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파뉼라를 품은 까마귀
라베 키르헤 x 캄파뉼라 (당마안 if AU)
이것은 어느 한 우주의 작은 기록.
만남과 인연, 우정과 사랑, 푸르른 달과 보랏빛 황혼의 노래.
우주에서 피어난 한 송이 캄파뉼라와 하늘을 비상하는 붉은 까마귀에 관한 이야기.
캄파뉼라야, 까마귀에게 화환을 씌워주고,
까마귀야, 캄파뉼라에게 날개를 달아주렴.
“와아~ 이 행성은 진짜 여전히 춥구나…. 아, 뼈 시리다.”
투덜대면서도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까만 털 망토를 뒤집어쓴 형상의 후드 밑으로 겨울의 행성, 윈터크로스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붉은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추워, 춥다고. 날아갈 수만 있다면 빨랐을 텐데, 이 날씨에 날개를 꺼낼 수도 없잖아. 날개는 망토로 덮지도 못한다고. 까마귀 살려.
춥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혼잣말도, 걸음도 거의 뛰다시피 빨라져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마을의 입구였다.
다 왔다! 드디어! 여기도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 맞다. 카렌 오빠 시간 도서관에 취직하는 거 도와줄 때였지. 기왕 오는 거, 오빠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그치만 나야 할 일이 그닥 없으니 그렇다 쳐도, 오빠는 휴가가 언제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여긴 바뀐 게 거의 없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드는 감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았다. 늘 그랬듯, 안정적이긴 한데, 조금, 아니 많이 심심하고. 근데 언니네 약방이 어느 쪽이었더라. 그간 너무 안 와서 그런가, 기억이…. 앗, 보인다, 저기네.
목적지를 찾은 후 한시라도 빨리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라베는 뛰어서 문을 거의 박차고 들어갔다. 그 충격에 선반에 놓인 유리병들이 살짝 흔들렸다.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인이 아담한 약방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후드를 벗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적발의 이를 보자, 엄한 웃음을 지으며 타박했다.
“라베, 내가 그렇게 문을 부술 듯이 열면 안 된다고, 몇 번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저번에도 쓰러뜨린 약병이 몇 개였더라?”
“아, 언니. 이번만 봐주라. 진짜 너무 추웠단 말이야. 밖에 조금만 더 오래 있었으면 머리카락까지 새파래져서 왔을지도 몰라.”
엄살은. 잔소리했어도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이 반가웠는지, 약방의 주인, 레미아는 라베에게 손짓해 난로 가까이 데려갔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너 오는 거 알았으면 쌍둥이들한테 일정을 조정해보라고 얘기했을 텐데. 걔들 지금 천이 다 떨어졌다고 유레인에 가 있거든.”
“앗, 알았으면 진짜 말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네.”
라베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세이스타드 마을에서 대도시인 유레인까지 가려면 오베로 숲을 가로질러야 했기에,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편이었다. 짐이 많다면, 더더욱.
너 언제까지 있을 예정인데? 레미아의 물음에 라베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엘도 보러 가기로 해서 오래 못 있을 것 같은데…. 윈터크로스를 떠나있는 막냇동생의 얘기에, ‘그럼 어쩔 수 없지’, 레미아는 수긍했다.
“그런데 라베야, 너 온 김에 심부름 하나만 해주지 않을래? 약초 하나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야생에서만 자라는 거라 숲으로 채집하러 가야 하거든. 난 가게를 못 비우니까, 내일 잠깐 갔다 와주라.”
라베와 같은 금색의 눈동자가 기대로 초롱초롱 빛났다. 추운 것을 질색하는 라베였지만, 언니의 부탁이니까. 라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캄파뉼라는 하얗게 숨을 내쉬었다. 현재 이 행성은 5월이라고 했었던가? 사계절이 뚜렷한 곳이었다면 늦은 봄이었겠지만, 이곳은 한겨울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 추위에 대비한다고 두꺼운 겉옷을 사 와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행도 제대로 못 해보고 행성을 뜰 뻔했다.
시공여행자라는 신분으로 이 행성, 저 행성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추운 행성은 처음이었다. 그날 장미꽃밭에서 재회했던 기묘한 카페의 사장, 루예나의 권유로 우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그리 많은 행성을 돌아보진 않았지만. 확실히, 윈터크로스는 기억에 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것이 좋은 의미였든, 나쁜 의미였든.
그래도 경치 하나는 캄파뉼라의 마음에 들었는지라, 이곳에 방문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 위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차, 얼어붙은 호수 위로 하늘이 비쳐 보였다.
거울 호수라고 불렸던가, 그럴 만도 하네. 호수 가까이 다가가, 유리 같은 수면을 들여다보며 캄파뉼라가 중얼거렸다.
겨울의 행성, 윈터크로스에서 이 호수가 녹는 일이 있을까? 항상 얼어붙어 있다면, 호수라기보단 하늘의 거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법했다. 이 위를 걷는다면, 하늘을 걷는 기분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저기! 혹시 도움 필요해? 길을 잃었다거나 하면 내가 여기 근처 마을로 데려다줄 수 있는데!”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걸까.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가득 끌어올려 허리춤에 달린 검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려 돌아봤다가, 캄파뉼라는 멈칫했다.
길게 길러 묶은,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 태양 같은 금색의 눈. 까마귀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의 옷. 겨울의 행성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무해해 보이든 아니든, 캄파뉼라는 보이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이였고, 상대가 누구든 의심부터 하는 성격이었다. 자신만을 위한 생존방식이었기에, 반란군을 떠난 지금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러나 훗날 돌이켜보면, 캄파뉼라는 자신답지 않게 쉽게 그를 향한 경계심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난 라베, 라베 키르헤라고 해.”
