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의 흐름은
혼돈
*Warning: 범죄, 동족포식(포켓몬>포켓몬, 약묘사)
20xx년 4월 18일
오전 11시 35분
구름시티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스페이스
레베카는 신의 존재를 결코 믿지 않았거니와, 운이란 개인의 무능을 좋게 포장하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인물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했으며, 오로지 능력만으로 타인을 주무르고 집단을 지배하는 자신이야말로 마땅히 으뜸이 될 자격이 있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이루고자 했다. 실패는 금물, 만일 실패를 겪었다면 시간을 들여 계발을 하는 대신 실패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직성이 풀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관 속에서 고스트와 같은 영적 존재들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였지만, 레베카는 이를 자신의 '재능'으로 거뜬히 메꿀 수 있었다. 그는 애초 사람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가진 원한에는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즉,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능히 주었다. 그리하여 원한을 충족한 고스트가 보답으로 내어주는 힘은 언제나 기대이상이었으므로 결국은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긴 세월 공들여 쌓은 탑이 경찰인지 레인저인지, 망할 버러지들에 의해 와르르 무너지고 자신마저 시궁창에 처박혔던 날 이후로, 레베카는 제 실패를 반추하며 원한을 하루하루 착실히 쌓아올려 왔다. 그 둘을 반드시, 뿌리부터 철저히 망가뜨려 주겠다. 그는 최우선 목표의 사전조건을 증오하면서 동시에 갈망했다. '이 시궁창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수족을 빼앗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원한을 쌓고 다지는 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무능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굴욕감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어찌 이렇게까지 추락할 수가 있나. 좁디좁은 내면 탓에 끝내는 자기연민에 젖어서 허망히 독방의 창살을 바라만 보던 인물이 바로 레베카였다.
그러므로, 제 인생을 허송하던 나날 끝에 찾아온 어느 손님은 그에게 있어서 행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변수 그 자체였다. 레베카는 주머니 속에 든 몬스터볼을 손가락으로 굴려보며 지난 몇 시간 동안 벌어졌던 상황을 회고했다. 일반적인 데스마스와는 조금 다른 외형을 지닌 데스마스가 교도소의 한 독방에 홀연히 나타나서는 시름시름 앓았었고,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괴이한 형태를 가진 포켓몬으로 진화했다. 레베카는 전율이 그토록 강하게 일어나는 원한을 생전 처음으로 맛보았고, 이내 희열했다. 가늠이 불가한 세월을 묵은 원한이 자신이 가진 것과 동일한 대상을 품었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너,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그래서 이런 시궁창에 갇힌 나를 찾아낸 건가?'
원념으로 똘똘 뭉쳐진 포켓몬은 레베카라는 인간을 흥미로이 여겼던 모양이다. 이해관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성립된 이후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레베카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철창을 파괴해달라 요구했고, 정체불명의 고스트는 당장 지면을 뒤흔들어서 큼직한 구덩이를 만들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탈옥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했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상황,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서 지하 하수도를 통해 움직이고자 하였다. 일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시설의 구조를 모조리 파악해 둔 덕분에 길찾기는 수월했다. 하수도의 출입구에도 경비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를 잠시, 원념 포켓몬은 놀라운 능력으로 상황을 타파해 주었다.
'최면… 아니면 세뇌? 어느 쪽이든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필요한 재주란 말이지. 이렇게 쓸 만한 녀석이 스스로 굴러들어오다니, 나도 참 횡재했구나.'
본래라면 죄수의 탈옥 시도를 저지하고 교도소에 연락을 즉시 취했어야 했을 경비원은 낯선 포켓몬의 모습에 놀라서 때를 놓치고 말았다. 자신의 포켓몬을 내보낼 틈도 없이 기묘한 수작에 희생된 경비원은 그대로 흉악 범죄자의 탈옥을 돕는 조력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양반은 뒷골목에 여전히 누워 있으려나? 아니면 지금쯤 정신을 차렸으려나? 짧은 시간 내에 나한테 이것저것 편의를 봐 줬으니 답례차 살려두긴 했는데… 뭐, 일찍 붙잡히긴 싫으니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긴 해야겠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싫지만 어쩔 수 없지.'
간이 조력자는 레베카가 갇혀 있던 섬에서 하나지방 본토까지 배를 태워주고, 새로운 포켓몬의 몬스터볼을 비롯해 변장을 위한 도구와 앞으로의 계획에 사용될 물품을 척척 구해다 준 다음, 대도시에서 가장 외진 장소에 스스로 걸어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신묘해.' 레베카는 주머니에서 빼낸 손으로 커피잔을 들어 슬그머니 떠오르려는 미소를 숨겼다. 자신의 머그샷이 뉴스며 전단지에 찍혀서 온 동네에 흩뿌려진 한편 도시 곳곳에 경찰 인력까지 깔려 있는 마당인데, 번화한 거리의 북적북적한 카페스페이스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도 들키지 않을 만큼의 변장 실력이 건재하고 있으므로 지금만큼은 잠깐의 여유를 즐기면서 계획의 우선순위를 정해도 될 것 같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스핀? 리앙? 아무튼 둘다 정의감은 투철하니 그 점을 이용해서 만나면 될 것 같고. 가장 먼저 이 포켓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은데… 어느 정도 파워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파워를 올려줘야 하기까지 해. 아~ 귀찮아. 이걸 다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려나….' 컵 속의 액체를 꾸준히 비워가며 속으로 종알거리던 레베카는 아주 당연한 듯이 답을 떠올렸다.
실은 아주 간단하다. 정보를 알아내는 일은 선택사항으로 둬도 무관했다. 자기자신을 고스트타입 전문가로 칭할 만큼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레베카는 이를 이용해 자신의 행동원칙을 철저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실패의 원인은 없애고, 원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는다. 참 간단하잖아, 안 그래?' 레베카는 자문자답을 즐기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는 식후 티타임을 가지려 카페스페이스 안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태연하게 헤쳐나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있다가 밤에 내 옛날 친구들 소개해 줄게. 너도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걸? 걔네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혼잣말처럼 건넨 말이 머쓱하게 느껴질 만큼 주머니 속 몬스터볼은 묵묵부답이다. 레베카는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너 은근히 재미없는 녀석이구나? 우리 친해져 보자고. 나 심심하잖아, 응?"
친구 사귀기에 실패하고 뱉는 혼잣말과는 반대로 그늘 속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마냥 발랄하기만 했다.
