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원(光原)
검은 은하, 빛나는 별, 유영하는 잔해, 헤메이는 사람.
“변했네요.”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고향인걸요.”
명백히 전쟁을 목적으로 조선된 함선이 허무를 헤엄치고 있다. 웅대하여 수십 미터 떨어지지 않는 이상 시야에도 못 담을 그 배는, 인공지능만이 적확하게 셀 다량의 무기와 그보다는 한참 모자란 인력을 실었다. 다수의 생명체를 손상 없이 광속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대 우주 시대에, 개인의 역량 따위는 행성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마치 우주진이 보이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것도 노바의 힘입니까?”
다만 138억 1천만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유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의 실존이다.
“방랑자의 힘이라고 해둘게요.”
‘노바’는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행성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수억 분의 일 가량으로 탄생하는 그들은 입증된 논리를 무시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을 지닌다. 과정이 없으니 결과도 각자 천차만별이다. 별 전체의 생명을 흡수하거나, 타 생명체의 정신을 지배해 제 일부로 삼거나,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난제인 죽음을 초월해 눈 감은 자를 어떠한 손상도 없이 일으킨다. 마지막 예시는 루시안 시어도어의 경우다. 그는 구원자, 혹은 오래 된 신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치유력을 지녔다.
역사의 관점으로는 아주 적은 사례지만, 그들은 찬란히 삶을 불태우며 성간을 가로지르는 획을 긋곤 사라졌다. 초신성과 같은 삶. 노바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성명학에 충실한 타칭이다.
“저는 모르겠군요. 방랑한지 너무 오래 지나버린 걸까요.”
모든 노바는 불행해진다. 이 웅혼한 우주는 섭리를 벗어난 자에게 빛을 비추지 않는다. 돌아갈 집과 살아갈 이유를 잃고 불릴 이름마저 감추어진 애셔, 혹은 루시안과 같이.
“당신 고향은 어딘데요?”
루시안은 문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계 연맹의 필두이자 군수인 그는, 그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함선 아스테레스의 주인으로서 늘상 쉼 없이 우주 곳곳을 순찰했다. 땅을 딛는 날이라곤 모두 군사 계획과 관련된 일로 치부해도 틀림이 없었다.
아담은 잠시 침묵했다. 모른다고 말하면 오히려 부가적인 질문이 쇄도할 것 같았다. 그는 인정받는 지식인이지만 자신에 대한 소재만큼은 남들과 꼭 같은 수준의 정보를 가졌고, 굳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비어있을 뿐.
‘하지만 비밀스러운 쪽이 훨씬 유용하지.’
때마침 뒤쪽에서 가벼운 울림이 전해졌다. 귀를 기울이니 희미한 포격음이 들려왔다. 긴급 통신망의 회로가 연결되고 창 위에는 홀로그램 화면이 덧씌워졌다.
“플란네타이 제독님, 해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후측 함대가 위험합니다.”
연락병의 얼굴 왼쪽 위에 좌표가 포함된 지도가 떠올랐다.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붉은빛이 점멸하며 빠른 속도로 한 데 모인다.
“후측에 맡겨라. 다른 함대는 지원하지 않는다. 중앙 입자포의 사거리에 들어온 선체만 격추해. 뒤보다 앞을 주의하고. 곧 전면전을 걸어올 테니.”
“네, 알겠습니다.”
군인에게 반문은 없다.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화면이 한 번 깜빡이고 꺼졌다. 루시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뒤쪽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견제 치고는 숫자가 많던데. 내버려 두면 포위 당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꼬리는 버릴 심산이었으니까요.”
“버린다고요?”
루시안이 경악해 되물었다. 후방에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군비를 잡아먹은 신형 병기들이 가득 실려 있고, 무엇보다 아담 A. 플란네타이를 믿고 따르는 병사 수 백이 탑승해 있다.
“제정신이에요?”
“전쟁입니다, 루시안.”
루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이제는 군인이었다. 반문은….
아담은 루시안의 원망 섞인 시선을 대치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전부 전해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만큼 생사를 함께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 병사들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최대한 안전히 생포하겠죠.”
