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분기점
네가 나를 통째로 빼앗았으니, 나도 너에게서 무언갈 뺏고 싶었다. 이를테면 사랑.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우리는 따뜻한 레몬티를 한 잔씩 두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냉장고에 갖가지 자석으로 세 사람의 가족사진이나 사란의 기사 스크랩이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태연자약하게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만큼 간절했다. 나는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사란은 기대에 응하지 않았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그는 잔을 힘을 줘 쥐었다가, 눈을 길게 한 번 깜빡이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당장 소리치며 울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그는 왜 변했냐고, 배신했냐고, 버리는 거냐고 매달리지 않았다.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화내길 바랐다. 채널을 돌리면 으레 보이는 연속극처럼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길 바랐다. 이해할 수 없다며 눈물짓길 바랐다. 그러면 내 삶이 보상받고 승리의 미소를 짓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사람이야?”
차가 식어가고 있었으나 그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목이 타서 수돗물이라도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신경전이라도 벌이듯 나 또한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섬세하고… 나를 신경 써 줘.”
하루미 유우나는 소탈한 이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채소 가게의 타임 세일 줄을 서다 발을 구르는 게 어울리는 사람. 직장 상사가 터무니없는 일을 맡겼다며 불평하는 사람. 인간관계가 지친다며 넋두리를 늘어놓고 기대오는 사람.
나는 원인 모를 우울증으로 상담을 위해 정신과에 들렀다가 그와 만났다. 그는 수년간 사귄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나는 그가 안쓰러워 내원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 혹은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사란과는 전혀 다른 유우나를 보며 천천히 확신했다.
이 슬픔은 오로지 그에게서 기인했으며, 그와 함께 있는 이상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와는 반대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란이 말했다. 찰나 숨이 턱 끝에서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재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나의 삼켜진 비명을 대신 내질렀다.
“도진에게는 아직 말하지 마. 힘들 때니까.”
또 보더 얘기다. 사란과 도진을 내게서 앗아간 그 조직. 외우주나 외계인 같은 허황된 꿈을 불어넣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착취하는 집단. 도진은 보더의 어떤 계획이 실패한 후로 친구와 가족 같은 사람들을 잃었다며 울었다. 사란 역시 마찬가지로 놀랄 만큼 소침해졌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 있잖아. 너희의 가족은 나잖아. 난 우주가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데.
“도진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같이 살자. 그 후로는 어떻게 해도 괜찮으니까.”
그는 물이 아래로 흐른다며, 사람은 늙어간다며 당연한 현상을 설명하듯 혼연스레 말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
어쩌면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애정과 미련이 담긴 질문.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지? 여기에 무어라 답했더라.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좋은 대꾸는 아니었을 테다. 그때의 난 아집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적에게서 원하는 전리품을 얻어낸 장군처럼 냉연하고 비정하게 말했겠지.
“처음부터 그런 적 없어.”
아마도.
너처럼은 될 수 없었어, 사란. 언제나 진실할 수는 없었어.
네가 나를 통째로 빼앗았으니, 나도 너에게서 무언갈 뺏고 싶었다. 이를테면 사랑. 이건 내가 가지고 갈 거야. 빛바랜 채로 심장도 아닌 폐 어딘가에 구겨 넣어 영원히 돌려주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고 네 삶의 상처로 남는다. 그게 네가 나를 관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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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異形)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다음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알았듯 떠난 후에야 나도 그를 알게 되었다.
광원(光原)
검은 은하, 빛나는 별, 유영하는 잔해, 헤메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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