어쩌면 이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 * *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지만, 오베로 숲은 라베에게 매우 익숙한 장소였다. 어렸을 때, 수호영을 각인하기 전부터 쏘다니던 숲이었으니 아무리 외진 길이어도 모를 리가 없었다. 시간이 늦어 어두워져도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렇지만 역시 추우니까 얼른 언니가 필요하다고 한 약초를 찾아서 나가자고, 라베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였더라…. 맞다, 거울 호수 언저리에 많이 자란다고 그랬었지.”
목적지를 정한 라베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앞으로 쭉 가다가, 한 번 더 꺾어지면… 그렇지! 바로 여기… 인 데.
라베는 순간 넋을 놓았다. 넓은 공터에, 얼어붙은 호수 위로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광경에 눈이 간 것은 아니었다.
하늘의 색도 빛이 바래 보이게 하는 푸른색의 머리카락. 그 위로 피어난 듯한 하얀 꽃의 머리 장식. 두꺼운 외투 위로도 선이 고운 사람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얼핏 보이는 옆얼굴만으로 미인인 것을 알 수 있었듯이.
라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고.
마을에서 저런 사람을 본 적은 없으니, 유레인에서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행성을 여행하러 온 시공여행자? 그런데 아까부터 호수만 보고 서 있는데,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말은 이미 튀어 나가고 있었다. 저기! 혹시 도움 필요해?
청발의 미인은 라베를 돌아보았다. 와, 눈동자마저 벚꽃색이라니, 라베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그 눈에 경계심이 깃드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차, 소개도 안 하고 다짜고짜 그러면 역시 좀 수상해 보이겠지. 라베는 빠르게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난 라베, 라베 키르헤라고 해.
“……길을 잃은 건 아니지만, 제안은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말투에, 미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기에 라베는 활짝 웃었다.
“그래? 혹시 여기, 그러니까 유레인에 사는 사람이야?”
“아니요, 그쪽으로 가는 길이긴 했습니다만….”
“그럼 여행자구나! 맞지? 세이스타드에서 널 본 기억이 없거든. 이런 엄청난 미인이면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네, 칭찬 감사합니다.”
거리낌 없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라베가 퍽 난감했는지, 아니면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던 건지 그의 얼굴은 약간 떨떠름하게 변해있었다. 그나저나, 전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라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유레인까지 같이 가줄까? …앗, 나 여기 심부름으로 왔었지, 안 되겠다. 미안. 좀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아쉬운 듯, 미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라베는 말끝을 흐렸다. 유레인까지 같이 가면 테스라도, 테이트도 볼 수 있고, 이 이방인과도 조금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레미아에게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라베를 보며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조그맣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연이 된다면, 어쩌면 또 볼 수도 있겠죠.”
비록 예의 바른 빈말이었을지라도, 라베의 얼굴에 기쁨이 피어났다. 그래!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또 볼 수 있겠지. 이래 봬도 난 엄청난 행운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조만간 또 보게 될 거야. 그때 가서 나 잊어먹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럼 만난 기념으로, 이름이라도 가르쳐 줄래? 다음에 만났을 땐 바로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게!”
“…캄파뉼라. 캄파뉼라 라고 불러주세요.”
캄파뉼라. 입속으로 이름을 되새기며 라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캄파뉼라. 그 이름을 라베는 꼭 기억하고 있겠다고 다짐했다.
* * *
까마귀를 닮은 적발의 여인을 만난 이후, 캄파뉼라는 유레인을 방문해 며칠 머물다 세이스타드 마을에도 들릴 예정이었다. 라베, 그 사람도 세이스타드에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짧다 못해 거의 스쳐 지나가듯 마주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가질 성정은 아니었건만, 캄파뉼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곳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칠 일이 있으려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매우 곤란해졌다. 캄파뉼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빤히 응시했다. 방금 땅에서 집어 든 작은 십자가 장식에 달라붙은 눈이 체온에 녹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손에 들린 장식이 왜 눈에 익을까 고민했던 것도 한순간, 캄파뉼라는 그 장식이 누구의 것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기본적으로 기억력도 뛰어났고, 일종의 생존방식으로 날카로운 관찰력을 키워온 캄파뉼라였다.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다는 말을 꺼낸 건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이르게 라베를 찾아 나서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십자가 장식을 주운 것을 모르쇠 지나친다는 덜 귀찮은 선택지도 있었지만, 왜인지 모른 척하기엔 마음 한군데가 걸렸다. 어차피 세이스타드로 가는 길이었고 라베 또한 그곳 출신인 것 같았으니, 크게 번거로운 일은 아니겠지. 마음을 굳히고 캄파뉼라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혹시 숲속 미아?”
이 상황, 어째선지 익숙한데. 데자뷔를 느끼며 캄파뉼라가 돌아보자 각자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진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그들의 금발이 반짝였다. 자신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머리색, 눈색, 그 외 자잘한 얼굴 특징도 똑 닮아있어 쌍둥이인가, 캄파뉼라는 추측했다.
진짜 길을 잃은 거예요? 금발의 여성이 재차 물어오자 캄파뉼라는 고개를 저었다. 길을 잃은 건 아닌데요.
“아는 사람의 물건을 주웠는데, 세이스타드로 가서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조금 막막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익숙한 도시에서 한 번밖에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생판 처음 방문하는 마을에선 오죽할까. 그랬기에 금발의 여성이, ‘세이스타드에서? 나름 그곳 토박이인데 혹시 도움 필요해요?’라고 물었을 때 고민은 찰나였다. 캄파뉼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혹시 라베 키르헤라는 분을 아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어? 쌍둥이는 문득 감탄사를 뱉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캄파뉼라가 예측했던 반응은 아니었기에 눈썹을 잠시 둥글게 휘었다가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번에는 금발의 남성 쪽이 캄파뉼라에게 질문했다.
