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랬던 이야기
Prologue.
차가 폭발했다.
이 한 문장으로는 도통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액정에 금이 간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급했고, 워낙 두서가 없어서 엘은 결국 벌컥 짜증을 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언더보스가 휘말리신 것 같습니다.]
순간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 폭발이 차가 아닌 제 머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듯 찰나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며칠 동안 떠올리지 못한 기억은 결국 얼마쯤이나 지나서야 스치듯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맞다. 그랬지. 결국 올 게 왔는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1.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도로를 달리던 엘은 멈추기도 전에 새까만 하늘로 번지는 붉은 빛과 회색 연기를 보고 있었다. 오는 내내 품에 꽂힌 스마트폰은 고요했다. 처음 전화를 받고 다른 일 없으면 쓸데없이 연락하지 말라는 호통을 던졌더니 그 이후로 화면이 다시 켜지는 일은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던가. 까맣기만 한 액정을 보며 이건 희소식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인간은 또 누구고.
“엘. 이쪽.”
바이크에서 내린 엘을 맞이한 건 그의 몇 안 되는 선배였다. 그는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익숙하게 엘을 불렀다.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건 아니고 책임자로 불려왔다는 모양이다. 나이만 먹으면 어른으로 취급되는 보통 인간과 달리, 엘에게 선배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그 하나만으로 존경받아 마땅했으니 나름 납득할만한 인선이었다. 그야 언더보스가 엮인 사건이었으니 아무나 파견할 수는 없었을 테다.
“상황은 알고 있나?”
“대충 들었습니다.”
시작은 시답잖게 걸려 온 시비였다. 간 보듯 성의 없는 총질 몇 번과 욕설 몇 마디 주고받으면 금세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나 안일했던 것 같다고 선배는 짧게 혀를 찼다. 엘은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설마 상대편에 오메르타를 맹세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가 있었고, 인사나 다름없는 총격에 화들짝 놀라 덜 여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쏘아진 총알 몇 발이 엔진에 틀어박혀 불길이 일고 기어코 폭발을 일으켰다는 대목에서 엘은 박수를 칠 뻔했다. 아주 훌륭해. 징그러운 스나이퍼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전에 내 손에 뒤지지만 않는다면. 빌어먹을 새끼.
하필 화려하게 터져나간 차가 칸티카의 언더보스를 모시려던 차고, 바짝 붙어있던 다른 차량에 불이 옮겨붙어 폭발이 잇따르고, 그를 수행하던 조직원들에게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건 우습기까지 한 우연일 뿐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걸 우연으로 치부할지 필연으로 만들어버릴지 결정하는 건 좀 더 위쪽의 일이긴 했다.
“시체는요.”
“일단 하나. 차 밖에 있던 거. 안쪽은 아직 못 봤어.”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무엇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망가졌거나, 엘이 신경 쓸만한 인물이 아니거나. 선배의 성격상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100퍼센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엘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상자 안에 든 고양이는 문을 열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만약 옆에서 누군가가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의무는 없었다. 고작 말 한 마디와 글 몇 자로 전해지는 것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걱정했는데.”
“뭐가요?”
“너 말이야. 이성을 잃고 뛰쳐나갈 줄 알았어.”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헛웃음을 끝으로 두 사람은 조용해졌다. 엘은 멀리 일렁이는 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헐렁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버릇처럼 쥐어든 건 반쯤 빈 담뱃갑이다. 한 개비 꺼내 입술 끝에 물곤 긴 숨을 토했다.
끔찍한 재앙 속에 소중한 이가 던져지고, 절규하며 달려 나가려는 등장인물을 다른 이가 막아선다. 영화에서나 만화에서나 어디서든 자주 나오는 장면이었다. 흔히 클리셰라고 말하는 것. 잘 팔리니까 클리셰가 되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엘이 그런 장면에 공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효율적이잖아. 보통 장면 속 재앙은 몹시 절망적이다. 다수의 인물이 죽을지도 몰라, 가 아니라 죽었을 거야, 라고 판단을 내릴 만큼. 그런 곳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고집이자 만용이었다.
