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것들의 노래
M03
"그게 문제가 되나요? 마담."
아침부터 무거운 정적만이 티 룸을 감싸고 돌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집안의 가장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티 룸에 모여 앉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늘빛 위로 갈색 얼룩이 진 눈동자가 티 없이 푸른 눈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마담의 시선이 찻잔 위로 떨어져 내린다. 뒤를 잇는 깊은 한숨에 고운 빛깔의 찻물이 작게 일렁였다.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케일럽은 지금과 같은 분위기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두 동생이 마담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고, 마담은 무언가…. 케일럽으로선 읽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무엇이 문제인 거지?
"내가 대행자인게 문제가 되냐고 물었어요, 마담."
재차 흘러나온 물음에 마담은 이마를 짚었다. 의미 없는 시간이 또 흐른다. 케일럽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자신이 무료하다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
케일럽이 몸을 반쯤 돌렸을 때, 발목을 잡는 목소리는 왜인지 모르게 떨림이 묻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동생의 시선이 마담에게로 쏠렸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여전히 이마를 짚은 마담은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케일럽은 몸을 돌려 마담을 내려다보았지만 다시 앉지는 않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달랐지. 유모는 가끔 네가 무섭다고 했어.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릴 하는지 잘 알았지만 난 그걸 네가 특별해서라고 믿고 싶었어. 네게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달랐던 부분도 보통처럼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단다. 네게 좋아보이는 건 다 하게 해주고 싶었지. 발레를 위해 파리로 보낸 것도 그래서였어. 그랬는데… 너의 외조모께서 네가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아이라고 하시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고장나 있었다고."'
"어머니, 형은―"
"내가 한 짓이 모두 쓸모없게 느껴졌지. 그런데 네가 자랄수록 멀쩡해진다고 하셨어. 잘 웃진 않아도 웃을 줄 알고, 기뻐할 줄 안다고 외조모가 무척 기뻐하셔서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단다. 하지만 순회공연을 왔을 때 내가 만난 너는… 무대 아래에서도 연기를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생각했지. 멀쩡해진 게 아니라 멀쩡한 척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도 네가 무섭더구나. 겉으로 볼 땐 그냥 조금 무뚝뚝해 보이는 게 다였으니까. 하지만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널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네가 이 집에 온 순간부터 노력했단다. 널 사랑하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의미 없는 일을 하셨네요."
"그런데, 그런데 네가 그 납치 사건이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행자라니. 이상한 힘을 쓰는 그런…."
마담은 히스테릭하게 고개를 저으며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이 힘도 어머니가 믿는 그 실체없는 신처럼 실체가 없는 존재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도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그렇게 오래 성당을 다니셨잖아요. 평이하게 읊조리듯 내뱉던 케일럽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에서 적의를 닮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끔찍한가요?"
"……."
"내가 무섭다고요."
"……."
"노력할 필요 없었어요, 마담. 사랑해주려 하지 않아도 돼요. 마담 말대로 어차피 잘 못 느끼니까. 의미없는 곳에 마음 가져다 붓지 마세요."
"형.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케일럽은 몸을 돌려 티 룸을 벗어났다. 문 앞에서 동상인양 가만히 서있던 경호원 두 명이 뒤를 따랐다. 일정한 속도의 두 발소리 위로 또 다른 발소리가 바삐 다가와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케일럽의 시선이 옆으로 다가온 엘리엇을 향했다. 그렇게 나가면 어쩌냐는 가벼운 타박이 귀를 울린다. 그러나 벗어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답 없는 케일럽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온 엘리엇은 방 안까지 함께 들어왔다.
"형 미안해. 어머니가 어디서 듣고 오신 건지 다 아시더라고. 요즘 대행자에게 경호원이 붙어있다는 거 말이야. 나한테 따져 물으시는데 뭐라고 말을 못했어."
"네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된 일인거지."
엘리엇이 마담에게 알린 것이 아닌 이상 미안해야 할 일은 없었다. 방 안 이곳저곳에 놓인 제 물건들을 한 번 둘러본 케일럽이 한 구석에 놓인 수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이따 미아에게 내가 가져온 물건들 다 챙겨서 호텔로 보내라고 전해줘. 어느 호텔인지는 기사 통해서 알릴게."
"형. 꼭 나가야 해?"