“라베 누나하고 아는 사이이신가요?”
라베 누나? 사뭇 친근한 호칭이었다. 아는 사이는 물론이고, 상당히 가까운 관계인가, 캄파뉼라는 생각했다. 라베를 찾는 과정이 예상보다 쉬워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면식은 있다고 할까요. 며칠 전에 이 숲에서 만났는데, 그때 떨어뜨렸는지 이 십자가 장식을 주웠거든요.”
캄파뉼라의 손에 들린 장식을 들여다보고, 확실히, 그거 라베 언니 목걸이 맞네, 청회색 눈을 가늘게 뜨며 금발의 여성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언니는 언제 세이스타드로 돌아왔었대? 언질이라도 좀 미리 해주지, 투덜대고 캄파뉼라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잘됐네요. 마침 저희도 세이스타드로 돌아가는 길이니까 안내해드릴게요. 아마 레미아 언니네 약방에서 머물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차, 소개를 안 했구나. 테이트 키르헤예요. 라베가 제 언니고요.”
가족이었구나. 놀란 티가 났는지 테이트는 그를 보고 키득 웃었다. 안 닮았죠? 그 말 자주 들어요. 저기 있는 쟤는 제 쌍둥이 오빠예요. 두 쌍의 눈동자가 남은 한 사람에게 향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라 키르헤입니다.
간단히 통성명을 마치고 테이트는 다시 캄파뉼라에게 세이스타드로 가는 길에 동행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캄파뉼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조금 놀랐지 뭐예요. 라베 언니한테 이렇게 미인인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이제는 귀에 익은 칭찬에 화답하며 캄파뉼라는 생소한 단어를 잠시 입속으로 굴렸다. ‘친구’라. 그리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하물며 얼굴을 맞댄 시간이 10분이 넘었을까 싶었지만 캄파뉼라는 굳이 그를 정정해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다.
* * *
“……어라?”
“깜짝이야. 왜 그래, 언니?”
갑자기 라베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에 옆에 있던 적갈색 숏컷을 한 청년, 엘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러나 라베는 자신의 목 주변을 더듬기 바빠 대답하지 않았다. 응? 무슨 일 있어? 엘이 재촉하자 그제서야 라베는 울상을 지으며 빈손을 쥐었다 폈다.
“내 목걸이…… 초커에 달린 십자가 장식이 없어졌어.”
그거 오빠한테서 받은 선물인데. 어디서 잃어버렸지? 분명 윈터크로스로 갈 때만 해도 있는 걸 확인했단 말이야. 어디지?? 세이스타드? 아니면 숲에 갔을 때? 우주에서 잃어버린 거면 진짜로 답이 없는데.
속상함에 발만 동동 구르는 라베를 보고 있던 엘은 우선 자신의 언니를 진정시켜보려 노력했다. 엘이 위로에 재능을 타고났다곤 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어찌어찌 근처 가게로 들어가 라베를 앉힌 후 조각 케이크 하나를 라베 쪽으로 밀어주는 데 성공했다. 라베는 여전히 길게 눈꼬리를 내려뜨린 채로 애꿎은 케이크만 포크로 푹푹 찔렀다.
“음……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와서 그 작은 장식을 찾는 건 좀 힘들지 않을까? 언니가 한 곳에만 계속 머무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짐작 가는 데도 한 행성이 아니고 말이야…. 큰 언니한테 연락이라도 해볼래? 세이스타드에서 잃어버린 거면 거기 있는 사람이 주웠을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응, 아니. 언니 요즘 약방 일 때문에 바쁠 거라고 했고, 지금 연락해도 답이 오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일단 오빠부터 찾아가야지.”
오빠? 카렌 오빠? 큰 오빠가 주웠을 가능성이야말로 아예 없는데, 왜 시간 도서관까지 가려고? 라베의 말에 담긴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엘은 잠시 자신의 작은 언니를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엘의 깊은 고민은 전혀 모른 채로 라베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고해성사를 해야 하니까……. 오빠, 미안해…. 내 행운 10년 치를 끌어다 써서라도 그걸 잃어버리는 걸 막아야 했는데….”
엘은 눈을 옆으로 굴리며 침묵했다. 라베가 카렌에게서 받은 선물을 애지중지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성당이라도 찾아가 자신의 죄를 참회할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언니에게 더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카렌이 장식 하나 잃어버렸다고 혼을 낼 성격도 아니었고 (잔소리는 하겠지만), 무엇보다 행운이 신용처럼 내키는 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이었던가? 고심하던 엘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 너무 자책하지 말고. 가는 김에 큰 오빠한테 안부나 전해줘.”
라베는 여전히 우울한 기색으로 테이블에 엎어진 채 고개만 끄덕였다.
* * *
시간 도서관에 대한 캄파뉼라의 첫인상은 ‘새하얀 성당’이었다. 캄파뉼라가 평생 살아온 솔레유 제국은 기본적으로 국가 종교란 것이 없었기에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곳이라는 개념은 캄파뉼라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래디아타 대륙을 떠나 우주의 행성을 여럿 방문하다 보니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할 기회는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캄파뉼라는 배움이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도서관은 처음 보는 것 같네, 건물 안쪽으로 향하던 발걸음도 멈춘 채로 캄파뉼라는 그 웅장한 풍경을 감상했다. 비록 레미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일정에도 없던 테임플로우까지 오게 되었다지만, 그게 나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을 조금 바꿨다.
