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지

[건현] 개의 기원

건현 교류전 2회 원고

<주의사항>

*본 책은 원작 및 원작자와 무관한 2차 창작물입니다.

*설정오류 및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광 엔딩 이후 시점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개를 좋아한다.

이사카 베르게네프, 혹은 서현. 릴리쓰가 낳은 ‘욕구의 아이’, 또는 라이칸스로프의 왕자. 그에게는 부모가 준 이름만 해도 두 개였고, 그 밖에도 월야의 주민들이 붙여준 여러 별칭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월야의 주민들이 보통 그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그 많은 이름과 칭호들 대신 항상 다른 것을 사용한다.

“늑대.”

서현은 필요에 따라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진 라이칸스로프, 웨어울프였다. 평범한 짐승, 보통 늑대와 웨어울프는 호랑나비와 호랑이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른 존재였다.

어쨌든 수화하면 서현의 머리는 분명 늑대의 것에 가깝게 변한다. 그러니까 그 정도는 받아들일 만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서현을 부르는 이름은 이윽고 바뀌었다.

“늑대개.”

보통 호칭은 길어질수록 그 주인의 성질을 자세하게 묘사하거나 위엄을 더해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늑대 뒤에 개가 붙자, 늑대의 흉악하고 위엄 있는 이미지가 희석되는 대신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느낌이 더해진다.

뱀파이어에게 가족들을 잃고 헌터가 되었다는 그 남자, 한세건은 뱀파이어들과 마찬가지로 월야의 일원인 서현을 증오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를 사냥할 수 없는 분을 모욕적인 호칭을 쓰면서 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 이 자식이 진짜 봐주니까 기어오르네. 서현은 그 호칭에 적지 않은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인내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참을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다. 첫째, 그는 라이칸스로프의 왕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사소한 모욕 정도는 흘려 넘길 줄 아는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그는 남의 의도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세건이 그를 도발하는 데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야수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려고 하는 의도가 깔려 있음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그렇다면야 거꾸로 참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이 오히려 세건을 도발할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셋째, 서린이 세건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세 번째가 가장 컸다. 그게 없었다면 앞의 다른 두 이유들은 잠깐 접어둘 수도 있었다. 그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역시 서현에게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호칭이 더욱 모욕적인 것으로 발전했을 때…

“개자식.”

이젠 늑대개도 아니고 100% 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더 이상 불쾌하지가 않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왜냐하면 ‘개’에는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이미지도 있지만, 늑대는 가질 수 없는 친근하고 친밀한 느낌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현은, 놀랍게도 그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 * * * *

하지만 호칭이란 불리는 쪽만의 것이 아니라 부르는 쪽의 것이기도 하다. 부르는 쪽 역시, 서현이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를 담아서 불러야만 하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서현은 알고 싶어졌다.

그간 여러 번 함께 아웃로 뱀파이어들을 막으러 다니면서, 세건이 원래 서현에게 갖고 있던 적대감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마다 똑같은 말을 하곤 했으니.

‘너네 친하지?’

‘너희 사실 사이좋지?’

그때마다 세건과 서현은 동시에 부정하곤 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두 사람 간의 관계가 한층 친밀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르쥬나에서 두 사람을 동시에 자주 마주하는 김성희도, 한동안 앙리 유이의 하수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함께 다녔던 강의찬도, 서현의 부하로 그의 집이나 중고차 수리 공장에서 세건을 자주 마주치곤 하는 루스킨도. 그들의 관계를 보고서는 하나같은 소리를 했다.

그래, 그들은 이미 친해져 있었다. 전투 시에 손발이 척척 잘 맞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닮은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친했다.

하지만 아직도 더 가까워질 여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서현은 앞으로 그 여지도 점점 줄어드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 과정에서 서현이 어떤 감정 변화를 느낄지는 모두 건너뛰고 그저 결과만이 미래에서 고정된 채 서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먹지 않기로 결심한 서현이었으니 무의식적으로 예지 능력을 사용했을 리는 없었다. 그건 정말로 직관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 태어난 그의 직관은 예지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다만 과정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서현은 세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꺼져, 전범.’

‘네놈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

세건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주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서현의 도움을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고, 때로는 그가 먼저 도와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현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 역시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가 증오해야 할 리림, 라이칸스로프와 계속 가까워져서 마침내 일시적인 협력 관계라는 선마저 깨질 것 같아서.

다만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없었다. 세건이 그 선을 굳이 지키려 들 것인지, 언젠가는 깨지기를 바라고 있을지. 당사자인 서현과 단둘이 남았을 때에도 끝까지 속내를 숨기려 들 것인가. 그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서현은 우연을 가장해 뱀파이어 사냥을 하고 있던 세건을 만났다. 사냥이라기보다 흡혈귀들이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잠복하곤 하는 장소를 순찰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서현은 인간보다 수백 배는 예민한 감각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던 아웃로 뱀파이어를 찾아내었고 곧 놈들은 세건의 손에 간단히 도륙 당했다.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더 이상의 뱀파이어는 없겠지?’ 하며 아지트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세건의 바이크 뒤에 서현은 냉큼 올라탔다. 늘 그래왔듯 세건은 짜증을 낸다.

“뭐냐, 개자식아.”

“내 덕분에 사냥도 실컷 했는데 뭐 보답이라거나 없냐?”

“도와달라고 한 적 없다.”

세건은 차갑게 말하면서도 그대로 아지트를 향해 바이크를 몰았다. 서현이 한국에 온 초기, 그가 세건의 옆에 반 억지로 들러붙었을 때는 버리고 가기 일쑤였는데. 참으로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목적지로 가는 내내 서현은 바이크 안장 끝부분을 손으로 잡고 세건에게 닿지 않은 채로 있었다.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바이크 엔진 소리, 배기음, 귓가에 공기가 스치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가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의 세건은 이상하리만치 말이 없었다.

지금 당신도 그간의 변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나? 말없는 세건의 등을 바라보며 서현은 속으로 웃었다.

* * * * *

한세건의 아지트에 들어서자마자 서현은 코 끝에 훅 밀어닥치는 진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환기하지 않은 실내 특유의 냄새였다. 세건은 며칠 동안 이곳의 문을 잠가 두고 다른 아지트를 이용한 모양이다.

“으, 냄새.”

“갑작스레 들이닥친 주제에 불평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건은 창문을 열었다. 주위에 야산만 있는 외진 곳이라 그런지 곧 청량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온다.

…딱히 불평은 아니었는데. 서현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새로 밀려들어오는 나무와 흙의 상쾌한 냄새보다 희미해져가는 원래의 냄새가 아쉽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그 고여 있던 냄새 중 상당한 지분은 세건의 것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원래 한세건의 냄새를 좋아했던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구가 정당한 것인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이리저리 따지기보다는 바로 충족시킬 방법을 찾았다. 항상 인육에 대한 갈증을 억누르며 살고 있는 서현이었다. 그로서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사소한 욕구가 드는 것이 반갑기까지 했다.

