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여름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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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일
PROFILE
NAME : 서유현
AGE : 32
BIRTH : 1988. 02. 28 (2019 시점)
RESIDENCE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담구 중앙로 444-1
TOP SECRET
YK 일가 구성원. YK 조직 회장 장남 및 당시 차기 회장 유력 후보.
국가정보원 대테러국 작전1부 특수팀 파키스탄 선견 부대 작전 中 구출.
서유현 제외 YK 일가 구성원 전원 사망 및 조직 와해.
#0 시클라멘
무릎을 꿇은 아비와 그의 품에서 축 늘어진 어미. 그녀 위에 놓인 밧줄과 다리가 부러져 기울어진 의자. 아이가 기억하는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이는 낮은 건물들 사이 홀로 우뚝 선 건물의 최상층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채광창에는 아이의 뒤 무수히 많은 사내들의 잔상이 비추었다. 자잘한 상흔으로 뒤덮여 있는 아이의 손에는 어미의 사진이 쥐여 있었다. 자신은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조국의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 군복 차림의 어미. 어미의 신상명세서가 담긴 봉투는 뜯기지도 않은 채 불에 탔다.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 낯선 감정을 알아차렸다. 가끔 어미의 품에서 봤던 한국의 삼류 드라마가 감명 깊었던 이유를, 매번 시시하고 뻔한 스토리에 열광하던 사람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언더커버와 사랑에 빠진 조직의 우두머리. 사실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나 보네. 아이의 혼잣말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 쌍의 눈동자는 이제 어엿이 성인의 티를 갖춘 아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1
제가 보호자입니다. 죄송합니다. 비스듬히 쥔 단검이 아이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한 사내가 현금다발을 꺼내 가게 주인에게 내밀고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울리는 머릿속 경고등을 무시하고 자신을 끌고 가는 낯선 사람을 밀어내지 않았다. 한 번의 만남은 두 번의 만남이 되었고 두 번의 만남은 세 번의 만남을 이끌었다. 동질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이질적인 사람. 아이는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연고와 밴드를 집는 남자를 마주했다. 남자는 계산을 하고 나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물건을 건넸다. 그는 한결같이 아이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아이의 시선을 가로챘다.
#2
정말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어요? 곧이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아이의 눈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작전 개요서 상단 저항 시 사살 가능 인물 목록에 분류되어 있던 아이의 이름과 사진을 회상했다. 실물이 낫다, 너는. 남자의 대답에 인상이 구겨진 아이는 바지 주머니 속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아이의 입술로 들어가야 했던 담배가 남자의 입술에 닿았다. 아이는 애꿎은 텅 빈 담뱃갑을 앞꿈치로 짓누르고 남자를 흘겨봤다. 남자는 아이의 시선을 외면한 채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내렸다. 당분간 흰 손수건 하나 손목에 매고 다녀. 무슨 일 생기면 네 따가리들이랑 떨어지고 함부로 총 꺼내지 말고. 남자는 담배를 슬며시 바닥에 떨어트리고 아이를 지나쳤다. 집에 돌아와 명함을 꺼내 든 아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일었다. 김해일. 대테러국 작전 1부 특수팀. 아이는 명함 속 남자의 소속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이름을 거듭 중얼거릴 뿐이었다. 해일. 김해일.
#3
아이의 앞을 막는 군복 차림의 사내들과 길을 틀려는 사내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아이는 그들을 따르다 순간 멈춰서고 걸음을 돌려 최상층으로 향했다. 아이는 자신의 금고로 향해 여러 파일과 돈다발 사이 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아이의 귓가에 생경한 걸음 소리가 타고 들어왔다. 아이는 익숙하게 문을 등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뒤에서 멈춘 여러 발걸음에 사고를 정지시켰다. 창문 뒤 자신을 둘러싼 여러 군복과 자신을 겨눈 총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천천히 총구를 관자놀이에 들이밀었다. 뒤엉켜 들리는 모국어와 익숙한 언어들. 아이는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올려두었다. 자살도 죄악이야. 쓸데없는 생각 마. 지나간 남자의 목소리가 아이의 귓가에 불현듯 타고 흘렀다. 뭣들 하는 거야. 투항했잖아. 저 표시 안 보여? 또 한 번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또렷했다. 아이는 감았던 눈을 뜨고 창호를 통해 한 사내와 눈을 마주했다. 똑같은 군복 차림. 복면으로 가려진 얼굴. 그러나 낯설지 않은 날카로운 눈동자. 아이가 급하게 몸을 틀자 총이 튕겨 나갔다. 남자의 총구는 정확히 아이의 총구를 향했고 남자와 아이의 눈이 교차했다.