캄파뉼라는 망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십자가 장식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장식을 주워들었을 때만 해도 세이스타드까지만 가서 라베를 찾아보고, 못 찾으면 파출소에라도 맡겨둘 계획이었는데, 여태 자신이 계속 지니고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라베도 참, 운은 좋은 애인데 이상한 데서 칠칠치 못하단 말이지.”
쌍둥이 테스라, 테이트와 세이스타드에 도착한 캄파뉼라는 바로 라베의 언니인 레미아를 만날 수 있었다. 레미아는 건네받은 장식을 손에 굴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라베가 엘도 보러 가겠답시고 떠난 게 벌써 며칠 전 얘긴데. 심지어 그 앤 추운 곳이 싫다고 윈터크로스론 잘 오지도 않고, 워낙에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애라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뭐하고…….
“엘한테로 보내는 건 어때?”
나름 머리를 굴려 낸 테이트의 제안에 레미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기에 며칠 머무른다는 얘기는 안해서 엇갈릴 확률이 너무 높아.
“그럼 아예 카렌 형한테 보내는 건? 라베 누나도 이거 잃어버린 걸 알아채면 형한테 가서 이실직고라도 하지 않을까? 워낙에 이걸 아꼈어야지.”
레미아는 테스라의 말에 동의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지금 우체국이 물건이 많이 들어와 포화상태라, 배송이 많이 지연된다는데. 제때 카렌 오빠한테 도착할지가 의문이네.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키르헤 셋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와중, 레미아의 시선에 그 자리에서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해 가만히 기다리던 캄파뉼라가 들어왔다. 음, 좀 미안하긴 한데 어쩔 수 없나. 레미아는 캄파뉼라에게 손짓을 하며 싱긋 미소지었다. 캄파뉼라는 어째선지 불길해졌다.
“혹시 많이 바쁘지 않으면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보통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부탁은 하지 않을 텐데, 라베의 지인이라고 하니까. 테임플로우 행성에 있는 시간 도서관에 들러서 카렌 키르헤라는 사람에게 이걸 전해줄 수 있을까요? 사례는 당연히 해드릴게요.”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들어맞는 편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캄파뉼라는 잠시 망설이다 부탁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일정이야, 조금씩 뒤로 밀려도 크게 상관이 없었고, 3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곳도 방문해서 나쁠 일 없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정말, 나쁘진 않네. 캄파뉼라는 다시 커다란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렌 키르헤라는 사람, 이곳의 사서라고 했지. 여기 직원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어디 있는지 알려주려나. 그러나 캄파뉼라 나름대로 세운 계획이 빛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 당신! 캄파뉼라. 캄파뉼라 맞지?”
캄파뉼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새빨간 까마귀가 서 있었다.
* * *
이걸 오빠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여전히 고뇌에 찬 표정을 하고 시간 도서관으로 향하는 라베의 걸음이 느려졌다 빨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기 무서워, 최대한 빨리 털어놓는 게 그래도 좋지, 하지만, 그렇지만. 두 마리의 까마귀가 한쪽 어깨씩 차지하고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본관 건물에 다다른 라베는 급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 저기 서 있는 사람 왠지 익숙해 보이는데. 저번에 여기 왔을 때 본 사람인가? 혹시 사서인가?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야 그 사람의 머리색이 제대로 보였다. 선명하고 부드러운 하늘색이었다.
어, 어? 당신!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어느새 입 밖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캄파뉼라, 맞지?
이곳에서 이름을 불릴 줄 몰랐는지, 상대방은 멈칫 굳었다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긴장으로 잠시 눈이 가늘어졌다 그쪽도 라베를 알아보았는지,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뜻밖의 재회에 들뜬 라베는 캄파뉼라가 서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캄파뉼라는 차분히 그 자리에서 라베를 기다려줬다.
“오랜만, 이라고 해야 할까요?”
캄파뉼라가 인사를 건넸다. 라베는 방긋 웃으며 동의했다.
“그럼, 오랜만이지! 그 이후로 이래저래 일도 있었고. 하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내 행운도 완전히 휴가 간 건 아닌가 봐!”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지라, 캄파뉼라는 잠시 다음 말을 고민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기억한 듯, ‘잠시만요’라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캄파뉼라가 손을 펼쳐 자신에게 내밀었을 때, 라베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자신의 십자가 장식이 캄파뉼라의 손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당신 것이죠?”
본능적으로 내민 자신의 손안으로 캄파뉼라가 조심스레 장식을 떨궈줬다. 맞는데, 이걸 어떻게? 난 꼼짝없이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음, 캄파뉼라가 뜸을 들였다. 조금 긴 이야기인데요. 일단 오베로 숲에서 세이스타드로 가는 길에 우연히 주웠어요. 더한 우연으로 당신 동생들을 만나서 세이스타드로 안내를 받았고, 당신 언니 되는 분에게 이걸 카렌 키르헤라는 사람에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받았죠. 카렌 키르헤, 당신 오빠 맞죠?
그 전에 당신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칠 수도 있는 일이네요. 그 순간 라베가 두 손으로 캄파뉼라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기에 캄파뉼라의 말이 끊겼다. 잡히지 않은 한 손이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향해 움찔했지만 라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기쁨에 겨워 캄파뉼라의 손을 흔들고 있어, 캄파뉼라는 손을 놓아 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진짜, 진짜 고마워!! 엄청나게 곤란하고, 막막하고, 우울하기도 했고, 아무튼 진짜 살았다! 내 은인이야!”
“…은인이라고 할 것까지는.”
그것보다……. 캄파뉼라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그가 더 불편해하는 티를 내기 전에 라베는 그의 손을 놓아줬다. 하지만 용건이 끝나기는커녕, 라베는 캄파뉼라 옆으로 바싹 붙어왔다.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캄파뉼라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휘었다.
