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You make me live in the dark

권산군 과거로그(Ori)

스물다섯, 권은 양양을 떠나 강릉으로 옮겨왔다. 저를 내칠 용기는 없어 끌어안고 있으면서 시선이라도 마주칠라치면 흠칫 어깨를 떨거나 갈라진 웃음을 지어 보이는 모친으로부터. 조모를 여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고, 부친은 스물이 되기 전에 한 줌의 재로 화하여 나무 아래에 잠들었다. 그러니 모친이 홀로 저를 견뎌온 시간은 약 오 년. 한 손의 손가락을 모두 꼽으면 헤아릴 수 있는 시간 동안 권의 모친은 혼자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어 성인이 되던 해의 첫날 모친이 그랬다.

 

너도 이제 알아서 챙길 수 있는 나이가 됐잖니.

 

권의 키가 모친의 키를 훌쩍 넘은 이후 모친의 시선이 턱 위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권은 제 목 언저리를 쳐다보는 모친을 내려다봤고, 묻고 싶었다. 내 목을 조르고 싶어요? 묻고 싶은 이유는 간단했다. 제게 물려주었을 새카만 눈의 밑바닥에서 얕게 찰랑이는 원망을 자주 관찰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묻지 않았다. 이 역시 이유는 간단했다. 모친은 자신이 보통 사람스럽지 않게 굴 때마다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했으니까. 만에 하나 모친이 졸도한다 해도 권은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터였고,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이니 곤란함을 초래할 뿐이다.

 

강릉에 처음으로 구한 집은 좁디좁은 고시원 방 한 칸이었다. 얇은 가벽으로 공간을 꾸역꾸역 나누어 놓은 닭장 같은 곳. 권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일을 시작했으므로 돈을 조금 더 쓴다면 이보다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 터였으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당장 주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으니 괜한 낭비를 할 이유가 없다 판단했을 뿐이다. 혼자 꾸려나갈 삶이다. 나중을 위한 대비는 많을수록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진 않으리라.

 

강릉은 양양보다 일을 구하기가 수월했다. 권은 주로 힘쓰는 일을 했다. 사람과 얼굴을 덜 맞댈 수 있는 일. 사람들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관찰은 충분했지만, 아직은 다른 곳에 신경을 쏟으며 관찰한 것을 뒤집어쓰는 것이 어려웠다. 쉽게 말해 멀티 태스킹 능력이 부족한 셈이었다. 이곳은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 도착한 새로운 곳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아는 이가 거의 전무한 곳. 그러니 허술한 부분은 되도록 적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 유리했다.

 

삼 년간은 주말을 제하고 매일 일만 했다. 저녁이면 고시원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새벽이면 일어나 일을 나갔다. 주말엔 번화가나 관광지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보고, 듣고, 관찰해 익히는 일을 꾸준히 붙들고 있으려고. 그러다 더러 대쉬를 받으면 쉽게 어울렸고, 몸을 섞는 일도 그랬다. 권에게 타인과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비유하자면 불량식품을 먹는 일이었다. 강하고 자극적인 맛으로 감각을 또렷하게 자극하는 것.

 

그 자극적인 맛을 접할 때마다 권은 저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레 자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성적 취향을 관찰하고 알아가는 일이 흥미롭기도 했다. 여러 번의 검증 끝에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낫다는 걸 제외하곤 제게는 이렇다 할 뚜렷한 성적 취향조차 없다는 점 정도일까. 물론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 기대한 적은 없으므로 실망할 것도 없었다.

