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寶石
일산의 종합 전시장은 적당한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양희태는 정문 근처의 전시 안내 게시판을 떠올렸다. 같은 건물에서 학술대회 이외의 이벤트가 두어 개 정도 개최되고 있는 듯했다. 그것들에 관심은 없다. 단지, 그로 인해 몰린 인파가 다소 성가실 뿐이다.
한국천문학회 학술대회는 제1전시관을 점유한다. 홀 네 개 짜리의 거대한 전시관 전체를 점유하는 것은 아니다. 건물 가장자리의 홀 하나와 회의실 세 개만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다른 이벤트는 남은 홀 세 개에서 개최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주얼리에는 관심 없나?"
전시관의 로비를 휘휘 둘러보던 이의엽이 물었다. 이번 학회의 유일한 동행인이다. 희태는 생기 없는 눈을 잠시 내리깔다가, 이내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대답을 고르기 시작했다.
"예."
의엽은 훗 하는 코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뿜었다. 관심이 없다는 대답 정도는 일찍이 예상했다는 반응으로 보였다.
그와는 같은 천문대에서 일 년 가까이 일했으니까. 자신의 취향이 파악되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의엽은 소장의 자리에서 소수의 직원들을 컨트롤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직원의 범위에는 희태 역시 포함되어 있었고, 무난하게 부려졌다.
근 일 년 간 희태는 그의 판단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적확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합리적이다. 그러니 반론을 펼칠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십 년, 오 년 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사고 패턴이다.
둔해진 것이다.
타인의 취약점을, 보완점을, 개선점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희태는 1인용 기숙사의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빽빽이 들어선 침엽수.
사시사철 푸르게 물든 그들을 희태는 하룻밤 내내 동경했다.
"어디 보자. 오늘은 볼 만한 세션이 있나?"
어느새 팜플렛을 손에 든 의엽이 내용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인터넷 웹사이트에 게재된 파일과 다를 것 없는 차례를, 희태는 그의 옆에서 훑어내린다. 기억과 동일한 지면이 눈앞에 있었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 동일한 위치에 새겨 있다.
"성일 씨는 오후 발표군."
"그렇습니다."
"간만의 학회인데, 다른 발표도 좀 듣지 그래."
의엽은 뒤이어 천문생물학따위의 학문을 입에 담는다.
"흥미가 없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분명 그렇겠지."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의엽은 홀 안으로 입장했다. 희태도 뒤를 따른다.정문 근처에 매달린 전자 시계로 시각을 확인한다. 열두 시 사십 칠 분. 성일의 발표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십삼 분. 이곳에서 두 시간이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차라리 빠르게 성일을 만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한 사실은 없다. 그 역시 자신이 이곳에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학회에 얼굴을 잘 내밀지 않는 인종이니까. 나 자신은. 적어도, 최근 이십 년 간은 얼굴을 디민 기억이 없다. 이십 일 년 전의 학회에서는 별 것도 아닌 발표를 했다. 초청을 받았었다. 스위스에서 한국까지는 15시간이 걸린다. 장거리 비행을 하고 싶지 않아 거절을 하려다가, 마침 신이 한국으로 들어갈 일이 생겼다고 하여, 함께 귀국했다. 학회로 이동하기 전 그는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었다. 아홉 살 짜리 남자 아이. 신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새카만 머리 뿐이었던 아이. 아이는 내가 들고 온 과자 상자를 받아들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아이를 좋아했다. 신의 세포에서 발생한 아이. 하지만 신과 전혀 닮지 않은 그 아이. 유전의 비엄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생명. 학회에서 발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탕 한 봉지를 샀다. 다섯 가지 맛의 사탕이 퍼지하게 섞인 봉투를 다시 아이에게 내밀었다. 웃는 얼굴이 정말이지 신과 닮지 않아서 나는 흥미를 느꼈다.
포스터 앞에서 서성이던 학생은 적당한 인지도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발표자가 그 신성일 교수인데,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미세한 각도로 상승하는 교수의 입매. 기대와 불안이 임계 농도로 믹스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학생. 신의 발표 주제를 생각한다. 학생 뒤에 붙은 포스터의 내용을 한 눈으로 흘긴다. 듣는 것만으로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을 성싶다. 하지만 그런 감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젊은 학자를 공격해 봤자 얻는 건 없다. 이제.