“있지. 캄파뉼라, 시공여행자라고 하지 않았어? 이번에 내가 빚을 졌으니까 내가 여행길 좀 도와줄까? 도와준다고 하는 말은 좀 이상한가? 어쨌든, 나 우주라면 이곳저곳 엄청 많이 가봤거든. 그 외에 여행하기 좋은 행성도 많이 알고! 내가 잘 안내해줄게, 나만 믿어!”
“네?”
캄파뉼라에겐 따라가기 힘든 전개 속도였나보다. 하지만 라베는 여기서 캄파뉼라와 곧바로 헤어지기엔 너무 아쉬웠다.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인연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빚을 갚는다는 핑계를 댔지만, 라베의 본심은 그것보다 단순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캄파뉼라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데, 같이 여행이라도 하다 보면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으니 자신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라베는 자신의 친화력에 자신이 있었다. 우린 친구가 될 거야! 예의 바른 거절은 거절한다! 그러나 라베가 캄파뉼라를 더 설득해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라베?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에 라베의 시선이 캄파뉼라의 등 뒤로 향했다. 짙은 다크서클 때문인지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서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묻는 라베의 말에 남자는 ‘방금’이라 답하면서도 캄파뉼라에게 의아한 눈길을 줬다. 라베가 채 설명하기도 전에 캄파뉼라는 차분히 자신을 소개했다.
“캄파뉼라입니다. 카렌 키르헤 씨, 맞나요? 레미아 키르헤 씨의 부탁으로 왔었습니다만, 라베 씨를 우연히 만나게 돼서 일을 해결했네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를 어찌 바로 알아보셨네요.”
캄파뉼라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윈터크로스에서 만난 쌍둥이가 당신을 많이 닮았거든요. 사서복을 입고 있고, 라베 씨와 아는 사이에, 그 금발에 청회색 눈이면 답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카렌의 난입을 기회로 자리를 빠져나가려 시도하는 듯했으나, 이번엔 라베가 캄파뉼라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도서관 구경은 안 해? 전에 와본 적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면 한 번 보고 가! 구경할 건 많으니까!”
라베에게서 빨리 벗어날 길은 요원해 보였기에, 캄파뉼라는 오래지 않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이름은 라베 키르헤. 키르헤 6남매 중 셋째로, 현재는 고향인 윈터크로스 행성을 떠나 우주를 떠돌며 자신의 종족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종족이요?”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겉보기론 인간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는데, 놀란 기색을 숨기며 캄파뉼라는 물었었다. 라베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스피리캐스트라고, 들어봤으려나? 수호영에 각인하면 동물이나 새로 변신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종족인데. 내 수호영은 행운의 까마귀! 눈으로 보는 게 이해가 빠르겠지. 잠깐 기다려봐!”
그리고 캄파뉼라가 뭐라 말려보기도 전에 두어 걸음 물러서 공간을 확보한 후, 새가 날개를 펼치듯 두 팔을 밖으로 뻗었다. 환한 빛이 잠시 눈을 가리고 다음 순간, 캄파뉼라는 라베가 서 있던 자리에 새까만 까마귀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날개깃 끝이 라베의 머리카락과 같은 붉은색, 날카로운 눈이 익숙한 금빛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어떤 속임수가 있었나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어때, 멋있지? 멋있지? 사람의 입이 아니었던지라 라베의 본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지만, 말 자체를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파닥파닥, 몇 번의 날갯짓을 하며 까마귀-라베-가 캄파뉼라의 어깨에 자리 잡았다. 잠시 굳었다가 라베의 깃털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엉키는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캄파뉼라는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옆눈으로 힐끔 바라봤다.
“라베 씨가 까마귀로 변신하는 거라면, 다른 남매분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라베라고 불러, 라베! 친해졌으니까 우리 격식은 떼자고!
저는 이게 편해서요, 꿋꿋하게 항의하는 캄파뉼라의 말을 못 들은 척, 까마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같은 까마귀로 변신하는 거냐면, 그건 아니! 수호영은 유전되는 게 아니거든. 음, 그치만 테스라하고 테이트는 비슷한 고양이로 변신하더라. 쌍둥이여서 그런 건가?”
아, 그런데 나하고 같은 종족 사람들을 찾는다고 하긴 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같았던’ 종족이라고 해야겠네. 변신 능력은 여전하다 보니 내가 이제 월의 관리자라는 걸 자꾸 까먹게 된단 말이야.
…네?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잊고 까마귀가 앉아있는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냥 이곳저곳 여행 다닌다면서요?
모험가,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시공여행자가 아닐까, 어렴풋이 했던 짐작이 거하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가볍게 캄파뉼라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베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행성의 일에 깊게 관여할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여행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으니까. 뭐, 그 대신 이것저것 특혜도 있긴 하고. 숨기려던 게 아니라 그냥 말하는 걸 까먹고 있었어.”
까먹을만한 게 따로 있지, 그래도 상당히 중요한 직책 같은데. 아연한 표정을 최대한 숨기며 캄파뉼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라베는 자신의 여행길을 따라다닐 것 같았으니 익숙해지는 수밖에 더 있으랴.
“제가 라베 씨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 이 이상 없겠죠?”
“라베! 라베 씨라고 불리는 건 기분이 이상하다고. 나도 캄파뉼라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니까 공평하게 나도 라베라고 불러줘!”
누군가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덴 영 익숙하지 않은 캄파뉼라였지만, 이번에도 우승은 결국 라베가 거머쥐었다.
* * *
캄파뉼라를 이 행성, 저 행성 끌고 다니며 가이드처럼 그곳의 역사나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라베에게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월의 관리자나, 하다못해 경력이 조금 있는 시공여행자만큼 지식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지만, 캄파뉼라가 시공여행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라베가 그를 이끄는 데엔 별 무리가 없었다.