그래서 엘은 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았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아니라 스무명쯤 되는 인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면 조금 생각은 해봤겠지만, 이것도 가정일 뿐이다. 총을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멀리서 위협을 제거해나가는 쪽이 더 안전하고 익숙한 일이었다. 날 구하러 온 거야? 아니, 나도 갇혔어. 이따위 개그씬을 찍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랑은 효율을 따지지 않는다던데, 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본질이 그러한 탓이다.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했대도 그 영혼은 여전히 예전의 그것이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위험한 건 무엇이 얽혀 있든 손대기 전부터 고민하고. 경험이 있기에 대다수 타인의 난관은 계단 한 칸 정도의 귀찮음쯤으로 여기니, 위험의 역치가 남들보다 월등히 높았으나 몸을 사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껏 희생한 것들의 대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결국 효율의 문제다. 그럼 이건 사랑이 아닌가?
2.
“찾았습니다!”
어느 전조도 없이 들려온 날카로운 외침이 묵직한 분위기를 갈랐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현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주어를 붙여, 주어를. 이것들이 죄다 선배를 닮아가나. 차마 내뱉지는 못할 투정을 한 번 흘리고 눈을 껌뻑였다. 누군가가 휘청 걸어 나오고 있었다. 빛을 등진 실루엣이 조금 이상했는지라, 자세히 보고 나서야 어깨에 다른 사람 하나를 둘러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기 중이던 인원 모두가 달려들어 물을 뿌리는 통에 주변은 금세 물바다가 됐다. 흠뻑 젖은 이가 말했다. 상자가 열린다.
“난 됐고 얘 먼저 데려가.”
툭, 엘의 입술 끝에 물려 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벌어진 틈으로 얕은 숨이 샜다. 뿌리박힌 듯 머무르던 걸음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코 빠르지는 않은 속도였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던 형체가 선과 색을 되찾았다. 늘 입고 다니던 비싼 코트는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보이질 않았다. 단정히 조이고 있었을 넥타이도 대충 풀어헤쳐져 있다. 하얀 셔츠가 그슬렸지만 심하게 불탄 흔적은 없었고, 어깨에 맸던 사람을 내리니 휘청이던 걸음도 제대로 돌아왔다. 엘이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더 확신했다.
그가 그임을 알아본 데에는 그런 평범하고도 당연한 이유들이 붙었다. 그의 키가 비교적 컸기 때문에. 사람들 한가운데에 서서 집중되어 있으니까. 조금 더 오래, 많이 들은 익숙한 목소리라서. 그저 그런 정도.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너만 보였다느니, 그런 로맨틱한 거짓말 따위는 때려죽여도 안 나온다. 그렇다면 이건 사랑이 아닌가?
“내가 볼 테니까 다 꺼져. 당장 죽을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옆에 의사 하나는 대기시켜 놔. 그런 엘의 말에 대부분이 자리를 비켰지만, 그럴 수 있겠냐며 버티는 사람도 몇 남았다. 하지만 라텔의 손짓 몇 번에 금세 한 풀 꺾여서는 엘에게 구급상자 하나를 쥐여주곤 떠났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계속 뭉개고 있지도 못했을 텐데 왜 괜히 고집을 부리는 건지. 역시 사람이 권력이 있어야 한다며 피식거리는 라텔을 본 엘이 그를 자리에 앉혔다. 쫄딱 젖은 채 작은 간이의자에 앉느라 자세가 구부정해지기까지 하니 모양새가 제법 웃겼다.
도르륵 굴러가는 붉은 눈에는 쉴 새 없이 정보가 담긴다. 기침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연기를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다. 안색도 나쁘지 않고. 자세히 보니 옷이 얼룩덜룩하지만 아마 다른 사람이 피일 것이다. 저 정도면 어딘가 찢겼어야 하는데, 특별히 불편한 기색은 없으니까. 경계해야 할 것이라면 뇌진탕이나 장기 손상 정도일까. 그러나 그만한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에 제 발로 들것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용케 도망쳤나 보네.”
사고 끝에 무미건조한 결론이 떨어졌다. 따지고 보면 나름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재회치고는 퍽 무미건조한 첫마디였다. 라텔은 그에 대해 말꼬리를 잡지도, 부정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지.”