아지트 안을 둘러보던 서현은 곧 세건의 냄새가 잔뜩 배어 있을 패브릭 소파를 찾았고 그 위에 올라갔다. 등받이 부분에 코를 파묻자 과연 천에 배어 있는 세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뭐하냐, 개코.”

“소파에서 당신 냄새가 잔뜩 나. 이거 한 번도 안 빨았지?”

그러면서 몸을 쭉 펴던 서현은, 아주 잠깐 미묘한 표정이 세건의 얼굴을 스쳐지나갔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아주 빠르게, 연기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대체 무슨 의미인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표정을 말로 묘사하라고 해도 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보라 해도 할 수 없고, 서현 자신의 얼굴로 재현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서현의 가슴 속에 아주 얕게,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몸도 마음도 재생이 빠른 서현에게는 아주 희한한 경험이었다.

“너야말로 내 소파에 개 비린내 묻히지 말고 내려가.”

세건이 고개를 홱 돌리면서 말했다. 그제야 서현은 눈치를 챘다. 그는 방금 전에도 서현에게 이끌림을 느꼈고, 그것을 애써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세건의 태도가 왜 그런지 이해하고 나자 서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그는 세건이 스스로의 마음을 계속 부정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내 피부에는 미생물의 증식을 억제하는 힘이 있어서 냄새가 거의 안 나.”

그러면서 서현은 아까부터 계속 소파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위치에 서 있는 세건을 향해 팔을 뻗었다.

“확인해볼래?”

세건의 시선이 돌아오자,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물었다. 손끝이 닿은 것도 아닌데 세건은 움찔하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다.

“필요 없어.”

뭐 쉽게 이 정도에 넘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대로라서 즐거울 정도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서현은 몸을 굴려 이번에는 팔걸이 부분을 베고 누웠다. 눈을 감고 다시 후각에 집중하자, 세건의 손이 가장 자주 닿을 부분에서 의외로 화약 냄새가 약하게 난다. 대신에 수돗물 냄새와 비누 냄새가 조금 배어 있었다. 아마도 이 소파는 샤워를 하고 나와서 잠깐 앉아 쉬는 정도인 것 같았다.

욕실에서 걸어 나와, 물기가 남아 있는 촉촉한 몸에 깨끗하게 세탁 건조된 옷을 걸치고 소파에 털썩 앉는 세건의 모습을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린 순간… 아주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져 서현은 당황했다.

이상하게도 상상이 멈추지를 않았다. 녹색으로 염색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상태에서는 검게만 보이는 머리칼, 물기어린 흰 살결, 소파에 몸을 기댄 순간 미약하게 내쉰 한숨.

그때만큼은 당신 눈 속의 귀화도 잠잠할까? 월야에 대한 것도 잠시 잊었을까? 나는 여기서 당신의 모습을 그리지만… 당신은 아닐 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는 눈을 반짝 떴다. 뜻밖에도 세건이 옆 자리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봐.”

“어떤 뻔뻔한 개자식.”

또 개라고 불렸다. 서현은 코웃음을 치다가 말했다.

“개라고 부르지만 말고 개 대접도 좀 해 주지.”

“뭐?”

아주 잠깐, 짜증이나 의심이 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의문만이 그의 얼굴을 채웠다. 얼핏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이었다.

월야에서 구를 만큼 굴러먹은 헌터 주제에… 오래 보지 못할 표정이라 생각하니 아깝다. 서현은 입맛을 다시다가 대답했다.

“먹이를 줘야 할 거 아냐.”

세건이 풉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현 본인이 스스로 개를 자처하면서 식사 대접이 아니라 ‘먹이’를 요구한 것이 꽤 즐거운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세건은 의외로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먹고 싶은 거 있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서현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되물었다.

“진짜 시켜주려고?”

“싫으면 그만 둬. 먹을 생각 없다는데 억지로 먹이는 것도 동물 학대겠지?”

세건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현은 황급히 그의 녹색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앗, 그럼 새우버거 하나랑 불고기버거 하나랑 치킨버거 두 개.”

서현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뭘 한꺼번에 네 개씩이나 시키냐고 핀잔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와 헬멧을 챙겨서 바로 걸어 나간다. 서현은 황당해져서 물었다.

“어딜 가?”

“여기로 배달을 어떻게 시켜. 내가 가서 사올 테니 집 잘 지키고 있어.”

현관을 나서는 세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현은 생각에 빠졌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아지트에 눌러앉아 있는 그를 쫓아내기는커녕 손수 햄버거를 사러 가다니.

서현을 개 취급 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아니면… 정말로, 설마 정말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들끼리 서로 휘감으며 어지럽게 엉켰다. 그의 직감이 맞다는 생각,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 카타볼릭 상태에서는 제법 무리가 가지만 텔레파시 능력을 써서 한세건의 머릿속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 그러지 말고 그냥 본인에게 말로 직접 물어보자는 생각, 아무것도,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말고 그냥 있자는 생각…

머릿속에 몰아치는 생각의 폭풍에 서현은 견디지 못하고 혼자 몸부림쳤다. 소파 팔걸이를 베고 누운 채 왼쪽으로 굴렀다가 오른쪽으로 굴렀다가, 몸을 둥글게 말고 거꾸로 굴렀다. 사실 완전히 굴러서 넘어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딱 넘어가기 직전까지만 한다는 게… 그만 무게중심이 휙 넘어가서, 방금 전 세건이 앉아 있었던 옆 자리에 코를 처박게 된 거지만.

“….”

그런데 거기에서 물씬 풍겨져 나오는 세건의 체취를 맡는 게, 역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불과 10여분 전에 세건이 남기고 간 냄새라서 그런가.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처음 소파에서 맡은 며칠 지난 냄새보다 이쪽이 좀 더 기분 좋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어차피 세건이 오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세건의 냄새를 깊이 빨아들이던 서현에게, 냄새를 맡는 것보다 조금 더 충족시키기 어렵지만… 그만큼 더 큰 만족감을 줄 욕구 한 가지가 찾아들었다.

아니, 조금 더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실패 가능성도 제법 상당하다. 체취를 맡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서현은 머릿속으로 그 욕망의 달성 난이도를 상향 조정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달성 시 예상되는 만족감의 수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뻥튀기되어버린다.

그는 괜히 주먹을 꽉 쥐며 갑자기 쿵쿵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달래었다. 안 돼, 만약 실패했다가는 이 관계는… 얼마나 마이너스가 될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될 텐데. 늘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좋은 동료 관계로 지낼 수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가라앉히려고 해도, 성공했을 때의 달콤한 보상에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어진다.

