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행상행 / 쿠다노보] 위선은 선이고, 탈락은 락이며, 악법은 법이다
그렇다면 리자몽은?
하행상행이지만, 논CP로 봐도 무관합니다.
포켓몬 스페셜(스페마스)을 기준으로 썼습니다.
최근 상행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있잖아, 너. 저번에도 20연승까지 하고선 나한테 졌어. 게다가 이유 역시 저번과 같아. 내 더스트나, 깨어진 갑옷 특성. 물리 공격을 맞으면 스피드가 올라. 그럼 내가 선공 가능해. 체력이 간당간당한 상태에서 체력 회복이 아니라 싸우는 걸 선택하다니, 멍청한 판단.”
하행, 제발! CCTV로 상황을 지켜보던 상행은 당장이라도 더블 트레인으로 달려가 하행의 입을 막은 뒤, 트레이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트레인은 아직 역에 도착하지 않았고, 상행이 저 상황에 난입한다 해도 하행의 지옥에서 온 주둥아리를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상행은 안절부절못하며 하행이 더 말을 잇지 않길 기도했다. 제발, 아르세우스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다음에 또 탑승해서 20연승 하게 된다면, 좀 더 생각해서 싸워. 잘 가.”
아르세우스시여!! 상행은 결국 CCTV를 보다 말고 마른세수했다. 저 사회화 덜 된 하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상행은 손 틈을 살짝 벌려 다시금 화면을 보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듯 평소처럼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이 괜히 얄미웠다.
상행은 관제실을 나왔다. 더 보고 있다간 제 분통만 터질 듯했다. 최근 들어온 민원의 90%는 하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조만간 민원실에 있는 역무원들이 민원을 넣을 것 같았다. 상행은 작게 앓고는 생각 정리를 위해 기어 스테이션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엄마! 나 오늘 싱글 트레인 5연승까지 갔어!”
“그래? 우리 딸, 장하네~ 배틀 끝나고 인사도 잘했지?”
“응!”
“아이 기특해! 그럼 오늘은 칭찬 스티커 두 개 붙일까?”
“내가 붙일래! 내가 붙일래!”
“그래, 그래. 얼른 집에 가자.”
상행은 모녀의 대화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칭찬 스티커? 10개 정도 모으면 상품을 주는 그거? 상행은 최근 하행의 요구를 떠올렸다.
‘있잖아, 상행. 더블 배틀 재밌지 않아? 더블 배틀 진짜 재밌어. 상으로 시작해서 행으로 끝나는 트레이너랑 더블 배틀할래.’
그러면서 하행 본인은 싱글 배틀을 해주지 않는 게 짜증 나서 상행도 그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만약 칭찬 스티커 10개의 상품으로 배틀 요청권을 건다면? 하행은 칭찬 스티커를 얻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상행은 곧장 사무실로 달려가 10칸짜리 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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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스티커 10장 모으면 상행이랑 더블 배틀 가능?”
“그렇습니다, 하행. 스티커 판은 제가 관리하며, 하행이 착한 일을 했을 때만 스티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행은 잠깐 고민하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약속 지켜.”
“하행이야말로 꼼수 부리지 마세요.”
이제 민원이 좀 덜 들어오겠지. 상행은 두 모녀에게 속으로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흰 보스, 검은 보스. 멀티 트레인 탑승 시간이에요.”
“알겠습니다. 가시죠, 하행.”
타이밍 좋게 멀티 트레인 탑승 요청이 들어왔다. 이건 하행이 태도를 얼마나 바꿨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행은 하행을 앞세워 트레인에 탑승했다.
…
최악의 전술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20연승을 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대 트레이너들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상행은 흘금 하행의 눈치를 보았다. 하행이라면 분명 화났을 텐데… 칭찬 스티커를 시작하자마자 이런 고난이 찾아올 줄이야. 상행은 마무리 멘트를 했다.
“저 상행과 하행의 2량 편성. 이번에는 승리를 향해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당신의 실력 역시 과연 만만치 않았군요.”
“난 하행. 상행과 함께 이겼어. 하지만,”
상행은 하행이 ‘그건 너희가 멍청했기 때문에 이긴 일, 별로 기쁘지 않아.’ 같은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하행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다음에 싸우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어. 그러니까 기다릴게, 너희가 여기에 오는걸!”
칭찬 스티커의 효과가 굉장했다! 상행은 하행의 태도에 감탄하여 상대가 이기지도 않았지만, 브라보를 외칠 뻔했다. 트레이너들 역시 하행의 말에 감동한 것인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트레인에서 하차했다.
“있잖아, 상행. 배틀 기록도 내가 하면 오늘 칭찬 스티커 두 개 받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자신의 일을 미루지 않고 하는 것은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니까요.”
“그럼 내가 쓸래.”
하행은 경보로 배틀서브웨이 사무실로 향했다. 저렇게까지 서류 업무에 의욕적인 모습이라니. 상행은 가슴이 뭉클해져 얼른 하행의 뒤를 쫓았다. 아무래도 하행의 모습에 자극받은 것인지, 상행은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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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검은 보스… 배틀 기록을 한 번 읽어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으음, 다음 주가 상부에서 배틀 기록 정기 검토하는 날인데요. 오늘 자 기록이 조-금…”
불안한 표정의 잭키가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상행은 약간 의아했지만,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파일을 받았다.
[○월 ○일 멀티 트레인 기록.
상대의 특성은 물론 타입조차 생각하지 않은 듯한 기술 남발. 서브웨이 마스터를 만나러 오기 전 20번의 싸움에서 운이 너무 좋은 탓에, 멀티 트레인 관리직들의 포켓몬이 한 대도 못 때려서 20연승을 했다고밖에 믿을 수 없음. 허접한 전술. 아무래도 트레이너 스쿨부터 다시 다닐 것을 추천함.]
“하행—!!”
상행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행을 찾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던 하행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있잖아, 나 귀 안 멀었어.”
“배틀 기록은 상부에서도 확인하는 것을 모릅니까? 저런 식으로 쓰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내가 쓴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 그들의 전술은 멍청했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칭찬받을 만한 어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칭찬 스티커 2개는커녕, 1개도 주기 힘듭니다!”
“뭐? 하지만 나, 트레이너들한테는 멍청하다고 안 했어.”
“기록을 그렇게 남겼잖아요!”
“상행, 바보야? 위선도 선. 멍청하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위선. 그러니까 내가 한 행동도 착한 행동이야.”
“그럼 리자몽은 자몽입니까???”
상행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푸흡, 웃음을 참기에 실패했는지, 주변에 있던 역무원들이 하나둘 물건을 줍는 척 몸을 숙이고는 일어서지 않았다. 화는 머리끝까지 났는데, 이 상황 자체가 웃겨서 어쩐지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상행은 깊은 한숨을 쉬고 비척비척 자리로 돌아갔다.
“기록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행은…”
피곤한 눈으로 하행을 바라보던 상행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말했다.
“벌점 스티커 1개입니다.”
“너무해.”
100일 3000자 단문. 주제는 ‘자몽’이었습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진짜 이걸 쓰네…’ 였습니다. 주제 처음 볼 때부터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일 처음에 주제 보자마자 떠오른 게 ‘탈락도 락이면 리자몽도 자몽인가요?’였고… ‘그래도 역시 좀 그런가…’ 하면서 다른 걸 구상했는데, 도무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안 되겠다! 그냥 쓰자! 하고 열심히 썼습니다. 하지만 자몽이 나왔죠?
개인적으로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부제와 잘 어우러지는 제목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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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플랫폼에 업로드했던 글을 글리프에 재업로드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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