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바등-재희무현

[재희무현] 환연 三.

무협au

무현은 하루도 그 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이제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언젠가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떠돌이 상인이었는지 그 뒤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무현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서 풀을 캐다가 문득 목이 말라 근처 냇가로 향했다. 물을 양 손으로 떠 마시려는 순간 위쪽에서 붉은 물이 한줄기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피? 피인가? 동물이 상류에서 죽어 피가 흐르는 것이라면 당장 피해야할 일이었지만, 만약…사람이라면…?

무현은 두 가지 가능성 속에서 고민하다가 냇물을 따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구해야 했다. 붉은 물줄기는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은 채 일정한 양으로 흘렀다. 무현은 한참을 오르고서야 이게 피라면 진작 실혈사하고도 남았으리란 것을 깨달았지만 피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지 궁금증도 일었기에 마저 올랐다.

그리고 나체의 남성과 마주쳤다.

"우, 우아아앗?! 미안합니다! 못 봤, 못 봤어요!"

당황한 무현이 양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고개를 확 돌렸다. 지, 지금 다시 내려갈게요, 마저 목욕하세요! 외치고 걸음을 돌리려던 무현은 낯익은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저런. 약초 선생. 관음하는 취미라도 있어요?"

"…엇?"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와 말투에 무현은 황급히 돌렸던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살짝 굴렸다가 이쪽을 뚱하게 쳐다보는 동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간 봤던 머리는 틀어올려 묶어서 천으로 감싼 상태라 정확히 몰랐는데 적발의 머리카락은 꽤 길어서 배꼽 아래서 찰랑이는 물에 닿아 흐늘흐늘 풀어져 있었다. 무현은 그 머리끝에서 흘러나오는 빨간 물과 목 아래부터 가슴께까지 뒤덮은 벌건 흉터 어느 쪽에 먼저 놀라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린 채로 서 있었다.

"다 봐버렸네?"

동백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젖은 머리를 순식간에 틀어올려 묶고는 천으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싸맸다. 그리고 물가로 걸어나오려 하기에 무현은 얼른 몸을 돌렸다. 마른 천으로 몸을 닦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부스럭거린 후에야 동백이 무현을 불렀다.

"봤죠?"

주춤주춤 양 손으로 눈을 살짝 가린 채 고개를 돌리는 무현에게 동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뭘요?"

"뭘요라고 묻는걸 보니 둘 다 봤네. 비밀 지켜줄거죠?"

"...물은 빨간데 피 냄새가 나지 않아서 안 그래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만...머리 염색이에요?"

무현은 두 가지 중에 더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말 없이 빙긋 웃는 동백에게 무현이 끔찍한 상상을 애써 무시하며 재차 입을 여려는데 동백이 무현의 입술을 검지로 지긋이 눌렀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했으니까 못 본척 넘어가줘요."

그렇게 말하며 동백은 빙긋 웃어보였다. 새카만 동공과 마주한 채로 입술이 눌린 무현은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트기 직전의 새파란 여명 아래. 깊은 산 속에서 유일한 인간 둘. 무현은 동백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뭣보다 안광 없는 저 눈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동백은 무현이 입을 열 기세를 보이지 않자 눈을 접어 웃으며 손가락을 뗐다.

약속대로 무현은 아무에게도 동백을 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염색 사실도, 상반신을 뒤덮은 화상 흉터도, 못 본 체 하기로 했다. 동백 때문에 넋이 나가서 허탕을 친 무현은 가족들에게 멧돼지를 만나 쫓기느라 못 캤다며 미안해했지만 무진은 '형이 멧돼지를 만나기도 하는구나', 하고 놀라기만 할 뿐 형을 탓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 식료품을 사지 못한 무현과 가족들이 다음 날 멀건 국으로 한 끼를 때우고 있을 때였다.

"무진아, 있니?"

"네, 어, 황 부인!"

얼기설기 엮은 문 너머로 보이는 부인은 바구니를 한 팔에 끼고 있었는데 다소 마르기는 했지만 인상이 좋아 보였다. 무진이 대문으로 나가 황 부인을 상대하는 동안 무현의 어머니가 무현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이 아주 밝아지셨구나. 며칠 전에 왔을 때만 해도 당장 아들 뒤를 따라갈 것 같았는데."

"떨쳐내기로 하신걸까요."

"…쉽지 않았을건데."

무현의 어머니는 다소 찜찜한 얼굴로 쌀이 둥둥 떠다니는 국을 한 술 뜨더니 덧붙였다.