"여긴 마담의 집이고, 마담은 날 더 보기 불편할 거야. 그러니 내가 나가야지."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수트케이스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을 제외한 몇 가지 다른 물건들을 챙겨넣은 케일럽의 손이 검은 편지에 닿으며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편지 마저 집어넣고는 수트케이스를 닫는다.
"엘리엇. 혹시나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으면 사람들을 시켜서 저택의 모든 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나가지 마. 그게 어렵다면 네 방의 창문과 문이라도 잠그고 방 안에만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형?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야."
무엇이 벌어질지는 케일럽 또한 알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정도라곤 사람이 망자와 산자로 갈라지게 될 거라는 것. 그렇게 되면 분명 곳곳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이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인 엘리엇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인 셈이었다. 남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존재가 가족이라는 거니까. 의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엘리엇을 뒤로한 채 케일럽은 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났다. 처음부터 호텔에서 묵지 않았던 것은 마담을 위해서였다. 아들이 온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대를 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었으므로, 호텔이 아닌 저택에서 머무는 것이 자신의 첫째 아들을 바라는 마담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짧았다 싶었으나 케일럽 역시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어려움 없이 체크인을 끝낸 케일럽이 기사를 돌려보내고 거리로 나섰다. 계속 방 안에 있어봐야 무료할 따름이다.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케일럽을 보았다가, 그 뒤의 두 경호원을 본다. 더러는 수근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케일럽은 개의치 않았다. 무심한 신경줄에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경호원과 사람들의 시선을 긴 꼬리처럼 달고서 걸었다. 그리고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는데, 맞은 편에서 마치 저처럼 경호원 두 사람을 대동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자 역시 케일럽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케일럽이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대행자이신가 보네요."
그러자 남자는 들어선 안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케일럽의 눈에 옅은 의아함이 어렸다. 대행자인 걸 감추고 있던 사람인가? 하지만 그 뒤의 경호원을 본다면 굳이 묻지 않아도 같은 대행자의 입장에서 남자가 대행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차림새는 깔끔했지만 경호원을 고용할 정도로 보이진 않았으므로.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저 잘려요. 그쪽도 대행자에요?"
"네. 보시다시피요."
"이 사람들 데리고 여기서 대화하기 힘들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길까요."
"그것도 좋겠죠. 여긴 길거리니까 대화하기엔 적절치 않겠네요."
여기가 어떤 곳인데 그런 말을 하면 잘린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케일럽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 옆에 있는 거라곤 백화점 정도가 다였다.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케일럽은 남자가 먼저 걸음을 떼자 그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경호원들이 그 뒤를 따랐고, 두 배가 된 경호원 탓에 케일럽과 남자는 본의아니게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이 못내 민망한 듯한 남자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한 카페였다. 네 명이나 되는 경호원을 이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보다 바깥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 것으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았다. 케일럽과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가게 입구에서 메뉴판을 들고 눈치를 보던 직원은 후다닥 다가와 메뉴판을 사뿐하게 내려두고 주문을 기다리는 대신 번개처럼 사라졌다.
"라이언 그레이슨이에요. 그 쪽은 이름이…?"
"케일럽 록하트에요."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은 뒤 케일럽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메뉴판으로 향했다. 아까 전부터 메뉴판을 가져다 준 직원이 자신을 언제 부를까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므로, 주문을 먼저 하는 것이 덜 거슬릴 것 같았다. 뭐 마실 건가요? 케일럽의 물음에 라이언의 시선 또한 메뉴판 위를 맴돌았다. 짧은 침묵 끝에 두 사람은 각자 커피와 얼그레이 티를 주문했다.
"아까는 왜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잘린다고 한 건지 궁금한데요."
"아까 그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까."
케일럽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라면 또 몰라도 대행자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이 많이 자란 지금 같은 때는 그의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록하트 씨는 무슨 일 해요?"
"난 발레 무용수에요. 지금은 휴가 중이지만요."
선선히 대답한 케일럽의 시선이 라이언의 얼굴로 향했다. 시리도록 푸른 눈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짙고 선명한 색 때문일까, 일견 차가워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시선을 넓혀 눈만이 아닌 얼굴을 보면 깨나 사람 좋아 보이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입매가 끌어올려 질 때마다 생기는 양 뺨의 보조개가 그런 인상을 더했다. 인상이 좋아 보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얻기 쉽다는 의미였다. 무던하기 그지 없는 저와는 달랐다.
