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
내가 밉지는 않았어?
아무리 단단한 사람인들 교묘하게 목을 죄고 주무르다 보면 필히 정신이 나가게 마련이다.
지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굳이 꺼내어 들추지 않는 사실이지만, 라이너 오플린은 학창 시절부터 사람 하나 작정하고 묻어 버리는 취미가 있었다.
라이너는 자기가 쥔 권력의 힘을 무척 잘 알았고, 단순히 더럽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하나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희열을 느꼈다. 물리적인 폭력 하나 사용하지 않고 저 좋을 대로 사람을 망가뜨렸다.
남에게 관심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간 정도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오레스테는 이 미친놈이 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었다.
오레스테는 그 누가 되었든 사람이 짓밟히고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특별하게 의협심 넘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었다.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의 절망에 안타까워하는 법이다.
오레스테는 그 기묘한 죄책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남에게 참견하기 시작했다. 라이너가 몰아붙인 사람들을 찾아가 무엇이든 해 보려 했다.
가해자의 동생,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참 달갑잖은 위치였다.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와도 상관없었다.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상 오레스테는 그 사람들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었고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 참견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레스테.”
라이너는 제 형제가 기어오르는 정도에 비해 상당히 관대했다.
“더러운 것들이랑 어울리는 걸 묵인해 주었더니, 너도 그 꼴 나고 싶구나?”
정확히 말하면 오레스테에게 부모님이라는 비빌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별수 없이 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레스테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부모님을 귀히 여기는 라이너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자신을 뭘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것.
“어디 어머니 앞에서 나한테 더럽다는 소리 해 봐.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나.”
오레스테는 제 형제를 대할 때 늘 그 선 위에서 줄타기를 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자신을 가지고 역으로 협박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꽤 효과적이었다.
“순수하다 순수하다 떠받들어 주니까 다른 사람들 눈은 눈이 아니고, 입은 입이 아닌 것 같지? 그래, 내가 네 말대로 더럽다고 쳐. 그런데 넌, 더럽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역겨운 새끼야.”
라이너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너, 네가 쓸데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아버지가 그 잡종 따위한테 얼굴 붉힌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오레스테는 라이너가 입에 올린 일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라이너가 괴롭혔던 스프링필드 이야기였다. 스프링필드는 할아버지 단 한 명이 마법사가 아니었을 뿐, 마법사의 피가 꽤 짙은 선배였다. 아마 마법사의 피가 짙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을 테다.
그 스프링필드가 괴롭힘의 대상이 된 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프링필드가 혼혈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
라이너는 제 친구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교묘하게 그를 옥죄었다. 혈통으로 나뉜 동급생 간의 위계를 활용하면 쉬웠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네가 그딴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네가 걔 괴롭히지 않았으면 나도 가만히 있었어.”
“‘가만히 있었어’?”
라이너의 손이 오레스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당겼다. 제법 자란 머리카락은 형제의 손아귀에 쉽게 감겼다. 오레스테가 헛숨을 삼키기도 전에 라이너가 입매를 비틀었다.
“네가 뭔데?”
“…이거 안 놔?”
“네가 설칠수록 곤란해지는 건 아버지야. 네가 그것들 편을 든다 해서 그 더러운 것들이 너를 떠받들어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어 아버지가 그깟 잡종들 따위한테 고개를 숙이게 하다니….”
녹색 눈에 명백한 분노가 어렸다.
“수치도 모르는 한심한 새끼.”
라이너는 오레스테를 벽으로 밀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명백한 경고였다. 더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 오레스테도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 이상 나선다면 라이너의 성격상 어떻게든 제게 해코지를 할 터다. 오레스테도 더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제 참견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들쑤시는 일이 될 뿐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오레스테는 헛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그깟 빳빳한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게, 사람을 죽일 정도로 몰아붙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놈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저놈처럼 사람을 말려 죽이는 인간은 되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오레스테는 라이너와 분명히 다른 인간이지만, 부정하고 싶고 끝내 부정했음에도 그와 자신이 같은 피를 타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넌 또 왜 표정이 그 모양이야?”
렉스는 영 찜찜한 얼굴로 앉아 있는 오레스테의 어깨를 툭 쳤다. 평소였다면 금방 렉스를 돌아보았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렉스의 입매가 약간 굳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요한 말이야.”
“어. 걔 왜.”
“아까 눈이 마주쳤는데.”
렉스는 오레스테가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금방 깨달았다. 그놈의 시그너스가 무언가 일을 친 모양이군. 하여간 순혈들이란… 지독할 정도로 사람 질리게 하는 인간들뿐이다.
“다른 소리 하려고 해 봤더니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했어.”
“그런데.”
“걔를 데리고 뭘 하려는 거지?”
“머리가 달려 있으면 생각을 해. 몰라서 묻냐?”
그 순간 오레스테는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야, 야.”
렉스는 반사적으로 오레스테의 손목을 꽉 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놀라서 벌인 일이긴 했지만 손을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폭력을 회피하는 습성이 있었고 렉스 또한 그 습성을 따르는 인간이었다.
“뭐야? 안 놔?”
“너 지금 뭘 하려고 그러는데?”
“따라올 거 아니면 꺼져.”
“너 설마 네가 가서 깽판 치려고?”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는데?”
“정신 차려! 이럴 때 나서면 좆되는 거 몰라서 이래?”
“너 같은 애들 나서면 안 되는 거 아니까 중간에 끼어도 덜 좆되는 내가 가겠다고!”
그 말이 나서고 싶어도 나서지 못하는 렉스의 비틀린 심기를 정면으로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렉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래, 가서 감싸서 지켜 보겠다고? 네가 뭔데?”