역시 텔레파시 능력으로 그의 생각을 읽어볼까? 그랬다간 카타볼릭이 더욱 악화되어 인육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스트레스가 더해질 텐데. 머릿속에 지금 그가 가진 경우의 수가 쭉 펼쳐졌다.

첫째, 텔레파시로 한세건의 생각을 읽는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고백해서 성공한다. 카타볼릭은 심해지겠지만 고백이 성공한다면야.

둘째, 텔레파시로 한세건의 생각을 읽는다. 그는 받아줄 생각이 없고, 고백하지 않는다. 수명만 소모하고 얻는 건 없다.

셋째, 그냥 고백해서 성공한다. 이게 가장 좋기는 하지. 사실 직감도 그렇고 이쪽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는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고를 수가 없다.

넷째, 그냥 고백해서 실패한다.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망가질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섯째,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 해도 세건 쪽에서 먼저 고백해 온다거나 하는 일은 정말 일어나지 않을까?

서현은 생각해보고는 괜히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행을 바라다니 정말이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느새 인간들의 좋지 않은 점까지 닮아버린 걸까? 아니면 그런 요행까지 다 끌어 모아서라도, 어떻게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세건을…

생각이 아지트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세건이 제법 묵직해 보이는 큰 비닐봉투 두 개를 든 채 돌아온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테이블 째로 서현 쪽을 향해 휙 밀었다.

“어이쿠, 감사.”

서현이 봉투를 열어보자 과연 그가 말했던 만큼의 햄버거가 들어있었다. 다른 쪽 봉투에서는 콜라와 감자튀김, 케찹 등이 잔뜩 튀어나왔다. 딱히 배고픈 건 아니었는데 맛있는 냄새를 맡았더니 식욕이 확 동한다.

그는 이제 용건은 다 끝났다는 듯 소파의 다른 쪽 끝에 앉아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세건을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서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만 두들기고 있는 옆모습이 제법 근사하다.

저쪽도 맛있어 보이긴 마찬가지지만, 일단은… 먹고 생각하자. 서현은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 간단한 욕망을 먼저 채우기로 결심했다.

* * * * *

눈 깜짝할 사이 햄버거 두 개와 콜라 두 컵을 다 먹어치우고, 다음에 먹을 것을 고르던 중이었다. 그제야 서현은 문득 세건에게도 하나 먹으라고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세건이 패스트푸드는 탄수화물과 지방 과잉이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역시 거절당하겠지? 네놈이 좋아하는 거니까 혼자 다 처먹으라고 하려나? 그렇게 예상하면서도 서현은 말을 꺼내볼 생각으로 세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봐.”

세건과 눈을 딱 마주쳤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인지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들기던 소리도 멎어있었다. 대체 그는 언제부터 서현을 보고 있었던 걸까.

“먹이 빼앗길까봐 괜히 으르렁거리는 개새끼 같아.”

서현을 향해 개새끼, 하는 목소리에 은근히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화가 나기보다도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아, 아직 햄버거 더 먹어야 하는데.

“개가 아니라 늑대거든. 그리고 세상 그 누구도 먹다가 방해받고 좋아하진 않을걸.”

그리고 서현은 다시 햄버거 한 개의 포장지를 벗겼다. 세건 이 자식이 또 뭐라고 하기 전에 빨리 먹어치워야지. 그는 입 안 가득 베어 문 햄버거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후, 허겁지겁 다시 베어 물었다.

그런데 세건이 또 낮은 소리로 웃는 것이 들렸다. 서현이 세건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는데, 그간 거의 들을 수 없었던 웃음소리였다. 한세건이, 원래 이렇게 웃는 인간이었던가…?

“안 빼앗아 먹을 테니 천천히 먹어라.”

그리고는 턱을 괴고 쳐다보면서 또 이런 소리를 한다.

“진짜 개 같다.”

갑자기 씹고 있던 햄버거에서 더 이상 아무 맛도 안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삼킬 때도 아무런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햄버거에 질리기라도 한 건가? 한국 와서 햄버거를 아무리 실컷 먹었어도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는데…

서현은 3분의 1쯤 남은 햄버거를 세건과 번갈아 바라보다가, 포장지로 싸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루스킨이나 빼또쥬가 본다면 기절할 일이겠지만 지금 서현의 옆에 있는 유일한 인물인 세건은 그저 가만히 서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르는 건 개라고 하면서 시선은 동물원 우리 안의 늑대를 저만치 떨어져 구경하는 듯하다. 서현은 오기가 생겼다.

“그럼 개 같은 짓 하나 더 해볼까?”

서현은 소파 위로 올라가서,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는 세건의 허벅지를 덥석 베고 누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서현의 속에는 그 돌발적인 행동에 세건이 질색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젠장, 내가 인간의 기분 따위를 신경 쓰다니. 처음부터 먼저 다가가지 않았으면 이럴 필요도 없을 텐데. 하지만 뒤늦은 자책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순간적으로 서현의 머리가 닿은 세건의 다리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곧 서서히 이완되면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서현도 마음을 놓고 몸을 좀 더 편안하게 둘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세건의 손가락이 서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머릿결에 꽤나 자신이 있었다. 뭐 사실 머릿결뿐만이 아니라, 신체 어느 부위든 빠지는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며 며칠씩 씻지 못하는 생활을 하던 때에도 흙먼지가 낄 뿐 머리카락 자체는 그다지 상하지 않았고, 씻어내기만 하면 즉시 탄력과 윤기가 돌아오고는 했다.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고 있는 요즈음은 그야말로 빛이 날 정도라, 서현은 외출 전 거울 앞에 섰다가 스스로 감탄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현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도, 세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개털.”

이제는 개가 아니라 늑대라고 주장하는 것도 지겹다. 서현은 먹히지도 않는 반발을 하는 대신, 그를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하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처음 베어보는 그의 허벅다리는 꽤나 베고 있기 편안했다. 그래서 서현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서현은 오랫동안 이곳저곳 전장을 떠돌아다니며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대부분은 적이었지만 호의적인 관계를 맺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관계는 항상 오래 가지 못했다. 인간 쪽에서 서현을 배신하고 총구를 겨눌 때도 많았고, 때로는 서현이 먼저 배신할 때도 있었다. 서현이 어떻게 하기 전에 다른 인간의 손에 죽어 고기조각이 되어 버릴 때도 있었다. 순전히 힘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침 곁에 있던 인간을 잡아먹은 적도 있었다. 원한 관계 같은 건 없었던 적이 더 많았다. 그저 서현의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인간의 불행이었다.