 

고시원에서 꼬박 삼 년을 버텨낸 권은 그보다 넓은 한 칸짜리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좀 더 넓은 방과 욕실,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주방 설비가 딸린 곳이었다. 집을 옮기며 일자리 또한 이전과 달리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로 바꾸었다. 월수금은 번화가의 큰 서점, 화목은 골동품을 함께 취급하는 표구사. 표구사를 운영하는 늙수그레한 주인은 그 스스로를 우리나라의 3세대 표구사라 칭하며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

 

표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들여온 이름이고 본디 조선 왕실에서 부르던 이름은 장황이라던가, 조선의 장황 기술과 일본의 표구 기술이 결합되며 수준이 훌쩍 뛰었다던가, 이제는 전통식으로 표구를 할 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던가……. 시시콜콜 이어지는 가르침을 빙자한 이야기를 들으며 권의 눈은 주인장의 능숙한 손길에 닿아있었다. 처음엔 표구가 무엇을 칭하는 단어인지도 몰랐다. 그다음에는 단순히 병풍이나 액자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표구라는 것은 문화재를 복원 및 보존하고, 그 가치를 올바르게 판단하여 전하는 행위라고. 표구사 주인장의 주름진 손 아래에서 초라하게 낡아빠진 과거의 유산은 켜켜이 쌓인 시간을 털어낸다. 세월에 갉아 먹힌 부분 위로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을 이어 붙인다. 오래된 것을 수복하여 가치를 되찾도록 만드는 일련의 행위가 권의 눈길을 진득하게 잡아끌었다. 흐려져 가는 존재를 다듬어 현재에 묶어두는 일. 제가 가진 환사는 죽어버린 것을 고작 일시적으로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표구는 오래 머물도록 만든다. 죽은 것에 새로운 생명을 더한다. 권은 죽은 것을 다루는 게 편안했다.

 

서른이 되었을 때 권은 다른 아르바이트를 모두 정리하고 표구사로만 출근했다. 여전히 아르바이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으나 권은 어느덧 주인장의 표구 솜씨를 제법 그럴듯하게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것, 시간의 틈에 끼여 낡아가는 것을 다루며 권의 생활은 묘한 안정감을 찾았다. 그간 일을 하며 저축한 돈의 액수도 제법 큰 몸집을 자랑했다. 권은 표구사의 일을 이어가며 자신이 좀 더 오랜 기간, 터 잡아 머무를 수 있을 만한 곳을 물색해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취미생활이란 것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하여 권은 항상 시선을 두던 바다로 향했다. 바다의 움직임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내맡기는 서핑을 익혔다. 강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르게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문득, 익숙한 불량식품의 맛이 났다.

 

서른셋을 맞이한 권의 삶은 그럴듯한 궤도에 잘 안착해 있었다. 권은 서핑이라는 취미에 더해 새로이 스키라는 취미를 익힌 참이었고, 표구사의 직원으로서 단독으로 표구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인장은 권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골동품이며 오래된 미술품을 매입해왔다. 저보다 젊은 권의 손이 더 섬세하고 빠르다는 이유에서였으나, 권은 수전증도 없는 늙은이가 거짓도 참 당당히 둘러댄다 생각했다.

 

그해의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권은 나대지를 사들였다. 좌우로 각각 단독주택이 서 있었으나 그리 가깝지 않아 서로 간섭받지 않을 수 있었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이름 없는 모래사장과 바다가 반기는 위치의 땅이었다. 부동산 측에서는 오래도록 나가지 않는 것이 이상한 땅이라 했다. 영안을 지닌 권의 눈에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는 멀쩡한 땅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땅을 소유하는 데에 뒤따르는 행정적 처리들을 모두 깔끔히 끝냈을 때엔 바야흐로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의 꼭대기였다. 표구사의 여름휴가를 맞아 권은 언제나처럼 바다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녀와 처음으로 마주쳤다. 서핑보드 위에 좀체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친구들과 요란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권이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제법 시끄럽다, 였다. 그러나 바다는 권의 것이 아니거니와 여름철 바다는 으레 요란함이 가득한 곳이었으므로 그러려니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참 파도를 타던 권이 서핑을 마치고 해변으로 걸어 나왔을 때 요란하던 예의 일행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렇다 할 감상 없이 바다를 한번 일별한 권은 간이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친 다음 편의점에 들렀다. 마실 것을 살 요량이었다. 길게 늘어선 매대 사이 통로를 걸어 음료가 진열된 냉장고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이가 툭 부딪혔다.