의엽을 따라 홀의 절반을 걷는다.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단상에는 발표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이 간혹 모습을 보이다가 사라질 뿐이다. 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본래 사람이 많은 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사람이 많다. 그의 인구 밀집 기준을 훨씬 넘은 정도로 사람이 많다. 신의 불편해하는 얼굴을 떠올린다. 불쾌해하는 얼굴을 떠올린다. 이십 년 전에는 언제나 그런 표정을 보았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서 불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얼마 전의 가을날에 보았던 신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십 년 전에 비하여 평온했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을 보고 순간의 두려움을 느꼈던 자신을 떠올린다. 모두가 늙어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
우주는 고립되어 있다.
심장의 고동을 느낀다.
시각의 이질감.
청각의 이물감.
지각의 이탈감.
차원의 이격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걷는다.
포스터.
사람.
전시물.
사람.
그들의.
눈동자.
움직인다.
나를 향한다.
말을 걸려 든다.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눈동자.
움직인다.
남을 향한다.
말을 걸려 든다.
익숙한 목소리가 대답.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 친구는 늘 그렇습니다. 왜, 천재들이란 으레 괴짜이지 않습니까. 저희 천문대에서도 독특한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듣습니다. 아마 해외에서도 그랬을 겁니다만. 그쪽은 또 풀이 다르니까요. 어쩌면 이 친구 같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을지도요. 아아, 그래서 한국에 들어오질 않았던 건가? 그쪽이 더 마음이 편해서? 하하하.
의식적인 호흡.
중력을 감지한다.
9.8 뉴턴의
구역감
몸이 안 좋으신가요?
왜 그래, 점심에 먹은 전골이 안 좋았나?
혀끝의 이동
성대의 울림
"몸살 기운이 조금."
한국어는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도 인식될 수 있는 점이 좋다고 생각한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
발바닥은 체중을 받치고 서 있다.
소란스러운 장내.
코를 찌르는 방향제의 냄새.
하나로 모이는 상.
명료해지는 현실 인식.
조금 춥다.
식은땀으로 젖은 등을 인지한다.
"괜찮은가? 세 시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디 앉아서 쉬고 있겠어?"
"괜찮습니다."
"저기, 강단 앞 의자에는 언제든 앉아도 괜찮은 거 같아요."
"괜찮습니다."
겉옷을 여민다. 장내의 난방은 평시와 같다. 희망 온도가 20도로 설정되어 있던 난방기기의 액정을 생각해 낸다. 체온 조절에는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전시물 앞의 여자는 당황한 티를 숨기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희태는 그제야 부스의 이름을 올려다 볼 생각을 해 냈다. 교육 관련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학회를 다소 잘못 찾은 느낌이 들지만. 어쨌거나 천문학 교육이니까. 게다가 국내 학회니까. 큰 상관은 없다.
"교육이라. 저희도 가끔 견학생들을 맞이하곤 합니다만."
의엽이 익숙한 각도의 눈웃음을 짓는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동행인을 바라본다.
"교육이라면, 가장 관심이 있는 건 자네 아니야?"
조심스러운 말투. 듣는 이의 컨디션을 배려한 것처럼 보인다. 희태는 포스터에 눈의 초점을 맞추다가, 의엽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저 말입니까?"
"자네, 천문대에 학생들이 오기만 하면 구경을 나가잖아."
"그렇습니다."
"가이드도 하고 싶어 했었지, 분명."
"비전공인을 향한 설명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전공자도 자네의 설명은 살짝 버거워들 하더군."
농담 조의 어투로 그리 말하곤 가볍게 웃는다. 희태는 웃지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의엽은 발표자를 바라본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좋아하시나요?"
발표자의 시선으로 보아, 명백하게도 희태를 향한 질문이었다.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대답한다.
"예."
애당초 망설일 필요도 없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보조자로 있으시는 건 어떠신가요?"
"교육 준비 인력을 말하는 겁니까?"
"아, 예. 비슷합니다."
말수 없는 연구자는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냐는 얼굴로 발표자를 바라본다.
"아, 안양에 어린이 천문대가 하나 생겼어요. 건물은 이미 준공이 끝났고, 지금은 개장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강사 뿐만 아니라, 기기 담당 인력도 모집 중이라 들었습니다."
"어린이 천문대?"
그것은 천문대라기보단 교육 시설에 가깝다.
"관심이 있으시면 한 번 컨택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의엽이 옆에서 우리 천문대의 귀중한 인력을 꼬셔내지 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희태는 자신의 근무 계약 기간을 생각한다. 올해 봄으로 일단은 만료가 될 것이다. 별 일이 없다면 연장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피어나는 생명을 보는 일은 귀중하다.
안양은 광명의 인근 도시다.
신은 광명에 거주한다.
조건은 모두 갖춰졌다.
단상의 신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한 감정변화를 파악한다.
단상 근처에 놓여있던 생수를 마신다.
발표를 재개한다.
