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파리
로 썬캐쳐를 만들 수 있나요?
사금파리 위에서 춤추며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어.
혀 위에 올릴 수 있는 말의 무게는 총 몇 그램인가? 확실한 것은, 쿠즈미의 혀 위에 올라간 단어들의 총체는 카푸치노 위에 올려진 우유 스팀보다 가볍다. 이것은 지금 카푸치노를 만들고 있는 여성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쇼—리 상, 기다렸어?
금속성의 종이 이지럽게 울리는 오후 3시, 점심시간이 지나 한적해진 카페로 들어오는 남자의 표정은 가볍기 그지없다. 턱을 괸 채로 시선을 창밖에 내던졌던 여자는 남자가 들어오자 시선을 틀어 반가운 얼굴을 짓는다. 금방 드러나는 표정이 참, 진솔하네! 오늘도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쇼리 상. 쇼리라고 불린-말하지만, 사토 시오리가 본명이다- 그 말에 부정할까도 생각을 해보았으나 언제고 놀릴 것이 뻔해서. 곧 생각을 커피콩 대신 그라인더에 갈아버렸다.
카푸치노, 맞지?
3시의 약속, 쿠즈미는 그 가벼운 약속에 대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카페 안에선 우유 향과, 잘 볶은 커피 향이 났으니까. 햇살이 더럽게 밝은 탓이다. 눈이 아릴 정도로 밝은 도쿄의 날씨 탓이다. 말을 덧붙이지 않은 까닭은.
이미 만들어 둔 거 알았쟝~
하얀 도자기 잔에 예쁘게 올려진 우유 스팀의 거품, 그 아래에 깔린 시커먼 에스프레소 샷. 클래식이 흐르는 카페와 어울리는, 한 사람이 건네는 찻잔. 쓰레기에, 티끌에, 잡동사니는 여기 이 곳에 나 하나 뿐이다. 딜리트 버튼 하나면 사라질 존재는. 쿠즈미는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아, 이 얼마나 가벼운 죄악인가?
오늘은 어땠어?
오늘? 뭐, 별거 없었는데... 아, 오늘따라 라떼 아트가 좀 더 잘 됐다. 원래 잎사귀 모양이 잘 무너졌는데 오늘은 한 잔도 실패 안 했어.
헤에~ 그거 기뻤겠는데.
오전 10시, 카페에 진상이 왔던 것을 쿠즈미는 안다. 샷을 넣어달라고 해놓고 쓰다고 따지던 진상이 있었다. 사람의 행복은 가볍고 불행은 무거운 법인데, 남이 칼에 찔려도 자기 손가락 끝이 종이에 베인 것이 더 아픈 것이 인간인데. 이 여자는 지금 라떼 아트 얘기나 하고 있다는 현실. 혼자 프리즘에 비춘 것마냥 세상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자아내는 여자.
쿠즈미는 그런 여자에게 나도 그래, 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나도 그래, 그러니까 망가져도 괜찮아. 우리는 망가지면서 피어나, 세상이 잘못된 거야. 세상에게 총구를 돌리고 스스로를 겨냥해서 쏴. 그런 말 따위는 이 공간에 위치하지 못했다. 부유하기 마련이었다. 프리즘을 차마 깨지 못하는 것은 마련이라는 말을 덧붙여 할 수 없었으나 현실이었다.
응, 그래서 오후엔 좀 더 어려운 걸로 내볼까 싶어. 아, 이제 슬슬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시키더라고. 넌 괜찮아? 난방을 좀 더 올려야 하나.
입에서 엇나가려 하는 단어들을 취합하는 것만으로도 쿠즈미는 온갖 힘을 다 쓰고 있었다. 과거고 미래고, 가족사고 무엇이고 전부 다 쉽게도 꾸며내면서 살았는데 이 여자의 검은 눈을 볼 적이면 저렇게 맑은 검은 색을 본 적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어서. 자신의 허울 다정을 기어코 진실로 끌어내려는 여자라서. 자기 자신의 어슴푸레한 삶의 극단적 대조라서. 게워 내고 싶었다, 토해내고 싶었다.
아니이. 나는 괜찮은데, 쇼리 상. 추워?
그런 생각 따위를 해도 겉으로는 싱글싱글 웃는 낯, 시오리가 보기에는 또 어쩐지 쿠즈미가 자신을 놀릴 준비 만반이라. 안 추워, 하는 말을 내뱉으며 시오리의 미간은 다시 조금 좁혔다. 햇볕이 들어오는 창, 그리고 혀를 타고 내려오는 에스프레소 샷의 따끈함. 그리고 끝없는 평온함. 세상과 유리되어야 겨우 이렇게 될까? 쿠즈미는 이쯤 되자 춥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울 지경이다. 사람의 온기 따위가 닿지 않는 곳을 바라, 네가 나랑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는 말들이 검은 액체에 녹아 목을 타고 다시 넘어간다. 쿠즈미의 손끝은 아직도 잔에 닿아있다. 시오리는 그 알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본다. 자신을 투영하지 못해 생긴 동경, 그런 역설적 사랑. 그 사랑의 수취인이 가진 아이러니를 시오리는 알지 못한다.
실내에만 있어서 그닥.
그거 다행인걸,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 힘들 텐데.
벌써 감기 걱정이야? 다정해라.
다정, 엇나간 시선이 다시금 맞부딪힌다. 쿠즈미에게는 그 다정이라는 말이 허울 좋은 사탕의 껍질에 불과하다. 내가 네게 하는 다정이 다정인가? 물의 굴절률보다도 우리의 굴절은 심할 거야. 내가 하는 공감은 항상 저 아래에서 뻗어오는 손이니까, 내가 네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주면 너는 그 삶을 받아들일까? 쿠즈미는 말을 삼킨다. 시오리는 쿠즈미의 다정을 기억한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그 얄팍한 다정함에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늘 있는 탓이다. 나는 우리가 어린 왕자와 여우 같다고 생각해. 언제나 그 소년은 떠날 수 있고, 여우는 한자리에서 기다리면서 한 시간 반 전부터 설레여 하잖아. 그리고 그 설레임은 기대가 되고, 마침내 소년이 도착할 때 퐁하고 터지는 풍선 같아. 너는 세 시에 늘 여기에 오니까, 그런 다정이 있으니까. 시오리는 말을 삼킨다.
쇼-리 상이라 그런 거야.
쿠즈미를 쿠즈미라고 제대로 부르지 않아서. 쿠즈, 미스테타가 취합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아직 허울 좋은 교훈 속에 살고 있어서. 과거를 묻지 않아서, 어떤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현재에 살고 있어서. 그런 모든 말을 합쳐낸 말을 쿠즈미는 그 짧은 말로 대신한다. 잔을 내려다보면, 아. 이제 커피 한 잔이 끝난다. 커피잔이 다 비워지면 남자는 웃었다. 손을 흔들어내는 것에 여자는 손을 같이 흔들어주며 말을 덧붙인다. 남자는 걸음을 밖으로 옮겨낸다.
내일도 세 시, 맞지?
사금파리 위에서 아직 우리는 춤추고 있다. 누구의 발이 먼저 상처 입을지는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이어지는 클래식, 혹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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