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태웅백호] 서태웅의 화이트데이

-2학년 시점.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기타 등등의 수많은 이벤트 당일이 되면 서태웅은 모를 수가 없었다. 본인이 그런 이벤트에 관심도 없고 챙길 의향이 없어도 등교 시작부터 여자아이들이 말을 걸어왔으니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수줍어하며 선물을 건네면 태웅은 말없이 받아줬다. 중학생 때였나, 필요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모습을 누나한테 들켰다가 잔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에 내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는 애들을 왜 받아줘야 하냐고 불퉁하게 대꾸했더니 누나는 답했다.

‘너 농구선수가 될 거라며. 스포츠 선수가 필요한게 뭔지 알아?’

‘…실력.’

‘팬이야! 왜 이 나라에 프로농구가 없는지 알아? 인기가 없어서야. 야구를 봐.’

이어진 누나의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농구를 위해서 얼굴이든 뭐든 네게 붙은 팬을 소중히 할 것! 그렇다고 과하게 친절하면 다른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받아줄 것! 중학생 태웅은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누나에게 또 농구 할 시간이 허비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선물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선물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작년에 전국 대회에서 활약했다는 명성 탓인지 사탕을 두 배는 더 받은 것 같았다. 태웅은 자리로 돌아와 어머니가 쓰시던 장바구니용 가방을 꺼내 오색찬란한 사탕들을 쓸어 담았다. 둘둘 말아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비닐가방은 이런 날 퍽 요긴했다.

가방 하나가 가득 차자 태웅은 다른 가방을 또 꺼내 열다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창가쪽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멍청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웅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사탕 하나를 들어 보였다.

“뭐야, 먹고 싶냐? 줄까?”

“됐어!!!”

태웅의 말에 버럭 소리지른 백호는 팩, 고개를 돌려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녀석의 뒷통수만 쳐다보던 태웅은 다시 가방에 선물들을 담았다. 아침 시간에만 1.5가방이라니, 아침엔 시간이 없었거나 용기가 없었던 아이들이 더 올것까지 생각하던 태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창 자고 일어나보니 점심 시간이었다. 자는 사이 책상에 몰래 올려 놓고 갔는지 태웅이 몸을 일으키자 사탕들이 후두둑 무너졌다. 태웅은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교실을 훑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도시락을 까먹는 반 아이들 사이로 백호는 보이지 않았다. 태웅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계단 쪽에서 백호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는 바람에 태웅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가 계단으로 향했다.

“-우 놈 짜증나, 내-”

“~~. ~~~”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

제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춘 모양이었으나 원체 목청이 좋은 놈이라 중간중간 소리가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태웅은 강백호가 다른 놈이랑 이야기하는 걸 굳이 들어야하나, 싶었다가 그게 농구 이야기라면 당연히 들을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반 층 아래에 서 있던 백호의 손에는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작은 사탕다발이 들려 있었다. 막대사탕 서너개에 까슬한 포장지로 꾸며진 사탕다발의 맞은 편에는 양호열이 백호를 향해 서 있었다. 백호가 태웅을 보고 말을 멈추자, 태웅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호열도 고개를 돌렸다.

“오, 안녕? 백호 찾아 다녔어?”

“….”

“여, 여긴 왜 왔냐. 가서 밥이나 먹어, 송태섭이 또 혼낸다.”

태웅은 반갑게 인사하는 호열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가 당황해하는 백호와 태연한 호열의 태도를 보고 어쩐지 기분이 매우 나빠져서 그대로 뒤돌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백호가 ‘저 새끼 왜 저래???’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태웅은 못 들은 척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뒷문을 열자마자 가득 찬 사탕가방이 보였다. 다른 반에서 워낙 찾는 사람이 많은 태웅을 뒷문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혀 놨던 탓에 태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에 사탕이 또 쌓여 있었다. 태웅은 책상 위의 사탕은 두고 뭔가에 홀린 듯이 가방을 뒤졌다. 백호가 받은 사탕다발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선물들이 많았다. 막대사탕이 스무 개쯤 박힌 화사한 다발을 찾아낸 태웅은 한참이나 그것을 손에 들고 노려 보다가 다시 가방에 넣었다.

