늑대는 깨달았다. 그들에게 지금껏 해온 사냥은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종의 생사가 달린 사냥 기회를 짓밟으며 그들은 그저 즐거움을 충족하고자 숲을 휘젓고 다녔을 뿐이라는 뜻이다. 빠른 속도로 숲을 가로질러 달린 끝에 그들의 인영이 희끗희끗 가까워졌다. 두 늑대는 냄새를 지우고자 방향을 바꾸어 바람을 안고 가까이 접근했다.

 

작게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인간들이 보였다. 못해도 여덟은 되어보이는 것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인원이었다. 일제히 한 곳을 쳐다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잔뜩 겁을 먹은 채로도 이를 드러낸 어린 늑대가. 그리고 녀석을 에워싸고 언제든 달려들 것처럼 몸을 낮추는 사냥개 세 마리가 있었다. 회색 늑대는 옆에서 당장이라도 으르렁거릴 듯 이를 드러낸 제 짝의 기색을 감지했다. 주둥이를 툭 갖다 대어 진정시키려는 듯 굴었다. 한때 알파로서 무리를 책임졌던 회색 늑대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고작 둘로 녀석을 구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사냥개 세 마리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가까이 인간들이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사냥을 위한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포기하는 것이 더 많은 늑대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 돌아가야 해. 구할 수 없어.

― ……

― 잠깐…!

 

사냥개 한 마리가 어린 늑대의 다리를 물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노호성을 터트리며 튀어나가는 짝의 행동을, 회색늑대는 막을 수 없었다. 요사이 제 짝은 무리의 어린 늑대들을 돌보는 일에 제법 매진했다. 그것이 새끼를 밴 영향임을 모르지 않았다. 갑자기 커다란 성체의 늑대가 나타나 사냥개 한 마리의 목을 물어뜯으며 어린 늑대 앞을 막아서자 저들끼리 시시덕대던 인간들이 표정을 달리하며 각자의 총부터 찾아 드는 것을 보고 회색 늑대가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목울음, 컹컹 짖는 소리와 인간들의 고함, 비명, 숲을 울리는 총소리. 난전이었다. 사냥개들과 인간 둘을 물어뜯은 두 늑대의 주둥이가 벌건 핏물로 물들고, 인간들이 쏘아댄 총탄이 거대한 몸 군데군데 파고들어 피를 뚝뚝 흘리게 했다.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라. 인간들은 저들의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무자비하게 총을 쏴댔다. 가장 먼저 쓰러진 것은 어린 늑대였다. 어리다곤 하나 사냥개와 덩치는 비슷했으니 난리통에 얼어붙어있는 녀석을 쏘아 맞추기는 쉬웠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회색늑대의 짝이 쓰러졌다. 한쪽 눈 바로 위를 맞춘 총탄에 그대로 축 늘어졌다. 회색 늑대는 제 짝의 시체라도 거둬가려 그 목덜미를 물고 질질 끌다 세 방을 더 맞았다. 마지막으로 쏘아진 것이 목덜미의 어디를 뜨끔하고 파고들었다. 그 탓에 물고 있던 것을 놓친 회색 늑대는 결국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혼자 몸을 피했다.

 

