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Enseignement

with. 아틸라


언어는 사람이 자신의 뜻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그 외에도 언어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무수히 많았다. 언어는 또한 도구였다. 아이에게 언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면 어른에게 언어는 자신의 교양과 지식 따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옛부터 과시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는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지배층은 말과 글을 통해 피지배층을 통제하고 계층을 나누며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피지배층은 말을 통해 자신들의 애환을 노래와 이야기로 기록했다. 하지만 현대의 언어는 보다 넓은 소통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케일럽은 생각했다. 말과 글로 지배를 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선생님? 다른 생각 하고 있죠."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물어오는 말에 케일럽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여전히 낯설다. 시선이 마주치자 주근깨가 춤을 춘다. 학생 아닌 학생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케일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아틸라가 짐짓 불평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케일럽은 분위기를 환기할 목적으로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미안합니다. 방금 읽은 문장 다시 읽어봐요." 

"이번엔 잘 들어주세요. 신데렐라는 급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계단에서 유리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습니다."

"신데렐라는 궁전에서 너무 빠르게. 그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꼭 동화를 읽어야 하나요?" 

"동화만큼 쉽게 읽히고 이해되는 게 잘 없으니까요. 책 수준은… 앞으로 아틸라 하기 나름이죠."

 

첫째 주 수업이었다. 케일럽은 첫 수업―이라고 부르기엔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여전히 낯설었지만―을 할 때 아틸라가 가져왔던 것보다 쉬운 동화책을 골라왔다. 그나마도 뉴욕의 서점에서는 프랑스 어로 된 책을 찾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헌책방에서 중고 책을 사온 것이다. 케일럽은 아틸라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쳐다보았다. 새하얀 필기체였을 Cendrillon이 세월의 때를 타 조금은 탁해져 있었다. 신데렐라는 샤를 페로가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선별하고 한데 모아 1697년에 펴낸 '옛이야기'에 처음 수록되었다고 전해지는 동화였다. 케일럽도 어릴 적에 읽은 기억이 있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달라진 감상이 있다면 왜 계모가 신데렐라를 살려두고 부려먹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거슬린다면 죽여버리고 그냥 새로운 가정부를 들이면 될 것 아닌가.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괴롭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케일럽은 맞은편의 아틸라에게 그 이유를 아느냐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늘 그랬듯 의문을 삼켰다. 자신의 의문점이 대다수의 타인에게는 의문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계단 바닥에 도착한 후… 시계는 자정의 소리를 끝냈다?"

"그녀가 계단 아래에 이르렀을 때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소리를 끝냈다. 그때는 바닥이라기보다 아래라고 하는 게 좀 더 매끄럽고… 도착한 후라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좀 더 매끄럽게 말하면 이르렀을 때라고 할 수 있는 거죠. "

 

천천히 음절을 끊어 말하며 발음을 들려준 케일럽이 세세한 부분을 좀 더 고쳐주었고, 아틸라는 그것을 기억에 새겨 넣듯 두어 번 되새기며 반복했다. 문장마다 같은 방식으로 이어진 수업은 약속한 한 시간을 빠르게 채웠다. 한 시간은 긴 시간 같으면서도 막상 체감하기엔 그리 길지 않았다. 공연을 할 때도 한 시간은 정말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으니. 찻잔 아래에 낮게 깔려 차게 식은 커피를 내려다보던 케일럽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책은 가져가서 읽어보도록 해요. 다음 수업 때 그 책 끝내고 아틸라가 처음 가져왔던 책으로 돌아갈게요."

 

동화책을 금방 끝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아틸라는 기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동화책보다는 소설책이 낫다는 걸까. 아틸라의 생각을 저 좋을 대로 짐작해보며 케일럽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무료하던 오후 시간이 어떻게든 무사히 흘러간 뒤였다. 케일럽은 수업 일정을 이틀에 한 번, 한 번에 한 시간씩 하는 것으로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는 그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뭔가를 배우려면 빠른 시간에 집중적으로 배우는 게 실력을 늘리기에 좋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틸라는 케일럽의 의도대로 빠르게 말을 습득해갔다. 여덟 번째 수업을 맞이했을 때 아틸라는 자신이 가져왔던 책을 절반 정도 해치웠고, 케일럽이 읽어주는 문장을 삼십 퍼센트 정도 따라 쓸 수 있었다. 케일럽과의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공부를 해오는 모양이었다. 양복점을 찾는 프랑스 손님들과도 부러 더 열심히 대화를 한다고 했다. 팔랑거리는 분위기와는 달리 열심히 하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케일럽은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이지만, 가르치는 대상이 수업을 잘 따라온다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이어지던 수업이 열일곱 번째가 되었을 즈음 아틸라는 책과 사전을 덮고 케일럽과 그날 혹은 전날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간간이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말을 멈추긴 했지만 일상적인 대화는 큰 어려움 없이 나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케일럽은 수업을 위해 자신 역시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언젠가 파리에서 했던 인터뷰보다도 한차례의 수업에서 하는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덕분에 무료함은 조금 덜어졌지만 살면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하기는 처음이라 최근 케일럽은 어색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앞으로 남은 세 번은 책 없이 사전만 가져오면 될 것 같네요."

"책 없이 수업해요?" 

"이젠 수업이라기보다 그냥 대화시간인 거죠. 오늘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할 겁니다." 

아틸라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같은 것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아틸라는 실생활에서 말을 쓸 일이 더 많을 테니 내린 결정이었다.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어색함과는 별개로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이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 점이 스스로도 의외였다. 동생인 엘리엇 역시 케일럽이 최근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자주 나선다는 것에 생전 들어볼 일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엘리엇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자신을 짐작하고 있겠거니 하기로 했다―이 굴었으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법했다. 

 

수업이 끝나면 두 사람은 금방 헤어져 각자의 갈길로 향했다. 아틸라가 다시 양복점으로 되돌아 가봐야 하기도 했거니와, 케일럽의 말주변 없음이 한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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