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Fatum

권산군 창조주/피조물 au (w.위환)

창조주가 세상을 빚을 때 가장 먼저 빚은 것은 무엇이고, 가장 마지막에 빚어낸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은 흔히 창조주가 저 자신들을 가장 마지막에 빚어냈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창조주가 외로워서, 혹은 그를 닮은 피조물을 보고 싶어서 빚어냈다고.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창조주를 가장 닮은 것이 그들 자신이라고. 인간들의 지저귐은 창조주의 귀에도 닿았다. 무수히 많은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이지를 갖고, 사유하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 인간이므로 우리들은 신의 축복과 사랑을 받았노라 말하는 그들을 창조주는 종종 시간을 들여 굽어보았다.

 

신의 축복과 사랑 앞에 모두가 공평하다던 이들이 언제부턴가 고귀한 이와 천한 이를 가름짓고 타인을 비난하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해관계에 의해 서로를 해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창조주의 눈꺼풀이 한 번 팔락이는 사이에 태어났다 스러지는 찰나의 시간을 살면서 인간들은 치열하게도 서로를 모략하고, 해치고, 저주하고, 더러는 사랑했다. 그 모든 것을 홀로 지켜보며 창조주는 과연 외로웠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지 않았던 창조주가 자신의 숨결 한 자락을 담아 흙을 빚기 시작했으니까.

 

창조주는 제법 심혈을 기울였다. 저만큼 빼어나고 결점이 없으며 제 곁에 있어줄 피조물을. 곁에 머무르는 목적은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저 함께 같은 것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딱 그만큼을 바랐다. 하여 지식을 조금 떼어내 담았다. 기억을 조금 나누어 담았다. 오래도록 곁에 있었으면 해 무한한 시간의 조각을 조금 쪼개어 심었다. 그렇게 창조주의 마지막 피조물이 태어났다. 첫 숨을 토해내며 눈을 뜬 피조물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카만 눈으로 저를 빚어낸 창조주를 바라보았다.

 

“…반가워, 창조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 누가 날 만들고 있는지.”

 

창조주는 자신의 마지막 피조물에게 산군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러자 피조물, 산군은 창조주에게 청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그러나 창조주는 그저 창조주였기에 달리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산군은 탄식했다. 창조주가 나누어 담아준 기억 속 모든 것들은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므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산군은 창조주에게 위환이라는 이름을 건넸다. 당신에게도 당신을 지칭할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창조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산군은 위환의 곁에 머무르며 그가 굽어 살피는 세상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고, 많은 생각을 나누었으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위환은 만족했다. 자신의 기억과 지식을 일부 나누어 가진 산군은 저만큼 빼어나 대화를 나누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때때로 위환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짚어냈고, 제안하기도 했다. 산군은 신이 아니었으므로 권능이 없었지만 또한 평범한 인간도 아니었으므로 지상의 인간들이 죽고 나길 반복해 세대가 몇 번이고 바뀔 때까지도 위환의 곁에 살아있었다.

 

언제부턴가 산군은 종종 물었다. 위환이 신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지, 인간을 부러워한 적이 있는지. 인간의 간절한 외침에 화답한 적이 있는지. 유한한 삶을 원한 적은 없는지. 권능을 갖는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자신이 만약 신이 되고자 한다면 어떨 것 같은지. 산군의 새카만 눈을 보며 위환이 물었다. 신이 되고 싶어? 산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 너머에 있는 거야. 위환은 처음으로 산군의 검은 눈이 어둠을 닮았다 생각했다.

 

그즈음 산군은 세상의 활자를 탐독했다. 인세의 지식부터 위환의 서재에 가득하게 꽂힌 많은 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아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위환을 가만히 관찰하곤 했다. 위환은 그 시선을 마주할 때면 문득 커다란 짐승의 아가리 속 도사린 어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으나, 그저 많은 것을 탐독하고자 하는 산군의 갈구가 내비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끔 시선의 이유를 물으면 산군은 가만 웃는 낯으로 아무것도 아니라 고갤 저었다.

 

어느 날 산군이 위환에게 한 잔의 포도주를 건넸다. 인간들이 제물로 바친 것이라고. 위환은 술잔을 기울였고, 이내 검붉은 피를 토했다. 몇 번의 기침을 토해내는 동안 지독한 독에 녹아내린 입안이 느릿하게 수복되었다. 그 광경을 가만 바라보던 산군이 조용히 읊조렸다. 신은 독으로 죽을 순 없는 거구나. 황망한 얼굴의 위환에게 산군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신도 독에 영향을 받는지 알고 싶었어.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산군은 여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위환을 찌르거나, 베거나, 간계를 속삭이거나, 교묘하게 불안과 의심, 의문을 심었다. 위환은 혼란스러웠다. 산군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차례의 곤경 끝에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느냐 물으면 산군은 소리없이 웃었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잖아. 세상을 창조한 당신도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라고, 나를. 이 세상에 빚어냈잖아. 위환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산군이, 자신의 창조주인 위환을 집어삼킬 듯 굴고 있었다.