서현의 세계는 철저한 야만과 폭력의 세계였고, 그곳에서 인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현의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현은 인간을 대상으로 ‘얻었다’, ‘가졌다’ 같은 표현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과 해가 뜨면 사라져버릴 아침 이슬과 같이 서현에게 인간이란 가질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지금까지 이 월야에서 살아남은 세건은… 러시아에서 한세건은 처음 그가 보여준 호의를 걷어차고 나가 적이 되었다가, 다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이가 되었다가, 또 다시 최후의 힘까지 짜내어 맞섰었다.

그 후로 실의에 빠져 노숙자 생활을 하던 때는 세건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현은 세건과 다시 만났고, 서로를 전범이네 테러범이네 하고 비난하면서도 제법 손발이 잘 맞는 사이가 되었다.

혹시 한세건이라면… 서현이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닐까.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시간을 지나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어쩌면….

가슴 속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질간질했다. 서현은 마치 재채기를 하듯, 시답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당신 이렇게 고운 개털 봤나?”

말해놓고도 서현은 잠깐 후회했다. 그런데 뜻밖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다.

“옛날에, 내가 월야에 들어오기 전에. 그때 키웠던 개는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털이 정말 고왔지. 잘 먹이고 빗질도 열심히 해줘서 아주 비단실 같았는데.”

춥고 황량한 지역 위주로 살아온 서현이기에 그동안 많이 본 개는 시베리안 허스키, 말라뮤트, 늑대개, 오브차카 등등이었다. 놈들도 자기들이 살아가는 땅의 성격을 닮아 거칠고 고집 센 성격이 대부분이었지.

어쨌거나 그런 서현은 골든 리트리버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개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활발하지만 온순하고 인간을 매우 좋아하는 개… 도저히 서현을 보면서 골든 리트리버를 떠올릴 구석이 없는데. 그는 어이가 없어져서 겨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방금은 내 머릿결 칭찬한 건가?”

서현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그게 답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심지어 세건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그래.”

“당신 아주 애견인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러는 것도 봐주는 건가?”

“그럴지도.”

세건의 대답은 짧고 가벼워서, 아무런 감정도 성의도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서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은 어느새 귓바퀴를 매만지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체온이 낮은 그 부위와 세건의 손끝은 비슷한 온도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만지는 것을 놔두려니 얼굴에 열이 점점 오른다.

“그렇다면 개 같은 짓 중에서 이런 것도 봐줄 수 있나?”

서현은 몸을 일으켜 세건의 뺨에 냅다 입술을 부볐다. 미세하게 체온이 오르고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미쳤냐며 쳐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내버려둔다. 이상하게도.

그가 자신에게 가진 마음이 처음과는 꽤 달라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서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빨리 확인할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가슴이 마구 뛴다.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래도 돼? 이래도 괜찮아? 불안해하면서도 그에게 더 접근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서현은 입술 사이로 슬쩍 혀를 내밀어 세건의 입술 주변을 핥았다.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이 느껴지지만 서현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까지는 아직 ‘개 같은 짓’이기 때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 한세건 이 자식은 나한테 마음이 있어. 언제까지 그 마음을 개 취급으로 덮어버리려는 건데?

반쯤은 오기였다. 서현은 세건에게 덥석 입을 맞췄다. 질끈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자기 것을 겹치고 밀어붙인 것이 전부라 키스라기에도 민망한 것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어서 입술끼리 닿아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그런데 세건의 반응을 느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처음부터 하지 말 걸 그랬나? 역시 너무 성급한 짓이었을까. 후회가 든 순간 이미 수십 분 동안 붙어 있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그는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도저히 진정하지 못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눈을 뜨자,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린 채 놀란 눈으로 서현을 쳐다보는 세건이 있었다.

“너 미쳤…”

말을 채 끝맺지 못하는 그의 얼굴이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붉었다. 서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열에 들뜬 그의 입에서는 여과 없이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당신, 나보고 맨날 미친놈이라고 하는데…. 하. 사실 난 꽤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거든? 방금 행동은… 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어서 시도를 한 거지.”

그런 서현과는 달리 세건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다. 입술과 턱을 가리던 손을 내려놓고서,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예상대로인가?”

“그렇다고 생각해.”

“네놈 마음인데 그 애매한 대답은 뭐냐.”

서현으로서는 지금의 세건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서현에게 자꾸만 캐묻는 건 그 역시 서현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건이 서현을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건을 향해 전혀 엉뚱한 마음을 품어버린 서현을 비난하고 비웃어주기 위해서일까. 기뻐할 수도, 절망할 수도 없는 초조함에 서현은 결국 두 손을 뻗어 세건의 어깨에 매달려서 물었다.

“당신 내 마음이 궁금해? 알고 싶어? 어째서?”

아무리 바짝 얼굴을 들이대어 거리를 좁혀도,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 미세한 호흡, 열의 움직임, 체취의 변화 그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건만 갑자기 마비가 된 것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건의 검은 눈 속 푸른 귀화마저 잠잠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덜덜 떨리다가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 때, 세건이 한 팔로 서현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동시에 다른 팔은 목 뒤에 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서현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세건 쪽에서 먼저 서현에게 입을 맞춰왔던 것이다. 단, 이번에는 입술만이 맞닿는 것이 아니라… 입 안으로 혀가 비집고 들어오는 깊은 키스였다.

처음으로 맛보는 그의 혀는 미미하게 쓴 맛이 났지만, 계속해서 혀가 얽히고 입 안 여기저기가 건드려지면서 점점 단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키스가 농밀해질수록 진하게 느껴지는 그 달콤함에, 문득 세건의 혀를 깨물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고 다음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세건을 밀어냈다.

역시 0세대라고는 해도 라이칸스로프의 본능은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인간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그의 옆에 둔다는 건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인 걸까. 자기 자신에 대한 진한 혐오감에 서현은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건이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올려 다시 자기 눈을 바라보게 만들고는 물었다.

“깨물고 싶었어?”

“당신…?”

얼떨떨했다. 항상 남들의 심리 상태를 읽어내기만 하던 서현은 역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에 꼼짝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서현을 보고도 세건의 눈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나도 분명하게 알겠어.”

“어…?”

“네가 좋아.”