산과 숲은 어둠이 이르게 내린다. 회색 늑대는 잔뜩 짙어진 야음에 몸을 감추고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몸에 박힌 탄환을 빼려면 보다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으니. 고통에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억지로 상처를 벌리고 헤집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악다문 잇새에서 뿌드득,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고통에 찬 비명을 대신했다. 늑대인간의 회복력은 인간에 비해 빠르고 좋은 편이다. 탄환을 빼두어야 그나마 회복이라도 될 터였다. 시뻘겋게 물든 손에서 탄환 세 개가 투둑 떨어졌다. 나머지는 손으로 헤집어 꺼내기엔 너무 깊거나, 혼자서 꺼낼 수 없었다.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회색 늑대가 피에 젖은 상처를 핥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숲의 저 멀리에서 바닥에 깔린 잔 나뭇가지 수십 개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의 숲에서 이렇게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것은 없다. 회색늑대는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일으켜 세웠다. 인간 십수명의 기척과 말소리, 횃불의 기름냄새, 선명하게 느껴지는 분노와 적의. 되갚음을 하러 다른 이들을 데리고 돌아왔구나. 정말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은 이쪽인데도. 그들이 부상자를 추슬러 숲을 벗어났을 때 회색 늑대는 난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었다. 죽은 제 짝의 몸이라도 거둬가려고. 그러나 자리엔 어린 늑대도, 제 짝도 없었다. 그 와중에 인간들이 챙겨간 것이다. 어찌 인간이란 족속들의 탐욕은 끝 간 데를 모르는지.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회색 늑대는 배를 깔고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인간들이 더욱 가까워지기 전에 영역 내에 있을 무리에게 경고해야 했다. 숨 쉴 때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나는 목으로 회색 늑대는 길게 울었다.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 갈라지는 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어가며 울부짖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위치가 들통 나고, 인간들이 데려 온 사냥개들이 일제히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색 늑대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왼쪽 뒷다리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달렸다. 아무리 어둠이 내렸어도 이 숲의 길은 훤하게 안다.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을 방향과는 반대되는 곳으로 움직였다. 설령 인간들이 자신의 울부짖음으로 무리의 존재를 짐작한대도 제 경고를 들은 무리가 위험에 대비를 할 테니 괜찮으리라. 지금은 그렇게 믿고 최대한 무리와 멀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다시 현재.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사냥개 두 마리를 물어 죽이고서야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으나 회색 늑대는 이제 무리에게로 돌아갈 여력은커녕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자릴 찾을 기운조차 없었다. 의식이 가물가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떠오르길 반복한다. 눈보라가 식어가는 털 위로 얇게 덮여간다. 깜빡깜빡 새하얀 세상과 검은 암전이 되풀이되길 몇 차례. 흐릿한 의식에 회색 늑대는 누군가의 숨이 얼굴 주변을 스치는 것을 들었고, 누군가의 체취를 맡았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게 뭉개지는 어떠한 음성, 축 늘어진 몸을 들어 올리는 힘. 그것을 끝으로 회색늑대의 의식은 깊은 해저로 가라앉았다.

 

오래도록 잠을 잤다. 몸을 덥히는 훈기가 얼어붙은 몸을 조금씩 녹였다. 며칠은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목을 울리며 흘렀다. 또 며칠은 열이 절절 끓었다. 몸에서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문득문득 정신을 차릴 때면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가, 또 다른 때는 털을 핥아주는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때와 날을 나누는 시간의 경계가 흐릿하게 지워진다.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건지, 생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건지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질 무렵에야 회색 늑대는 명료하게 의식을 차리고 눈을 떴다.

 

타닥, 탁 마른 장작이 불길에 타들어가며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등 뒤편으로부터 훈훈한 열기가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욱신거렸으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작은 오두막의 창밖이 온통 하얀색 일색이었고, 가재도구와 원형탁자, 세 개의 의자가 놓인 오두막 안은 사람이 사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침대가 없었다. 군데군데서 묻어나는 익숙한 냄새. 멍하게 기억을 더듬던 회색늑대는 이 냄새가 낯선 영역에 들어서며 맡았던 다른 개체의 것이라는 점과, 제 무리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하다는 걸 짚어냈다. 회색 늑대는 그제야 이 영역이 단순한 늑대의 영역이 아니라, 다른 늑대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늑대인간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또 그리 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인접한 영역에 다른 늑대인간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회색늑대가 조금 아연한 눈을 했다. 그때 저벅저벅 오두막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이족보행을 하는 발소리. 회색늑대는 경계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자신을 죽이려면 이미 한참 전에 죽였으리란 데에 생각이 다다르자 이내 몸에 긴장을 풀고 머리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드디어 깼냐.”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던 잿빛 머리의 남자가 자연스럽게 벽난로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쪽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한 습관적인 시선에 회색 늑대가 호박색 눈을 깜빡여보였고, 잠시 멈칫하나 싶었던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 건넸다. 대꾸하듯 꼬리를 한 번 툭 들었다 내렸다. 남자의 한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서는 순록의 냄새가 났다. 들고 온 것을 원형탁자 위에 올려둔 남자가 옷가지를 꺼내 회색 늑대 앞에 툭 내려놓고 돌아서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고 앉아라. 2주 만에 눈 떴으면 그래도 날 것보단 따뜻한 걸 먹는 게 좋겠지.”