그 순간 오레스테의 눈가가 크게 움찔했다. 그건 렉스가 의도하지 않은 점이었다. 평소라면 이쯤 싸움을 그만두었을 테지만, 렉스는 이미 머리에 열이 오른 상태였다.
“대답해 봐. 네가 뭔데 그러냐고.”
“…….”
“네가 걔한테 뭐라도 됐다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그런데, 네가 걔 가족이야? 죽고 못 살 것 같은 친구야? 걔는 그냥 네 동기일 뿐이잖아. 갑자기 왜 안 부리던 오지랖을 부리고 지랄이야?”
대답이 없었다. 기세가 죽었다. 오레스테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파르게 오른 호흡을 다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걘 내 친구야. 거기에 명분 따위가 꼭 있어야 해?”
“…….”
“내가 좀 다치더라도 걔만큼 다쳐? 나도 내가 순혈이라 덜하다는 거 알아. 알면, 그걸 어떻게든 끌어들여서라도 걔를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렉스는 나설 수 없고 오레스테는 나설 수 있다. 렉스는 지킬 수 없고 오레스테는 지킬 수 있다. 저 새끼는 순혈이고 나는 순혈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오래 들끓어 숨기지도 못하는 자격지심에 기름을 한 됫박 들이붓는 꼴이었다. 렉스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너 진짜 웃긴다. 또 그 좆같은 버릇 못 고치지?”
렉스는 자기가 왜 화를 내는지 잘 알면서도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걔 해코지한 애가 누굴 것 같냐? 머리만 달고 있어도 답 나오지 않아? 그런데 네가 끼어들어? 이건 그걸로 안 끝나. 네가 끼어들면, 그 미친놈이랑 너만 싸워? 아니야! 너희 집이 통째로 엮일 수도 있는 문제라니까? 그걸 알고서도 이딴 식으로 멍청하게 굴 거야?”
“…….”
“지금까지 나설 생각 따위 안 했으면서, 갑자기 뭐 잘못 처먹은 것처럼 그래? 너 순혈이고 나발이고 싫다며. 이 세계 싫다며! 네 알 바 아닌 일에 왜 자꾸 오지랖을 부려?”
그 순간 오레스테의 표정이 처음 보는 형태로 일그러졌다. 너무 몰아붙였나? 렉스는 흠칫하며 오레스테의 어깨를 놓았다. 고개가 앞으로 떨어졌다.
“알아. 아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오레스테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렉스는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나는….”
오레스테가 뒤늦게 행적을 쫓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이후였다.
오랜만에 그 시절의 꿈을 꾸었다.
분명히 도와 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이었는데….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아서 손바닥 안쪽에 고개를 파묻다가 한발 늦게 동행인의 존재를 자각했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니 자는 얼굴이 보였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는단 사실에 지레 안도하다가 괜히 손을 뻗어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부스러지는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이마를 더듬다 보면 손끝에 흉이 걸린다. 잠시 망설이다가 흉터를 타고 이마 위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자는 사람을 두고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데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들켜도 화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을 옆에 두고 눈을 붙인다는 것은 사실상 이 행위를 용인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고… 뭐, 용납할 수 없으면 뺨이라도 치겠지 싶었다.
“요한, 일어나.”
나는 나무껍질을 너무 오래 베고 누웠더니 등이 결려서 다시 눈을 붙이지도 못하겠는데, 동행인은 사과나무가 익숙하다고 잘도 잤다.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문 사과의 향이 번졌다. 잠은 그대로 달아났다.
기왕 잠에서 깨 버린 것,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꿈을 머리에서 떨어뜨려 버리려고 애썼다. …몇 차례나 반복했는데도 도저히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웠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미워할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평생 헤아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 심중을 막연히 짐작하면서도 그 감정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너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면서도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애당초 남의 감정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희망 사항 따위를 가진들 무슨 소용이지.
“…오래도 자네.”
나는 머리를 도로 나무에 기댄 채 옆얼굴을 보았다. 할 일도 없었고,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은 있었다. 언제까지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여행에 동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목격하지 못했다. 그저 귀끝까지 닿는 심장 소리에 매몰된 채로, 요한 웨이페러라는 인간이 외롭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제멋대로 목숨을 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건 명백히 나를 위한 행위였다. 어떻게든 뿌리 깊은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동행하겠다는 말을 핑계로 댄 채 나 자신을 덜컥 걸어버리고 감당하라 종용하는 것.
거기에 악의는 없다. 분명한 선의였지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건 똑같다. 사람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라이너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아기적이고 저열한 짓이다. 스스로도 그 공통점을 자각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네가 그걸 모를까?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순례자 요한이 아닌 인간 요한 웨이페러가 필요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나 자신의 저열함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 너는 대체 왜 나를 매몰차게 내치지 못하는 걸까?
이제는 그걸 직면할 때가 왔다고 여겼다. 지금까지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굴었으니, 이제는 너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할 때였다.
이미 제 머릿속은 자신이 구하지 못한 웬 순례자에 대한 생각으로 난장판이었기 때문에, 발 뺄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굳게 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너와 나 사이에는 풀어야 할 매듭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자진해서 떠나면 멋대로 구는 셈이 될 테니, 가능하면 네가 밀어내 주기를 바랐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밉지는 않았어? 그때 만약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면, 네가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그날의 너를 구할 기회가 온다면, 망설임 따위는 없을 거다. 그날 이마가 찢어지는 사람이 내가 된다고 해도 달가웠으리라.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나는….’
‘…….’
‘요한을 구하고 싶어.’
이제 와서 너를 구하고 싶다고 하면 늦었을까?
나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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