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상징
네로, 네로 알카디아 허무에 기대 맹목적으로 그림자를 바라보던 해바라기. 그러나 요즘 그는 도대체 무어라 지칭해야 하는가, 밤늦게 자신의 집에 돌아온 그는 집필실에 있는 모든 그림을 떼내기 시작했다. 벽을 긁는 것처럼 상자안에 갇힌 어린아이가 살고싶다 발악을 하는것처럼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벽을 긁고 그림을 뜯어내 사정없이 찢었다.
가여운 종이 속 이름없는 인어들이 사라진다, 전부 거짓이었다. 자신이 믿었던 것은 허무였고 그저 배신하지 않는 상징을 원할 뿐인 머저리. 다리가 부러지듯 그의 손이 벽을 쓸어내리며 몸이 허물어진다, 책상에 수북히 쌓여있던 책들이 떨어지고 잉크가 넘어지며 피를 쏟는 시체처럼 네로의 백금발 사이로 검은 잉크가 흘러내린다.
“…하”
옅은 숨을 토했다, 그러나 속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짙었다. 자신이 앉던 의자보다 더 낮은 곳에 주저앉아 자신이 사랑이라 믿었던 인어들은 쓰레기가 되어 바닥을 덮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허탈감,공허함,우울과 자조 무엇으로도 정의하지 못하는 추잡한 기분. 잉크는 점점 그의 머리에서부터 어깨로 흘러간다.
매몰된다, 그저 매몰될 뿐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신을 덮고 있던 흙이 더 두터워진다. 이제 자신은 무엇을 향해야 하나, 그러한 고민을 품고 네로는 눈을 감았다.
“..야…디아…로 알카…”
“..군요…일단…물..”
그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몰된 자신을 끌어오는 손길 무겁게 닫힌 눈꺼풀을 들어보면 잉크가 번진 바닥과 끌려가는 자신의 몸이 보인다. 그의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물이 가득찬…욕조?
풍덩!!
“우프흡..?!으브르르..!!”
차갑다, 덮혀있던 흙을 씻어내리는 비가 오듯이 오직 차가울 뿐인 물속으로 얼굴이 잠겼다. 익숙한 감각이다 적진에 포로로 잡혔을 때 정보를 얻겠다며 차가운 물속에 얼굴을 밀어넣던 그 때의 감각이 회상된다. 반사적으로 욕조를 잡고 고개를 들자 그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저항없이 고개가 들렸고 자신의 양 옆에 있던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렛서? 카일?”
“…렛서가 손을 놓쳤다.”
그와 눈을 마주친 카일이 곧바로 이실직고를 해왔다. 그로인해 반대편에 있던 렛서를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그,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실수라고 웅얼거린 그를 뒤로하고서 힘겹게 일어났다. 욕조에 퍼진 소량의 잉크가 물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에 시선을 거두고 수건을 잡아 머리를 덮으면서 욕실을 나갔다.
“왜 왔지?”
“왜 오기는! 너 오늘 안오길래 무슨 일있나 싶어서 왔지! 문은 열려있고 집안은 난장판에 집필실은 전부 뜯어났잖아! 머리에도 잉크인지도 모르고 신고할뻔했어! 강도라도 든거야?”
“일단 신고하려던 렛서를 막고 확인차 봤지만 침입의 흔적은 없었어, 발자국도 하나뿐이고..무슨 일이야? ”
그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물병을 잡고 그대로 입에 들이부었다, 병의 절반을 비워버리고 숨을 몰아쉬는 네로를 향해 렛서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카일은 침착하게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며 네로가 해 줄 말은 하나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예상했던 대답인듯 그 말을 듣자마자 렛서가 한숨을 푹 내쉰다, 이것들은 왜 어째서 상태가 나쁜데 말을 안하지? 라는 울분섞인 짜증. 그러나 이내 다시 어설프고 바보같은 웃음을 흘리며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좋아! 그럼 일단 따라와! 그 머리부터 어떻게 하자!”
“신경..”
“신경 끄라고 하면 우리가 들을것 같나? 혼자 있고 싶어하는것과 잉크범벅에 난장판으로 있는건 다르니까. 정리는 내가 하고 있을테니 렛서는 데리고 미용실 다녀와.”
“알았어!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확 쳐버리면 되겠다!”
“아니…다 필요 없으니까..”
“그럼 왜 그런지 말할거냐? 안 할 생각이면 그럼 얌전히 다녀와, 그 뒤로는 안건들일테니까.”
그들의 말과 행동에 네로는 끌려가듯 밖으로 쫓겨났다. 쬐어오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린 그의 앞으로 렛서는 그가 따라올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지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덮혀있던 자신을 끄집어냈지만 여전히 자신은 매몰된다, 수없이 끌어올려도 잠시 떠오른 조각배일뿐 구멍이 수없이 뚫리고 목표를 잃은 배는 또 다시 가라앉는다.
자신은 매몰되는 인간이다, 무너지고 쓰러지며 주저앉고 죽어가는 인간, 그러나 잠시 아주 잠깐만이라도 끌어주는 이들이 있다면 아직 넘어지기엔 이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 길의 끝에 다다르더라도 이미 잃어버린 길에 미련은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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