20xx년 4월 19일
오전 1시 정각
구름시티 교외 지역에 위치한 포켓몬 교화시설
팬텀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림자 바깥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휘영청 떠올랐던 둥근 달이 천장 위로 올라가 버리면서 방 안의 그림자 면적이 줄어든 탓이었다. 주행성의 주민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도 남은 시각, 그러나 고스트들에게는 대낮이나 다름없는 시각에 팬텀은 약간의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달이 떠오르기 전에 먹었던 음식이 참 맛있었는데, 남은 거 없으려나.' 머잖아 자신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라는 인간이 포… 포피리인지 뭔지 하는 알록달록한 과자를 주면서 제게 매일 맛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팬텀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낼름이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의 전 주인을 향한 충성심은 이제 코딱지의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는데도 그 놈의 식탐이 대체 뭐라고 마음이 이렇게 뒤숭숭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광기가 떠오르기 쉽대. 그래서 혼란을 겪거나 하는 경우가 흔해진다더라."
무더기로 쌓인 인형들 사이에서 탈 녀석이 작게 속삭였다. 팬텀은 무던하게 눈만 꿈벅거리다가 툭 내뱉는다.
"난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누가 그렇게 말하던?"
이번에는 인형들 사이에서 옅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탈 포켓몬 치고 꽤나 기분이 좋게 들리는 웃음소리였는데, 팬텀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건넨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따라큐는 최근에 새로운 인간 친구를 사귀었단다. 오컬트에 심취한 작은 인간 말이다. 팬텀은 저 나름의 웃음소리를 마주 들려주고는 장난 삼아서 고깔모자를 탈 위에 씌웠다. 그것은 작은 인간이 따라큐를 위해서 가져온 선물이었다.
"언제 떠나냐?"
그림자같은 손으로 모자의 위치를 바꿔 보던 따라큐는 팬텀의 질문에 잠잠해졌다.
"일곱 개의 밤을 네 번 보내고 나서. 조금 오래 걸리긴 하는데… 삼백 개 넘는 달을 세는 것보다는 적어서 그럭저럭 기다릴 만해."
"그러냐. 난 이틀만 지나면 나가는데."
깃털만큼 가벼운 침묵이 찾아왔다.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던 두 고스트들은 같은 지점으로 시선을 올렸다. 달은 시야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달빛은 여전히 지상 위로 곱게 퍼져 내리고 있었다.
"…네 주인은 요리사라고 했으니 너한테 맛있는 걸 많이 만들어 주겠지."
"그렇겠지. 예전처럼 싸움은 못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타격을 입히는 기술은 죄다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자의로 잊은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미련을 크게 느끼지도 않아서 팬텀은 그저 시큰둥하니 옆구리만 긁적였다. "싸움같은 귀찮은 일을 하지도 않고 맛있는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잖냐." 따라큐는 그 말을 듣고 작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모자를 벗어내렸다.
"내 주인은 날 데리고 따뜻한 섬으로 여행을 갈 거래. 내 고향이 거기라나 봐. 난 고향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말이지…."
팬텀은 빨간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 말고 제 벗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가기 싫어?"
툭 튕기듯 묻는 말에 따라큐는 고깔모자를 냅다 끌어안고 열심히 도리질했다.
"완전 가고 싶어! 사실 그 섬이 내 고향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어. 버림받을 걱정 없이 따뜻하게 머무를 수 있는 품이 내 고향이니까…."
"어이구, 그러냐."
팬텀은 키식거리는 웃음을 남기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지나가는 어조로 슬쩍 덧붙인다.
"뭐어, 멀리 떠나든 어쩌든 행복하게만 지내라. 고스트 생에 햇빛 들지 말란 법 없으니까."
따라큐는 아까와 같이 키득키득 웃었다.
"응, 너도."
둘 중 누구도 전 주인과 얽혔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기억을 지금 와서 떠올리기에 때는 이미 한참 지났고 전혀 유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동안 자신들이 쌓아 올렸던 업보의 산은 까마득했으나, 이에 궁극적인 책임을 가진 인간이야말로 죄값에 깔려서 파묻혀야 마땅했다.
…그래야 했는데.
두 고스트는 갑작스레 들이닥쳐 오는 원념의 파도를 감지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팬텀은 겁에 질려서 인형 더미 속에 파고들려는 따라큐를 붙잡아 그림자 속으로 억지로 밀어넣는 한편으로 주위를 휘둘러 살폈다. 경비를 서는 인간이 풍길 만한 기운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의 것이 아니다. 고스트를 오싹하게 만들 만큼 강한 원한이라니, 듣도 보지도 못한 것이다. 팬텀은 따라큐가 안전하게 숨어들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숨을 그림자를 찾았지만, 달리 눈에 보이는 피난처가 없었다. 결국 팬텀은 제 벗이 숨은 그림자 앞에 버티고 서서 바깥 복도와 통하는 문을 가만히 쏘아보기 시작했다. 대관절 어떤 녀석이 기어들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방에 들어오지만 말아라. 그냥 지나쳐 가란 말이다… 팬텀의 간절한 기원이 무색하게도 문의 잠금장치가 찰칵 풀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잔뜩 긴장한 그림자 포켓몬의 시야에 맨 먼저 들어온 인물은 다름아닌 자신의 새로운 주인이 될 요리사였다. 팬텀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이 잘 아는 얼굴을 보고 잠깐 마음을 놓았다. ‘왜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거지? 설마 그 맛있는 과자를 주려고?’ 말없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요리사를 향해 무심코 몇 발자국 다가가려는 찰나,
“…팬텀~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지? 그 동안 나 없이도 잘 지냈어? 새 주인이 생긴 모양인데 나도 축하해 줘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지 뭐야.”
그 뒤쪽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목소리에 팬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요리사를 따라서 방에 들어온 인물은 자신의 전 주인인 레베카였다. 팬텀은 제 뒤에 깔린 그림자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꾹 밟았다. 그리고는 두 인간을 초조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던 중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요리사의 눈에서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주방장님,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저 의자에 앉아 있어요. 그 쪽에서 잘 보이겠다.”
‘무엇을?’ 팬텀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요리사는 레베카의 말을 명령처럼 따르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방의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저 녀석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렸구나. 팬텀은 적대적인 눈초리로 레베카를 쏘아보았다. 눈총을 받은 인간은 섭섭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다.