 

“…….”

“…어…죄송합니다.”

 

권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제자리를 찾았다. 아까 바다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 거기 또 있었던 탓이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고동색 눈이 보였다.

 

“괜찮아요.”

 

짧게 대꾸한 권은 그녀를 지나쳐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 든 다음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서는 권의 옆으로 그녀의 친구들이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권은 휴가가 끝나는 날까지 바다로 나가 서핑을 즐겼다. 휴가라고 해 봤자 달리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제철을 맞이한 서핑이라도 많이 해둬야겠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권은 혼자 출근해 표구사를 지켰다. 친구들과 등산을 갔다던 주인장이 산에서 미끄러져 발목이 부러졌다던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권은 거짓말이 아닌가 잠시 생각했으나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에 몸조리 잘하시란 상투적인 인사말을 뇌까리며 전화를 끊었다. 오전에 시작했던 표구 작업이나 마저 이어가야겠다 생각하며 가게 안으로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문에 달아둔 종이 딸랑이며 울었다.

 

“어서 오세요.”

“어…”

 

권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익숙하다는 표현을 붙이는 게 우습지만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 탓이다. 바다에서도 보았고, 편의점에서도 보았던. 이런 낡아빠진 가게에 올 만한 연령대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아, 길을 좀 여쭈려고요…”

 

권은 그녀가 내밀어 보이는 쪽지의 주소를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잠시 길을 짚었다. 멀지 않은 곳이긴 했다만 초행길에 찾아가긴 어려운 찻집이었다.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던 권은 잠깐 뜸을 들이다 가게 안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작업하던 것이 넓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차피 말리느라 작업을 멈춘 것이기도 했으니, 풀이 마르는 시간을 더 주어도 관계는 없으리라.

 

“앞까지 같이 가드릴게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서요.”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사실 이미 좀 헤매던 중이어서….”

 

가게 문을 잠근 권은 그녀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해는 뜨거웠고, 전신주의 달궈진 전깃줄이 힘없이 축 늘어진 채였으며, 곳곳에서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녀는 한 손에 양산을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권과 함께 걷느라 펼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저 때문에 양산 안 쓰는 거면 그냥 쓰세요.”

“아… 그래도 혼자 쓰기 좀 그래서요. ……같이 쓰실래요?”

“그러기엔 키 차이가 좀 나는데요.”

 

권의 에두른 거절에도 양산을 펼친 그녀가 팔을 위로 뻗어 권의 머리 위로 양산을 들었다.

 

“이렇게 하면 되죠.”

 

팔 아플 텐데. 권은 나란히 걷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흘긋 쳐다봤으나 더 말리진 않았다. 본인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

“…….”

“…….”

“저기…”

“네.”

“아까 거기서 일하세요?”

“…네.”

 

가늘게 떨리는 팔에 잠시 시선을 두던 권이 한숨처럼 대답하며 그녀의 손에서 양산을 옮겨 들었다.

 

“여기서 꺾어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양산을 든 권이 좁은 골목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찻집은 아주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이용하는 곳으로 동네 주민들이 더 많이 찾곤 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골목이 너무 좁아서 막다른 길일 줄 알았어요.”

“오래된 곳이라서 길이 좁아요. 보통은 동네 주민들이나 찾는 곳이라서 딱히 길을 넓히지도 않고요.”

“그러잖아도 여기 알려주신 할머님이 그러셨어요. 여행객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고.”

 

알고 찾아가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이리저리 꺾이는 골목의 폭이 좁은 탓에 그녀의 어깨가 권의 팔뚝을 가볍게 스쳤다.

 

“저번에 같이 있던 친구들은 어쩌고 혼자예요.”