희태의 예상보다는 놀라지 않았다. 아마, 주변인에게서 자신이 학회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의엽과 함께 홀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시선을 받았다. 갖가지의 속삭임을 들었다. 양희태 씨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좀 나이가 들었지만 그 사람이 맞다. 그런 사람이 국내 학회에 왜 와? 지금은 강원도 천문대에 있다고 들었으니까, 변덕이 생긴 게 아닐까. 그도 이제 늙었으니 레벨이 내려간 거다. 신성일 교수를 봐. 이런 곳에서 발표나 하고 있잖아.
신의 초록을 생각한다. 그와 같은 결의 발표를 경청한다. 그만이 주장할 수 있는 의견을 관람한다. 타 연구자의 발표보다 수준이 다소 높다. 희태는 그의 발표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동등한 레벨의 연구자. 동등한 레벨의 발표. 동등한 레벨의 반응. 적어도 한국에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연구자란, 희태가 알기로 그뿐이었다.
발표가 끝났다. 몇 문장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문 몇 가지. 유창한 답변. 더 이상의 물음은 없다. 근처의 시계를 확인한다. 네 시 이십 분. 상대적인 시간. 단상에서 내려오는 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게로 다가가는 연구자들. 담화가 짧기를 바란다. 신은 교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어색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이 역시 변화에 가깝다. 이십 년 전의 그는 미소를 짓는 날이 없었다.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졌다.
신은 안심한 표정으로 단상 뒤로 사라지려 든다.
희태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간다.
뒤를 돌아보는 신.
자신을 인식한 신이 흠칫 놀라고야 만다.
그 얼굴은 예상 범위 내의 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신은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난다. 그리고 한 손에 생수 통을 든 모습으로 희태에게 묻는다.
"왜, 이런 곳에?"
"자네가 발표를 하니까."
포멀한 차림새의 신은 눈동자를 어지럽게 굴리다가, 이내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친우를 맞아들였다.
종합 전시장 내부에는 카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전시장 정문을 넘어 시내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프랜차이즈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신은 샷을 뺀 핫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따뜻한 생수 하나가 같은 트레이에 놓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 트레이를 든 희태는 성일이 자리를 잡은 테이블로 향했다.
"......오랜만인가?"
삼십 분 전의 물음에 이제야 답하는 신.
"지난 가을에 보지 않았나."
이제는 년도가 바뀌었다. 계절 역시 바뀌었다. 한파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들이닥치고 있다.
"전화도, 했었지."
의아하다는 표정의 신.
"그렇게 오랜만이진 않지 않나?"
성일에게 따뜻한 생수를 건네며, 희태는 자신만이 시간의 왜곡을 느낌을 알아챈다.
대화 주제를 억지로 틀었다. 성일의 발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네의 실력은 여즉 녹슬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성일은 무표정하게, 때때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희태의 이야기를 듣다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물음을 던졌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희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대화의 주제를 다시 전환시키기로 했다. 이번 학회에 나온 포스터 발표자들. 크게 흥미가 가는 소재는 없지만 이십 년 전에 비하면 그 수준이 월등히 높아졌다. 성일은 무표정하게, 때때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태의 이야기를 듣다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물음을 던졌다.
"그런가?"
성일은 그 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익숙하다. 이십 년 전에는 언제나 이런 하루하루를 맞이했었다.
주제를 전환했다. 안양에 세워진 어린이 천문대의 이야기를 했다. 성일은 새 천문대의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상호의 사전지식이 동일하다면 이야기의 흐름은 간단해진다. 어린이 천문대의 고용 사정. 강사를 구하고 있다는 말에서 성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교수 일이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희태의 판단으로 미루어 볼 때, 성일은 업무만 아니면 교실 따위의 인구 밀도가 높은 장소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희태는 어쩐지 성일에게 조금의 동정을 품었다. 동시에, 남에게 동정을 품는 자신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따위의 분열이 자신에게는 익숙했다.
"안양에서 별이 보이나?"
의문스럽다는 표정.
"어린이 천문대? 천문대라고 부를 규모가 아니지 않나."
희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많아."
미간을 찌푸리던 신은 한순간 표정을 풀었다.
"......양의 뜻이 그렇다면야."
샷을 뺀 핫 아메리카노를 입가에 가져다 댄다.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다. 지나친 온기를 느끼고, 입을 달싹이다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곳이라면, 내 집에서 가까워."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이직의 조건에 포함되었던 정보. 신은 그러한 조건을 알고 있을까. 제가, 네 얼굴을 자주 보기 위해 근처의 직장을 찾고야 말았다고.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지만, 하나의 진지한 이유는 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신의 반응으로 보아 그런 사실은 알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희태는 그 사실을 깨달은 신의 반응이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길게 찢어진 눈이 번쩍 뜨일까?