“어머, 팬텀.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고~ 우리 좋았잖아, 응? 따라큐는 어디 있니? 나도 새 친구를 사귀어 온 참이라서 너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팬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려는 따라큐의 그림자를 한 번 더 힘주어서 밟았다. 고스트의 직감은 때에 따라서는 극한에 치달아 위험을 예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러한 상황이었다. ‘무슨 볼 일로 찾아온 거지? 저 인간을 해코지 하려고? 아니면 우리를? 아니면 전부 다?’ 한때 레베카의 에이스 포켓몬이기도 했던 팬텀은 전 주인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나머지 어떠한 경우의 수가 나오든 간에 최악으로 치달을 것을 예상했다.
‘이게 내 업보로군.’
팬텀은 체념을 떠올렸다. 옛날에 저 인간과 처음 마주했던 날, 자신의 힘을 빌려주기만 하면 생명력을 마음껏 취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이후 그의 명령을 따라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남기는 지도 까맣게 몰랐던 주제에, 이제 와서 뒤늦은 후회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달은 팬텀은 최소한 마지막 발악이라도 시도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따라큐는 낯을 가리는 모양이네… 할 수 없지. 너 먼저 인사하렴, 팬텀. 이쪽이 내 새로운 포켓몬 친구야.”
레베카는 가벼운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몬스터볼을 허공에 던졌다. 팬텀은 그동안 쭉 느껴왔던 원념의 출처를 비로소 직시하며 헛숨을 삼켰다. 크다. 무식하게 컸다. 이 방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꽉 채울 만큼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적이 구불거리는 움직임 끝에 그림자 포켓몬을 굽어보았다. 팬텀은 평균을 웃도는 자신의 체구가 하찮게 보이고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눈을 부리부리 치켜뜬다.
“너한테는 그 기술밖에 남지 않았던가? 어차피 우리는 도망가지 않을 텐데도 말이지. 애석하게 됐어, 팬텀.”
어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손이 사냥감의 발을 잡아채고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발버둥마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다. 팬텀은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어 고함을 질렀다.
“당장 도망쳐! 날 절대 보지마!”
인형 더미의 틈바구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들썩이는 찰나, 팬텀은 입을 아귀처럼 쩍 벌린 사냥꾼에게 스스로 달려들어 시야를 가렸다. 그는 문득 이 모든 광경을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새 주인을 돌아보았다.
'과자를 더 달라고 졸랐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림자 포켓몬이 한 조각 남긴 미련까지 게걸스레 먹어치워진 현장 속에 이성이란 단 한방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20xx년 4월 19일
오전 7시 정각
4번도로에 위치한 레인저 기지
아침 햇살을 넉넉히 쬐고 있는 잎사귀 위로 작은 물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꽃봉오리와 잎사귀를 적시고 줄기를 따라서 흙에 닿은 물방울들이 빠르게 스며들어, 머잖아서는 뿌리를 통하여 대사를 만족시킴으로써 꽃봉오리를 벌려 줄 것이다. 그 이후에 피어날 꽃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그 이전에 꽃이 핀 모습을 누구와 함께 볼 수 있을 것인지, 마음이 설레기보다는 차라리 막연하기만 하였다. 그 모든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물빛 눈동자가 멍하니 초점을 잃어가는 때, 뒤에서 꾸준히 들려오던 물소리가 언젠가부터 뚝 끊겼다. 이윽고 열린 문의 틈새로 수증기가 뿌옇게 흘러나왔다.
"어라, 리안? 일어나 있었네?"
리안은 자동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부스스하게 미소지었다. 룸메이트가 수건을 머리에 얹어놓은 채로 욕실에서 걸어나오면서 반갑게 아침인사를 건네었다.
"넌 원래 여덟 시쯤 되어야 일어나지 않던가… 아, 아니지. 교육생 시절에는 더 일찍 일어나곤 했었지. 너까지도 패턴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역시 사람들은 다 똑같은가 봐."
시오레는 아침 운동 삼아서 남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빠르게 쏟아내고는, 아직 잠이 덜깬 얼굴을 하고 있는 리안을 향해 기분 좋게 웃었다. "나 다 씻었으니까 욕실 써도 돼." 리안은 눈곱을 떼며 시오레의 말에 웅얼웅얼 답한 뒤,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가까이 보여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했던 의식이 여전히 붕 떠올라 있었다. 시오레의 말대로 머리에 물이라도 끼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저 기지의 기숙사에 비치된 비누의 향마저 그립고도 낯설게 다가왔다. 샤워를 빠르게 마치고 욕실을 터덜터덜 빠져나온 리안은 동기가 자신의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꿈벅거렸다.
"…시오레, 거기서 뭐해?"
시오레는 창가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침대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리안은 샛노란 눈동자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양에 그저 맹하니 고개를 갸우뚱했고 시오레는 대답 대신 자신의 옆자리를 통통 두드렸다. 이리 올라와서 옆에 앉아보라는 의미였다. 리안은 착실히 그 주문을 따르고 나서야 시오레가 어떤 것을 보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이거, 아빠가 너한테 준 거지? 그라시데아 꽃 말야."
"으응… 이 꽃 이름이 그라시데아였구나."
리안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자신이 꽃집 주인에게서 받은 것은 꽃 화분이 아니라 씨앗이었는데도 시오레는 출처를 즉각 알아차린 것이다. '꽃집 사람들 눈썰미는 원래 이렇게 대단한가?' 리안은 속마음을 여실히 눈빛으로 드러냈고, 동기는 여지없이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척하면 척이지~ 이건 하나지방에서는 좀처럼 못 보는 꽃이걸랑. 쳇, 내가 키워보겠다고 했을 땐 안 된다고 하더니만. 그래도 네가 이 정도까지 잘 키운 걸 보니 주인을 잘 찾아간 모양이네."
시오레는 꽃봉오리가 햇빛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에 화분을 배치하며 종알거렸다. 리안은 괜스레 쑥스러움을 느끼며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그라시데아는 어떤 꽃인지 알려줄 수 있어? 원산지라든지, 꽃말이라든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중에 확인할 거야."
시오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반쯤 말린 머리카락을 반대쪽 어깨 위로 넘겼다. 흠흠, 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언제나 뱉는 헛기침 소리가 정답게 들려와서 리안은 새는 듯한 웃음을 흘린다.