“우주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걸 보니, 오랫동안 여행을 하셨나 봐요?”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으나 라베는 흐음, 콧소리를 내며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러게, 윈터크로스를 떠난 지도 좀 오래됐으니까. 처음 여행을 시작한 게 100년 전쯤이려나?”
순간 잘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 캄파뉼라를 옆에 두고 라베는 손에 턱을 괸 채 오래된 기억을 되짚었다. 맞아, 그때 처음 윈터크로스를 떠났었고, 엘이 자신도 모험 떠나고 싶다는 걸 오빠가 말리느라 고생 좀 했었지.
캄파뉼라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될까요?
“나? 올해로 딱 150! 기억하기 쉽지? 아, 맞다. 캄파뉼라, 인간이었지? 비인간 종족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면 놀랄 만도 하겠네. 그런데 어차피 외형으로 보이는 나잇대는 비슷하니까 편하게 대해도 상관없어!”
캄파뉼라는 몇 살이야? 스물셋입니다. 그렇구나! 여행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됐다고 했지? 그전에는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어? 래디아타 대륙의 솔레유 제국, 인데 제국이 대륙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서 어떻게 부르든 상관은 없지만요.
이후로 라베는 계속 캄파뉼라에 관해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짤막하고 간결했다. 캄파뉼라 본인, 또는 그의 과거에 대한 것을 물을 때 특히 답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운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관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라베가 다가가면 피하지는 않는 캄파뉼라였다. 그렇지만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 한두 개쯤은 있다는 것을 라베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진 않았다.
시무룩해진 심정이 라베의 얼굴에 솔직하게 드러났는지, 캄파뉼라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조곤조곤 달랬다.
“…숨기는 것이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와서요. 라베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했어도, 대답하긴 여전히 어려웠을 거예요.”
그래도 이런 변명을 해줄 만큼, 같이 다니던 몇 주간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증거 같아서, 라베는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조금 더 가까워지면, 편해지면, 그땐 내가 궁금해하는 거 전부 답해줘야 한다? 라베는 캄파뉼라의 소매를 붙들고 길거리의 판매대로 척척 걸어갔다. 우리 저거 먹어보자! 캄파뉼라는 불평 없이 순순히 이끌려갔다.
캄파뉼라보다 한발 앞서 척척 걸어 나가던 라베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분홍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보았다. 오늘도 캄파뉼라의 미모는 눈부시구나, 라베는 말없이 감탄했다. 슬슬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아무래도 콩깍지가 씌었는지 하루하루 빛이 나는 얼굴을 감상하기 바쁜 라베였다. 라베가 캄파뉼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땐 캄파뉼라 역시 ‘얘 또 이러는구나’, 가볍게 넘길 만큼 빈도가 잦기도 했고.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니까 이 정도쯤이야! …친구 맞겠지?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라베는 단순히 캄파뉼라가 좋았다. 예쁘기도 하고, 나름 친절하기도 하고, 자신이 곤란해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처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기도 했고.
달달한 와플 아이스크림은 자신의 몫.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캄파뉼라에겐 과일 꼬치를. 판매대에서 간식거리를 산 라베는 캄파뉼라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이거 다 먹고 저기 서쪽 지역에 있다는 공터로 가보자. 다 폐허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숨겨진 유적도 있을 거라는데?
어차피 캄파뉼라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시간도 많겠다, 나중에 해도 될 거라고 라베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민의 시기를 앞당길 무언가를, 그들이 향할 유적에서 마주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 *
그가각. 기이하게 꺾인듯한 울림과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캄파뉼라와 라베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그러나 파괴의 소음은 점점 가까워져, 숨어봤자 소용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거 대체 뭔지 알아요?”
한껏 소리를 죽여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캄파뉼라가 라베에게 속삭였다. 라베는 입술을 짓씹었다.
“카이제…라는 괴물인데, 보시다시피 엄청 크고, 힘도 세고, 그나마 다행히도 지능은 없지만. 아니 그런데 왜 저런 게 여기에 있지?”
콰광.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유적 복구하려면 여러 사람이 꽤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들었지만, 당장은 생존마저 급급해 보였기에 캄파뉼라는 상황 파악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주를 여행하며 여러 종류의 인간, 비인간을 봐왔지만, 저런 괴물은 처음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고민하던 와중, 라베가 갑자기 캄파뉼라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끌어당겨진 캄파뉼라의 뒤로 그들이 몸을 숨기던 벽이 무너져내렸다. 그들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한참 젖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괴물의 몸집은 앙상했지만 크기는 어마무시했다. 짐승의 길쭉한 세모꼴의 얼굴이 그들을 향했지만, 그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빠른 시간내에 몸을 숨겼지만 그 많은 장애물 속에서 그들을 찾아낸 걸 보면 아마 시각에 의존하는 괴물은 아닐 거라, 캄파뉼라는 추측했다. 그 추측이 맞다면 널려있는 돌무더기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기에 곤란한 문제였다.
도망칠 수 없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지. 빠르게 판단을 마친 캄파뉼라가 한 손을 검 자루 위에 올려 발도할 각을 재는 찰나, 라베가 다시 캄파뉼라의 손을 잡아채고 괴물의 반대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둘 다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찰 만큼 빠른 속도로 괴물한테서 멀어지며 라베가 헐떡였다.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저거, 만다라가, 아니면, 공격이 안 먹히거든! 일단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겉보기와 달리 꽤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캄파뉼라에겐 짜증 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으나, 캄파뉼라는 라베의 판단에 토 달지 않았다. 카이제를 처음 본 자신보다야 라베가 그 괴물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았으니. 만다라라는 말에 문득 자신이 아는 유일한 만다라, 카페의 사장 루예나가 생각났으나 이 상황에서 그에게 연락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 연락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고.