"록하트 씨가 갖고 있는 능력은 어떤 능력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별 것 아니에요. 공기를 총 쏘듯이 쏘는 능력이 답니다. 그레이슨 씨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습니까?"
"수인화라고 할까요. 원하는 부분을 동물형으로 바꿀 수 있죠."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라이언의 한 손을 내려다보며 케일럽이 머릿속으로 몇 종의 짐승 발을 떠올렸다. 왠지 모르게 어린 아이들에게 알려진다면 인기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직업이며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온 커피와 얼그레이 티를 앞에 두고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끊어질듯 말듯 계속 이어졌다. 주로 라이언이 질문을 하고 케일럽이 대답을 하는 식으로, 예컨대 점심식사는 했느냐와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들이었다.
가벼운 티 타임은 찻잔이 바닥을 드러내 보일 쯔음 끝이 났다. 라이언은 저 역시도 백화점에 휴가를 신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했다. 그의 뒤에서 밀착 경호를 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휴가를 얻는 쪽이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휴가를 충분히 얻을 수 있길 바란다고 대꾸한 케일럽이 경호원들과 함께 먼저 걸음을 옮겼다. 넷이 되었던 이들은 다시 둘씩 찢어져 경호대상이 향하는 방향으로 각각 흩어졌다. 케일럽은 라이언과의 만남 뒤에도 거리 이곳저곳을 걸었다. 저보단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경호원이 둘 씩이나 있으니 낯선 길로 들어서는 것도 딱히 아무렇지 않았다.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살펴보고, 새로운 화방을 발견해 이름을 기억해두고, 가죽 장갑 가게에서 올지 모를 이번 겨울에 쓸만한 장갑을 구경했다. 오래 걷거나 서 있는 것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휴가 기간동안 부족한 하루의 운동량을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케일럽이 가볍게 이른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교대한 경호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케일럽의 뒤를 지켰다.
문득 눈을 밀어 뜬 케일럽이 협탁으로 손을 뻗어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두 시 삼십이 분. 전신을 맑고 가뿐하게 만드는 이 감각은 느껴본 적이 있는 것이다. 안젤리카 테일러. 승급식을 치를 때 겪었던 그의 권능이었다. 창 밖이 환 한 빛에 휩싸였다 다시 어둠으로 빠져든다. 이 새벽에 권능을 쓸 일이 뭐가 있는 거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케일럽이 창가로 향했다. 고층인 탓에 어둠에 잠긴 아래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득하던 고함이 '증명하라'는 선명한 외침이 되고, 거리는 비척이며 걷는 사람들로 점점 메워졌다.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케일럽이 방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도 바깥의 고함이 들렸다. 비록 뭉개져 무슨 말은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경호원 중 하나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경계가 들어찬 그들의 눈매가 사납다. 케일럽은 그것을 무시하고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세계의 존속을 바라는 자들에게 전합니다. 누구도 죽여서는 안됩니다. 부여받은 권능으로 당신을, 그리고 타인을 지키세요. 안젤리카 테일러의 텔레파시였다. 경호원들과 케일럽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도 들었을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팔을 붙잡혔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무슨 일인지…. 경호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의 편도 아닌 증명자로서 전한다!>
<멸망을 막고 싶다면 살아남아 증명하고>
<멸망을 행한다면 단죄로 증명하라!>
이제야 오롯이 이해가 되었다. [망자는 우리의 편, 산자는 우리의 적.] 멸망을 행한다면 산자를 단죄하여 증명하라. 편지는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단죄하면. 망자가 다시 일어나 우리의 편이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알고 싶다면 망자를 만들어보면 된다. 케일럽이 저를 붙잡은 경호원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두 경호원은 조금쯤 당황한 듯 보였다.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그들을 보며 케일럽은 팔을 손에 쥔 채로 능력을 사용했다. 다섯 손가락의 끝에서 쏘아진 공기가 손에 잡힌 팔뚝을 터트리듯 찢었다. 얼굴까지 피가 튀어 케일럽이 잠시 눈을 찌푸리는 사이 다른 경호원의 손에는 어느새 총이 들려 있었다. 패널티로 돌아올 고통을 생각하고 있던 케일럽이 고개를 기울였다. 경호원의 팔뚝이 너덜해졌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의 통증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패널티가 사라진 것이다. 케일럽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는 것은 제약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생명체를 향해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이제 더는 고통을 되돌려받지 않을 수 있다. 하늘색 눈이 총구를 쳐다보았다.
