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미즈] 가족

네모상자 by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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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즈키한테 기억이 남아있고 모종의 이유로 게게로 몸이 살아있는 설정.

  • 쇼와 시대 생활을 잘 몰라서 날조 많습니다.

  • 치치미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 커플링 표기를 했으나 둘의 관계는 연인이 아니며 치치+미즈에 가깝습니다.



"미즈키의 기척이…."

셋이 단출하게 사는 집에 불온한 기운이 감돈다. 희미해지는 미즈키의 기척을 눈치챈 게게로가 키타로와 함께 미즈키를 찾으러 나서려는 찰나,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문밖에서 이웃집 여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의아해진 게게로가 문을 열어주자 숨을 헐떡거리던 이웃집 여자의 입에서 미즈키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취객이 몬 차에 퇴근하고 돌아오던 미즈키가 치였단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야기에 게게로도 키타로도 굳어버렸다.

믿기지 않는 말을 부정하며 미즈키의 기척을 쫓던 게게로는 친우의 생명이 끊어진 걸 느꼈다. 요괴에게 당한 거라면 품에 늘 지니고 다니라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부적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게게로가 준비한 부적에는 쇠고철덩어리를 막는 힘은 없었다. 그 강인하던 남자가, 인간이지만 든든하게 등을 맞대고 싸우던 남자가 고작 그런 걸로 죽는단 말인가.

입을 벌리고 굳어있는 게게로의 옷자락이 당겨진다. 성장하면서 감정 표현이 드물어진 키타로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게게로의 소매를 꽉 쥐고 있었다. 마치, 양아버지는 죽지 않았다는 답을 듣고 싶은 것처럼. 괜찮을 게다. 걱정 말거라. 사랑스러운 아이가 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미즈키의 생명은 이미 끝났다는 걸 게게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다나카 씨!"

입만 달싹거리고 있자 이웃집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마음은 알지만 정신 차려야 한다고 게게로를 닦달한 여자는 키타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차에 치인 미즈키 씨 상태를 보면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그러니 어서 임종이라도 지키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키타로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게게로는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키타로를 품에 안아 들고 병원을 향해 달리려 했다.

친절한 이웃집 여자가 미리 준비해둔 쇠고철덩어리에 타게 된 게게로는 훌쩍거리는 키타로를 달래주지도 못하고 허망한 얼굴로 언젠가 미즈키가 사준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미즈키를 죽게 만든 것과 비슷한 쇠고철덩어리를 타고 미즈키의 죽음을 확인하러 간다. 퍽 우스운 상황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 앞에 도착한 게게로는 잔돈도 받지 않고 병원 안으로 홀린 듯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보폭을 맞춰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아버지에게 놀란 키타로가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짧은 다리로 힘겹게 쫓았다. 그러나 게게로는 미즈키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게게로가 미즈키와 법적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키타로가 미즈키 씨는 자신의 아버지라고, 미즈키 키타로라고 밝힌 뒤에야 그들은 미즈키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게 좋다고, 사실 형체가 너무 뭉개져서 어른에게도 보여주기 좋지 않다는 말에도 부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병원 관계자들의 말처럼 미즈키의 시체 상태는 끔찍했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동네에서 치이지 않았다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게 정말 미즈키인가. 얼마나 세게 치였으면 이렇게 뭉개졌을까. 순식간에 숨이 끊어진 게 다행이었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처럼 붕 떠버린 기분에 빠져있던 게게로는 옷이 축축해지는 감각에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봤다. 감정표현이 줄어든 아들이, 키타로가 게게로의 옷에 매달린 채 엉엉 울고 있었다.

키타로가 좀 더 어리던 시절, 키타로가 울면 미즈키는 항상 하던 일을 제쳐두고 키타로에게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아주곤 했다. 그 품이 따듯해서 좋다고, 미즈키 씨가 모든 일을 제치고 자신을 우선해주는 게 좋다고, 그래서 거짓으로 운 적 있는 저는 나쁜 아이일까요? 미즈키 씨가 저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죠? 하고 미즈키가 잠든 걸 확인한 키타로가 소곤소곤 게게로의 귀에 속삭인 일이 있을 정도로 우는 키타로를 미즈키는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아이가 울고 있는데도 미즈키는 일어나지 않는다.