#4
연화장 안 빠르게 타는 관구 속은 애석하게도 비어 있었다. 장례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남자는 장례식을 강행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사진 속 아이는 그 나이대에 맞지 않은 정장을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초점이 어긋난 동공은 사진 밖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과거에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은 남자의 앞에는 어느새 일관된 무표정을 유지하는 상관의 얼굴이 남자가 들이민 아이의 신상명세서로 비틀려 있었다. 대한민국 출생. 남자와 같은 보육원 출신.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고, 또 살아갈 한국의 평범한 청년. 남자가 아이를 구원했던 그날 밤, 남자가 가져온 두 번째 인생을 환한 웃음으로 보답했던 아이의 얼굴이 남자의 뇌리를 스쳤다.
#5
바로 옆 참관실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여인의 울음소리는 강한 폭발음과 함께 뒤집혔던 현장을 연상케 하였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쓰러진 동료와 점차 쓰러져 가는 동료들. 이중권의 부상으로 팀장 격이었던 남자는 몰려오는 반군에 기어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남자는 자신의 명백한 과실을 인정했다. 감히 자신이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오만에 사로잡힌 불찰이었다. 남자는 과거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익숙하게 사람을 도륙 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누구보다도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여전히 그 잔재 속에서 허덕였다. 여즉 아이는 그 집안의 흔적도 습관도 버리지 못했다. 남자는 아이에게 다가가 천천히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억눌린 음성이 남자의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미안하다. 한 사내의 경추를 향하던 아이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남자는 끝내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그들에게 넘겼다. 아이를 완충재로 건물을 빠져나가 도로변에서 아이의 이름을 낮게 읊조리던 남자의 말소리가 굉음에 먹혀들어 갔다. 수순대로 폭발하는 건물의 상층이 파열되고 나서야 정적이었던 남자의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6
남자는 국장이 넘긴 파일을 더듬었다. 불안한 육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현장에서 본 그들의 표식이 그 일가를 떠올리게 한 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이십 년 이상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킨 그들이 단 한 번의 균열로 산산이 무너지리라 자부하면 안 됐었다. 남자는 사진 속 고층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 년 전 무너져 내렸던 그 자리에 다시 그대로 들어선 건물은 그 조직의 막강한 힘과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끝내 아이는 입을 함구했고 조직을 배반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모두가 죽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신원을 말소시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배신자였다. 남자는 배신자의 최후를 알았다. 그들이 배신자를 낙인찍는 그 잔학무도한 수법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죽지 않은 아이의 사망신고를 단행했다. 아이의 죽음이 기정사실화 된 이후로 그 누구도 남자의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7
남자는 성전 앞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감히 고앙한다. 남자의 옷에는 금속으로 새겨진 별이 아닌 로만 칼라가 박혀 있었다. 이중권이 언급했던 열하나의 어린아이들이 남자의 심장을 후벼팠다면 그다음 언급된 아이의 이름은 남자의 심장에 무딘 칼을 꽂았다. 남자는 구 년 전 들려온 아이의 소식을 기억한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듯 더욱 단단하게 재건한 YK 조직을 또 한 번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아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들은 날, 남자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아이는 십삼 년 전처럼 최상층에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고 하였다. 남자는 아이를 보러 가는 대신 동료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그는 아이를 보러 가지 않았고, 아이는 남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8
이중권이 남자를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남자에게 얼굴을 내비쳤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던 서늘한 아이의 두 눈동자를 떠올렸다. 서 형사를 공격한 용병을 처리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검사님에게 향하는 순간 서린 기운에 뒤를 돌았을 때 마주쳤던 두 눈동자가 기억에 내리박혔다. 검은 코트에 검은 하이넥, 얼굴과 손을 가린 검은 머플러와 검은 장갑. 과거 더운 나라에서 일평생을 보냈던 아이는 유독 추위에 약했다. 여전히 앞머리는 눈을 아슬아슬하게 찌르고 있었고 이국적인 옆모습은 너무나도 낯에 익었다. 남자는 멀어지는 아이를 뒤쫓지 못했다.
#9
회고의 늪에서 빠져나온 남자는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이가 이중권의 편에 섰다면 남자를 공격했을 테지만 아이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조차 꺼내지 않았다. 검사님의 집에서 본 용병도 수녀님이 마주한 용병도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는 이중권의 편에 서지 않았지만 이중권과 함께 나타났다. 이중권은 아이의 이름을 언급했고 아이를 포섭하려고 한다. 남자는 주님의 곁으로 가는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아이의 첨예한 칼날이 자신을 향하는 꿈을 꿨을 때 두려움보다 희미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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