날카로운 본능이 눈보다 빠르게 경고한 순간, 캄파뉼라는 달리던 라베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한 라베가 넘어지지 않게끔 어깨를 붙들어준 캄파뉼라는 인상을 쓴 채 불과 몇 번의 뜀박질 만에 자신들을 추월한 괴물을 경계했다.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을 갈 수 없는 상황 같은데요.”
라베가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큰일 났다, 어떡하지. 일단 내가 변신해서 몸집을 키워볼 테니 네가 내 위에 올라타면….”
캄파뉼라는 고개를 저었다.
“라베 혼자라면 모를까, 저까지 태우고선 속도가 너무 느려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 봐야지!”
그러나 라베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괴물이 다시 그들 위로 덮쳐왔다. 캄파뉼라가 한발 빠르게 라베를 괴물의 앞발 아래서 다시 끌어냈다.
“…그래요.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보는 게 맞겠죠.”
캄파뉼라가 검을 빼 들었다. 양손에 하나씩 들린 검의 날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베를 자신의 등 뒤에 두고, 캄파뉼라는 긴장을 놓지 않고 카이제에 시선을 고정했다.
“변신할 시간은 벌어보죠. 그 이후는 당신에게 맡길게요.”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라베 역시 죽게 둘 생각도 없었다.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캄파뉼라가 계속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가와 준 라베를, 캄파뉼라는 이제 기꺼이 친구라 칭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까워진 사람을 다시 잃어버리기는 싫다는 감정이었을까, 발악이었을까.
캄파뉼라는 한 발 내디뎠다. 자신의 앞에 드리운 괴물을 노려보며, 어디를 베어야 그나마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무수식舞修式, 섬려纖麗의 춤.”
그 말과 함께 무언가 눈앞을 스치듯 뛰노는 것 같은 잔상을 보았다. 그것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춤과도 같았다. 그 몸짓의 향연 속에서 카이제는 아주 오싹하고도 기묘한 울음소리를 길게 내질렀다. 그제서야 캄파뉼라는 그것이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의 시력이 거의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행해진 공격이었던지라, 캄파뉼라는 카이제가 쿵, 소리와 쓰러지고 나서야 간신히 괴물이 입은 피해를 볼 수 있었다. 이마에 있던 보석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아이 참, 기분 나쁘게 왜 이런 데까지 싸돌아다닌대?”
내 귀여운 아기새들 위험하게. 그치? 오랜만이야, 안녕! 청발과 금발이 섞인 밝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금 괴물을 쓰러뜨린 장본인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느긋함이었다.
어, 어? 저 사람 설마? 허투루 3월의 관리자 직을 맡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라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캄파뉼라는 안도 반, 피곤 반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안녕하세요, 루예나 씨.”
우주를 닮은 보라색과 푸른색의 눈을 접으며, 달의 만다라는 활짝 웃었다.
* * *
푸른 바다 위로 정겨운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고, 시끌시끌한 부두와 하얗고 파랗게 복작한 거리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화음을 넣는 도시. 그 거리에 있는 한 가게 안에선.
그러니까 이걸, 삼자대면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엇나간 생각을 하며 라베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 루예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뭇 무례하다고 생각할 만도 했지만 루예나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방글방글 웃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캄파뉼라 뺨치는 미인이잖아? 라베는 옆에 앉은 캄파뉼라를 쿡쿡 찔렀다.
“만다라의 대표, 루예나 님하고 아는 사이라곤 말 안 했잖아?”
“그런 말을 할만한 주제가 안 나왔으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깜빡이도 안 켜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심장에 안 좋다고!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는 라베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하던 캄파뉼라는 루예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에이, 뭐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우리 사이에~”
살랑살랑 손사래를 치며 루예나는 라베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찡긋했다. 네가 3월의 행운, 라베 키르헤지? 같이 여행하는 걸 보니 엄청 친한가 봐~
캄파뉼라는 말없이 앞에 놓인 음료를 들어 홀짝였다.
“다 알고 계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으시는 것도 여전하시네요.”
“그래도~ 직접 당사자한테서 듣는 거야말로 제일 좋은 거라구~?”
가벼운 대화가 몇 번 오가는 사이 라베는 드디어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지만, 라베 키르헤, 3월의 관리자입니다! 여기 캄파뉼라하고 같이 여행 다니는 사이고요. 얼마나 오래됐지? 두 달? 좀 안됐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설마 그런 데서 카이제가 튀어나올 줄 몰랐거든요. 어떻게든 튀어보려고 하긴 했는데 그것도 어려워 보였고. 캄파뉼라 아니었으면 벌써 사지 어딘가 하나쯤은 날아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때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준 모습에 의외로 설레기도 하고, 기뻤을지도 모른다고 라베는 곱씹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친해지긴 했다지만, 캄파뉼라는 늘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었기에 배로 기뻤을지도. 라베는 캄파뉼라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음, 음, 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루예나가 화제를 전환했다. 뭐, 사건도 일단락되었고 미스티쇼어까지 온 김에 둘이 구경이라도 하고 가. 시공여행자라면 당연히 미스티쇼어를 보고 가야지! 볼 건 많을 테니 심심하지는 않을 거고, 추천이라도 해 줄까? 북쪽으로는 해수욕장이 있고. 저어기 번화가 길도 예쁘니 볼만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바닷가에서 불꽃놀이 해주기도 하고. 오늘 날씨도 맑으니 아마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음료를 다 마신 걸 확인하고 루예나는 둘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루예나의 초대를 받아 엔스파일 행성까지 와서, 이제는 거의 관광을 강요받는 상황을 맞이한 캄파뉼라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라베는 반대로 눈을 반짝이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캄파뉼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캄파뉼라는 움찔했지만 라베의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잘 놀다 갈게요!”
