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앉아있었다. 한밤중이었다. 몹시 어두웠고. 몸부림치듯이 일어난 자세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제 다리에 휘감긴 이불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악몽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이 예상할 수 있듯이, 그래. 엘은 악몽을 꿨다. 엘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머리를 맞았고, 그 자리에서 손쓸 틈도 없이 죽었다. 악몽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엘은 그 사실이 못내 끔찍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죽음을 두려워함은 과거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쳤군…’
무엇이 그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들었는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엘은 그 이름의 주인이 태평하게 자고 있을 방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날 엘은 다시 잠들지 않았다.
엘은 결국 잠을 설쳤다. 포지션 특성상 몇 날 밤을 새우는 것쯤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고민이 깊었던 탓인지 얼굴이 어두웠다. 오늘은 예정된 의뢰가 없는지라 느지막이 거실로 나온 엘은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평소에 보지도 않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당연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허공 어느 지점을 응시할 뿐이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나온 라텔은 퀭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엘을 보았다. 원체 창백한 안색이 오늘은 파랗게 비쳐 보일 지경이다. 산 사람임에도 뺨에 손을 대면 냉기가 흘러나올 것 같다. 라텔은 자연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이 왜 그래? 밤샜냐?”
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라텔을 향해 중지 손가락을 곧게 펴 보여주었다. 엘은 고개는커녕 눈동자도 굴리지 않은 채였다. 라텔의 얼굴에 `나 심기 불편하오.`라는 불만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저건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라텔은 투덜거리며 마저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저렇게 완고하게 나온다면 별수를 써도 소용없으리란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가만 지켜보기로 했을 따름이다. 라텔은 흐린 시선으로 엘을 흘끔 훑다가 이내 거두어들였다.
라텔이 벽 뒤로 모습을 감춘 후에도 손을 뻣뻣이 들어 올리고 있던 엘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마구 비볐다. 머리만 대면 잘 것처럼 피곤한 주제에 막상 누우면 온갖 잡념이 잠들지 못하게 할 것이 뻔하다. 그나마 라텔이 시야에서 벗어나니 시끄럽던 속이 가라앉은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현란한 색의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티비 속 인물조차도 라텔이 한 번 얼쩡거리는 것만 못했다. 평소보다 크게 튼 볼륨도, 아나운서만치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도 정신을 반쯤 뺀 엘의 주의를 끌 수 없었다.
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볼 수 있을 리 만무함에도, 꿈이기에 선명했던 장면이 소리 없는 흑백영화처럼 어두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총알은 매우 느린 속도로 날아오고 있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으며 날개를 퍼드덕대고 술에 취해 길을 잘못 든 부랑자가 살벌하게 울리는 고함에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골목길 위의 하늘. 모든 것이 제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 총알 하나만이 여유를 가졌다.
엘은 평소처럼 라텔을 노리는 적을 스코프에 담고 있다. 조준점 끝의 대상이 1초에 한 번씩 적에서 아군으로, 아군에서 적으로 뒤바뀌는 난전 속에서도 엘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라텔의 등을 칼로 내리찍으려던 남자가 피를 쏟으며 허물어지고, 엘의 솜씨임을 안 라텔이 고개를 든다. 엘은 그런 라텔에게 ‘뭘 봐’라며 한마디 쏘아붙여 주기 위해 입을 연다. 그리고, 느릿느릿 날아오던 총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속도를 가했다. 이제 상황은 정반대였다. 마른 입술을 떼고, 턱을 벌리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숨과 함께 새어 나오는 동안 총알은 그 찰나마저 용납지 않고 순식간에 엘의 뒤통수에 틀어박힌다.
필름을 되감던 엘은 문득 의문을 가진다. 뒷머리의 격통과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자신이 죽는 그 순간에 라텔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무언가를 봤다는 감각만이 남아있을 뿐, 떠오르는 것은 없다. 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꿈이란 본래 그렇게도 희끄무레하다는 걸 알아도 짜증스럽기 그지없다.
“나갔다 온다.”
“……!”
엘은 깜짝 놀란 눈을 번쩍 떴다. 천둥같이 고막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라고 생각했지만 재빠르게 돌이켜보면 거의 혼잣말과 다름없는 음성이다. 깔끔한 목티를 입고 겉옷을 팔에 걸친 채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나서는 라텔은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엘을 보지 못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엘은 폐 속에 갇혀 굳었던 호흡을 길게 내쉬며 소파에 미끄러져 누웠다. 예민한 신경 줄이 끊어질 듯 간당거렸다. 미쳐버리기라도 할 요량인가. 어디 아픈 건가? 엘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뭉개진 언어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엘은 이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까만 시야가 더욱더 까맣게 물든다. 귀가 먹먹하고 몸이 무겁다. 모든 게 귀찮다. 잠들었는지, 깨어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숨은 쉬고 있는지. 티비의 소음을 듣고 있는지. 저 어둠 너머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런 고요한 꿈이라면 깨어날 의지 없이.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저 높고 자유로운 세상으로부터 유리되듯 점점.