"그라시데아는 신오지방에 서식하는 꽃인데, 감사제라는 축제 때 사람들이 많이 사 가기도 해. 거기서는 그라시데아 꽃을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는 관습이 있거든. 꽃의 형태는 네가 직접 알아본다니까 건너뛰는데, 꽃이 정말 예쁘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줄게."
시오레는 윙크를 남기곤 은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라시데아 꽃은 프로포즈할 때도 곧잘 사용되거든."
동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열심히 귀기울여 듣던 리안은 그 문장을 빠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헤벌렸다.
"…프로포즈?"
"응. 다른 단어로 말하자면 청혼."
시오레는 동료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이에 리안은 얼른 베개를 찾아서 냅다 자신의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침대 매트리스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동기는 그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며 태연스럽게 흥얼거렸다.
"나중에 네 결혼식 때 나랑 크리스 꼭 불러야 해~. 자자, 밥 먹고 출근 도장 찍으러 가자. 나 먼저 나가 있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정적이 찾아왔고, 리안은 뜨끈하게 달궈진 베개를 이불 아래에 묻어 두고 사다리를 내려갔다. 손에 땀이 살짝 고인 탓에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뻔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무사히 방문 앞까지 걸어나올 수 있었다. 리안은 문을 열기 직전 무심코 벽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시곗바늘은 일곱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깼으려나."
다른 건 몰라도 잠과 밥은 꼭 챙겨야 하는 법인데. 리안은 허전한 곁자리를 애써 무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전에는 거뜬하기만 했던 문이 오늘 따라서 무척 무겁게 느껴진다.
세 명의 레인저는 회의실에 둥글게 앉아서 저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며 허름한 대화를 나누었다.
"…미란다 씨, 아침부터 엄청 화나신 것 같더라. 네가 보기엔 어땠어, 리안?"
"……응. 우리가 원인인 건 아닌데… 그래도 상당히."
"원인을 대충 알 만하지만 말이다."
리안은 자신을 향해 흘긋대는 두 쌍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나 '내'가 분명히 원인은 아니다. 추측해 보건대, 한 인물의 긴급 수배가 하루가 지나도록 내려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구역의 리더 레인저의 신경이 곤두섰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현실이 생시가 아니라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남몰래 한숨을 쉬던 리안은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파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황급히 동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의실 문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다.
"아휴… 다 모여 있었냐?"
리더는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말똥말똥한 시선들을 보고 우중충한 기색을 절반 물렸다. 그는 남은 의자를 끌어다 앉고 천장이 무너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시오레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꺼냈다.
"무슨 일 있었나요…?"
근황을 묻는 말에 잿빛 눈동자가 한차례 굴러가는가 싶더니, 리더는 암담한 어조로 대답을 해 주었다.
"외곽 지역에 포켓몬 교화시설 있잖냐. 탈옥범이 새벽 시간대에 거기 나타났단다. 듣기로는 사달이 크게 난 모양인데, 거기서 보호 중이던 포켓몬 하나가 사망했다더군."
세 명의 레인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당혹감을 표현했다. 그 중에서 리안이 제일 먼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리더에게 물었다.
"거기도 보안이 센 편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탈옥범이 출입했는지에 대해서는요?"
최악에 해당하는 범죄자가 문자 그대로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단계였다. 다른 레인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리더를 바라보았다. 리더는 턱을 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거기 소장이 탈옥범과 아는 사이였는데 지난밤에 협박을 당했다나 뭐라나. 뒷거래를 했는지 협박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 과정에서 포켓몬의 보호자 정보가 넘어갔다데. 더 자세한 내막은 경찰 쪽에서 알아낼 거다. 레인저 관할이 아니라서 나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거든."
시오레가 잔뜩 질린 낯빛을 떠올리며 질색하는 가운데 리더는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이번 공지의 요지는 이렇다. 우리를 한 번 고생하게 만들었던 작자가 탈옥해서 지척에 얼쩡거리고 있다는 사실. 다들 임무 나갈 때 그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특히 리안은 그자와 직접 맞붙은 전적이 있으니까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겠다. 실은 널 임무에서 당분간 배제할까도 고민해 봤는데… 넌 이런 조치를 원치 않겠지?"
리안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고개부터 열심히 끄덕거렸다. 이런 긴급한 사태 속에서 치안 인력이 아쉬운 판에 임무 배제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리더는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빛으로 리안을 바라보았다.
"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에휴, 됐다. 나가서 일들 봐라. 나는… 음?"
자리에서 분주히 일어나던 레인저들은 리더가 무심코 내뱉은 소리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통유리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방금 접수된 의뢰가 요란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시각을 확인한 시오레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여덟 시를 넘겼는데 사막에서 조난 신고가…? 리조트데저트는 여덟 시 반에 개방되는 곳이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흠…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으니 확인하러 가 보긴 해야겠지. 이번엔 너희 셋이서 가는 게 좋겠다. 나는 게이트에 출입 명단을 요청해서 확인해 보마."
조난자 구조 미션은 원래 두 명 이하의 레인저가 대응하는 임무였지만, 그들 중 아무도 인원이 초과 배정된 이유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회의실을 바삐 빠져나가는 발걸음들 사이로 누군가가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멈칫하고 고개를 돌리니 잿빛 시선이 근심을 가득 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해라."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리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라고 셋이서 가라고 하셨으니까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리안은 저 정도 깊이까지 울렁거리는 감정의 파동을 익히 알았다. 몇 번을 느끼더라도 전혀 익숙해지지 못할 종류의 '불길한 걱정'이 어제부터 산발적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리더에게서 '그래.'라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조로아크 아인스는 자신의 갈기와 털에 마구 엉겨드는 모래를 털어내면서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모래 조로아크가 되겠군.
"그러게. 오늘 따라 바람이 더 많이 부는데…."
-이런 알갱이는 씻어내려고 해도 잘 빠지지 않는단 말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들 당분간은 내 갈기를 갖고 놀지도 못하겠는데. 소소리가 섭섭해 하겠어.
방진 고글과 마스크를 쓴 덕분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을 돌아다니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개방 시간이 되기 이전의 관광구역은 순찰을 온 레인저들 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더욱 광활하게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아인스의 갈기를 빗어주던 리안은 하늘을 가로질러서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워글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봤을 땐 아무도 안 보여! 리안은 어때?"
모래밭 위에 깔끔하게 착지한 워글의 등 위에서 시오레가 외쳤고, 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이 탐색해 온 현황을 밝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폈는데도 느껴지는 기척이 아무것도 없어. 눈에 띈다고 해도 전부 야생 포켓몬들 뿐이야."
