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 메리 크리스마스
카나트 x 자유의 신전
“…그래서 트리가 곧 배달 올 거란 얘기예요. 재스퍼가 잘 책임지고 신전 잘 보이는 곳에다 두고 장식해줘요. 유천하고 자윤은 재스퍼를 도와주고요. 다른 일은 내일로 미뤄도 괜찮으니까.”
“예?”
“네?”
“저, 유화 님?”
지목당한 세 사람에게서 얼빠진 대답이 돌아왔지만, 카나트는 수족의 당황을 모른 체했다. 그 정도 철판도 깔지 않고서야 자유의 만다라를 어떻게 해 먹겠는가. 얼핏 카나트의 주변인들이 뒷목 잡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도 카나트 밑에서 구르던 짬밥이 제일 많은 재스퍼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카나트가 보지 않을 때 미간을 문질렀다. 연말이 어째 잠잠하다 싶었더니 뜻밖의 선물이 이렇게 날아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아, 반송 안 되나요.
그새 자신의 상사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바닥에 상자와 포장지를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얘들아, 트리 올 때까지 손 비면 나 좀 도와서 포장 같이해요. 카나트의 말투는 늘 그렇듯 미묘한 존대 같지 않은 존대였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카나트의 수족은 존대에 속지 않았다.
상사의 말은 뭐다? 절대적인 명령이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유천과 자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해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카나트가 건네주는 박스에 포장지를 두르기 시작했다. 누가 틀었는지 모를 캐럴이 배경에 은은하게 깔렸다.
카나트(만다라)는 박스에 선물을 집어넣고, 자윤(자유의 수족)이 포장지를 자르고, 유천(자유의 수족)이 박스를 포장지로 감싸고, 재스퍼(자유의 수족 대장)가 리본을 묶어 옆으로 분류했다.
총체적인 재능과 능력의 낭비가 있다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싶은 광경이었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다계가 크리스마스를 챙겼다고요?’
당연한 질문을 아무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태초의 도시에 크리스마스 열풍이 불게 한 원인이 하이레인과 아리아테라는 것을 카나트의 수족은 당연히 몰랐지만, 달의 만다라가 소동의 중심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것은 오래된 감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셋은 조용히 원망을 담아 달의 신전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팔자에도 없던 선물 포장 노가다에 끌려든 것을 욕할 수도 없었다. 카나트가 매우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인, 아니,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인지 호불호가 확실한 카나트에게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극호인 모양이었다. 재스퍼에게 크리스마스란 굳이 따지자면 중립이었지만 현재는 불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평생 묶을 리본 지금 다 묶는 것 같아. 손 아파.
“그런데 유화 님, 이 많은 선물은 대체 어디로 보내시려고요?”
가위를 들고 포장지를 자르던 자윤의 질문에 카나트는 옆에 놓인 기다란 종이를 들고 펄럭였다. 시원시원한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이름에 포장에 동원된 셋이 조용히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카나트는 그 표정을 본 체도 하지 않고 씩 웃었다.
“내가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많다 보니, 목록이 훅 늘어났네요~ 여러분 것도 섞여 있으니 걱정 말고요. 근데 제때 다 배달시키는 건 좀 어려우려나. 몇 개는 내가 직접 전해줄 거고요, 나머지는 잘 부탁해요.”
아, 크리스마스 휴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건만, 믿지도 않는 산타 씨,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셋은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며칠간 선물 뺑뺑이를 해야 할 듯싶었다. 어떻게 할까요 재스퍼 님. 우리 교대로 하나요? 그게 좋겠…지? 절박한 눈치 게임의 적막을 깨뜨린 건 익숙하고 발랄하고,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트리 배달~이요~”
네 명의 고개가 돌아갔다. 배달원 몇 명이 달라붙어서 트리를 옮기고 있는 선두에 자유의 전령인 미미르와 그의 후임 비올레타가 서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반겨주는 카나트의 활짝 핀 얼굴 뒤로 재스퍼, 유천, 자윤은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전령을 이런 데에 막 써도 되는 거야? 저도 솔직히 긴가민가하긴 한데 누가 유화 님에게 그런 걸 따지고 들 거에요? …그렇지? 우린 못 본 거야. 누가 물어보면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잘 지냈어요?”