 

자신이 늑대인간인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운 행동에 회색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모습을 바꾸고 그가 내어준 옷을 걸쳐 입었다. 슥 끌어내리는 티셔츠 자락 아래로 한창 아물어가는 총상 자국이 붉은 새살을 돋워내고 있었다. 원형탁자에 가지런히 밀어 넣어진 의자를 하나 빼 앉아 무언가의 요리를 하느라 움직이는 뒷모습을 멀겋게 주시했다.

 

“…무리는 없나보지?”

 

목을 찢는 듯한 통증과 함께 형편없이 갈라지고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색 늑대는 마른기침을 터트렸다. 그제야 목덜미에도 총을 맞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한 손에 나무 주걱을 든 남자가 물 한 잔을 떠 탁자에 내려두었다.

 

“없다. 너는. 없냐?”

 

무심하게 툭 던지는 대답과 물음에 대꾸하려면 물을 마셔야 했다. 잔뜩 메마른 목구멍을 적시는 물의 느낌조차 아릿한 통증으로 다가와 회색 늑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지와 관계없이 잠시간 뜸을 들여야 했다.

 

“있었는데 없어, 이제.”

“…그러냐.”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 부상을 입은 이유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듯 싶었다. 아주 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정답인 것도 아니었지만 회색 늑대는 굳이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무리에서도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이 영역을 헤집고 다닌 탓에 무리가 다 같이 새로운 영역을 찾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둘 사이에 자연스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보글보글 액체가 끓는 소리만이 작은 오두막의 허공을 맴돌았다. 남자는 익숙한 손길로 요리를 이어갔다. 회색 늑대의 무리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는 때보다 늑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때가 더 많은 편이었다. 무언가를 관찰하길 즐겨 인간들의 행동양식을 익히 눈여겨 봐온 회색 늑대와 달리 무리의 일원 가운데선 인간의 행동양식을 흉내 내는 것이 어색한 개체도 있었는데, 그와 비교하면 남자의 행동은 거의 인간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자, 먹어라. 숟가락은 쓸 줄 알지?”

 

회색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 앞에 놓이는 오목한 그릇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스프보다는 스튜에 가깝게 끓여낸 고깃국이었다. 느릿한 손길로 숟가락을 들어 한 김 식히려는 듯 가벼이 저었다. 제 몫의 그릇과 숟가락을 챙겨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손을 모으며 눈을 감고 무어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회색 늑대는 그 광경을 생소하게 쳐다보았다. 기도를 하는 중이란 것은 알았는데, 늑대인간이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두 늑대인간은 그릇을 다 비워갈 쯤에야 통성명을 했다. 회색 늑대, 산군은 저를 주워다 치료한 남자가 박도훈이란 이름을 가졌으며 늑대인간 치고는 특이하게도 신의 어린 양을 자처하는 신실한 신자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도훈이 제 사정을 묻지 않았듯, 산군 역시 구태여 묻지 않았다. 많은 대화를 나누기엔 총상을 입었던 목의 상태가 좋지 않기도 했고.

 

산군은 그러고도 몸이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꼬박 2주간을 더 자리보전하며 쉬어야 했고 매 식사마다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쓰디 쓴 약을 먹어야 했다. 도훈은 산군이 의식을 잃은 동안 인간 마을에서 수의사―아무리 늑대의 형상이었다지만 수의사라니?―를 데려와 미처 못 빼낸 총탄을 빼내고 주사를 놓고 약을 처방받았다며, 치료를 하고 돌아가면서도 수의사는 사실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던가. 도훈은 어쨌든 산군이 죽지 않고 눈을 뜬 것 자체만으로도 장하다는 듯 말했다.

 

도훈의 집에서 의식을 차리고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때 붉게 돋기 시작했던 살들은 이제 조금 더 밝은 빛을 띤 채 흉터로 남았다. 몸 곳곳에 남은 흉터와 더불어 산군은 목소리를 반쯤 잃었다. 적당히 말을 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전보다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는 조금만 말을 많이 했다 치면 금세 갈라지고 통증을 유발했다. 눈폭풍이 불거나 날씨가 흐리면 왼쪽 다리에 우릿한 둔통과 함께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절뚝거리게 되었다.

