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rain, no rainbow
비가 오지 않으면 무지개도 볼 수 없어
연희가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번화가의 어느 바에서였다. 멘탈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간신히 근처의 바에 들어가 주머니에 남은 약간의 돈으로 술 한잔을 주문한 연희는 한참을 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지만, 술집이니 술을 주문해야지 앉아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문한 터였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눈 앞에 깜깜했는데, 그런 연희의 앞에 주문도 하지 않은 샌드위치가 내밀어졌다. 건장한체격의 바텐더에게 연희는 망그러진 머리로 간신히 문장을 짜냈다.
“난 이거 주문안했어요”
“알아, 베이비. 서비스야.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에게 필요한 건 술이 아니라 이거야.”
그리고는 또 주문도 하지 않은 따뜻한 커피를 한잔 내어놓었다. 오늘 하루 몰아닥친 일들을 견디지 못했던 연희는 그 약간의 친절에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동양인 여자에게 당황하지도 않고 바텐더는 티슈곽 하나를 연희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연희의 대각선 앞에 서서 잔을 닦았다. 연희가 휴지로 코를 팽 하니 풀고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나는, 당신을 곤란하게, 훌쩍,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연희의 말에 개의치 말라는 듯, 바텐더는 어깨만 으쓱해보았다.
“신경쓰지 마. 이 땅에 처음 왔을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걸 지금 당신에게 해주고 있는거야.”
그리고 그 말은, 정말로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연희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어느새 앞에 놓여진 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그녀가 조금 진정이 되자, 휴지를 치운 바텐더가 물을 한잔 더 따라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는, 아주 무법천지였지. 지금이야 대공 전하와 용기사님 덕에 조금 정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말도 아니었거든. 나는 오래지 않아서 머물 곳도 가진 것도 없게 되었지. 사람이 무섭다는 걸 아직 잘 몰랐을 때였지.”
연희는 코를 훌쩍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바텐더는 잔을 다시 닦으며 노래하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저음의 맑고 울림이 풍부한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진 게 없으니 독만 바짝 올라서 여기저기 치받고 다녔지. 아주 골칫덩어리였어. 정말 말도 아니었지. 아무한테나 싸움걸고,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그렇게 살다가 객사할 운명만 남겨둔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도움들로 이렇게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지.”
“잠깐만, 중간에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는데요?”
갑자기 끊긴 이야기에 연희가 당황하자 바텐더는 웃으면서 눈짓했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 바텐더의 역할은 듣는 쪽이거든.”
바텐더가 깔아준 자리에 잠시 주저하던 연희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자친구만 믿고 이 대륙에 왔는데 정작, 도착해보니 남자친구에게는 애인이 있었다는 것. 그 망할 놈이 정말로 왔냐고 조롱하며 자신을 차버린 것. 울면서 미리 마련해둔 거처에 갔더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던 것. 중개인은 연락도 안되고, 호텔이 있는 번화가로 가다가 신분증이 들어 있는 가방을 소매치기 당한 것. 호텔들은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자신을 재워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여자 혼자 여관에 갈 수는 없어서 차라리 번화가의 바에 들어와서 밤을 새려고 한 것. 이야기는 한번 시작하자 술술 나왔다.
“정말… 큰일이었네. 내 생각보다 더 큰일이었는걸…?”
“그렇죠? 저도 제 일이 아니었으면 신기해하면서 놀랐을 거예요. 정말… 어쩌면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죠?”
연희는 깊은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바텐더는 연희의 빈 커피잔에 따뜻한 커피를 다시 채워주며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샌드위치는 있지.”
위트있는 바텐더의 말에 연희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마법같은 사람이야. 연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입에 음식이 들어오고 나서야 연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오늘 아침 비행선에서 먹은 점심이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내가 몸에 못할 짓을 하고 말았네. 거의 반나절 넘게 공복이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샌드위치는 정말 맛있었다.
“마히써요.”
“천천히 먹어. 샌드위치는 도망 안가.”
바텐더의 상냥한 말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희는 눈물과 함께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삼켰다. 체하면 안되니까 꼭꼭 씹어먹었다.
“그나저나 경찰에 신고는 했어? 소매치기 당한 거.”
“네… 그렇지만, 희망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내일 대사관에 가서 임시 신분증이라도 받으려고요.”