* * * * *

그날은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세건의 고백에 당황한 서현이 그대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서현은 집으로 돌아가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오느냐는 루스킨의 타박도 무시하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뱀파이어 사냥을 도와줬다는 핑계로 그의 집에 밀고 들어가, 먹을 것을 뜯어내는 것까지는 뭐 몇 번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세건이 서현을 위해 직접 바이크를 타고 나가서 햄버거를 사다주다니? 무릎을 베고 눕자 밀쳐내기는커녕 머리카락과 귀를 만져주다니? 게다가 서현이 얼굴을 핥고 입을 맞추는 것도 내버려두다가, 그 다음에는 자기 쪽에서 먼저 서현을 끌어당겨 깊게 키스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내가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그 한세건이, 진마 사냥꾼이, 뱀파이어들만이 아니라 월야 전체를 증오해 마지않는 비스트가 라이칸스로프의 왕자, 월야의 신 릴리쓰의 아들인 서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다니.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비스트 한세건이고, 상대가 서현이었기에 결코 거짓일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서 서현은 베개를 껴안고 누워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전부 없던 일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화들짝 다시 떴다.

그는 분명 한세건을 원하고 있었다. 개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서현은 세건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얻기를 원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세건에게 키스를 받고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그의 아지트에서 부리나케 뛰쳐나오고 말았던 걸까?

세건과의 키스, 그 아찔한 단맛, 혀를 깨물고 싶었던 충동.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서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한세건의 마음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너무 오랫동안 인육을 먹지 않고 식인 욕구를 억누르기만 하다 보니 급기야는 연애 감정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그와 키스하면서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세건이 안겨주는 감각을 받아들이고만 있었지만, 몸은 진실을 깨달았기에 도망친 건지도 모른다.

인간을 죽이고 먹고 싶은 욕구 대신 다른 평화롭고 건설적인 욕구들을 좇으며 문명인으로 사는 삶이란 정녕 서현에게는 불가능한 것일까. 점점 실의에 빠져들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서현의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하지?”

중얼거리며 폰을 든 서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은 한세건이었다. 역시 그의 아지트에서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걸어대는 걸 보면, 세건은 이대로 흐지부지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서현이 멍하니 폰을 쳐다보기만 하는 사이 액정에 떠 있던 [통화/거부] 버튼은 사라지고 부재중 전화 표시로 바뀌었다.

어떻게 할까? 서현은 망설였다. 그는 이미 한 번 한세건에게서 도망쳤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둘은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좋았고… 너무 시간이 지나버리기 전에 다시 세건에게 전화를 걸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한낱 인간 때문에….

그때 서현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발소리로 알았다. 루스킨이군.

서현은 잽싸게 폰을 이불 밑으로 감추었다. 비록 지금은 통화 중이 아니었지만, 액정에 [한세건-부재중 통화 1건]이 떠 있는 것을 루스킨에게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뭐냐. 자려는데 누구 마음대로 들어와.”

“내일 중요한 미팅 있는데 좀 먼 데라서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는 거 기억하고 있나 싶어서 물어보려고요.”

“아, 물론… 기억하고 있지.”

루스킨의 말에 겨우 기억해낸 것이지만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루스킨은 서현이 둘러댄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용건 다 끝냈으면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루스킨은 코를 킁킁대더니 물었다.

“잠깐, 보스. 대체 뭘 하고 왔기에 방에서 온통 비스트 냄새가….”

“사냥 좀 도와주고 아지트에서 밥 얻어먹고 왔어. 그때 묻었나봐.”

“아니, 그 자식 아지트에 들어간 것만으로 이렇게 진한 냄새가 배었다고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 설마….”

“아니거든!”

서현이 괜히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침대를 손으로 팡 쳤지만 루스킨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는 서현의 주변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살피다가, 바닥에 떨어진 폰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도 비스트한테 전화하고 있었으면서!”

서현은 루스킨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방 안을 살피다가, 이불 밑에 살짝 감춰뒀던 폰이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화면은 [한세건]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루스킨이 보는 앞에서 통화 중으로 바뀌고 말았다.

미친… 서현이 조금 전 침대를 손으로 쳤을 때 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화하기 버튼이 눌린 모양이다. 서현은 황급히 폰만 주워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루스킨에게 일갈을 남기고서.

“따라오지 마!”

그는 무작정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거리를 마구 달렸다. 자정은 훨씬 넘었고 새벽이라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밤하늘은 깜깜하고 공기는 차가웠다.

가슴이 마구 벅차올라 얼마 속도도 내지 않았지만 숨이 가빴다. 그러면서 몸은 더없이 가벼웠다. 이게 행복이라는 걸까? 서현은 혼자 웃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혼자가 되었다 싶어 폰을 들었을 때, 통화는 끊겨 있었다. 그제야 서현은 자신이 얼마나 달려왔는지를 깨달았다. 적어도 20분은 넘은 듯하다. 그 동안 뭐라고 말해주지도 않는 폰을 붙들고 있을 사람은 없지… 아마.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세건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역시 서현 같은 개자식에게 고백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다시, 다시 그는 시험에 처했다. 그는 거의 절망적인 기분으로 세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 하지만 세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금 전이 그가 준 마지막 기회였을까. 벅차오르던 기분이 그대로 역전되며 서현은 더 이상 달릴 의욕을 잃고 말았다.

이제 와서야… 이미 잃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세건의 마음을 원했던 게 맞구나, 하고.

서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인육을 먹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때 익숙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서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앞에는 세건이 서 있었다.

“도대체 왜 도망쳤지?”

“….”

서현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세건은 조금 더 걸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하지만 실제로 그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허리께에서 떨리고 있을 뿐이다.

“넌 그냥 심심해서 날 떠본 정도에 불과한가? 그럼, 그만두지.”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쫙 솟으며 마비되어 있던 것만 같은 감각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과 함께, 그동안 한세건의 안에서만 몰아치던 폭풍이 서현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서현은 세건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결코 쉽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를 어찌나 마음을 쥐어짜서 뱉어내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난… 서현 너한테 자꾸 호감이 생기는 게 싫었어. 네 행동 하나하나에서 나에 대한 호의를 찾고 있는 내가 싫었어.”

“….”

“하지만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 진짜라면…. 진짜로 네가 내게 마음이 있어서 다가오는 거라면 나도 용기를 내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놈은 아니었나? 뭐, 이게 다 널 개새끼가 아니라 사람 취급한 내 잘못이지만.”

그러면서 세건은 하, 하고 짧게 숨을 뱉어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왠지 그 숨에서 탄내가 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서현은 그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고 스스로도 더 이상 마음을 억누르고만 싶지 않았다.

딱 두 걸음이었다. 서현은 발걸음을 옮겨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괴로웠어 한세건?”

세건이 놀란 눈으로 서현을 올려다보려 했지만 그는 억지로 세건의 얼굴을 가슴팍에 묻게 했다. 이만하면 인간인 세건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짜 표정을 숨기고 가짜 얼굴로 덮어 버리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서현은 차라리 그쪽이 편했다. 이 순간 그는 그렇게 간절했다.

“그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말해줄 테니까 당신은 받기만 해.”

세건이 서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에도 타는 듯이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한세건, 나를 받아줘.”