"어찌 됐든 살기로 결심한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무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진이 뭔가 사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볼 일은 저게 전부였는지 미련없이 자리를 뜨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다가온 무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었니?"

"저번 약값이라고 들고 오셨어요. 돈은 없어서 미안하다고."

들여다본 바구니는 온갖 작물로 가득했다. 감자 몇 알과 삶은 옥수수 밑으로는 콩과 보리가 섞여 담긴 두레박이 있었다.

"아이구, 돈 보다 우린 이게 더 좋다."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어머니가 웃으며 삶은 옥수수를 꺼내 베어 물었다. 무현도 웃으며 옥수수를 꺼내 들었다.

뜻밖의 외상값 덕분에 배를 그럭저럭 채운 무현은 신씨세가로 향했다. 신씨세가에서 요구한 풀을 제때 납품하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저번에 만났던 창고 관리장은 다소 깐깐했기에 무현은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대문에 들어섰다.

"아, 박 선생님이시죠? 거래일을 조금 늦추고 싶으시다구요? 예예, 괜찮습니다. 그 풀이 어디 구하기가 쉽습니까 하하하."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창고장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있었다. 심지어 무현이 무슨 말을 하든 웃는 낯으로 수긍했다. 무현은 그가 장부에 기록된 날짜를 고치는 것을 지켜보다가 전임자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물으려 했다.

"선생님."

"아. 소가주님."

"소가주님처럼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는 소가주님도 절 선생님이라 부르잖아요."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해오는 청년에게 무현이 웃으며 가볍게 질책했다. 청년의 등장에 장부를 기록하던 창고 관리장은 두 분 말씀 나누시라며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무현은 순식간에 사라진 창고장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다가 청년을 흘겨봤다.

"전임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소가주님?"

"편하게 불러주시면 대답해드리죠."

"무슨 일이 있었죠, 해량 씨?"

"별 일 아닙니다. 안목이 없고 맡은 바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이길래 해고했을 뿐입니다."

"그거 저를 못 알아보고 저한테 거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말을 해서 잘렸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그게 바로 안목이 없고 일을 못하는 증거입니다."

"해량 씨...제가 거래를 어겼으니 화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걸로 자르면 어떡해요."

무현이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쉬자 해량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선ㅅ, 무현 씨.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 재산의 절반 정도는 그냥 드리고 싶습니다."

"절대 안 받을거에요."

"-그래서 정당히 거래 하기로 했잖습니까? 편의는 최대한 선생님께 맞추라고 했는데 어딜 감히 세가의 위엄을 제 것마냥 부리며 선생님을 면박합니까? 저는 총관에게 단단히 일러뒀는데 알고 그랬다면 괘씸하고 만약 그 창고장이 총관이나 전임자에게 경고를 듣지 못했다면 그럴만한 인선이었다는 뜻입니다."

해량은 당장이라도 전임 창고장을 찾아가 한 대 패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갈무리했다. 무현은 해량의 호의는 기꺼웠으나 자신 때문에 해고당한 남자는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또 '선생님은 너무 선해서 탈입니다...'같은 말이 나올 것이 뻔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거래기한을 늘린 후에 바로 돌아가려 했던 무현은 식사하고 가시라는 해량에게 붙잡혀 저택으로 들어섰다. 해량이 무척이나 절절하게 오늘 갓 잡은 돼지라거나, 신선한 과일이라거나, 새로 들여온 찻잎 이야기로 무현을 붙들려 애쓰는 모습에 무현은 먹고 가겠다며 두 손을 들었다.

집에 가져갈 음식도 싸준다는 약속에 아침에 먹은 멀건 국을 떠올리던 무현은 마음 편하게 식탁에 앉았다. 해량은 돈은 받지 않으면서 음식이나 생필품으로 보이는 정성은 고맙게 받는 무현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간만에 명절도 아닌데 포식한 무현이 만족스럽게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는데 해량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요즘 이상한 종교가 성내에 도는 모양입니다."

"이상한 종교요?"

"예. 죽은 사람을 되살려준다고 하는 모양이던데요."

"...사이비는 끊임없이 새로 등장하네요."

무현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본 해량은 더 자세하게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전에 박 무현의 과거를 조사하다가 그의 아비가 사이비에 재산을 털어넣는 바람에 남은 식구가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무현에게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말을 해주려던 건데, 무현은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할 것 같지도 않았고 뭣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종교에 재산을 탕진할 사람이 아니었다. 해량은 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무현에게 다과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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