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박스/건현] favorite flavor

리퀘박스: 서로 아이스크림 먹여주는 건현

"덥다 더워. 쪄 죽을 것 같아."

간만의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현이 연신 투덜거렸다. 세건은 애써 참았다.

이번 사냥 장소를 찾아갈 때 주변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우고 운전을 한 것도 전부 세건의 몫이었다. 서현이 한 것은 차 안에서 내내 카타볼릭 핑계로 차 안에서 내내 드르렁 코를 골며 퍼 자다가 도착지에 다 와서야 일어나 잠깐 날뛴 것뿐이다. 게다가 놈이 사냥을 마치고 난 후 후덥지근한 한국의 날씨를 못 견디겠다며 축축 늘어지는 것을 질질 끌고 오느라 세건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뭐 그건 둘째 치더라도, 세건은 차 안에 들어와 시동을 걸자마자 에어컨부터 최대치로 켰었다. 곧 차 안의 온도는 세건에게는 으슬으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맞춰졌지만 서현은 러시아 출신이다 보니 더위에 훨씬 약하겠지 생각해서 내색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 여벌로 늘 싣고 다니는 검은색 긴팔 재킷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더워 죽겠다니... 세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에어컨 지금 최대로 틀었거든? 덥다 덥다 지랄 말고 좀 닥치고 있으면 나아질 거다."

"그래도 더워... 차라리 아르쥬나 알바를 갔으면 얼음이라도 원없이 퍼먹을 텐데."

하지만 서현의 징징거림은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하여간 저 짐승새끼... 얼음이든 뭐든 입에 뭘 좀 물려놔야 하긴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한 카페를 찾던 세건의 눈에,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손님의 취향대로 마음껏 골라담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들어왔다.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햇빛은 뜨거운데 매장은 거의 텅 비어 있다. 이쪽이 더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세건은 차를 멈추고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내려."

"아 귀찮아. 그냥 당신이 적당히 사다 줘."

짐승은 괜히 등을 돌리며 일어나질 않았다. 아, 진짜 저놈의 개새끼... 내가 사람이니 참는다. 세건은 코를 좌석에 파묻고 엎드려 있는 서현을 향해 말했다.

"종류가 10가지 넘게 있는데 안 골라도 되나?"

"그렇게 많아?"

그 말에 서현은 호기심을 보이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눈이 반짝반짝 하는 걸 보니 이번엔 좀 잘 고른 것 같기도.


하지만 겨우 3분만에 세건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야만 했다. 매장 안에 준비되어 있는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을 보고 태어나서 아이스크림 처음 보는 사람마냥 신기하다는 둥, 맛이 상상도 안 간다는 둥 난리 법석을 떨기에 일부러 6가지 맛을 골라서 담을 수 있는 상품을 결제하고 서현 마음대로 고르라고 선택권까지 다 넘겨줬더니만... 어째 하나도 고르질 못한다. 매장에 혼자 있던 아르바이트생은 모처럼의 손님이 반가웠는지 그들을 굳이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고르라며 웃어보였지만 세건은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어쩌지, 오히려 너무 많으니까 괜히 또 고민이 되네."

"모르면 그냥 익숙한 거 해. 초콜릿이나 바닐라 정도."

"나도 좀 신선하고 새로운 맛을 보고 싶다고. 이름만 봐서는 도저히 맛이 상상이 안 되는 그런... 거."

거 얻어처먹는 주제에 더럽게 따지는 거 많네. 세건은 당장이라도 버럭 하고 싶다가도, 눈앞에서 기웃거리는 회색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대신에 그는 말했다.

"그럼 저건 어때."

"오, 파핑캔디...? 이거 신기해 보이는데... 근데 기껏 샀더니 맛없으면 어떡하지? 색깔도 푸르딩딩한 게 영 수상한데."

잠시 솔깃해하는 눈치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태클이다. 아, 진짜. 세건은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편의점 햄버거도 맛있어 죽겠다던 놈이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대충 아무거나 처먹어."

"당신이랑 같이 먹을 건데 그럴 수야 있나."

"난 됐다."

세건은 뒤늦은 사탕발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팔짱을 끼고 휙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뒤에서 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구석 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혼자서 아이스크림 고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두고 보자. 세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서현은 생각보다 빨리 테이블로 왔다. 고민에 빠져 있던 건 언제고 싱글싱글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다.

"테러범, 이거 좀 봐라."

왜 이렇게 신이 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세건은 서현이 골라온 아이스크림을 확인했다. 그린티, 애플민트,  키위, 그린애플, 멜론...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기준이 확 눈에 들어오고 만다. 결국 이거였냐, 망할 개새끼. 그의 미간이 확 찌푸려짐과 동시에, 서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녹색 동글동글한 것들이 모여있으니 귀엽지 않냐?"

 서현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핑크색 플라스틱 스푼으로 가차없이 그린티 아이스크림 한 웅큼을 퍼냈다.

"아, 시원하고 맛있다. 당신은 안 먹어? 먹여줄까?"

서현이 키위맛 아이스크림을 잔뜩 올린 스푼을 세건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됐다니까. 너나 처먹어."

그렇게 물어본 것은 정말로 겉치레였나 보다. 그 다음부터는 세건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례 차례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들도 한 뭉텅이씩 서현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놈의 붉은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서 넘어가는 모습을 생각하자 갑자기 목이 탔다. 세건은 괜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역시 먹고 싶잖아?"

망할 개새끼.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그새 캐치한 건가. 하지만 세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현의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 싶더니, 이내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그 사이로 말캉한 혀와 함께 달콤한 애플민트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한가득 밀려들어온다.

"이 맛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줄 알았어."

입술을 떼고 나서 서현이 웃었다. 세건은 괜히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입 안에는 아직도 아이스크림이 남기고 간 차가움이 얼얼할 만큼 남아있는데 바깥쪽 뺨 언저리는 이상하게 뜨겁다. 그 온도차가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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