개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렇게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늑대는, 뜻밖에도 순순히 세건에게로 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서로 마음이 통한 후에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날 후로 서현은 세건을 테러범이라고 부르던 것을 줄이고, 이름을 부르거나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전직 소년병에 반군 리더, 라이칸스로프의 왕자라는 그의 출신에 비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정중하며 약간은 낯간지럽기까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세건은 줄곧 전범이나 개자식이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서현이 아무리 짜증을 내도 소용이 없었다. 서현이 세건에게 받기만 해도 된다고 말했다는 핑계로.

게다가 호칭 문제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늘 세건은 서현과 함께 뱀파이어 사냥을 하다가 그의 가랑이 사이에 총을 마구 쏘았다. 서현이 허벅지 안쪽에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청바지가 찢어진 부분을 보여주며 마구 화를 냈어도 세건의 반응은 냉담했다.

‘어차피 너한테는 눈 한번 깜빡하면 회복되는 정도의 별 거 아닌 상처잖아.’

‘아니, 내 몸이 재생된다고 다가 아니잖아! 적들 총에 맞는 거랑 당신 총에 맞는 거랑 똑같냐?’

‘애초에 0세대 라이칸스로프씩이나 되어서 총알도 못 피하고 쩔쩔매는 네가 잘못한 거지.’

‘아, 이게 진짜! 그래서 당신은 뭐가 어쨌든 간에 전부 내 잘못이란 말이지!’

그렇게 아지트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옥신각신하다가, 서현은 세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시위라도 하듯이 그를 흘겨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사냥 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아지트로 돌아가는 내내 세건의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문을 잠그자마자 입술을 덮쳐왔을 서현이었다. 세건이 장비를 내려놓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옷을 벗어던지는 동시에 세건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하지. 세건에게 그럴 때마다 발정난 개자식이라고 욕설을 얻어먹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놈이었다.

세건이 신경 쓰지 않는 척 태연한 척, 샤워를 평소보다 더 길게 하고 나왔을 때도 서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저거 내 생각보다 많이 화가 난 모양인데.

결국 세건은 밖으로 나가 바이크를 타고 햄버거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낮은 책상 위에 햄버거를 올려놓자 서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은 변한다. 아직 뜨끈한 햄버거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가 놈의 식욕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세건은 팔짱을 끼고 그가 안달이 나기를 기다렸다.

서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안달이 난 쪽은 오히려 세건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결국 세건은 입을 먼저 열고 말았다.

“먹고 싶어 죽겠는 거 다 아니까 그만 평소처럼 처먹지 그래.”

서현은 세건을 노려보다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결국 햄버거를 집어 든다. 포장을 뜯다 말고 그는 다시 세건을 올려다보았다. 뚱한 얼굴이지만 그의 두 눈은 집요하게 서현을 살피고 있었다. 서현은 하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또 개 같다고 하려고 그랬지? 다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 서현은 햄버거를 우걱우걱 잘도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보며 세건은 자기도 모르게 잠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가, 재빨리 지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다른 화제로 무엇을 꺼낼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넌 햄버거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 그것도 패스트푸드점 햄버거만.”

세건은 그날 후 처음으로 골랐던 데이트 장소를 되새기며 물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고른 수제 버거 가게였다. 사용하는 식재료의 질은 물론이고, 식기나 인테리어 모두 흔한 패스트푸드점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렴한 가격에 맞게 저렴한 재료로 만들어진 편의점 냉장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맛있다! 하고 늘 감탄을 연발하던 서현이었다. 그러니 햄버거라는 틀 안에서 최대한 고급스러움을 추구한 수제 버거를 사주면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실제 서현의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었다. 그때 서현의 앞에서 실망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그런 한편, 지금 서현이 신나게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것을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게 이렇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맛있으니까.”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널리고 깔렸는데 왜 하필 탄수화물과 지방과 나트륨이 과다하게 들어가는 햄버거에 환장하냐는 거다.”

“맨날 냉동식품에 초코바에 단백질 쉐이크나 먹고 사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서현의 못된 버릇이 또 튀어나왔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은 안 하고 상대방한테 떠넘기는 것. 세건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서현은 어느새 남은 햄버거 조각을 마지막으로 입 안에 밀어 넣은 후 한참 우물거리고 나서 좀 더 성의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이야 어렸을 때부터 곳곳에 패스트푸드점이 널려 있어서 쉽게 사먹었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햄버거 하나 사먹으려면 엄청나게 오래 줄을 서야 했어. 그렇게 처음 사먹었던 햄버거가 너무 맛있어서… 그래서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내게는 왠지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음식처럼 느껴지더라고.”

“고작 햄버거를 가지고.”

“당신도 이런 도시가 아니라 차를 타고 가도 가도 맥도날드 하나 볼 수 없는 동네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런 소리 못할 걸.”

서현이 씩 웃었다.

“햄버거라는 게 어쩌면 고도로 문명이 집약된 거 아냐? 넓은 땅을 기계로 경작하고, 농약과 비료를 잔뜩 쓰고,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량을 증가시킨 밀을 재배하고. 수확도 기계로 하고, 기계로 껍질을 벗기고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다시 공장에서 우유나 계란, 다른 첨가제 같은 걸 넣어서 빵으로 만들지. 들어가는 채소 역시 그런 식으로 농장에서 대량 재배되었을 거고. 문명의 힘이 없었으면 절대 이 가격에 쇠고기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을 수가 없을 거야. 그렇지 않나? 난 진심으로 햄버거를 볼 때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문명의 성과에 감탄을 하고 있어.”

“그걸 아는 놈이 ICBM으로 인류 문명을 날려버리려고 했냐.”

“예전에는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그런 심정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서현은 세건의 뺨을 쿡 찔렀다.

“네가 무슨 문명인이야, 이 개자식아.”

세건은 금방 서현의 손가락을 쳐냈지만 그 손길은 연애 전처럼 매섭지 못했다. 아주 잠깐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도 미친 듯이 화끈거린다. 게다가 뜬금없이 며칠 전에 패스트푸드점에 함께 들어갔을 때, 최근에 새로 생긴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면서 즐거워하던 서현의 모습도 생각났다. 주문할 때 점원과 직접 대화할 필요가 없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메뉴를 마음껏 정할 수 있다고 하니까 신기해하며 세건 대신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지. 세건의 음료는 제로콜라로 바꾸고, 사이드를 추가하고, 할인 혜택까지 적용시켜 카드로 결제해놓고는 뿌듯해하던 서현을 그만 귀엽다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뭐, 이만하면 충분히 나도 문명인이지.”

서현이 무릎으로 기어 소파에 앉아 있는 세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냅다 턱을 세건의 무릎 위에 올리고 엎드렸다.