툭,
커다란 손이 팔을 붙들어 들어 올릴 때 엘은 끌어올려 진다.
“허억…!”
엘은 갈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본능대로 행동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상대의 멱살을 틀어쥔 후, 몸을 굴려 일으킴과 동시에 다리를 걸어 그를 바닥에 내쳤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그것은 곧 괴리감의 파도가 되어 밀려든다. 엘은 그 위에 올라타 단단한 몸을 짓누른 후에야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손에 총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냐.”
라텔이 눈살을 찌푸리며 엘을 올려다보았다. 제정신도 아닌 와중에 달려들기에 요령 좋게 당해줬지만, 엘의 동작이 워낙 거칠었던 탓에 탁자에 부딪힐 뻔한 걸 감싸느라 오랜만에 팔이 부러질 뻔했다. 천 아래로 욱신거리며 부어오르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엘은 다른 데를 둘러볼 새 없이 라텔의 눈을 가만 내려다보느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라텔은 장난으로라도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거친 숨을 식식 내쉬는 동안에도 눈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풀 기색도 안보이고 비켜설 생각도 없어 보인다. 라텔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만히 고민하다가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뭘 원하는 거야?”
뭘 원해? 질문을 듣는 순간 중구난방 흩어져 있던 의문의 파편이 모여들었다. 하나의 완전한 형태가 되기 전에, 엘은 말한다.
“너.”
죽음의 고통은 두렵지 않다. 두려움은 미지로부터 오는 것. 그렇기에 엘은 자신이 죽은 이후의 라텔이 미지의 것이 될 미래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텔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죽은 사람은 그 무엇도 볼 수 없으니. 보았던 것 같다는 의뭉스러운 감각은 스스로를 속인 치졸한 결과였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엘은 라텔이 제것이 아니라는 가정조차도 견딜 수 없었다.
“……하.”
단 한마디를 뱉은 후 다시 침묵하는 엘을 본 라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텔의 얼굴에 곤란함이 서렸다. 집요하게 쳐다보는 엘의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빠르게 생각을 마친 라텔은 손을 들어 엘의 이마를 덮었다.
엘은 무심코 흠칫, 몸을 떨었다. 라텔의 손이 지나치게 차갑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좀 자라. 아픈 애새끼를 데리고 내가 뭘 해.”
그제야 엘의 시선이 돌아간다. 넘어지느라 날아갔는지 한구석에 처박힌 하얀 봉투가 보인다. 그 안에서 처량하게 굴러나온 것은 약병과 일회용 주사기였다. 엘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봉투를 응시하다가 급작스레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라텔은 힘없이 무너지는 엘의 몸을 당연하게 받아들었다.
“진짜 애냐?”
평소라면 누가 애냐며 길길이 날뛰었을 엘은 말없이 라텔을 끌어안았다. 라텔의 걱정스러운 타박도 이내 멀어진다. 엘은 수마가 잠식해오는 몽롱한 머리를 애써 깨우려 하지 않았다. 다만 바란다.
죽고 싶지 않아. 너를 내게서 빼앗지 마.
라텔이 엘 없이 출근하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앞에 나서서 물어볼 용기를 가진 조직원은 없었다. 수군거리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주고받는 정장 무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라텔은 자신이 유일하게 보고할 의무가 있는 보스에게만 잠시 들렀을 뿐이다.
라텔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서류를 집어 들어 들여다보는 것도 잠시, 머리를 벅벅 긁어 헤치고는 일어나 옥상으로 향했다. 슬슬 훈기를 머금는 바람이 분다. 라텔은 결국 피멍이 들고 만 팔을 만지작대다가 안주머니 속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냈다.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며 집에 누워있을 엘을 떠올린다.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눕혀지면서도 제 옷자락을 잡아 늘어지던 엘의 손과 그 얼굴을.
그러니 애라고 놀리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데. 라텔은 담배 끝을 물어 가볍게 빨아들이고는 헛웃음과 함께 연기를 내뿜었다. 해열제를 놓기 위해 얼마나 씨름을 해야 했는지. 봄에 앓는 열병치고는 참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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