"절벽 구간에도 없다. 지상에 사람은 우리 외에 아무도 없다고 봐야겠어."
거구의 레인저가 거구의 파트너 부란다를 데리고 소리없이 걸어오면서 제가 살핀 결과를 알려 왔다. 시오레는 머리카락을 탈탈 터는 행동을 관두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딜 더 살펴봐야 할까? 신고가 거짓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슬 떠오르는걸."
"글쎄,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했으니 한 번 더 살피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할까, 크리스?"
버릇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졸지에 이름이 불린 크리스토퍼는 침침한 낯으로 턱을 긁적였다.
"우리가 살펴보지 않은 구역이 있기는 하다. 진작 모래 속에 파묻혀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소 말야."
"…고대의 성 말야? 요즘 거기 가려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하긴, 입구를 찾았다면 호기심 때문에 들어갈 만은 했겠다."
시오레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가 금방 수긍하는 뜻을 비쳤다. 그리고는 다시 워글에 올라타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대강 고대의 성 입구의 위치를 봐 놨으니까 나와 워글을 따라와. 거기서도 찾지 못하면 기지로 복귀하자."
리안과 크리스토퍼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인 뒤 각자의 파트너 포켓몬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실제로 있을지 모르는 조난자를 찾기 위해 사막 위에서 벌써 한 시간 넘게 돌아다녔다. 사막의 아침은 그리 덥지는 않았으나 몹시 건조하였으므로, 모래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장소에서 약간이나마 수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다들 한시라도 빨리 모래바람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지, 모래에 깎여나가고 파묻힌 잔해를 찾아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와, 먼지 봐. 신발에 모래 엄청 들어갔어…."
조로아크와 부란다와 워글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요란하게 모래를 털어내는 동안 레인저들 역시 고글이며 신발장갑에 들어간 모래를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중에 시오레가 거하게 터뜨린 재채기 소리가 유적 내부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리안은 천장 틈새로 조금씩 새어들어오는 모래알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유적의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태어난 수백년 전의 시대보다도 오래 전에 지어졌을 이 건축물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풍화를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지금도 시시각각 모래 속으로 깊이 파묻히고 있을 고대의 성에 일부러 찾아올 여행자가 있기는 할지 궁금해지는 풍경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런대로 멀쩡했는데 말야. 그땐 최하층까지 내려가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절반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모래가 들어찼어. 그래서… 리안, 거기 움푹 파인 부분 조심해."
두런두런 울리는 메아리 섞인 목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리안은 흠칫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앞에는 톱치가 만들어 놓는 구덩이보다 규모가 작으면서도 존재를 쉽게 알아차리지도 못할 크기의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주위를 재차 둘러보면 그와 비슷한 구덩이들이 모래바닥 여기저기에 산재했다.
"유사(流沙)다. 빈 공간 위에 모래가 쌓여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위험한 지형이지. 예전보다 수가 확실히 늘었군. 다들 발이 닿지 않게 주의하도록."
워글을 제외한 나머지 포켓몬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도리 없이 알겠다는 의사표시를 해 보인다. 그렇게 어디에서 푹 꺼질 지 모르는 바닥을 경계하고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돌계단을 내려가면서 외부인이 진입할 수 있는 구간까지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레인저들은 인기척이나 목소리같은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시오레는 약간 체념한 얼굴로 스타일러를 흔들었다.
"사막 한복판에 깊숙이 묻힌 장소까지 내려와서 통신파가 닿질 않아. 그냥 이대로 복귀할까?"
크리스토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리안은 마지막으로 주변에 흐르는 파동을 감지해 보았다. 확실히, 아무런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리안은 시오레의 제안에 동의의 표시를 더해 주었다.
"지금쯤이면 출입 명단의 분석도 끝났을 테니까, 기지에 돌아가면 리더가 확실히 알려줄 거야."
"좋아! 가서 씻고 휴식좀 취하자고. 으으, 왔던 길을 또 되돌아가려니까 너무 멀다…."
시오레가 말한 내용과는 다르게 현장을 떠날 생각으로 가득 찬 발걸음들이 힘있게 옮겨질 무렵이었다. 동료 레인저들의 뒤를 따라가려던 리안은 문득 발밑을 보고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신발끈이 언제부터 풀려 있었지?' 조로아크가 앞선 이들에게 잠깐 멈춰달라는 뜻을 전달하는 동안 리안은 서둘러 신발끈을 묶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다. '여기까지 내려올 때만 해도 분명….' 끈을 묶는 손끝에 까닭모를 의문이 얽혀서 오히려 복잡하게 꼬여가는 도중이다.
무언가가 리안의 발목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어?"
리안은 자신의 몸이 단숨에 정강이께까지 모래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을 보며 멍한 탄성을 질렀다. 그 찰나에, 리안은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파동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낯빛을 하얗게 물들였다. 리안은 이 파동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리안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발버둥을 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모래에 삼켜진 다리는 주인의 말을 듣지 못하는 상태였다. 불쾌한 시취(屍臭)를 풍기는 파동이 점점 머릿속으로 깊게 파고들어와 의식을 몽롱하게 흐려놓는다. 마치 굴복하지 못할 잠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잔뜩 뭉개진 시야 안으로 인영 여럿이 달려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런 와중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까닭에 리안은 속수무책으로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오, 오면… 안, 돼…."
리안은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파트너의 몬스터볼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아인스의 경악 섞인 비명이 아득하게 들렸다.
-리안, 안 돼!
몬스터볼이 다급하게 메아리치는 조로아크의 울음소리까지 삼켜버렸고, 리안은 파트너를 가둔 볼을 있는 힘껏 던지며 소리쳤다.
"크리스! 아인스를, 부탁해…."
인영 하나가 우두커니 멈춰서서 허공에 떨어지는 것을 받아내는 사이, 이번에는 또 다른 인영이 공중에 매달려서 리안의 손을 꽉 붙잡는다.
"꽉 잡아, 리안!"
몽롱한 의식을 헤치고 들어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리안은 힘겹게 눈을 깜박거렸다. '이미 때는 늦었다'고,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한 파동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모래의 무게가 호흡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리안은 강한 날갯짓에 떨어져 내리는 깃털의 형상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시오레, 나 대신 화분을… 돌봐 줘…."