“지금 손이 좀 떨어져 나갈 것 같긴 한데, 어제까지만 해도 잘 지내고 있었어. 오랜만이네, 미미르. 후임 교육은 잘 되어가고 있어?”
미미르 옆에서 비올레타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수족 셋은 비올레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싫어하는 이들이었지만 카나트가 직접 전령 후임으로 데려온 비올레타인 만큼 싫어하는 티를 대놓고 내진 않았다.
“비올레타야 잘 배우고 있지요~ 얼른얼른 가르쳐야지 저도 고향 숲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좀 취하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나버려서.”
그렇지, 그렇지. 미미르가 워낙 인간의 모습을 닮아 종종 잊었지만, 그는 본디 나무의 요정, 드리아데스였다. 드리아데스는 주기적으로 고향 숲에서 정기를 받아 휴식을 취해야 했기에 고향 숲을 떠나는 이들이 매우 적었다. 미미르가 그런 면에선 상당히 괴짜긴 했다. 하긴, 그러니까 카나트가 자유의 정령으로 데려다 굴려 먹은 것이겠지만.
나도 숲은 아니지만 내 방으로 돌아가서 길게 잠이나 자고 싶다. 무념무상으로 선물상자에 리본을 묶던 재스퍼의 손이 멈췄다. 어라? 끝났어? 눈을 옆으로 돌리자 이미 배달원에게 트리를 놓을 자리를 직접 지시하는 카나트와 옆에 반쯤 널브러진 유천과 자윤이 보였다. 아, 다행이다. 손이 떨어지기 전에 선물이 먼저 떨어져서 다행이다.
“얘들아~ 그럼 난 선물 전해주고 올 테니까 트리 장식 좀 해줘요. 미미르하고 비올레타는 도와줘도 좋고, 따로 바쁜 일이 있다면 가봐도 좋아요. 메리 크리스마스~”
만다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인사와 산타 모자를 쓰고 선물 보따리를 맨 카나트가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간 듯한 자유의 신전에 일이 끝나지 않은 수족 셋과, 아무래도 좋다는 웃음을 짓는 전령과, 뻘쭘한 표정을 한 전령 후임이 남았다.
“…그래서 카나트 님은 어디로 선물을 주러 가신 거예요?”
비올레타의 물음에 유천과 자윤이 시선을 교환했다. 카나트 바로 옆에 앉아서 선물 상자를 받아 포장하던 유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건 아마 차원의 만다라님 앞으로 갈 선물상자였…을 걸?”
“나중에 차원의 신전에서 공문을 빙자한 컴플레인이 날아오는 거 아니야? 수족 된 도리로서 유화 님 좀 잘 설득해서 잡아두라고?”
쌍둥이 자윤의 물음에 유천은 침묵했고 재스퍼는 다시 미간을 짚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공문에 대한 답장을 머릿속으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님들도 못 하는 걸 왜 힘없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나요, 저희도 말리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 같나요?’ 였다. 물론 정중하게 포장해서.
산타 씨, 크리스마스에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화 님이 수습 가능한 선에서 사고 치시게 해주십시오. 간절한 기도를 마친 자유의 수족은 카나트가 돌아오기 전에 트리 장식하기에 착수했다.
…정말, 눈물 나게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자유의 신전 한가운데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후일담
“그런데 혹시 차원의 만다라님에게 보내는 선물이 뭔지 아는 사람 있어요?”
“포장할 때 소리 들어보니까 작고 가볍던데. 뭔가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 나 포장지 자르다가 유화 님이 작성한 리스트 슬쩍 봤는데 체렌 님 이름 옆에 두통약이라고 써 있던데요? 내가 볼 때마다 미간을 문지르고 다니는 게 아무래도 일이 많아서 두통이 잦은 모양이다. 효과 좋은 두통약을 선물하자! 라고.”
“………얘들아, 공문이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데 답장에는 뭐라고 쓰면 좋을까?”
두통약과 함께 새로운 두통을 선물 받게 된 체렌에게 메리 크리스마스와 함께 심심한 애도를 보낸다.
Written 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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