들을 거야? 라텔이 물었다. 엘은 거절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같이 울고 웃고 놀라워하며 공감할 것도 아니니 더더욱. 나중에 술 몇 잔 하며 나눌 소재거리가 떨어졌을 때나 들으면 좀 재미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걱정했냐?”
“어느 쪽으로?”
“걱정에도 종류가 있어?”
“당연하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였다. 그렇다고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걱정한 건 라텔이 죽은 이후였다. 죽음의 이유나 과정은 오히려 나중의 이야기다. 아까도 생각했듯이. 지겹도록 생각했듯이. 또 다시 효율성이 발목을 잡는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나 곱씹을 시간만큼은 무한히 주어지니까. 만일이라는 일어났을 때 엘이 직면해야 할 건 그 만약에서 파생된 부가적인 일들이었다.
책임지는 것이 귀찮아 여태껏 말단에 머무는 그라도 조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남들보다 많았다. 수고스러운 뒤처리라면 차라리 귀여울 텐데, 전쟁이라도 나면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제 역할이고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으므로. 무섭다고 도망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서워할 인물도 아니었으니 늘 그랬듯 투덜거리면서도 라이플백을 짊어지고 나설 것이다.
그렇다면 연인으로서는 어떨까.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없어서. 생각할 수록 할 수 있는 게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장례식에 참여한다면 같은 조직원으로서. 연인으로서는 아닐 것이다. 연인이라고 해봐야 말뿐으로, 공적으로 발표하거나 소속된 것도 아니며 서로를 독점을 과시하는 증표를 갖지도 않았으니까. 동거한대도 어영부영 얹혀사는 모양새라 나서서 집을 정리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완벽히 자신의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총이나 옷가지 정도를 제외하면 온통 그의 것이니, 가방 한두 개 챙겨서 슬그머니 몸을 빼면 붙잡을 도리도 없을 테다.
서럽지는 않았다. 상대도 처지는 비슷할 것이다. 남겨진 많은 것들이 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포기해야 할 엘과 달리,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제 것이 아니어도 가질 수 있을 권력이 있는 그는 그냥 없어서 못 가질 거란 점이 달랐지만. 시체가 불타고 나면 제대로 관리해본 적 없는 통장이나 좀 남을까. 집 안 곳곳을 뒤져보아도 찾을 수 있는 건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애정이 어린 쪽지 따위가 아니라 다람쥐 도토리마냥 숨겨둔 무기다. 서러워하기는커녕 이 자식은 뭐 하는 자식이냐며 짜증 낼 얼굴이 선했다. 하여간 이쪽이나 저쪽이나 웃기긴 매한가지였다.
그래. 그랬다. 엘은 라텔의 죽음만을 가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후를. 죽지 않았기를 기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신은 그들을 살리고 싶어 하기보단 죽이고 싶어 할 테니까. 우리의 죽음은 갑작스러울 것이고, 그렇다면 그게 지금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서럽지는 않았다. 금방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기적은 믿지 않는다. 어쩌면 체념했다. 그래서, 이건 사랑이 아닌가?
3.
“그럼 이건 뭔데.”
라텔이 눈썹을 찡글거리며 물었다. 엘은 그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시치미 떼듯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뺨을 더듬거리던 손을 올려 이마를 짚고 머리를 시원하게 넘겨 올렸다. 젖어서 차가워졌던 피부에 다시 열감이 오르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멀쩡해 보여도 화상을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다. 그래도 손에 만져지는 건 분명히 살아있었다.
“상자 속 고양이 꺼내기.”
“뭐?”
“어디 안 지져서 다행이네. 얼굴 말고 뜯어먹을 것도 별로 없는 늙은인데.”
“지졌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글쎄. 생각 안 해봤어.”
그건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럼 이제부터라도 상상해볼까. 만약 그가 심하게 다쳤다면의 가정이다. 좀 더 심한 화상이었다면. 아예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녹아내렸다면. 팔다리가 뜯겨나갔거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실려 나오기라도 했다면.
“흠.”