루예나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분명 좋은 일도 있을 테니까. 속삭이듯 남긴 말은 루예나 본인만 들었다.
* * *
미스티쇼어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루예나가 추천해준 대로 라베와 캄파뉼라는 제일 가까운 번화가부터 들러 오후의 대부분을 보냈다. 바다 도시 느낌을 물씬 풍기는 하얀 벽돌의 도로를 걸으며 라베는 캄파뉼라를 이리저리 잡아끌었다.
와, 이것 좀 봐봐! 저거 멋있다! 속절없이 끌려다니며 캄파뉼라는 그 나름대로 맞장구를 치며 라베와 어울려줬다. 네, 네. 시간은 많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뛰지 마세요. 사람들하고 부딪히면 어쩌려고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저녁이 다가와, 하늘에 보랏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노을이 온전히 보라색인 행성이라니.”
캄파뉼라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옆에서 라베도 그를 따라 고개를 젖혔다.
“맞아, 엔스파일 행성은 저녁엔 하늘이 보라색이 된다 하더라고. 만다라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 라고 했을걸?”
만다라라. 이 현상 역시 루예나와 관련된 것이었을까?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볼까 고민하는 캄파뉼라의 팔을 라베가 톡톡 두드렸다. 우리 저녁 먹고 바닷가로 가보자. 미스티쇼어 항구도 가보고 싶었는데 저녁 먹고 나면 시간이 늦을 것 같으니, 그건 내일! 캄파뉼라는 별 불만 없이 동의했다.
저녁으로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연어 요리를 먹고, 둘은 바닷가로 향했다. 불꽃놀이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몰렸는지 해안가는 북적북적했다. 하늘은 이제 짙은 보라색이 되어, 차차 밤의 색깔이 깔리고 있었다. 낮에는 하얀색으로 보였을 모래 역시 어둠에 물들어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래지 않아,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졌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다양한 가지각색의 빛무리를 보며 사람들은 들뜸과 흥분 속에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라베 역시, 눈을 반짝이며 환호했다.
“와, 진짜 마법 같지 않아?”
캄파뉼라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마법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을 광경이긴 하네요.”
불꽃놀이가 끝나고 하늘이 다시 완전한 어둠에 깔리자, 사람들은 하나둘 해안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파도가 모래 위로 밀려오며 찰싹이는 소리가 라베와 캄파뉼라의 귀에 들려올 정도로, 해안가는 한산해졌다. 저 멀리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 두어 명만 보일 뿐,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 생각이 옆에 있는 이에게로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라베는 캄파뉼라의 옆얼굴을 살짝 올려다봤다. 수려하고 고운 선이 시선 가득 들어찼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보면 심장이 뛰었다. 어쩌면, 첫눈부터 반해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친근함 아래 감춰진 더 열렬한 감정을 이제서야 자각했으니. 우리의 관계는 이제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친구?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라베는 캄파뉼라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에서 더 나아가, 너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너를 더 가까이에서, 계속, 보고 싶은 욕구가 든다면. 나는 이 감정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캄파뉼라’, 그의 이름을 조용히 뇌까린 어조에 ‘네’, 마찬가지로 고요한 답이 들려왔다. 라베는 캄파뉼라를 향해 몸을 틀었다. 해가 진 이후에도, 여전히 밝게 빛나는 황금색의 눈이 캄파뉼라만을 담고 있었다.
“나, 너를 좋아해.”
담백하고도 간결한, 하지만 강렬한 고백이었다. 너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엔스파일을 떠나서도, 네가 우주를 여행할 때도. 어디로 가든지. 내가 그 옆에 있고 싶어.
설레는 만큼 불안한 마음을 품고, 라베는 기다렸다. 캄파뉼라의 답이 어떨지 예상하기엔 가슴이 너무 떨려왔기에, 그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기다릴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캄파뉼라의 겉 표정만큼은 평온해 보였다. 오직 그의 흔들리는 벚꽃색 눈동자를 통해서만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느냐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캄파뉼라는 타인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뛰어났고, 라베는 솔직한 만큼 읽기 쉬운 상대였다. 여태 라베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것을 모른 척한 이유는, 그저 캄파뉼라가 타인의 호감을 기꺼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달의 만다라의 인도 하에 래디아타라는 구속구를 벗어던지고 떠났음에도, 캄파뉼라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생소하게도, 라베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캄파뉼라는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 자신이 성장할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보단, 라베에 의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는 뜻일까.
그러니, 이젠 그만 물러서겠다고. 내밀어진 손을 이제야 잡아보겠노라고, 캄파뉼라는 결심했다.
“…저도 같이 있고 싶습니다. 라베, 당신과 계속.”
들릴 듯 말듯, 조용한 맞고백이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익숙지 않던 캄파뉼라가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캄파뉼라는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내밀어, 라베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라베의 얼굴에 세상을 다 가진듯한 만개한 웃음이 피어났다. 캄파뉼라도 새가 사뿐히 내려앉듯,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황혼이 지고 바다 위로 달이 떠오를 때까지, 그들은 그곳에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
그래, 이것이 까마귀와 캄파뉼라의 이야기의 시작.
우주를 여행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한참 남아있고, 언젠가는 이어서 들려주게 될 수도 있는 이야기.
하지만 누군가에게 들려주지 않더라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 마법 같은 소중한 이야기.
자 그럼, 당신의 이야기도 안녕하십니까?
Written 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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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솜코코(@im_nelin)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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