눈앞의 미즈키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남자는 더는 키타로를 품에 안아줄 수도, 게게로와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없다. 덜컥 눈앞에 닥친 현실에 게게로는 숨을 들이켰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시체 확인이 끝난 뒤는 일사천리였다. 미즈키 씨의 시체가 너무 망가져서 땅에 묻기는 힘들 테니 화장을 추천한다는 말과 함께 미즈키였던 고깃덩어리는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작은 유골함에 담겨 돌아왔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게게로에게 주어졌지만 게게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유령족이다. 인간 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인간 사회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은 이와코와 미즈키가 전부 해줬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게게로라는 유령족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다행히 이웃집 여자 덕에 장례식 준비는 착착 이뤄졌다.


검은색 기모노로 갈아입은 게게로와 키타로는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미즈키의 죽음을 기리는 준비를 해나갔다. 사실, 당장이라도 지옥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친우의 영혼을 거둬오고 싶었다. 그러나 육체가 없는 영혼만 데려와서 뭘 하겠는가.

더구나 미즈키는 몇 번이고 인간으로 죽고 싶다 말했다. 자신에게는 치러야 할 죗값이 있다고, 분명 지옥에 갈 테니 종종 얼굴이나 비추러 오라 했다. 게게로는 물론이오, 평소 욕심 부리지 않던 키타로가 미즈키의 팔을 잡고 떼를 써봐도 인간 사회에 너희들만 두고 가는 것은 퍽 걱정되지만 인간으로 죽는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고집부렸다. 그러니 인간의 방식으로 보내줘야 했다.

그게 그간 그들을 지탱해준 친우에게, 양아버지에게 마땅히 줘야 할 보답이었다.


장례식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미즈키의 전 직장이었던 혈액은행 사장과 직원들, 이직한 새로운 회사 동료들, 미즈키를 좋게 본 영업처 사람들, 마을 주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미즈키의 죽음을 기리고, 게게로와 키타로에게 아직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어 안타깝다는 심심한 위로를 남기고 떠났다.


장례식이 이틀째에 접어들자 손님들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새벽이 되자 완전히 손님이 끊겼다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대신 생전 미즈키와 친분이 있던 요괴들이 밤을 틈타 방문했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은 채 잠이 든 키타로에게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침소로 향했다.

그때 벌컥 사람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불온한 기척이 요동쳤다. 게게로는 한달음에 키타로의 곁으로 향했다. 불온한 인간은 잠이 든 아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극의 주인공처럼 큰소리를 냈다. 아아, 불쌍해라. 아버지인 OOO가 죽었으니 갈 곳도 없겠구나. 미즈키와 퍽 친한 사이라고 자랑하듯 미즈키의 이름을 불러가며 키타로의 감정을 무시하고 억지로 품에 안았다.


"얘, 너 우리 집 애가 되려무나."


욕심이 잔뜩 묻어난 말에 정신 차린 게게로가 눈앞의 인간들에게서 놀라 잔뜩 굳어있던 키타로를 빼내 왔다. 그제야 게게로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눈물을 쥐어짜 내던 남자는 게게로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자신은 OOO의 친척이라 밝혔다. 그 남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OOO의 친척이라 자기소개했다.


"어렸을 때부터 OOO가 저를 정말 잘 따랐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를 많이 아꼈지요. 장난기가 많은 귀여운 사촌 동생이었는걸요. 그런 동생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인간사는 정말 알 수 없군요." 

"맞아요, 그이가 얼마나 OOO 씨 이야기를 하던지.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답니다."

"형님과 그 녀석 사이가 퍽 좋긴 했죠. 동생인 제가 샘이 날 정도였습니다. 하하."


욕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는 눈물을 훔치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도 남자를 두둔하며 단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게게로는 딱딱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저런 더러운 기운을 풍기는 인간들의 입에서 미즈키의 이름이 연거푸 언급되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게게로와 키타로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어린 자식이 있다니! 그 아이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만도 하지요."