작은 동공이 한순간 팽창할까?
어쩌면 아무 반응이 없을까.
희태는 남몰래 신의 성정을 시뮬레이션하다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무표정하니 온순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십 년 전의 추억을 잠시 회상하다가, 자네는 참 바뀐 게 없군, 나는 이렇게나 무뎌지고야 말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예민했던 그 시절의 눈을 가지고 있군, 그것은 부러운 일이다, 자네는 아직 학자이구나, 나는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고야 말았는데.
"......거처가 구해지지 않으면, 잠깐 자네의 집에서 묵어도 되겠나?"
신의 표정이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분명, 이십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때의 자신은 오만했다.
생활을 같이 하는 상대를, 관찰하고, 또 컨트롤하려 들었다.
일찍이 그런 경험을 한 신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해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하지만 신은 거부하지 않았다.
희태는 반쯤 감긴 눈으로 커피를 홀짝이다가, 가늘게 미소지었다.
그것을 미소라고 생각하는 이는 분명 신 뿐이었으리라.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서 전시장으로 향했다. 겨울의 태양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 들고 있다. 이런 시간에 학회에 가 봤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만찬의 참가 뿐이다. 신에게 만찬의 참가 여부를 물었다. 자신은 그런 교류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것 역시 예상 범위의 답변이었다. 신은 역시 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포스터 발표를 볼 건가?"
제 1전시장에 들어서서 희태가 물었다.
"응, 둘러보고 싶어."
신은 길다란 머리칼을 흔들며 대답했다.
자신은 관심이 없지만, 동행인이 관심이 있다니 둘러볼 수밖에 없다. 의엽은 이미 만찬에 참가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교류를 좋아한다.
바로 옆 홀에서는 주얼리 관련 이벤트가 한창이다.
고가의 물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탓인지, 경호 인력이 전시장 곳곳에 보인다.
귀에 검은색 이어폰을 꽂고, 전시장에 입장하는 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전문 경호 인력이리라.
학회가 마무리 중인 홀로 다가간다.
신은 무표정하다.
언제나와 같이.
안정적이다.
평온하다.
돌연 모르는 남자가 시야에 뛰어들었다.
조금 흥분한 기색의 눈알이 인식된다.
복부에 날카로운 고통이 부닥쳐 온다.
뜨겁다.
격통.
무너지는 신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한다.
복부를 내려다 본다.
날붙이가 피부를 뚫고 파고든다.
격통.
오그라드는 촉각.
끊어지는 근섬유.
절단되는 내장근육.
넘쳐흐르는 혈액.
격통.
눈동자를 굴린다.
신을 확인한다.
상황 파악을 하는 얼굴.
오그라든 동공.
격통.
더욱 파고든다.
무릎의 관절이 꺾인다.
남자가 제 위로 올라탄다.
복부에 파고들었던 날붙이를 뽑아낸다.
출혈.
격통.
어째서?
몸체를 향하는 날붙이.
사고가 원활하지 않다.
적혈구가 부족하다.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날붙이가 몸체를 향한다.
주저가 없다.
어째서?
팔을 든다.
들려고 들었다.
어깨 관절은 움직이지 않는다.
날붙이가 심장을 향한다.
적확한 움직임이다.
나는,
죽을 수 있나?
아주 조금 상기된 정신을 지각한다.
쇼크로 제정신이 아니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안쪽의 자신.
온몸으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흐려지는 시야.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러니, 여태 움직임이 없는 것인데.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인지한다.
소란.
에코.
메아리.
이쪽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
격통.
흐려지는 의식.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저지당하고 있다.
아까의 경호 인력?
분명, 그렇겠지.
혈액의 부족을 느낀다.
눈앞에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민다.
아, 야무지게도 찔렀네. 미친 새끼.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
구강의 움직임으로 발음을 예상한다.
비속어.
머리가 조금 긴 남자.
자신 정도의.
기장.
복부의 압박감.
지혈을 하고 있다.
몽롱함.
신은?
무엇을 하고 있지?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확장.
동공으로 쏟아지는 빛.
지체 없이 사라지는 의식.
이것이 마지막?
어쩌면, 그러할지도.
신은?
미안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출혈.
격통.
조금 춥다
체온이 올라가지 않는다
항상성의 종말
죽음?
안락하다.
기분 좋은 수면에 돌입하는 듯하다.
졸리다.
남자의 고함이......
페이드 아웃.
엔도르핀.
안락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無.
의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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