 

산군은 그 해의 겨울이 지나도록 도훈과 함께 지냈다. 함께 사냥을 다녀오거나, 인간 마을에 볼일이 있어 내려가는 도훈을 따라 숲 경계까지 나가주곤 했다. 도훈은 딱히 산군에게 축객령을 내린 적이 없었고, 산군은 달리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두 늑대인간의 기묘한 동거는 몇 달간 더 이어졌다. 녹지 않는 눈이 쌓인 혹한의 땅에도 봄은 왔다. 낮 내내 볕이 드는 자리엔 더러 눈이 엷게 녹아 그 아래에서 생명을 틔워 올린 푸르름이 희끗희끗 드러나곤 했다.

 

“너 안 가냐.”

 

오두막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볕을 쬐던 어느 날 도훈이 불쑥 물었다. 가늘게 뜨고 있던 호박색 눈을 굴려 그 옆얼굴을 일별한 산군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달리 갈 곳도 없는데. 이거 가라고 눈치 주는 건가?”

“누가 가래?!”

 

도훈이 벌컥 화를 냈다. 산군은 낮게 웃었다.

 

“오늘 저녁거리는 네가 잡아와라!”

 

오두막 안으로 획하니 사라지는 도훈의 그림자로 낮은 웃음이 조금 더 길게 달라붙었다. 내리쬐는 햇살줄기 아래로 봄의 짧은 찰나를 사는 날벌레 몇 마리가 어지러이 춤을 춘다. 산군은 제가 살아남기 위해 떠나지 않고 남았다. 제 짝을 잃은 상실감에 매몰되어 스러지지 않고자, 동족의 곁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홀로 길을 떠났을 때 마주하게 될 매 순간의 상실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그나마 동족이 하나라도 옆에 있다면 그 허전함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도훈의 존재는 산군에게 제법 많은 위안이 되었다. 산군이 후유증에 앓으며 밤잠 설치는 날이면 도훈은 말없이 몸을 좀 더 붙여와 체온을 나누어 주거나, 진통제를 내어주곤 했다.

 

산군은 퉁명스러우나 그 아래에 감추어진 도훈의 정을 알았다. 도훈의 영역을 둘러보기 위해서, 혹은 사냥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마주하는 얼굴에서 옅은 안도의 빛을 볼 때가 있었다. 희미하기 그지없어 깜빡임 한 번에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찰나간의 기색이었으나, 그럼에도. 도훈은 거친 손길로 바람결에 흐트러진 산군의 털을 슥슥 빗어주곤 뚝뚝하게 잘 돌아왔다 인사를 건네곤 했다. 산군은 제 귀가를 반기는 그 손길이 썩 나쁘지 않았다. 반겨줄 누군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제법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으므로.

 

언젠가의 외출 끝에서 도훈이 말했다. 멀리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근데 네가 돌아오는 걸 보면 무사하구나. 괜찮구나 싶어서 안심이 된다, 고. 딱 한 번 도훈이 솔직하게 제 마음을 드러낸 때였다. 그때 산군은 문득 깨달았다. 이제 이 곳이 내가 돌아올 곳이구나, 하고. 이전의 무리에 속해있을 때와는 또 다른 안정감이었다. 이전 무리에서의 산군은 알파였고, 스스로 자리를 내놓은 후에도 알파였던 자로서 예우 받았다. 모두가 자신을 고개 들어 높이 쳐다볼 뿐 곁에 서려던 이는 없었다. 제 짝조차 알파로서의 저를 먼저 떠올리곤 했었으니. 도훈과 함께 지내며 산군은 처음으로 느꼈다. 나란히 선 친우와의 관계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각을.

 

“……”

“…뭐. 왜.”

 

문득 몸을 일으켜 오두막 문을 열어젖힌 산군이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원형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적어 내리던 도훈이 불퉁하게 따지듯 물었다.

 

“앞으로도 안심하라고. 숨이 다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곳으로 돌아올 거니까.”

“……”

“저녁거리 잡으러 갔다 올게.”

“…그래, 잘 다녀와라.”

 

닫히는 문 사이로 들려온 도훈의 배웅인사에 산군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동면에 빠져들었던 동물들이 슬슬 바깥 공기를 쐬러 나올 즈음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저녁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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