"발걸음이…?"

"예, 어찌나 걱정이 됐는지 그 아이가 제 꿈에 나오지 뭡니까. 형님 부디 제 아이를 부탁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남자의 욕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에 게게로는 상 중인 것도 잊고 크게 웃고 말았다. 미즈키가? 저런 욕심이 가득한 남자에게 키타로를? 더구나 이제 막 죽어 저승에서 심판을 받고 있을 인간이 어떻게 꿈에 나타난단 말인가. 자신은 고사하고 그토록 아끼는 키타로에게도 찾아오지 않은 미즈키가 어떻게 저런 놈에게 먼저 찾아간단 말인가. 웃기 시작한 게게로에게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인간들을 노려보며 게게로가 이를 갈았다.


"아이의 신변은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이 아이의 친부니 말일세."

"당신이…? 그러고 보니 닮았군요."

"그럼 OOO 씨는 어째서 자신의 아이도 아닌 애를 키운 거지?"


게게로의 말 한마디에 거실의 분위기가 싹 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촌 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아들을 기꺼이 거둘 것처럼 사람 좋은 척 하던 치들이 가면을 벗고 험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동시에 키타로를 보는 눈길이 매서워졌다. 도둑을 노려보는 인간들이 자주 하는 표정이었다.


"이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무슨 소린가."

"이제 OOO가 죽었으니 이 집에서 나갈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이곳은 미즈키의 집이네. 나갈 이유가 없네."

"OOO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그 아이의 부모라 했으니 OOO의 재산을 물려받을 아이도 없지요. 그 애는 OOO의 자식이 아니니 말입니다."

"…아니에요, 미즈키 씨는 저의 아버지예요!"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하긴 OOO 저것도 되바라지긴 했지."

"아이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게."


게게로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 더러운 인간들을 노려보며 기모노 소매로 키타로를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감췄다. 고작 여섯살 먹은 키타로는 이렇게 많은 인간의 악의에 노출된 적이 없다. 실제로 저들의 악의에 놀랐는지 미즈키의 영정 사진에 얼굴을 묻고 옹송그리고 있었다. 무서운 것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키타로를 동료들의 곁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저들 앞에서 요괴들을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 게게로는 키타로를 손짓으로 등 뒤로 숨게 했다.


"당신들은 OOO와 생판 남이지 않습니까. 그럼 당연히 이 집도, OOO가 남긴 재산도 우리 것이지요. 그에겐 피붙이가 없으니까요."

"미즈키는 우리들의 가족이었네."

"하, 뭐야 그 녀석 군대에서 남색이라도 깨우친 건가. 멀끔하게 생긴 놈이 결혼도 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야?"

"하긴 뭣도 없는 놈이 그 큰 은행에서 버티려면 무슨 짓이든 했겠지. 웩, 더러워라."

"미즈키를 욕보이지 마시게!"


미즈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장소에서 미즈키를 음해하다니. 더러운 욕심으로 똘똘 뭉쳤어도 미즈키의 혈육이기에 상대하려던 게게로는 더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저것들은 미즈키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기리지도 않는다. 그저 미즈키의 재산이 탐이 났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의 친척에게 속아서 얼마 없던 재산을 모두 잃었더군.' 그제야 게게로는 미즈키와 처음으로 술을 나누던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선에서 겨우 돌아온 미즈키의 희망을 꺾어놓은 것들. 소중한 친우인 미즈키를 상처입힌 것들.

요동치는 게게로의 감정과 맞물려 방출된 요기에 미즈키의 집이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했다.


"와 지진인가? 아, 큼큼.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혼란 속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끔한 복장을 한 남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어둔 문을 지나 혼란의 구덩이에 도달하더니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신의 직업을 변호사라고 밝혔다.


"미즈키 OOO 씨의 사망 소식이 늦게 전달되어 찾아뵙는 게 늦었습니다. 그분께서 생전 남겨둔 유언이 있어 전달해드리려 하는데 아들인 미즈키 키타로 씨를 뵐 수 있을까요?"