라텔의 얼굴을 치덕거리다가 이제는 턱을 붙잡고 생각에 빠져있던 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문제가 되나? 모든 게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경우든지 병원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른 점이라고는 입원 기간 정도였다. 하루 내지 몇 년. 그 정도야 뭐. 결국 결과가 중요한 거지.
역시 쓸데없는 거였군. 그런 감상이 스치자 엘의 얼굴이 조금 느슨해졌다. 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라텔은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해가는 엘의 표정을 보며 풀리지 않을 의문만 늘 뿐이었다. 물어봐봤자 제대로 대답이나 할까? 그럴 리 없었다.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린 라텔은 궁금증을 입에 담는 대신 짓궂은 목소리로 다른 걸 꺼낸다.
“이게 걱정한 게 아니라고? 아주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명백히 놀리는 듯한 어조에 엘은 태연하게도 가운뎃손가락을 뻣뻣하게 펴 눈앞에 흔들어주었다. 몇 년 전이면 뚫렸다고 다 주둥이냐며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어디서 개가 짖나 귀를 후비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엘이 말했다.
“존나 싫어.”
“그러셔.”
라텔은 뇌를 거칠 필요도 없이 대꾸하며 슬렁슬렁 눈을 굴렸다. 어차피 예상했던 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니. 사실 따져볼 필요도 없이 본래 그들은 서로 맞지 않은 퍼즐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하나라도 삐끗했다면 지금쯤 서로의 손에 둘 중 하나는 죽어 나갔을 것이다. 한 70퍼센트의 확률로 엘이, 30퍼센트의 확률로 라텔이. 엘이 듣는다면 왜 그딴 확률이 튀어나왔냐면서 욕했겠지만, 라텔의 계산으로는 그랬다. 총이 모두에게 공평할지언정 일단 지위라는 게 있잖냐.
이런 뒷골목이 아니면 마주칠 일도 없었을 애송이. 보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도 안 봤을 말단 조직원. 자신에게 대드는 깡이 없었다면 기억조차 못했을 미친놈. 그러고 보면 이런 놈을 대체 왜,
“근데 사랑은 하는 것 같아.”
“……?”
라텔의 생각이 뚝 끊겨 나갔다. 배회하던 시선이 엘을 향한다. 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내뱉지 않았을 그런 발언을 하고도. 그래서 라텔은 의심했다. 혹시 얘도 그때의 폭발 장소에 있었던 건 아닐까. 터져나간 차의 파편이 좋지 않은 곳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앞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사실 뒤통수에 커다란 땜빵을 달고 있다면?
“미쳤…”
“지랄 마. 안 미쳤어.”
그래, 이 성질머리지. 라텔은 내심 조금 안도했다. 그 대신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이 새끼가 왜 이러지.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너무도 뻔해서 엘은 웃음도 안 나왔다. 그럴 만 하다고 이해는 하지만. 딱히 부끄러워하거나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지극히 당연하고 새삼스러운,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그러니까,
4.
지난 몇 시간은 온통 이상한 일 뿐이었다. 처음에 받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곧장 집을 나섰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엘이 소식을 전해 받은 건 단지 그가 주요 정보를 습득할 자격이 있고, 라텔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와달라고는 안 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은 엘 자신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엘은 이 현장에 오기를 택했다.
몇 년을 쓴 건지 모를 스마트폰과 차키, 그리고 권총 한 자루를 버릇처럼 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 건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집어들 때부터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챙기고 싶어서 챙겼다. 확률은 완전히가 아니라 거의였으니까. 누가 알아. 지나가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웬 얼굴을 보고 쏴버리고 싶어질지. 지금쯤 꽁무니를 빼며 도망갔을게 뻔한 적대 조직원 중 한둘쯤은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지. 그러면 한 발쯤은 괜찮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차고로 향했다.
