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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P. 그라프 (Roman Patrick Graf)

메뉴판 by 멍게m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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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혼자가 됐을 때

이른 독립. 분수에 겨워 자식을 내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으나, 조숙한 아이는 고독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적어도 자력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형편은 됐으니.

당돌한 건지, 뻔뻔한 건지. 한 대장간에 무턱대고 들어가 기술을 알려달라 고집을 부린 덕이었다.

늙은 대장장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괴짜였다. 다짜고짜 찾아와 일거리를 요구하는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들려준 뒤, 그대로 멱살을 잡아 가게 밖으로 내던졌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지으며 첫날과 같이 가게의 문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꼬박 보름이 지난 늦은 오후, 대장장이가 패배를 선언하자 아이는 그곳에서 잡일을 돕기 시작했다. 낮에는 쉴 틈도 없이 일을 하고, 밤에는 근처 골방에 몸을 뉜 채 벌어진 외벽 틈으로 별을 보았다. 그 반짝임이 좋아 일부러 벽을 메우지 않았다. 매일 아침 모래를 뱉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호기심이 일을 나이

소년의 호기심은 어깨너머로 배운 주조에 그치지 않았다. 이따금씩 손님들이 보여주는 간단한 공학에 빠져 시내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것을 찾아 구경했다. 매캐한 매연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줄도 모르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엔진펌프에 정신이 팔려 검댕 범벅이 된 얼굴로 돌아오기 일쑤인 나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을 일을 그만두고는 작은 공방을 하나 얻어 수년 동안 틀어박혀 독학을 하였다.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구식 부품으로 신체를 개조하기 시작한 것 또한 이 시기였다. 그가 세운 목표치를 감당하기엔 세심함을 요구하는 신식은 너무나 쉽게 고장 났다.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았을 때

남자가 택한 일은 해결사였다. 우선 많은 일을 겪어보며 견문을 넓히겠다는 취지였으나, 태생이 우직한 그에게 각종 술수가 판치는 음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어진 몇 년의 실패 이후, 남자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릴 적 일하던 대장간을 찾았다.

그곳은 약간의 잔해를 품은 공터만이 남아있었다. 얼마 전, 가디언의 습격으로 가게가 무너지자 늙은 대장장이는 은퇴를 선언하고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전해 들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간다. 해결사와 닮았으면서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일.

기세 좋게 모험가 조합에 이름을 올렸지만, 낮은 등급 탓에 게시판 근처만을 서성이던 둘의 만남을 계기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어느새 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패배했다. 그 목표 또한 같았기에 분수에 맞지 않는 전투임을 예상했음에도,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 대가가 본인들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왜인지, 죽지 못한 남자는 혼자가 되었다.


다시, 홀로

그저 따르고, 또 마시고. 보다 못한 바텐더가 쫓아낼 때까지 매일같이 술에 절어 지냈다. 주변인의 죽음이야 이미 숱하게 겪어왔던 일인데 이번만큼은 왜 이리 견디기가 힘들까. 돌이켜 보면 무던한 남자는 일생 동안 크게 동요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에게 버려졌을 때도, 쇳물을 쏟아 크게 데었을 때도, 중상을 입어 일주일 만에 깨어났을 때도 그저, ‘결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자는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무너졌다.

다시금 빈 술잔을 채워 입으로 가져다 대는 그때, 검은 가죽의 반장갑을 낀 손이 나타나 잔을 가로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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