강백호가 들고 있던 작은 사탕다발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태웅은 그것이 경쟁의식이라고 생각해서 선물을 뒤졌는데, 막상 찾고보니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경쟁 의식이 아니라면 이 기분 나쁜 찝찝함은 뭐란 말인가. 태웅은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웬일로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지 않고 눈을 뜨고 있는 태웅에 선생님들도 반 친구들도 수근거렸다. 백호는 깨어 있는 태웅 대신 제 가방에 삐죽이 솟은 사탕다발만 흘끔거리며 쳐다봤고, 그걸 눈치 챈 태웅은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서태웅은 결국 쉬는 시간에 강백호에게 다가갔다. 백호는 가방 틈새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말을 거는 태웅에게 놀란 눈을 향했다.

“야.”

“뭐야. 왜?”

“그 사탕 뭐냐?”

“아앙? 니가 무슨 상관인데?!”

“…양호열이 준 거냐?”

“뭔 상관이냐고?”

“….”

“????”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넣고 백호를 내려보던 태웅은 한참을 말없이 쳐다보더니 교실을 나갔다. 백호만 어리둥절해하다가 허공에 주먹질을 날렸다.

마지막 수업을 째버린 태웅에게 과목교사가 분노했다. 농구한다고 처자는것도 모자라 아예 째!? 강백호, 서태웅 이 새끼 어디갔어!! 아, 저도 몰라요! 같은 농구부원인데 왜 몰라! 제가 서태웅을 왜 챙겨야 되냐고요!

한참을 입씨름하던 선생은 이마를 짚더니 출석부에 줄을 그었다. 강백호는 투덜거리며 창 밖을 쳐다봤다. 구름 낀 하늘 아래서 체육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공을 튀기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백호는 숱 많은 머리의 남학생이 교문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구겼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이제 2학년이니 의젓하게 참았다.

수업 종이 치고 선생님이 나가고 난 뒤에도 태웅은 들어오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모습을 봤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태웅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호가 으, 하는 소리를 내며 가방을 챙겨 체육관으로 향했다. 서태웅은 그 곳에 있었다.

채육관 문을 열자마자 교복 차림의 서태웅이 서 있는 것을 본 백호의 눈썹이 들렸다.

“너 여기서 뭐해? 옷도 안 갈아입고. 아까 대머리쌤이-”

“멍청이.”

짝다리를 짚고 선 백호에게 태웅이 뒤로 돌리고 있던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레 병문안 선물로 들고 가는 과일바구니에 색색의 포장지가 올라가 있고, 과일 대신 사탕이 가득 담겨있었다. 백호가 눈을 끔뻑였다.

“…어, 존나 큰 거 받았구나. 축하한다. 자랑하러 왔냐?”

“받아. 니 꺼야.”

“엉? 내 꺼?”

제 것이라는 말에 백호는 얼떨떨하게 두 손으로 바구니를 받쳤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막대사탕이 아니라 사탕껍질조차 비싸 보이는 고급품이었다. 사탕을 빤히 들여다보던 백호가 다시 태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어어, 누가 준 건데?”

“….”

“헉, 혹시 소녀팬? 나에게 직접 주기 부끄러워서 너한테…!”

“암튼 그거 받았으니까 양호열이 준 건 버려.”

“엉??”

태웅은 백호에게 줄 사탕바구니를 사러 수업도 빠지고 백화점에 다녀왔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줬다곤 생각도 못하고 얼굴 모를 소녀팬을 상상하며 히죽거리는 멍청이가 열받았지만, 그래도 말하기는 좀, 기분이 그랬다.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태웅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작은 사탕다발을 버리라고.

태웅의 말에 백호의 눈이 둥그래지더니 곧 얼굴이 벌개졌다. 목부터 서서히 달아오르는 백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태웅의 눈도 커졌다. 태웅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기 직전, 백호는 바구니로 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 그건 내 꺼 아냐….”

“뭐?”

“아, 암튼 나한테 이제 없어! 사탕 전달해줘서 고맙다!”