엘이 선택한 건 올라탄 지 꽤 되었을 바이크였다. 괜한 물건은 아니었다. 혼자 살 때는 나름 애용했다. 일도 없는데 방에 틀어박혀 있기 싫을 때면 맨몸으로 곧잘 훌쩍 나섰다. 목적지는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슬렁슬렁 나다니다가 익숙한 펍이 보이면 멈추어 섰고, 처음 보는 길이 나오면 하루 이틀 헤매다가 호출되어 헐레벌떡 뛰어나온 메이드맨을 등에 태우고 집에 돌아갔다. 뭐, 지금은 왠지 이용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주기적으로 관리는 해주었으니 괜찮았다.
교통법규라는 사소한 상식을 살짝 뒤로 밀어둔 채 도착한 곳은 어수선했다. 아마 시끄럽지는 않았다. 소방서와는 어떻게 협의를 보았는지 경보음은 없었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는 되레 차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멀리 떨어진 대기 장소에서도 냄새는 매캐했고 까만 하늘로 번진 검회색빛 연기는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화재를 처음 맞닥뜨린 건 아니었다. 남들에 비하면 제법 자주 본 편일지도 몰랐다. 그다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를 고양이 때문일 것이다. 옅은 털빛과 눈빛을 가진 상자 속의 고양이.
엘은 내내 서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오다가다 한 번씩 권하는 그 친절들이 귀찮아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처음 볼 때는 몰라도, 몇 번 지나치며 미동 없는 그를 확인한 사람들인 더 이상 그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그의 선배는 어느샌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엘의 눈은 언제까지나 검은 연기 속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마치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듯.
입에 물린 담배는 처음 물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곧았다. 불을 붙이지 않았으니 당연하지. 까먹은 건 아니었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라이터의 존재를 떠올리면서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엘은 조금 더 가까이 가면 스스로 불이 붙을 것 같다는 농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라가는 입 안이 썼다. 물은 당기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엘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라는 감상적인 소리 따위는 안 한다. 스스로 모든 이유를 알고서 행동했다. 엘은 자신이 이성적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안 그래도 됐을 일들을 했다. 시간을 되돌려 처음부터. 모든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연락을 기다릴 수 있었음에도 이 자리에 와서 직접 결말을 확인하고자 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엘은 미치지 않았다.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줄여 말하자면 그냥.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이 일련의 흐름을 평가하자면 참으로 비효율적이었다. 그토록 어쩌고저쩌고 따지던 것의 문제, 그리고 해답이었다. 엘은 웃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하고 새삼스러워서. 그렇다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5.
병원에 갔다. 입원 통보는 없었다.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대차게 빗나간 예상에 엘은 그제야 한 번 웃었다. 겉옷이 없어 어색하게 손을 한 번 휘젓고 만 라텔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미친 게 아니라고? 엘은 그의 무릎 뒤를 걷어찼으나 미수에 그쳤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Epilogue.
휴가를 받았다. 길진 않았지만. 이후에는 두배로 굴려 먹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으나 그들은 현재를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인간들이었다. 지금쯤 고성이 오가고 있을 사무실 따위는 머릿속에서 밀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차피 복귀하면 그 모든 쓸모없는 의견들을 들고 올 텐데. 예정된 고생을 지금 당장 헤아리고 있을 필요가 있나.
“아니지. 너만. 난 꼬리. 넌 대가리.”
“이 애새끼가?”
라텔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건 늦은 아침이었다. 그의 배 위에 얹혀 빈둥거리던 엘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한장의 사진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손목이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면을 대충 훑고 고개를 까딱인 엘이 입을 열었다.
“개 같은 것들.”
엘과 라텔은 왜 목이 아니라 손목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그게 관례니까. 하지만 그러면 정말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모르는 거 아니냐. 얼굴이 좀 비위가 상해서 그런가보다. 갑자기 뭔 내숭이냐. 멍청아, 목 말고 얼굴. 그렇다면 동의하는 바이나 역시 좀 괘씸하다. 잘못한 게 총을 쏜 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방아쇠를 당기라고 명령한 뇌에 가장 큰 죄가 있지 않느냐. 역시나 동의하는 바이나…
여러 의견이 오갔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다면 직접 뜯어 주자와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의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다가 둘은 브런치나 먹기로 합의를 보았다. 써니사이드업과 에그 스크램블 중 어느 것으로 하느냐로 2차 토론이 발발하는 건 그로부터 5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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