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그리고 다시 한 번 안녕
리비에르 시라 x 아노렐 킨
안녕을 고하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도,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린 듯한 미소만이 존재할 뿐.
매정하다면 매정하고, 차갑다면 그가 다루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리비에르 시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불로와 불사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고, 아티팩트의 오염도만 지킨다면 그 어떤 에리어도 누빌 수 있지. ‘시련’을 진행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말이야.”
서로에게 정은 없었다. 짧은 나흘간의 시간 동안 깊은 관계를 맺을 만큼, 그들은 가벼웠지만 쉬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늘 웃고 있을지언정, 서로에게 감정을 허락할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한쪽은 생사를 저울질하는 시험관, 한쪽은 시험당하는 불공평한 입장이었으니 따듯한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아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평생 RP로는 돌아갈 수 없어. 또, 조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있어야 해. 항상 말이야. 참가자들을 존중하며, 네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색의 마술사는 금빛의 아이에게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의 반짝이던 밝은 금색의 머리칼. 그다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련을 돌파하던 그의 무모함. 일주일이라는 시간조차도 필요 없었다. 이번 시련의 우승자는 너무도 확실했기에.
“모두가 너를 잊어도 너는 나와 같이 일어설 수 있지? 믿어. 고작 나흘간의 짧은 시련이었어도 믿어. 너는….”
죽은 자에게 건네지는 두 번째 기회, 전의 삶으로 돌아갈 기회를 건네주는 것이 마술사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아노렐 킨에게 리비에르 시라가 제안한 것은 삶이 아닌, 죽음과 생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영생이었다. 그에 따른 힘, 그리고 동반한 위험조차도.
“그런 좋은 제의를 왜 지금 해? 난 말이지 내 집이 없는 사람이야. 돌아갈 필요도 이유도 없는 사람이라구. 그럼 답 나왔잖아? 아핫, 아하하. 영생이든 뭐든 상관없어. 좋아, 마술사님의 제의 수락할게.”
그 순간부터 그들은 마술사와 조수라는 인연으로 묶이게 되었다.
* * *
UP라는 이질적인 공간에서도, 그들은 결코 평범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 좀 약간 맛이 간 마술사 말이야. 저스티스 시라였던가? 맞아, 그 병원 에리어 운영하는 걔. 최근에 새로 조수를 들였다는데?”
“말을 듣기론 아주 지같이 맛 간 조수로 들였다고 하더라. 마술사가 그 모양이니 조수가 평범하겠냐만. 참가자들만 불쌍하게 됐지 뭐.”
뒷담은 예사였고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는 동료 마술사와 조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실력에 대해선 그 어떤 토를 달지 못했다. 리비에르 시라 뿐만이 아닌, 조수 아노렐도 당연하듯이. 마치 자연재해 같은 사람이었다. 모든 예측을 비웃듯 깨뜨리고, 감당하기 힘든 파괴력까지 동반한.
“그 둘 말인가? …실력은 인정하겠다만.”
“엮이면 머리 아픈 사람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스티스 시라하고 조수 아노렐, 서로 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닮았다. 정확히 무엇이 닮았냐 물어보면 쉽사리 답을 내놓을 수가 없지만 둘은 어딘가 닮아있었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는 듯한 분위기였을까. 규율을 선택사항처럼 가볍게 내버리는 자유로움이었을까.
“자, 우리 조수님? 오늘도 그럼 시작해볼까?”
가벼운 웃음, 가볍게 건네는 말이지만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게가 더해져 있었다. 감정의 무게였을까. 리비에르 시라에게 아노렐이란 사람은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 될 수 없었다. 그가 바랬든 간에, 바라지 않았든 간에. 견고하고 얼음처럼 얼어붙은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온,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너는, 이제 나와 함께할 조수님이니까. 잘 부탁해, 아노렐?”
누가 리비에르에게 아노렐과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냐 묻는다면, 한 치 망설임 없이 그러했다고 답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저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리비에르에게 아노렐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새로운 참가자들을 맞이하고, 못 가본 에리어에 놀러 가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잔소리도 듣고, 이따금 징계도 받고. 조용한 날이 드물었고 심심한 날이 드물었다.
“그러니까, 참가자들 잘 데리고 있어야 해, 조수님?”
믿어. 그들의 인연이 맺어진 날 건넸던 그 말은, 그가 아노렐을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도 유효했다.
* * *
영생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UP에서 살아가는 모든 마술사와 조수가 영생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페이스리스, 불의의 사고는 언제나 존재했고 RP 못지않게 위험이 구석마다 도사리고 있는 곳이 UP였기에. 그들은 죽음에 익숙했고, 무감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죽음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며 점수를 매기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들에게 이별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파프니르 출현? 누가 아티팩트에 먹혔길래?”
그렇기에 영생을 살면서도 영원을 믿지 않았다. 마술사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조수라는 존재도 언젠가는 곁을 떠나기 마련이었다. 마술사로 승격해서 떠나든.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적과 싸우다 소멸하든. 아티팩트가 오염되어 그 힘에 집어 삼켜지든. 리비에르 시라도 예외 없이 언젠가 아노렐이 제 옆을 떠나리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아노렐?”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미소는 깨지지 않았고, 평정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이별에도 눈물은 없었다. 그런 그를 보고 누가 얼음 같은 사람 아니랄까 봐, 들으라는 듯 일침을 놓아도 리비에르 시라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찾아봐야겠지.”
어느 학교의 옥상. 전투가 일어난 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듯, 잔해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렸겠지만, 리비에르 시라가 서 있는 공간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가 한치 속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던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오로지 리비에르 시라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왠지 너라면, 끝까지 끈질기게 남아있을 줄 알았어.”
혼의 파편. 극소수의 확률로 아티팩트의 힘에 전부 먹히지 않고, 조각처럼 남아있는 존재. 그가 알던 아노렐은 아니지만, 아노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실 리비에르 시라에게는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 또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보내기에는 아쉬웠기에, 그가 어떤 형태로든 돌아왔다는 것이 그저 기뻤는지도 모른다.
“자 조수님. 아니, 이제는 아니지. 아노렐. 난 리비에르 시라, 마술사란다.”
그것은 이별이었고, 재회였으며, 다시 한 번 찾아온 첫 만남이었다.
Good-bye.
Hello.
Welcome back.
안녕, 아노렐.
유능한 조수님, 그동안 수고 많았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해도 인사 한번 없이 가면 나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는데.
리비에르 시라는 웃는다. 늘 그렇듯, 그린 듯한 웃음.
안녕, 아노렐.
초면이라고 해야 하나, 좀 미묘하네. 조금 혼란스럽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는지도,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뭐, 괜찮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테니까. 일단 나와 같이 가지 않을래?
리비에르 시라는 금빛의 아이에게 다시 제안한다. 그답지 않게, 깊이가 있는 웃음이었다. 감정이. 그래, 애정이.
어서 와, 아노렐.
리비에르 시라는, 아노렐에게 다시 손을 내민다.
Written 1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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