백호는 빠르게 말을 뱉고는 뒤돌아 도망쳤다. 태웅은 목적이 완수된 것에 기뻐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어정쩡한 상황에 백호를 뒤쫓지도 못하고 서 있다가 뒤이어 온 태섭에게 엉덩이를 발로 차였다.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물론 컨디션이 저조한 태웅이라 해도 웬만한 1,2학년보단 잘했으니 태웅은 몸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태섭은 눈치챈 것 같았지만 태웅 본인이 조퇴하겠다 말로 한 것도 아니라 그냥 넘기기로 한 듯했다.

반대로 백호는 펄펄 날라다녔다. 평소보다도 점프가 가벼웠다. 시원하게 덩크를 꽂아넣는 백호를 보며 1학년 후배들이 환호하자, 백호는 손으로 V자를 그려보이며 웃었다. 태웅은 벽에 기대 앉아 음료를 마시다가 그런 백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탕 받은 게 그렇게 좋나? 이해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자, 그럼 오늘은 해산. 수고했다!”

“수고하셨슴다!!”

쿨다운을 마친 태섭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부원들이 후다닥 뒷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선배라고 빼는 일 없이 다같이 땀 흘린 바닥을 닦고 공을 마른걸레로 닦아 정리한 후에야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태웅이 락커룸에 들어왔을 때는 다들 샤워실에 들어간 후였다. 태웅도 옷을 벗으려 락커를 열었다.

사탕다발이 들어 있었다. 태웅은 순간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밖에서 다 받고 들어왔는데 누군가 침입이라도 한 걸까. 그랬다간 친위대라고 불리는 팬들이 가만두지 않았을텐데. 태웅은 고된 몸으로 부하가 걸린 뇌를 열심히 굴리다가 깨달았다. 이 색깔, 강백호가 양호열에게 받은 사탕다발과 똑같았다. 평소라면 사탕다발 포장지 색깔 따위를 기억할리가 없었건만 어쩐지 백호가 든 사탕다발은 잊히지가 않아서 금방 알아차렸다.

근데 그게 왜 내 락커에? 태웅은 락커를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제 이름표가 맞았다. 설마 멍청이가 자기 락커인줄 착각하고 여기에다 넣어놨나? 태웅은 바로 옆 칸의 강백호 이름표가 붙은 락커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아까까지 입고 있었던 옷이 널부러져 있는 걸 봐선 멍청이가 락커를 착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암튼 나한테 이제 없어!’

양호열이 준 사탕을 버리라는 말에 잔뜩 빨개진 강백호가 바구니로 얼굴을 가리고 외쳤던 말이 생각났다. 그건 내 꺼 아냐, 하던 말도.

태웅은 제 락커 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 꺼 아냐, 나한테 이제 없어. 백호 것이 아니다. 남한테 줬으니까 이제 나한테 없다. 근데 그 사탕이 서태웅의 락커에 들어있다.

….

태웅은 조심스럽게 사탕다발을 잡아 들었다. 빨강과 노랑이 섞인 포장지에 딸기, 레몬, 콜라맛 사탕이 묶여 있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일 먼저 샤워를 마친 백호가 락커룸에 뛰어 들어왔다가 사탕을 들고 있는 태웅을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천재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다 멈춘 백호의 인기척에 태웅은 고개를 돌렸다.

“….”

“….”

“강백호.”

“뭐, 왜. 아 사탕 또 받았냐? 하.하. 부럽네. 난 이제 씻었으니까 집에 가야지. 하.하.”

“내가 준 거야.”

어색하게 다가와 락커를 열던 백호가 락커 위에 올려둔 사탕바구니를 내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내가 준 거라고.”

“….”

강백호를 보는 태웅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그런 태웅을 보던 백호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마찬가지로 확 붉어졌다. 커다란 사탕바구니를 들고 있는 팬티만 입은 남자와 아기자기한 사탕다발을 들고 땀에 젖어 있는 남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묘한 분위기에 샤워실에서 나가지 못하던 농구부원들을 데리고 들이닥친 송태섭이 부실 전세냈냐고 소리 지르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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