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릴리

히스릴리

동반자살 소재 주의

“찬 음식이나, 기름진 거 조심하시고. 3일 치 드릴 테니까 계속 아프면 다시 오세요.”

“네”

 

연구소의 오후는 늘 그렇듯 한산했다. 간단한 배탈이나, 감기약을 처방받는 환자들이 주였다. 붉은 눈동자가 책상 위의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곤함에 절은 붉은 눈이 책상의 캘린더에 시선을 고정했다.

 

‘축하는 해줘야 할까.’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굳이?’

‘맘 같아서는 싫은데, 나름 동료니까.’

 

같이 반강제로 퇴사한 직장 선배가 있을 센터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거둔다. 오늘은 그녀가 친애하는, 아니 증오하는 동시에 밀어낼 수 없는 사람의 생일이다. 퇴사할 때도 히스는 릴리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녀가 히스의 실험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했으니까. 그는 후배인 그녀가 자신을 신고해도 상관이 없었다. 협회장의 동의가 없다고 해도, 그의 신념을 실현할 의지가 있었다. 릴리는 히스가 마나 협회에 재직하는 기간동안 삭망월의 기적, 시니즈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그의 흥미를 끌고 있는 존재였다. 몸에서 백합 향이 나는 특이 체질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시니즈가 아니았어도 긴히 연구할 가치가 있었다. 원래도 날카로운 눈매가 일그러져 사나운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왜요, 왜 안된다는 건데.”

“릴리, 네가 전에 인턴 할 때 내가 덮어준 의료사고 기억나? 꽤 위급한 상황이었어. 내가 뒤처리 안했으면 바로 중징계였을 거야. 만약 진실을 밝혔다면 넌 유족들한한테 비난당하고 사형까지도 갈 수 있었는걸.”

“나도 협회장이 허가 거부한 실험을 계속하려는 당신을 고발 못 할 줄 알고? 착각하지 마.”

“아무리 동료라고 해도 선배인데. 예의가 없네.”

“당신 같은 놈한테 예의 차릴 이유 없어.”

 

나갈 거면 당신 혼자 가. 나는 협회에서 계속 일할 거니까. 당시의 기억이 안개처럼 사그라졌다. 머리가 웅웅거리며 지끈거렸고,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그때 이후로 마나협회로 그의 만행을 비밀리에 제보했지만 아무런 답신조차 없었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릴리는 생각했다. 다시 협회로 돌아가면 그녀를 받아줄 사람이 있을까. 윤리 의식이 없는 이의 실험을 도운 죄로 그때야말로 사형대에 내몰릴 수도 있었다. 결국 우리 두사람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나 봐. 비뚤어진 천재 과학자와 싸가지 없는 돌연변이 체질의 후배. 또 서로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관계라니. 이렇게 비틀릴 수가 있는 관계가 어디겠는가.

 

“이제 끝을 볼 때가 된 것 같지.”

 

다시한번 느끼는 자신의 운명에 헛웃음을 뱉은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일을 하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고, 그가 보고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히스에게 특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 달콤한 향기과 릴리 몸에서 나는 특유의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평소 히스와 함께하는 그녀는 향수를 뿌리곤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말그대로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바쁘던 그의 사무실도 오늘은 사람의 흔적이 별로 없었다. 히스는 머그잔을 들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와. 미지근한 목소리가 릴리를 반겼다. 길고 차가운 손은 히스의 어깨를 느리게 쓸었고, 동시에 그의 큰 손이 얇은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는 릴리의 손길을 딱히 피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나, 타인과의 신체접촉을 거부당해온 그녀로서는 히스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실장..아니, 센터장님. 보니까 이번주 당신 생일이던데요.“

”응, 생일이더라.“

”뭐 없어요?”

“휴가라도 줄까.”

“아뇨, 됐어요.”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밀착되면서 입술이 부딪혔다. 스킨쉽으로 다가온 이는 릴리였지만, 얼굴을 먼저 들이댄 사람은 히스였다. 건조한 습기가 사무실에 맴돌고, 남녀의 호흡이 얽혔다. 지금 하는 행위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이용하는 관계였으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릴리에게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가운 주머니에 담긴 유리병이 뒹굴었다. 블루 히비스커스, 수면제로 쓰이는 마약. 농도가 높아 죽음에 이를 수도있는 중독성 맹독이다. 늘어지는 기분속에서도 주머니 속 병을 손에 들고 기분좋은 감각을 느꼈다. 어쩌면 이런 행위도 중독이라고 할수 있지 않나 싶었다. 그만큼 그는 놓고싶은 동시에 놓치고싶지 않았다. 히스란 릴리에게 중독과 같았다. 푸른 빛을 내고있는 병을 손안에서 힘을주어 깨트렸다. 까득 소리를 나고 열렬하던 키스는 멈췄다. 농축된 향이 사무실 밖으로 흘러나왔고, 두사람의 후각을 파고들었다. 미치도록 달디 단 향이 느껴졌다.

 

 

 

“생일축하해요.”

 

“릴리.”

 

“당신이 처음이었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유일한 사람이.”

 

“점점 시야가 흐려지네. 유감이야.”

 

“어차피 우리의 끝은 이미 알고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당신은 물어볼 자격도 없는데.“

 

”네 마음대로 해. 히비스커스는 침투가 빠르니까“

 

”난 아직도 당신을 미워해. 증오하고.“

 

 

 

릴리의 시야도 마찬가지였다. 초점이 흐려져 그녀를 보는 얼굴이 허공에 떠있는 그와 다르게 자신은 이제 막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몇 번 흔들던 히스의 눈이 감기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득 릴리는 협회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거 알아요 릴리씨?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각이 청각이래. 연인이나 소중한 사람이 죽을 때 슬퍼하고 울기보단, 고맙다고 사랑한다 말해줘요.’

 

‘난 왜 이런 말이 지금 떠오르는걸까. 당신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서일까. 당신을 내가 죽였으니, 이 말 한마디 해주는건 지옥에 갔을 때, 그나마 죄책감을 덜지 않을까.’

 

이제 그녀의 붉은 적안도 뿌옇게 흐려져갔다. 분홍빛밖에 남지 않은 눈이 서서히 잠겨가는 것을 버텼다. 거짓이지만 진실같은 사랑을 속삭이고싶었다. 허탈하게 웃는 그녀는 이미 깊은 잠에 든 연인의 귀에 속삭였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고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히스,내가 언젠가 말했죠. 우리의 끝은 좋지 않을거라고. 결국 내 손으로 끝냈어.‘

 

 

당신과 나는 지옥에 갈거야

 

 

그라면 지옥도 좋았다. 둘은 천국보단 지옥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투명한 눈물을 흘리던 릴리는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나긋히 말했다.

 

 

”조금은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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