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01

키워드 : 무지개

습작 by 고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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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정의하는 명제는 수도 없이 많다.

빗방울이 스쳐 지나간 맑은 하늘 위로 떠오르는 색색의 띠ㅡ라거나, 빛의 굴절 효과로 생성되는 자연 현상의 신비ㅡ라거나. 그도 아니면 창작물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생과 사의 징검다리ㅡ라거나.

또 무지개에 대해, 육안으로 보기 쉽지 않다는 현실 사람들의 경험담과 달리 인터넷 익명방의 사람들은 무지개를 본 경험담을 쉬이 내뱉곤 했다. 그들은 각종 자음을 섞어 쓰며 그 아름다움이 눈에 담겼던 순간을 가벼이 취급한다. 가만 화면을 스크롤 하던 나는 세상의 무심함에 종종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이산화탄소를 내뱉으며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던 우리는 분명, 화단에 물을 주는 경비 아저씨 주위로 무지개 하나만 떠올라도 행복해하던 청소년이었는데….

….

뭐어, 여하튼. 상념은 이쯤에서 끊어낼까. 짧게 혀를 찬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에 젖어 질척이는 흰 우비의 인영이 찰박찰박 발걸음을 내디뎠다. 피할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웅덩이는 기이하게도 보라색 빛을 띄었는데, 한 일곱 칸 정도를 건너가니 다음으로는 파란색 웅덩이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또 그다음으로는 초록색,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웅덩이가 차례로 나와 우비를 가로막았다. 아무리 우비와 장화를 썼다 한들 오만하게 웅덩이를 밟으면 사방으로 튀기기 마련이다. 우비가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웅덩이에서 파생된 물방울들은 은근슬쩍 옷 속을 파고들어 미세한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우비는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다.

무한할 것만 같은 진흙탕 길에도 끝은 있다. 흰 우비의 검은 장화가 막 다섯 번째 빨간색을 지나쳤을 때, 녀석은 고지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아, 이제 두 칸만 더 가면….

결승점이 코앞이라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던 걸까. 혹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을까. 우비의 감정에 감응한 하늘이 기쁨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몹시 시원하여 우비는 자신이 어느 동화의 나그네가 된 것만 같다 생각했다. 사뿐, 손을 얹어 모자를 벗겨낸 우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반짝이는 유리조각, 아니. 그런 단어로는 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하고 선명한 무언가가 세상에 흩뿌려졌다.

굴절되는 빛은 세상의 것이었고, 곳곳에 튀기는 물방울은 지상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우비와 장화를 신은 녀석은 하늘의 것이었나.

탁, 마침내 끝에 다다른 녀석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빨을 훤히 드러낸 미소가 하늘로 치솟았고, 녀석의 우비는 뭉게뭉게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장화는,

잠시 세상 뒤로 숨어 빛이 닿지 못하는 것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ㅡ나는 지금 여기, 무지개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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