"제, 제가 키타로입니다."


게게로의 기모노를 꽉 잡고 뒤에 숨어있던 키타로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상냥한 미소를 내건 변호사는 다리를 접어 키타로와 시선을 맞췄다. 그때 게게로의 기운에 눌려있던 인간들이 키타로를 밀치며 변호사에게 달려들었다.


"키타로!"

"아이에게 무슨 짓입니까!"

"시끄러워! 유언이라고? 빨리 말해봐."

"아버지, 미즈키 씨가 유언을…, 유언을 남겼다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폭력은 좋아하지 않지만 미즈키의 평안을 기원하는 자리에서 더는 행패를 부리게 둘 수 없다. 게다가 키타로에게, 미즈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아들에게 이런 처사는 미즈키는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게게로가 움직이려던 찰나, 자신의 직업을 변호사라 밝힌 남자가 철면피들에게 화를 내며 키타로를 보호했다. 빨리 유언을 밝히라며 멱살을 잡으려 드는 인간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게게로의 품에 키타로를 안겨준 뒤,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유언장을 읽겠습니다."

"미즈키 OOO가 아들 미즈키 키타로에게 유언을 남긴다. 통장, 집 등. 내 이름 앞으로 된 모든 것을 아들인 키타로에게 상속한다. 혹 키타로가 미성년자일 때 내가 사망한 경우, 키타로에게 상속하되 대리인을 세운다. 대리인은 나의 친우이자 키타로의 친부인 다나카 ㅁㅁㅁ으로 삼는다. 그와는 사전에 상의를 마쳐두었으며 다른 이가 대리인을 자처하는 것은 불가하다. 나의 친척이 찾아와 자신의 몫을 요구하더라도 그들과는 절연한 사이이며 키타로는 내 호적에 올라가 있는 아이이므로 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이상입니다."


변호사의 말이 끝나자 욕심에 가득 찬 인간들의 분노 섞인 말이 쏟아졌다. 그러나 인간의 악의에 익숙한 듯 변호사는 손수건으로 땀을 한 번 닦고는 미즈키의 글씨로 적힌 유언장을 키타로의 손에 들려줬다. 그리고 게게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생전 미즈키 씨께서 친우분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며 모든 준비를 해두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달라 속삭였다. 미즈키가 엄선한 사람이니 믿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게게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타로 씨께 드린 유언장은 사본입니다. 찢어도 원본이 남아있으니 소용없답니다."


너스레를 떤 변호사는 흡사 지옥도로 변한 집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키타로는 미즈키의 글씨로 적힌 유언장을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도록 품에 숨겼다. 게게로는 키타로를 어중이떠중이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소중히 안아 올리고 불청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이라도 게게로에게 달려들려던 인간들은 게게로가 몸을 일으키자 움츠러들었다. 게게로가 섬찟한 분위기를 숨기지 않고 계속 노려보자 욕지거리를 몇 번 흘리더니 이윽고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인간들의 기척이 전부 사라지자 몸을 숨기고 있던 요괴 동료들이 게게로 주변으로 몰려왔다. 이래서 인간 놈들은! 미즈키 씨는 똑똑하군요. 미래를 전부 내다본 걸까? 진작에 달려 나와 괴롭히고 싶었는데! 저것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도록 뒤를 봐줄까요?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분위기에 탄 게게로는 당연하지 않은가. 미즈키는 대단한 인간이라네! 하고 친우를 자랑하며 웃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말 걸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게게로가 평소처럼 웃자 요괴들은 안도한 듯 술판을 벌였다. 미즈키는 타고난 술꾼이었으니 이런 분위기를 더 좋아할 거라는 말에 게게로도 술자리에 끼었다. 꼴꼴꼴, 술잔에 차오르는 술을 마시며 게게로는 키타로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게게로의 옷을 꽉 쥐고 버티던 키타로는 게게로의 단단하면서 따듯한 손길에 긴장을 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대로 술판을 이어가면 시끄러운 소리에 키타로가 깰지도 모른다는 스나카케바바의 말을 끝으로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해산됐다. 게게로는 기꺼이 찾아와준 동료들의 배웅을 마친 뒤 잠이 든 키타로를 품에 안아 침소로 옮겼다.