차츰 힘이 빠져나가는 손에 어느덧 선뜻한 공기가 닿았다. 무어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리안은 뜻을 알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꼭, 돌아갈 테니까.' 미처 덧붙이지 못한 문장은 허구가 되어 사라진다.
「너의 귀환을 축하한다, 세를리안.」
리안은 저주처럼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까마득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0xx년 4월 19일
오전 7시 25분
국제경찰 하나지부 건물 내 사무실
어쩐지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더라니, 은엽은 가까스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고 끙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붉은 눈을 향해 힘겨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깨워 줘서 고마워, 소소리."
쪽잠을 잔다는 게 그만 잠을 통째로 설쳤을 뿐만 아니라,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한 대가로 허리통증을 얻고 말았다. 루카리오 소소리는 조그맣게 툴툴거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주인의 책상에 켜켜이 쌓인 서류 뭉치를 응시했다. 지난 새벽에 팀원들과 함께 급작스럽게 교외 지역으로 출동했던 은엽이 본부 사무실에 홀로 복귀해서 나머지 시간을 꼴딱 세워가며 조사하고 작성해 둔 보고서였다. 책상의 반대편에도 비슷한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는데, 전날 하루종일 탈옥범을 수배하면서 수집하고 정리한 진술이 저만큼이다. 은엽은 파트너의 염려 섞인 시선을 느끼고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출근 시간이 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사무실 안은 마냥 조용했다. 그는 천천히 기지개를 키면서 사무실의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쯤이면 리안도 일어나 있겠지…."
머리를 텅 비운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루카리오의 귀가 아래쪽으로 시무룩 내려갔다. 은엽은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인스가 보고 싶은 거야?"
소소리는 귀를 한차례 쫑긋거리는 움직임으로써 긍정을 표했다. 작년 여름에 트레이너끼리 살림을 합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자의 포켓몬들도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는 소소리가 아인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스가 소소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음…." 조로아크의 주인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슬쩍 물어보니 그는 한참을 고심하는 안색을 비쳤었다. "…아인스도 자기 나름대로 심란해 하더라. 그래도 소소리를 밀어 낼 생각은 없는 듯하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리곤 '꼭 우리가 한창 속앓이 하던 시절을 다시 보는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더랬다. 그걸 듣는 입장에서는 약간의 의아함에 더불어 아연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리안이 청신호를 밝혀 준 덕분에 루카리오의 주인은 안심을 찾을 수 있었다. 은엽은 짧은 회상을 끝마친 다음 루카리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침 회의 끝나고 리안에게 전화를 걸어 줄게. 그때 아인스를 바꿔 달라고 하자. 알았지?"
파트너가 금세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본 은엽은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무실의 분위기는 출근하는 주간반 요원들로 인해 산만하게 변할 테니, 한적할 때 미리 회의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한 손에는 차게 식은 커피잔과 다른 손에는 랩탑을 챙겨들고 회의실로 향하는 강력팀 요원의 발걸음은 어쩐지 힘이 없었는데, 조금 더 있다가 본부에 복귀할 팀원들도 매한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강력팀에게는 정말이지 기나긴 새벽이었다.
"우와, 선배님. 선배님 눈이 이어롭을 닮았어요."
"에단 씨도 별 다를 바 없는 걸요. 그레이스 씨는… 멀쩡하시군요?"
감탄스럽다는 눈빛들이 모여들자 수습 딱지를 절반 벗어난 요원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가 원래 야행성이라서… 에단 선배는 정말 한숨도 안 잤지 뭐예요. 팀장님은 좀 주무셨나요?"
"예, 그럭저럭… 그런데 안 주무셨다고요, 에단 씨?"
"아, 후배님~ 그걸 말하시면 어떡해요."
"사라 선배 귀에만 안 들어가면 되는 이야기잖아요."
팀원 둘이서 아침 운동 삼아 가볍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관전하듯 바라보던 은엽은 커피인지 물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연갈색 액체를 몇 모금 들이켰다. 그는 곧 안개로 자욱했던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랩탑을 영상 출력장치에 연결하고 회의 자료를 스크린 화면으로 옮긴다.
"교화시설에서 전달받은 폐쇄회로 녹화본을 토대로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추려 봤습니다. 여기에 두 분께서 가져와 주신 피해자 진술까지 합쳐서 중간점검 차 정리를 해 볼까 해요. 진술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고생 많았어요."
에단이 뻐근한 목을 연신 주무르다 말고 헬쑥한 미소를 지었다.
"피해자 분께서 사건을 겪고 적잖이 충격을 받으시는 바람에… 이번 일은 저로서도 두 번 다시 접하고 싶진 않네요…."
그 옆자리에 앉은 그레이스까지 침울한 낯으로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고, 은엽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분위기에 한숨을 남몰래 삼키며 긍정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을 수사할 때는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지만 말 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포켓몬부터 짚고 갑시다."
은엽이 두 포켓몬을 스크린에 차례로 띄워 올리자 요원들은 우울한 기색을 금방 치워 버리고 집중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은엽은 졸지에 포켓몬의 정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왼쪽은 익히 아시는대로 하나지방의 리조트데저트에 서식하는 데스니칸, 그리고 오른쪽은 가라르지방에 서식하는 데스판이라는 포켓몬입니다. 가라르 리전폼인 데스마스가 진화한 포켓몬이기도 하죠. 학계에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저주가 담긴 그림에 데스마스의 영혼이 흡수되어 태어났다'거나, 또 저 그림자처럼 생긴 부분을 직접 만지면 '그림에 담긴 무서운 기억을 보게 된다'고 하더군요."
은엽이 한차례 말문을 끊자마자 회의 참석자들의 손이 나란히 올라갔다. 먼저 발언권을 가져간 쪽은 그레이스였다.
"그럼 저 데스판이라는 포켓몬은 가라르 이외의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을 텐데, 어쩌다 하나지방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에단은 '나도 궁금했다'는 의미로 엄지를 척 세워 들었고, 그레이스는 한결 우쭐해진 표정으로 눈을 또릿또릿하게 빛냈다. 은엽은 그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짓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한 바퀴 굴렸다.