“먼저 서울로 돌아갔어요. 전 원래 혼자 더 머물다 갈 계획이었구요.”

 

혼자 더 남아서 구경할 만한 게 있는 곳은 아닐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권은 이윽고 낡은 나무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가볍게 턱짓을 해 보인 권이 양산을 돌려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기예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안 헤맸어요.”

“별말씀을요. 그럼 전 가볼게요.”

 

고개를 까딱여 보인 권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할 때였다.

 

“저기, 같이 차 마시지 않으실래요?”

 

양산을 어깨에 기대 세운 그녀가 돌아서는 권을 바라봤다.

 

“가게를 비워놓고 와서요.”

“…그럼 언제 쉬세요?”

 

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타인의 호의, 관심, 호기심. 고작 우연한 세 번의 마주침이 다인데. 그럼에도 사람은 쉽게 타인에게 관심을 품는다. 어차피 강릉에 사는 사람도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으리라.

 

“월요일이랑 화요일이 휴무예요.”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그녀의 일정이 어떤지는 몰라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 강릉에 머무르진 않을 것 같았으므로. 권은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권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표현하는 무수한 말 가운데 하나일 뿐이 아니던가. 권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고작 이주 뒤의 일요일, 권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조금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마주하고서 드물게 할 말을 잃었다.

 

“내일이 휴무인 거 아는데, 오늘 안 찾아오면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길래요.”

“……”

“내일 커피 한 잔 같이 마셔줄래요?”

 

권은 다음날 정말 그녀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타려 줄을 선 뒷모습을 보며 권은 문득 ‘가능성’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꾸릴 수 있는 가능성. 하여 권은 그 가능성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권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말했다. 오는 주말에 서울로 가겠노라고.

 

만남이 다섯 번째가 되었을 때 권은 그녀에게 연애를 제안했다. 시선을 내리깔고 머리칼을 귀 뒤로 가벼이 쓸어 넘기는 그녀의 고동빛 눈에 낙엽의 빛이 스몄다. 서른셋의 가을, 권은 계획에 없던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사랑하는 흉내를 내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받는 만큼 되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그만큼의 전화를 자주 주고받았다. 못해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만났다.

 

그녀와의 연애는 제법 순항했다. 권의 흉내 내기도 점차로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의식하지 않고도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한 해가 흐르고, 또 한 해가 흘렀다. 서른다섯의 권은 약 이 년 전 사두었던 대지에 집을 지어 올렸다. 양양을 떠난 지 꼬박 십 년 만에 앞으로 살아갈 저만의 공간을 마련해낸 것이다. 덕분에 서른여섯의 새해 첫날은 새집의 거실에서 그녀와 함께 쏟아지는 창밖의 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표구사의 일은 점점 권이 주로 도맡게 되었다. 주인장도 가게를 아주 처분하는 일이나, 모르는 이에게 넘겨주는 것보다 아는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며 은근히 권에게 가게를 넘겨받을 것을 자주 언급했다. 이제 와 다른 일을 새로이 찾을 생각도 없었으므로 권이 가게를 넘겨받는 것은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음에도, 계속된 주인장의 압박 아닌 압박에 결국 약간의 대출을 낸 권은 가게의 위치를 이전하며 주인장으로부터 표구사 및 골동품점을 온전히 넘겨받았다.

 

이전한 가게의 뒤편으로 작은 창고를 지었다. 집에서 보관하고 손질했던 뼈들을 모두 그리로 옮겼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며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집에 뼈를 보관해두는 것이 불편하다 느끼던 참이었다. 권은 그녀가 제아무리 제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해도 이 부분만은 수용하지 못하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애초에 그녀는 영능은 물론이요 영안조차 트여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새로이 이전한 가게와 좀 더 노선을 다듬은 사업, 모자람 없는 구색을 갖춘 집과 비교적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서른일곱의 어느 가을날 권은 문득 생각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긴긴 사고 끝에 어렵사리 결론지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가진 것이 어쩌면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이것이 진짜라면. 그녀와 서로 곁을 나누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번엔 내가 강릉 내려간다니까 괜히. 최근에 계속 바빴으면서.”