정말 서현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에서 세건이 만난 이사카는 저주받은 라이칸스로프의 왕자였으며 인간들을 경멸하고 문명을 파괴하려 했던 위험한 늑대였다.

그러던 이사카는 뜻밖에도 몇 년이 지난 후 이렇게 서현이라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세건에게 다가왔다. 세건은 그를 믿지 않고 힘도 빌리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그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을 먹는 괴물에게 모든 것을 잃고 복수를 결심한 자가 또 다른 괴물과 친구가 되어도 좋을까? 세건이 머뭇거리는 사이, 놀랍게도 서현은 스스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세건에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고백했다. 그 후에도 늘 이죽거리고 놀리고 하다 싸움이 붙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서현은 세건과의 새로운 관계를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가끔 세건은 그런 그가 어떻게 자신과 맺어졌을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세건이 상상하는 것은… 약간은 엉뚱하게도, 수만 년 전 야생에서 떠나와 인간의 곁에 머무르기로 한 최초의 개였다.

그 최초의 개는 현재의 늑대와도 개와도 같지는 않은 생물이지만… 대충 늑대라고 부르자. 아마도 그 생물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밤 인간이 모닥불을 쬐게 해 주지 않아도 추위를 버텨낼 수 있는 길고 억센 털과,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고 다닐 수 있는 길고 튼튼한 다리와,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곰 같은 야수를 만나도 결코 겁먹지 않는 사나운 눈, 스스로 다른 동물을 사냥해서 잡아먹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었을 테니까. 아마 모습만큼이나 습성이나 성격도 늑대와 더 흡사했겠지.

체격도 작고 무기도 전술도 발전하기 전,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수만 년 전의 인간들에게 그런 늑대들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늑대 무리에게 사냥감을 뺏기고 굶주려야 했을 때도 있었을 테고, 때로는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었을 때도 있었을 테니까.

그런 늑대가, 어떻게 길들여져 개가 되었을까. 정확한 답은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늑대들이 먼저 먹을 것을 구하러 인간의 거주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인간이 젖먹이 늑대 새끼를 데려다가 인간 아기와 같이 젖을 먹여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째서 대화도 통하지 않고 습성도 다르던 종족이 함께 살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둘이 힘을 합치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걸 인간도 늑대도 본능적으로 처음부터 알았던 것일까. 그전까지 서로에게 쌓아왔던 혐오감을 넘어설 만큼 강력한 근거가 있었던 걸까.

최초의 개도 최초로 개를 길들인 인간도 오래 전에 죽어 없어져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학자들이 연구해서 밝혀내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

과연 밝혀지기는 할까? 적어도 그의 시대에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세건은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분명, 늑대 쪽에서 인간을 훨씬 더 많이 사랑할 용기를 냈을 거라고.

가끔은 그도 그의 늑대를 위해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쩐지 세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전범. 너 그거 아냐? 늑대와는 달리 개는 탄수화물도 잘 소화시킬 수 있다는 거. 분비되는 소화 효소에 차이가 있다고. 인간의 음식을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진화했다는군.”

그렇게 말하며 세건은 서현의 입가에 묻은 햄버거빵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서현은 조금 민망한 듯 웃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뻔뻔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게 뭐?”

“햄버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볼 때마다 넌 진짜 개새끼 맞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거든.”

“당신 또 개 타령이네.”

서현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세건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무릎 위에 고개를 푹 파묻고 엎드렸다. 그런 채로,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난 개 할 테니까 넌 인간 해라. 꼭. 천년만년.”

“…뭐라고 했냐, 전범?”

“아, 몰라.”

개의 기원

이사카 베르게네프는 자신의 삶이 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 방향에 있어서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테트라 아낙스의 수장, 늙은 고든은 온갖 금지된 비술들에 손을 댄 결과 한계에 이른 자신의 육체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그의 동생 롯시니의 몸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플렉스 메디컬이 소유한 막대한 재력, 진마들과 세계 각국의 공권력에 행사할 수 있는 압력…

이사카가 아무리 릴리쓰의 축복을 듬뿍 받아 태어났어도, 고든이 수천 년에 걸쳐 지상에 건설한 왕국과 혼자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고든 역시 오래 전 릴리쓰가 낳은 자식이었다. 대체 릴리쓰는 그들 형제를 왜 낳았을까? 예지 능력이 없다고 해서 이사카와 롯시니가 고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어쩌면 롯시니는, 그녀를 증오하고 심장을 뽑아 봉인한 고든에게… 릴리쓰가 어머니로서 건네는 화해 선물이었을까?

구역질나는 가설이었다. 옛날 어머니를 죽일 때 목을 한 번에 날려서 고통을 최소로 해준 게 후회가 될 정도로.

하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왜 이사카를 낳은 것인가. 이사카의 능력에 엄청난 행운이 더해져서, 고든을 쓰러뜨리고 롯시니를 운명에서 구해낼 희박한 가능성에도 한 발 걸쳐두고 싶었던 걸까. 그걸로 릴리쓰는, 롯시니에게도 어머니로서 최소한의 자애를 베푼 것일까.

이사카는 릴리쓰를 증오하면서도 그녀가 부여한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라이칸스로프의 왕자로 태어나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 전지전능한 적과 맞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죽는 삶이라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롯시니가 고든에게 릴리쓰가 건네는 선물 같은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고든은 그의 몸을 빼앗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안에 갇히도록 되어 있었다. 이사카는 때가 될 때까지 롯시니를 감추는 연막에 불과했다.

고든을 자기 안에 잠들게 하고,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롯시니-서린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의 아이는 자신이고, 이사카는 욕구의 아이라고. 서린은 월야의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이사카는 단지 그녀가 사랑했기에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주어 탄생시킨 아이라고.

이사카는 당시에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곧 알게 되었다. 서린이 무사히 고든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이사카는 수시로 피를 토할 정도로 무리를 하고도 결국 살아남았다. 오랫동안 카타볼릭에 빠진 상태에서 인간을 잡아먹지 않을 만큼 이성을 유지할 수도 있었고, 일반 음식을 먹어서 느리게 회복할 수도 있었다. 서린이 무사히 고든을 계승하는 일을 마치고 나면 이사카는 어디로든 가서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릴리쓰가 사랑하는 장남에게 안배한 바였다.

하지만 정작 자유를 얻고 나자 이사카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동생을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지만 그건 순식간에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4살에 헤어졌던 동생은 성장한 후 다시 만났을 때, 인간들 틈에서 자라 이사카를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든에게 납치되어갔다가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를 흡수해서 또 이사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오직 롯시니를 위해서 삶의 대부분을 희생하고, 괴물로서 살아왔건만… 그는 항상 이사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존재였다.