"가라르지방이 독보적으로 많은 수의 벽화나 그림 유물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 서식하던 데스마스가 영향을 받아 특수한 진화를 이루게 되었다… 라는 것이 제가 세워 본 일차 가설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 본다면, 전세계의 고미술품에 대한 수요는 언제 어디서나 늘 있어 왔죠. 그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운송수단도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그림은 그렇게 하나지방에 유입되었을 테고요. 하나지방은 가라르 이외에 데스마스가 서식하고 있는 유일한 땅이라는 점까지 감안해 봅시다. 여기서 저는 어떤 가설을 추가로 도출했을까요?"
은엽은 자신의 팀원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이것대로 괜찮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려 버린다. 고민스러운 침묵을 먼저 끊은 쪽은 이번에도 그레이스였지만, 그는 조금 전보다는 자신감이 덜한 얼굴로 소심하게 답변을 꺼내었다.
"하나지방의 데스마스가 외부에서 유입된 특정한 그림과 접촉해서 리전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데스판으로 진화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긴가민가 하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단이 옆에서 첨언한다.
"말이 안 되는 듯… 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원종에서 리전폼으로의 변형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포켓몬 학자가 아니라서 단언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부분도 추론을 해 보긴 했습니다. 데스마스는 고스트타입 중에서도 영혼 포켓몬으로 정의되고, 따라서 유기체적인 변이 과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거예요. 으음, 굳이 비유를 해 본다면… 저주가 강하게 서린 그림이 데스마스에게 일종의 '진화의 돌'과 같은 효과를 냈을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은엽은 그제야 반짝 뜨인 눈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순전히 가설 뿐인 내용이지만 전문가에게 검증을 요청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촉박했고, 결국 새벽 내내 자료를 뒤져가면서 추리에 추리를 거듭해야 했다. 그는 속에서 올라오려는 쓴맛을 도로 삼킨 다음 에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단 씨한테도 질문 사항이 있었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에단이 흠칫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데스판의 특징 중 하나가 '그림을 만지면 무서운 기억을 본다'는 점인데, 그럼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진술한… '세뇌를 당한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부분일까요? '초반에 무시무시한 환각을 보았다'는 부분과는 어느 정도 연결이 되는 것 같은데 말이죠."
이번엔 그레이스가 옆에서 고개를 마구 끄덕거린다. 후배가 막내를 가르치더니 둘이서 점점 닮아가는 모양이었다. 은엽은 소소하게 새어나오는 웃음기를 참기 위하여 목을 짐짓 가다듬었다.
"그거 말이죠… 사례를 긁어모으다시피 했는데도 데스판의 습격을 받아 몸이 조종당했다는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 범죄인이 데리고 다니는 개체가 지닌 고유한 능력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있는데, 저도 이 부분은 확신을 못하겠군요. 차라리 칼라마네로의 최면술에 당한 사례와 유사한데, 이마저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기억이 또렷한 편이었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칼라마네로의 경우에는 잠에 빠져든 상태로 조종을 당하는지라 해당 시기 내의 기억이 전무하다고 하니까요."
고맙게도 에단과 그레이스는 이 대답에 납득한 듯 고개를 동시에 주억거렸다. 은엽은 시계를 잠시 확인하고 둘을 바라보았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기 전에 추가적인 질문 사항 있을까요? 제가 뭔가를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 편히 말씀해 주세요."
에단은 질문이 없다는 말을 남겼으나 그레이스가 잠시 머뭇거리는 기미를 보였다. 그는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쭈뼛거리다, 이내 작아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질문을 꺼내었다.
"그, 범죄인의 데스판… 말인데요. 어째서 팬텀을… 그러니까……."
"네, 이해했어요, 그레이스 씨."
은엽이 부드러운 어조로 질문을 끊어주자 그레이스는 비로소 한숨을 작게 쉬었다. 채 이어지지 않은 뒷부분을 은엽 역시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이러한 질문이 나오리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았으며, 아직 수습 기간이 반 년 정도 남은 요원에게는 충분히 무리일 수 있는 요소임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 은엽은 후배의 탁해진 눈빛까지 보고는 착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행위의 의도를… 포켓몬에게 맞추기보다는 트레이너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그자와 다수 맞닥뜨려 본 제 경험상, 레베카라는 인물은 실패의 원인을 자기자신이 아닌 자신의 주변으로 돌려버리는 성향이 강해요. 그리고 포켓몬을 도구로만 여기는 인물이 패배를 겪고 나면 주로 어떤 행동을 보일 지는 두 분 다 아시겠죠."
은엽은 무언의 끄덕임들을 바라보면서 깍지낀 손으로 하관을 가렸다. 이윽고 한숨과 같은 목소리가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온다.
"실패작은 소거한다… 그는 그걸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에요. 그것도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서 말이죠. 레베카의 악심은 일반인이 가진 상식을 한참 초월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은엽마저도 마지막에 가서는 문장을 애매하게 맺을 수밖에 없었다. 리안이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현재 쫓고 있는 인물은 최악의 악심을 가졌고, 이를 이용해 머잖아 새로운 가족을 품게 될 사람을 데려다가 저항을 할 수 없도록 만든 후에 '그러한' 지옥도를 직관시켰다. 그리고는 팬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그가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깔리게끔 일을 꾸민 것이다. 은엽은 눈물 자국이 말라서 버석버석해진 진술서의 마지막 문장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해 달라. 증오의 감정을 그대로 꾹꾹 눌러담아 움푹하게 패인 부분은 흉터 자체가 되어 있었다.
"이런 피해자가 더 생겨나기 전에 서둘러 그자를 붙잡아야겠죠. 어제 탈옥 사건이 일어난 이후 범죄인의 행적을 시간선에 따라서 정리했습니다. 범죄인이 워낙에 변장의 달인인지라, 이마저도 첫번째 피해자의 행적을 기반으로 유추한 것이지만요."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서 스크린의 화면만이 밝게 빛났다. 세 쌍의 눈동자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빠르게, 혹은 천천히 훑어내린다. 18일 오전 9시, 첫번째 피해자와 함께 구름시티의 선착장에 도착. 오전 9시 30분, 구름시티의 포켓몬 센터에서 물건 구매. 오전 10시 42분, 대로변의 화장품가게와 옷가게에서 물건 구매. 오전 11시 13분, 카페스페이스 인터넷 공간에서 결제 진행. 첫번째 피해자는 오전 11시 30분에 뒷골목에서 심신미약 상태로 발견됨. 다음 날 오전 1시 20분, 교외 지역의 교화시설에 변장을 하지 않은 상태로 출입, 두번째 피해자 발생. 이후로는 행적 불명. 그레이스가 다소 침침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8일 오전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공백이 상당히 크네요. 그 동안에는 은신처같은 곳에 숨어있기라도 했으려나요."