 

위환은 권능으로 산군을 벌하고자 했다. 자신의 숨결로 빚어낸 것 가운데 권능을 피할 수 있는 자 그 누구도 없었으니. 그러나 권능은 그의 마지막 피조물을 벌하기는커녕 보호하듯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황망한 위환을 마주하고 서서 산군은 권능을 삼켜 제 것으로 삼았다. 같은 색채를 띈 권능이 두 인영 곁을 맴돈다. 창조주의 권능을 삼켜 그 자신의 것으로 삼는 피조물은 만들어낸 적이 없었다.

 

“너…뭐야?”

“당신의 마지막 피조물. 그리고…… 당신을 끌어내릴 존재.”

 

해치고자 하는 자와 벌하고자 하는 자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권능으로도 꺾을 수 없는 산군의 무릎을 꿇리기 위해 위환은 검을 들었고 창을 휘둘렀으며 활을 쏘았다. 그때마다 산군은 번번이 위환의 권능을 흉내 내어 검을 무디게 하고 창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꺾었다. 날 그저 벌하고자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퍽 즐거운 듯 속삭이는 산군을 보며 위환은 입술을 짓씹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마,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자신의 피조물을 죽이는 일만은 할 수가 없어서. 무용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환은 산군을 죽이고자 힘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너는 악마구나. 내가 나를 징벌할 악마를 만들었구나.”

“당신은 내게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 쉽잖아. 무슨 수를 써서든 날 소멸시키면 된다는 걸.”

“…….”

“그럼에도 당신은 제 손으로 빚어낸 날 차마 죽일 수 없지. 가엾은 창조주여. 어쩜 그렇게 여린 걸까. 당신은 그 무름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굴레에 빠질 거야.”

 

수십, 수백의 해가 흐르는 사이 산군은 위환을 끊임없이 마모시켰다. 집어삼키려 들었다. 위환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 갈구를 꺾어 없애고자 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의 힘을 제법 흡수한 산군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웠다. 그 즈음 위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해도 산군을 저지할 수 없음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을 끌어내린 다음이면 산군은 찰나를 살아가는 세상의 삶들에 손길을 뻗칠 거라는 걸.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어 굽어 살피던 피조물들이 저 악의에 스러지는 것만은 안 됐다.

 

위환은 권능을 쏟아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관을 지었다. 제아무리 무한한 시간의 조각을 쪼개어 심은 산군이라 해도 수명의 끝은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을 때 산군을 가두면 된다. 영영 파훼할 수 없는 관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부패하고, 삭아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군이 고이 관 안에 가두어질 리가 없었으므로, 위환은 신으로서의 무한한 시간을 대가로 지불해가며 권능을 깎고 첨예하게 다듬어 영혼 그 자체에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창을 만들어냈다.

 

지난한 전투 끝 위환의 창이 이윽고 산군의 어깻죽지를 꿰뚫어 관 안에 처박았을 때, 영혼을 갉아먹어 들어가는 창날의 힘을 느끼며 산군은 소리 내어 웃었다. 영혼을 손상시킬지언정 고작 숨통 하나를 끊지 못하는 자신의 창조주를 동정했다. 그를 잡아먹고자 하는 피조물마저 아끼는 무른 애정을 비웃었다.

 

“아, 창조주시여. 당신은 지금이라도 날 죽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턱 근육이 울툭 불거지도록 이를 꽉 다물었던 위환이 분노와 후회 따위의 무수한 감정을 한데 짓씹어 비릿한 웃음으로 내뱉었다.

 

“너 같은 걸 만든 시점에서 이미 할 후회는 다 했어.”

 

말대로, 위환은 후회스러웠다. 기억을 나누어 담아준 것이. 지식을 떼어 담아준 것 또한. 일이 이 지경으로 치달은 와중에도 고작 그런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단지 곁에 있어줄 이를 바랐을 뿐인데. 창조주로서 원해선 안될 것을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날 여기 처박기 위해 당신이 어떤 것까지 대가로 지불했는지 알아.”

 

나직하게 내뱉는 산군은 창을 뽑아내지도, 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위환을 해치려들지도 않았다. 그저 순응하듯, 일그러진 위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게 다였다.

 

“널 영원히 가둘 거야.”

 

위환이 마치 스스로에게 약속하듯 중얼거렸다. 제 손으로 죽일 수 없다면, 영원히 가두어서 세상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그것이 위환이 제 피조물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이었다.

 

“고작 그걸 위해 스스로를 윤회의 고리에 가둬도 되겠어?”

 

그냥 날 죽여, 위환아. 산군이 밀어를 나누듯 다정히 속삭였다. 죽이는 것만큼 쉬운 게 없을 텐데. 스스로 만든 피조물 하나 죽이지 못하는 가련한 나의 창조주여. 과연 당신이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산군은 빛을 가리며 세상과 저를 단절시키는 관의 뚜껑이 얼굴을 가리기 전,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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