이사카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미래였다. 동생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 다국적 기업의 총수이자 월야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 자신도 죽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이사카에게도 삶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동생을 살리기 위해 수명을 깎아가며 싸워야 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

하지만 무엇을 하려던 자유인가? 그에 대한 답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장에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가, 괴물로서 살고 싶은가 하는 것도 정할 수가 없었다.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인간들 틈에 섞일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괴물의 삶을 선뜻 택할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괴물로 살겠다고 쉽게 결정해 버린다면, 그건 이사카가 아니었다. 괴물로 태어났지만 마음만은 인간이라고 믿었던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모독이었다.

그렇게 그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자유로운 삶은 그의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그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유한한 수명을 가진 라이칸스로프였으니까.

오랫동안 그가 원했던 것을 드디어 손에 넣었음에도…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이사카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그래서 이사카가 선택한 것은 그저… 인간으로서도, 괴물로서도 살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을 먹지 않아서,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카타볼릭 상태… 느린 수동적 자살.

그리고 더 이상 타인을 만나지 않으면, 이사카는 그에게 자신을 인간이라고 말해야 할지 괴물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혼자 있으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건 괴물이라고 생각하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사카는 혼자 독주를 들이키며 정처 없이 떠도는 노숙자 생활로 도피했다.

그렇게 상처 입은 채로 치유되지 않고 썩어가기만 하는 몸을 이끌고 황야를 떠돌다가 죽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동생의 부탁을 받고, 못이기는 척 간 곳에서… 이사카-서현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문명인들의 세상에는 절대 끼어들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막상 해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자 그는 놀랍도록 잘 적응했다. 야만의 세계를 떠돌다 가끔 접촉한 문명의 파편들은, 서현이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가슴 속에 볼품없나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뻗고 상상력을 빨아들여 숨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현이 실제로 인간의 세상으로 뛰어들었을 때, 사막에 단비가 내린 직후처럼 그것들도 그의 영혼에 활짝 꽃을 피웠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현은 어쨌거나 릴리쓰의 아들이었고 라이칸스로프였고 지금까지 살기 위해 전쟁 범죄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은 자였다. 그리고 서현은 그 사실을 만날 때마다 일깨워주는 자를 만났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첫 순간, 그는 서현에게 ‘식인 괴물’, ‘전쟁 범죄자’, ‘살인마’, ‘쓰레기’라는 말을 퍼부었다.

그 순간 서현은 진심으로 상처받았다.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이어서 아팠고, 한편으로는 비난을 하는 자가 만만치 않은 괴물이자 범죄자인 한세건이어서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모욕을 당할 때마다 서린의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억지로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와 함께 행동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서현은 알게 되었다. 그 역시 금이 간 영혼의 그릇을 붙들고 인간으로 남는 길을 찾아 절망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그리고 인간과 괴물 사이에는 아주 좁은 틈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틈에는 괴물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의 곁에 머무를 수 있고 인간에게 사랑받는 생물들이 있었다. 서현은 기꺼이 그 틈으로 스스로를 구겨 넣었다.

서현은 옆 자리로 손을 뻗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두 명에게는 비좁은 침대여서, 곧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피부에 손끝이 가로막혔다. 그 닿은 곳으로부터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의 박동과 따스한 체온이 흘러들어왔다.

서현은 조금 웃었다. 아인소프 오올이 발동한 후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했다. 심지어 세건과 서현 자신들의 과거마저도 다시 씌어졌다. 세건은 진마사냥꾼이 아닌 초짜 헌터였고, 서현은 릴리쓰의 아들도 무엇도 아닌 정체불명의 라이칸스로프였다.

하지만 몸은 남아있었다. 세건의 몸은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과 수많은 경험을 축적한 사냥꾼 그대로였고, 서현의 몸은 월야에서 가장 강력하고 다재다능한 0세대 라이칸스로프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계에서는 아예 아지트를 합친 후 매일같이 방수포 위에서 서로의 맨몸을 맞대고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옆 자리 체온의 주인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불렀다.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호칭으로.

“전범.”

“나 이제 전범 아니다. 차라리 개자식이라고 불러.”

남자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요새는 개 아니다 늑대거든? 이런 소리를 안 하더라.”

서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내가 개자식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나빠하는 걸 즐기는 것 같기에. 우리 원래 그런 사이잖아? 상대가 좋아할 일은 절대 안 해주는 거.”

남자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정의를 그도 서현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런데 상대가 좋아할 일은 절대 안 해준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걸 뭐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지껄이고 있어? 당장이라도 그렇게 따지고 싶어 한다는 게 서현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실 ‘상대가 좋아할 일은 절대 안 해주는’ 쪽은 세건일 때가 더 많았다. 말로 애정 표현 좀 해라, 하는 서현의 말을 그간 얼마나 많이 무시했던가 말이다. 그래서 한세건은 양심에 찔려 먼저 따지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도 서현은 읽어낼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개자식아.”

세건이 부루퉁한 얼굴로 가슴에 닿아 있던 서현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쭉 뒤로 뺐다. 하지만 서현이 다시 양 팔을 뻗어 목 뒤로 감으며 다가오는 것은 가만히 둔다.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세건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천천히 서현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러는 동안만큼은 그의 검은 눈동자 안 귀화도 꽤 차분해진다.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며 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을 감추고, 절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쪽은 서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으로도 세건에게 좀 솔직해지라고 잔소리를 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가 역시 세건보다는 좀 더 뻔뻔하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령 그의 마음이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는 세건을 지키고 싶었다. 끊임없이 월야의 지독한 어둠에 파묻혀버릴 위기를 겪어야 할 세건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도 세건을 훨씬 더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에게 개라고 불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것보다도 개라고 불러줬으면 싶을 정도라고, 서현은 생각한다. 그걸 알면 세건이 오히려 서현을 개라고 부르지 않을지도? 그러니까 생각만 하고 말은 안하지만,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거지만.

인간과 괴물 사이의 아주 좁은 틈에 있는, 원래는 괴물이었던 생물. 확실히 인간은 될 수 없지만 너무 친근하고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괴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물. 인간은 그 생물을 ‘개’라고 부른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고, 바라는 것도 가질 수 없었던 서현이었지만 한세건의 곁에 머물기로 한 ‘개’가 된 순간 그는 공허로부터 해방되었다. 그에게는 이제 원하는 것이 있었다.

서현을 향해 웃고 손을 내밀고 개자식이라고 부르고 껴안을 수 있는 한, 세건 역시 계속해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서현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월야의 진짜 괴물들로부터 그렇게 그를 지킬 수 있기를 소망했다.

언제까지나 나는 당신의 개로, 당신은 나의 인간으로. 이 세상 모든 개의 기원(祈願)이란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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