"그러게요, 어차피 그자도 인간인 이상 휴식이 필요하긴 할 텐데. 저는 카페스페이스에서 결제했다는 물건이 뭔지 궁금해요."
의문이 연달아 나오자 은엽은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서 팀원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았다.
"에단 씨부터 먼저 확인해 봅시다. 첫번째 피해자의 지출 내역인데, 여기 형광펜으로 칠해 둔 부분 보이시죠?"
데봉 코퍼레이션. 에단은 눈을 꿈벅거리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여긴 몬스터볼과 트레이닝 도구를 개발하는 회사잖아요. 데스판을 훈련시키는 데 쓸 물품이라도 주문했나… 그런데 가격이 왜 이렇게 비싸죠? 이 정도라면 카드사에서 확인을 바로 해 줄 텐데."
은엽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두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정말로 공교롭게도 카드사측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서 전달이 늦는다고 합니다."
"…이게 머피의 법칙이란 거군요."
에단이 허무하게 종결된 궁금증에 허탈해 하고 그레이스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사수를 바라보는 동안, 은엽은 다음 화면으로 넘겨서 표로 정리해 둔 목록을 스크린에 띄워 올린다.
"그레이스 씨는 여기를 보시면 됩니다. 구름시티 인근의 지역경찰과 레인저 기지에 접수되는 사건사고 목록인데요,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지요. 범죄인의 행적이 공백으로 남은 시간대에 접수된 건들을 확인해 볼까요?"
그레이스가 일순 탄성을 흘렸다. "이런 시스템도 있었네요? 어… 대도시 치고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도 않은걸요?"
은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몇 년 전에 비하면 정말 나아진 수준이죠. 아무튼 해당 시기에 레인저 측에 접수된 건은 리조트데저트에서 발생한 조난자를 구조하는 임무 뿐이고, 지역경찰에 접수된 건은 딱 두 가지. 식료품점과 아웃도어 전문점에서 발생한 절도 뿐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발생했고, 절도범의 인상착의는 서로 다른데, 둘 다 현장을 바로 벗어나서 아직까지 잡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행적이죠. 그레이스 씨의 의견은 어떤가요?"
질문을 돌려받은 막내 요원은 한참을 스크린만 쏘아보다가, 이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띄엄띄엄 문장을 뱉었다.
"경찰이 도처에 깔려서 검문을 하고 있는데도 범죄인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그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중이고요. 범죄인이 식료품점에서 먹고 마실 것을 훔치고 아웃도어 전문점에서도 의류제품을 훔쳤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외진 장소에 오래 머무를 목적인 것 같은데… 뭐랄까,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준비 단계를 모두 마치고 난 다음에야 변장을 아예 풀고서 마지막 장소에 나타났고, 그… 짓을 저지른 다음 또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전부 구름시티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역시 팀장님을 습격하려고 이렇게 철저히 다니고 있는 걸까요? 그러면 그쪽에서 팀장님을 찾아와야 할 판에 오히려 한군데서 오래 버티는 행적이 설명이 안 되는데. 으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요……. 이래가지고선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도 헷갈리는 걸요."
그레이스가 말을 꺼낸 초반부터 탁월한 분석이라고 맞장구를 칠 준비를 하던 은엽은 마지막 문장을 듣고 주춤하더니 스크린 속 사건 일람표를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나 착각한 막내의 눈길이 갈팡질팡 흘러가는 동안, 후임을 다독여주던 에단이 불현듯 은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요… 레인저 측에 접수된 조난자 구조 건 있잖아요. 우리가 회의 시작하기 전부터 올라와 있었는데도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상태네요…. 지금이 열 시니까 두 시간쯤 지났는데, 원래 저렇게 오래 걸린대요? 레인저 리안이 나섰다면 금방 해결될 만한 일인데…."
이제 회의실에는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에단은 자신의 질문이 닿지 않자 어리둥절하게 은엽을 바라보지만, 그가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돌리는 질문에 오히려 목구멍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구름하수도 말입니다. 끝까지 들어가 본다면 어디와 이어지죠?"
"…어… 일단 도시 곳곳에 있는 장소들…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고대샛길요."
은엽은 갑자기 라이브캐스터를 꺼내들고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다른 물음을 던진다.
"고대샛길은 또 어디와 연결되죠?"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선임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레이스까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는 말문이 콱 막혀버린 선배를 대신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예전에 거기까지 가본 적이 있는데… 물풍경시티 남쪽 지구… …그리고 고대의 성 최심부와… 연결되어 있어요."
은엽은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라이브캐스터를 급히 품속에 쑤셔넣은 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봄철의 하수도에는 물이 흐르고 있지만 포켓몬을 소지했다면 통로를 넘나들기 어렵지 않겠죠.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그자가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면서 여행객을 납치했거나, 아니면 자기자신이 직접 조난자 행세를 함으로써 사냥감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대상은 레인저 리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자가 어떻게 레인저의 소재지를 파악했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은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동시에 숨을 골랐다. 새하얗게 질려가는 사고회로를 바로잡아서 대응 방안을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 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요원들은 저마다 분주히 소지품을 챙기면서 팀장의 지시를 기다렸다.
"에단 씨, 당신은 레인저들과 안면이 있으니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그들과 연락을 취하세요. 필요하다면 회의에 쓰인 자료를 그쪽에 몽땅 넘겨도 좋습니다. 그레이스 씨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회의실을 당장 뛰쳐나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저, 팀장님과 동행할래요. 아니, 동행을 허락해 주세요. 전 반드시 그 작자를 잡고 싶어요."
자신의 말이 중간에 잘려나갔음에도 은엽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악인은 절대로 때려잡고 말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것도 잠시였고, 눈앞의 인물이 지금 그레이스에게 보이는 눈빛은 비정상적으로 차분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레이스 씨는 하수도 내부의 지리를 잘 알고 계시니 안내를 겸해 동행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는 곧장 떠오르려는 반색의 기미를 최대한 숨긴 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은엽은 막내 요원이 남기고 간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섰다.
"……."
그는 연인의 이름을 소리없이 중얼거린 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당장 본부를 나서더라도 시기를 놓칠 수 있거늘, 삽시간에 들이닥친 공포심이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저주와도 같았다.
따라큐는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기절해 있었을 뿐 무사히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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