“내가 오고 싶었어.”

“사실 와 줘서 좋았어. 오늘 식사한 곳도 너무 좋았고.”

“응.”

 

겨우내 쌓인 냉기도 사르르 녹아가기 시작하는 봄밤이었다. 새순이며 꽃망울이 움트기 시작하는 다정한 계절의 시작. 권은 맞잡은 손의 온도와 형태, 감촉을 새삼 되새긴다. 여전히, 그녀를 대하는 자신의 행동을 애정에 기반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기야.”

“응.”

“결혼할까, 우리.”

 

권의 프러포즈는 그 성정만큼이나 건조하고 담담했다. 화려한 이벤트도, 휘황한 말도 없었으나 다만 솔직하게 건넸다. 멈춰선 그녀의 왼손에 준비해온 반지를 끼워주었다. 다들 이렇게 한다고 하니까. 이벤트 따위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반지 정도의 구색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멋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프러포즈에도 수줍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듬해 여름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선뜻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강릉으로 내려왔다. 권이 이미 제 소유의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 권은 그녀가 자신의 생활 기반을 모두 내려두고 제 곁으로 와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가게 뒤편에 창고가 하나 있는데, 종종 거기서 일하고 있을 때가 있어. 가게 안에서 안 보이면 들어오지 말고 그냥 전화해줘.”

 

살림을 합친 첫날, 권은 그녀에게 ‘창고’를 언급했다. 부부가 되었다는 건 서로의 생활 반경에 대한 경계 역시 뒤섞이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최소한의 선은 그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창고에 들어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으므로. 권은 그녀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부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권은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창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잦은 언급으로 그녀의 관심이 닿는 것조차 원치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권의 결혼생활은 연애만큼 순조로웠다. 서로의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고, 그 탓에 다투거나 언쟁을 벌일 일도 없었다. 권은 서서히 낯선 안정감에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난공불락의 비밀은 없는 법이고, 인간이 호기심을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창고의 문을 열어젖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증발하는 순간을, 공포와 당혹 따위로 희게 질리는 변화를 권은 똑똑히 보았다. 초의 초를 쪼개어 늘린 것처럼 서서히 달라지는 모습이 눈 안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여보. 이야기 좀 해.”

“아니, 싫어. 안 들을래. 듣고 싶지 않아. 그냥, 그냥…”

 

두려움은 사람의 눈을 가린다. 귀를 덮는다. 판단력을 흐린다. 권은 우두커니 서서 혼란스러움에 흔들리는 그녀의 고동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해받을 수 없는 부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그게… 그게 다 뭐야? 왜 그런 게… 당신 뭐야?”

“…….”

 

산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녀가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오지 마. 가까이하기 싫어.”

“들어줄 생각은 없어?”

“그 광경을 다 보고 뭘 들어줘야 하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해가 될 것 같아, 그게?”

“…여보.”

“그렇게 부르지 마. 무서워. 소름 끼쳐. 당신 싸이코패스 뭐 그런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럼 거기 있던 것들은 다 뭔데?! 그런… 그런 끔찍한 짓을 하면서 나랑 한 침대에서 자고, 한 식탁에서 밥 먹고, 날 만지고…… 어떻게 그래? 나한테 어떻게…… 끔찍해. 징그러워.”

 

히스테릭하게 팔을 감싸고 문지르던 그녀가 진저리치듯 고갤 저었다.

 

“나, 여기 더 못 있어. 있기 싫어. 소름 끼치고 무서워. 당신이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한다는 걸 어떻게 믿겠어. 친정으로 갈게. 생각 정리 좀 하고 연락 할 테니까 그전까지 나한테 연락하지 말아줘. 당장 신고하지 않는 게 내가 최소한으로 보일 수 있는 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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