“대사관은 보통 당직자를 두니까 한 번 전화해볼래?”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기와 전화번호부를 꺼내왔다. 연희는 전화번호부에서 율도국 대사관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연희는 초조한 마음으로 신호음을 들었다. 받아도, 안받아도 망하는 일이었지만 이미 망한 인생 여기서 더 망할 곳이 있겠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던 찰나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주휴안 율도국대사관입니다.]
연희는 율도국 말로 대답했다.
“저… 율도국 사람인데요, 도둑을 당해서요. 오늘 휴안에 도착했는데 신분증도 아무것도 없어서…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곤란하시겠군요. 혹시 계신 곳이 어디실까요? 저희 대사관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드릴게요.]
연희가 급하게 바텐더에게 주소를 물어 대사관 직원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시간이면 지하철은 없을거예요…. 지금 주소가 있는 곳이 ‘아누에우에’라는 술집인데 맞으실까요?]
그랬던 것 같다. 대사관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가게 안이시면 전화 바꿔주시겠어요?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택시비는 일단 저희가 지불하겠습니다.]
연희가 바텐더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바텐더가 직원과 이야기를 마치는 걸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천만에. 어린 시절의 내게 해주고 싶었던 걸 해줬을 뿐이야.”
손사래를 치는 바텐더에게 연희는 두 손을 겹쳐 예를 취했다.
“율도국 사람은 신의를 알아요. 제 이름은 한연희예요. 은인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말레이아야. 할레아칼라 출신이지.”
처음듣는 나라였다. 연희의 기색을 읽었는지 바텐다가 크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남쪽 바다의 작은 섬이야. 아마 들어본 적 없을거야.”
연희가 난감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연희가 당황한 부분은 그 점이 아니었다. 연희가 알기로는 할레아칼라는 남쪽에 있는 큰 화산의 분화구였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말레이아가 거짓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그것 역시 내색할 일이 아니었다.
곧 택시가 왔다. 연희는 배웅을 나온 말레이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진 돈을 모두 건넸다.
“어어, 샌드위치는 서비스인데.”
머쓱해하는 말레이아에게 연희는 웃어보였다.
“커피는 메뉴에 있는 거잖아요. 오히려 외상이 남았죠. 다음에 꼭 갚을게요.”
“뭐, 손님이 느는 건 좋은 일이지.”
말레이아가 피식 웃고는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희가 손을 마주잡고 악수했다. 말레이아는 마주잡은 손을 세번 흔들고 연희에게 말했다.
“한연희, 우리 말에는 이런 게 있어. ‘비가 오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다’ 궂은 비가 지나면 무지개가 뜰거야. 오늘 일은 힘들었겠지만 꼭 좋은 일이 생길거야.”
“말레이아를 만난 것처럼요?”
“하하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호쾌하게 웃은 말레이아가 연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작별인사였지만 힘을 내라는 듯한 그 두드림에 연희는 어깨를 펴고 택시에 탔다. 말레이아가 문을 닫아주었다.
“잘있어요, 말레이아. 또 만나요.”
“그래, 한연희. 또 보자구.”
택시가 밤거리를 달렸다. 말레이아가 기지개를 한번 펴고는 하품을 했다. 음, 이걸로 미리내한테 진 빚 하나 갚은 셈 쳐도 되겠지? 남쪽 화산의 용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가게로 돌아갔다. 문간에 앉아서 다른 손님들을 쫓아내던 체리쉬가 일어나 방금 연희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지랖은.”
“네가 할 말이냐?”
말레이아는 어이없어하면서 빈 그릇들을 치웠다. 달그락거리를 소리 속에서 체리쉬는 품에서 시가를 꺼내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대충 보니 동쪽 은한씨의 딸인듯 한데 용케 귀하신 몸이 바깥나들이를 했군.”
“뭐, 가출이겠지. 남자친구 만나러 왔다고 했으니. 아마 정혼자를 보러 가출한 거겠지. 율도국이 뒤집혔겠군.”
그래도 남의 일이었다. 한가로운 대화 사이로 한들한들 시가 연기가 흘러갔다. 갑자기 밖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레이아가 하늘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정말, 뒤집혔는데?”
체리쉬가 말레이아의 말에 뒤늦게 하늘을 보고 기겁했다.
“맙소사, 은한의 용이 행차한거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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