"게게로, 키타로를 내 호적에 올리려고 해."

"키타로를 인간들의 사회에 편입시킬 필요는 없네. 자네를 통해 인간 사회를 배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나중에 학교 보낼 때를 생각하면 호적에 올리는 쪽이 나아. 그게 아니더라도, 키타로와 내가 가족이라는 증거가 필요해."

"증거?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는 건 우행이라네. 그리고 나에게도 호적이란 것이 있네. 아내와 혼인신고? 라는 것을 할 때 만들었어."

"오, 있나. 역시 이와코 씨. 인간 사회에 익숙하시군. 하지만 안 돼. 네 호적에 올리는 걸로는 의미 없어."

"왜냐. 미즈키, 자네의 호적에 키타로가 올라가지 않아도 그 아이는 자네의 아들이기도 해. 그리 고집 부릴 필요 없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야."


그리 고집부리지 않아도 키타로는 자네의 아들이기도 하거늘. 툴툴거리며 텐구의 술이 담긴 술잔을 기울이던 게게로를 미즈키는 보는 사람이 외로워지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사람 같아서 싫었다.


"그럼 자네와도 혼인신고를 하면 되지 않나."

"하하,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남자끼리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어. 애초에 너와 나의 사이는 그런 관계도 아니잖아."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얽매인 종족이구나. 자네와 내가 혼인신고를 하면 자네의 호적에도 키타로가 올라갈 테니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거늘."

"무리야 무리.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이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허락을 구하려고 말한 게 아니다. 통보야. 이것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어."

"고집이 센 남자로군."


실없는 이야기 덕에 미즈키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으니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게게로는 미즈키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미즈키는 술을 마시며 게게로에게 호적에 올린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 이름은 왜 묻는가? 나에겐 소중한 친우가 붙여준 게게로라는 이름이 있으니 충분하다네."

"하핫, 소중히 여겨주는 건 기쁘지만 필요해. 이와코 씨와는 무슨 이름으로 혼인신고 했어?"

"다나카…, 뭐였더라. 다나카 ㅁㅁㅁ이었던 것 같네. 아마 그게 맞을 게야."

"자기 이름은 좀 더 소중히 여기지 그래."

"내 이름이 아닐세. 아니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아내는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네. 그저 혼인신고를 위해 만들어낸 이름일세."

"이와코 씨에게 받은 이름이니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만…."

"아내가 직접 지은 이름도 아니거니와 인간 사회에 맞추기 위해 붙인 이름이 좋을 턱이 있나. 그때의 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네. 여전히 자네 외의 인간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이름의 필요성 따윈 느낄 리 없지 않은가."

"……그렇군."


게게로는 키타로가 첫걸음마를 시작한 날, 미즈키와 텐구의 술을 마시며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미즈키는 그때부터 본인의 죽음을 대비한 거다. 언제 무슨 일로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키타로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남길 수 있도록. 저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키타로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술기운에 취한 상태로 단 한 번 입에 담은, 이름의 주인인 게게로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유언장에 남길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자네는 참으로 정이 많은 인간이잖나. 잔인하구나. 사랑스럽구나. 외롭구나…."


미즈키와 달맞이 술을 마실 때마다 애용하던 툇마루에 미즈키 전용 술잔을 내려놓은 게게로는, 미즈키의 사고 이후 처음으로 눈물 흘렸다. 빈 술잔을 채우듯 눈물이 뚝뚝 술잔으로 떨어졌다.

평소였으면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게게로 너 또 울고 있다고! 그러다가 눈알이 녹아버려도 모른다? 시원하게 웃는 목소리가 따라왔을 터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이 더는 없는 현실을 인지하라는 듯 게게로의 혼잣말은 그저 혼잣말로 끝났다.

지독하게 적막했다. 앞으로 게게로가 익숙해져야 할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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