“어떻게 확신하나요?”
“아스테레스의 병사는 한 명이 열 명의 몫을 하고, 배는 무작정 해체해 고물상에 팔기만 해도 억 단위의 돈이 들어올 테니.”
아담이 빙긋 웃었다. 동시에 옅은 폭격 소리가 귀를 스쳤다.
“고전은 좋아하시나요.”
“네?”
“고대 지구에 트로이의 목마라는 이야기가 있죠. 구밀복검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루시안이 심통 난 얼굴로 아담을 일별했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요. 난 지구인이 아니라구요.”
“무사히 되찾아 오겠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루시안도 자연스레 그쪽을 보았다. 작고 푸른 점이 한 눈에 담겼다.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그의 별이었다.
“당신의 고향처럼.”
루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을 잃었다. 밀려오는 감정의 홍수에 쓸려가지 않도록 손을 휘젓자 아담의 가느다란 손이 잡혔다. 강하게 쥐고 숨을 들이키자 그제야 현실이 눈에 담긴다.
그래, 오늘은 이 사람과 함께 되찾으러 왔다. 우주 해적의 손에 떨어져 이제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된 별. 그리운 고향을.
물과 생명이 힘차게 뛰노는 아름다운 행성은 한순간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값비싼 자원이나 탐낼만한 인력조차 없는 곳이었음에도.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이 원인일 테다. 노바의 탄생은 원죄다. 섭리를 역전하는 힘은 우주의 불순물에 불과하기에. 죽거나, 이용당하거나. 그리도 간단한 이지선다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나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 힘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졌음을 더 빨리 알았다면, 침략자에게 먼저 투항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내어주었다면.
그러나 가정은 공상으로 그치고 루시안 시어도어는 여기에 있다.
“고마워요.”
루시안은 진정하고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별말씀을.”
“지금 이것뿐만 아니라….”
“알아요.”
푸른 점은 다가갈수록 커져 이제는 루시안의 눈동자와 꼭 같은 크기가 되었다. 찰나 그는 정말로 아담이 자신에 대해 모두 아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착각이 아니에요, 소리 없이 읊조리듯 아담은 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온기를 감싸 쥐었다.
“각오는 됐습니까?”
“겨우, 된 것 같아요.”
아담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오른 손목에 감아둔 기기의 화면을 두드렸다. “5분 후 적의 사정권에 진입한다. 작전 준비.” 즉시 선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었고, 일사분란하게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시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시어도어 소령, 위치로.”
“네, 플란네타이 제독.”
지체 없이 돌아선 루시안의 뒷모습을 보던 아담은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키가 컸나?’
고요히 물결치는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맑게 웃던 소년은 다신 돌아올 수 없다. 걸음걸이는 짜 맞춘 듯 일정한 보폭을 그리고, 굳은 표정은 죽음을 건너 온 자의 것이다. 그는 많이 잃었지만 그만큼 찾아냈다.
검은 은하, 빛나는 별, 유영하는 잔해, 헤메이는 사람. 아무리 손을 뻗어도 공허만이 손에 쥐어지고 바라는 것은 궤도를 따라 멀어져 간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나 설레이는 마음은 숨겨진다. 그래도 살아있는 자들은 꿈을 꾼다. 기적이 존재하는 우주에서 낭만은 변치 않는 타성이다.
모든 노바는 불행해진다. 이 준엄한 우주는 운명을 거스르는 자에게 빛을 비추지 않는다. 그 이름대로 불타올라 폭발해, 가득 찬 무한의 검정을 물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그는 상대가 성계 전체라 하여도 커다란 목소리로 반박할 수 있다.
내겐 나만의 이름이 있어. 애셔는 누군가의 축복이었고, 루시안은 누군가의 선물이지. 변하지 않는 기적은 언제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야.
빛은 어디에나 있어. 지금은 멀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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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분기점
네가 나를 통째로 빼앗았으니, 나도 너에게서 무언갈 뺏고 싶었다. 이를테면 사랑.
재회
이미 어머니는 딸의 흉터였고 딸은 어머니의 흉터였다. 이 아픔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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