"경호대상을 공격할 생각입니까?"
총을 든 손이 멈칫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든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총을 발사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호대상으로부터 갑자기 공격을 받으면 당혹스럽긴 할 거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바로 공격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계속 움켜쥐고 있던 팔을 놓아준 케일럽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렬한 붉은색이 눈을 찌르듯 선명한 색을 발한다. 언젠가 붉은색은 제게 없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만 같다 생각했던 때를 떠올린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붉은색은 제게 비밀스러운 색이었다.
케일럽이 내려다보던 손을 뻗어 제게 겨누어진 총구를 부드럽게 아래로 잡아내리며 다른 손으로 경호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경호원의 목을 향해 공기를 쏘았다. 살갗에 구멍이 나며 그 안에 가두고 있던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케일럽은 멈추지 않고 다친 팔을 감싼 채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이내 방아쇠에 걸려 있는 남의 손가락을 눌러 발포했다. 탕, 큰 소리를 내며 발포된 총이 정장을 입은 가슴에 구멍을 내놓는다. 흰 셔츠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케일럽이 손에 쥔 것을 모두 놓았을 때 두 경호원은 숨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툭 하고 카펫 위에 총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뒤로 누군가의 숨 삼키는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고개를 든 케일럽은 옆 방에서 나온 투숙객과 시선이 마주쳤다. 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남자가 얼어붙어있었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이었다면 웃어주었을까, 화를 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을 가지며 케일럽은 익숙하게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발사된 공기가 남자의 몸에 구멍을 내놓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증명하라는 외침은 더욱 더 커지고 있었다. 케일럽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바깥의 소란이 궁금해 문 밖으로 나서보는 이들을 향해 능력을 썼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한 사람에게는 두세 번 더 능력을 써야했다. 누군가의 머리를, 목을, 가슴을 꿰뚫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쯔음 복도에서 외침이 울렸다. 증명하라!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게 방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던 목소리였다.
로비 층에 도착한 케일럽의 행동은 불과 몇 분 전 객실이 있던 복도에서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벽 시간 로비는 사람이 없어야 마땅했지만, 바깥의 소란에 상당수 직원들이 나와 문을 잠그고 있었다. 로비층으로 내려와 다시 보니 바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시체들이었다. 걸어다니는 시체. 언젠가 코람데오의 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잠시 바깥을 보는 사이 케일럽을 발견한 호텔 직원이 얼굴과 손에 튄 피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냐며 한달음에 달려오는 가슴팍을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는 다른 직원을 향해 총을 쏘듯 공기를 쏘았다. 달아나는 다른 직원들을 굳이 쫓을 필요는 없었다. 케일럽이 호텔의 유리문을 향해 능력을 사용하자 쏟아지는 유리파편 뒤로 시체들이 걸어들어와 도망치는 이들을 해쳤다. 썩어가는 악취가 저승사자의 숨결처럼 지독하다. 케일럽의 미간이 찌푸러들었다.
케일럽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다 가슴팍을 꿰뚫린 호텔 직원의 몸이 벌떡 일어섰다. 느린 걸음으로 케일럽을 스쳐지난다. 선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몇 분은 더 살아있었으리라. 케일럽은 인간의 선함이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또한 안젤리카 테일러와 헨리 스트렁크의 앞에서 말했듯 세계가 멸망을 겪기에는 큰 아픔을 겪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과 생각일 뿐 케일럽의 뜻은 아니었다. 케일럽에게 세상은 너무나 시끄러웠고, 복잡하며 따분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무너뜨려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 필요가 있었다. 케일럽은 이 세상이 폐허가 되고 나면 어떻게든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 생각하는 쪽이었다. 만에 하나 그대로 폭삭 무너져 영영 사라진다면 그것으로도 상관 없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모든 것이 지금과 달라진 후에 자신이 즐거움이란 것을 알게 될지.
난장판이 된 호텔 로비를 한가롭게 걸어다니던 케일럽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가 멈췄다. 찾고 있던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붉은 상자로 다가간 케일럽이 뚜껑을 열고 망설임 없이 작은 레버를 잡아당겼다. 이내 건물 내로 귀청을 찢는 요란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케일럽이 할 일은 화재경보를 듣고 대피하기 위해 내려오는 이들을 망자로 만드는 것 뿐이었다. 점점 더 늘어날 시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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