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4

문호 스트레이 독스 - 다자이 오사무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벌써 포트 마피아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났다. 다자이 오사무는 무심한 눈길로 달력을 훑었다.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포트 마피아의 어둠에 평생 묻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렇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니. 과거에 자신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믿기 못하겠지.

무장 탐정사 직원들은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각자 개성이 강했지만, 전적으로 포트 마피이와 다르게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최대한 사람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움직이는 자. 다자이는 그게 마냥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쪽으로 움직이려면 더 많은 걸 포기하고 힘든 길을 가야 한다. 그 끝에 원하지 않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겠지.’

포트 마피아에 있을 때처럼 무조건 보스의 말에 순응하지 않아도 된다. 무장 탐정사는 사람이 적었다. 가볍게 사무 보조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수의 이능력자들이 사건 해결에 나섰다. 사소하게 심부름꾼 역할을 맡을 때도 있지만, 때론 포트 마피아보다 더 악질인 이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장, 후쿠지마는 어지간한 긴급 사태가 아닌 이상 터치하지 않았다. 다자이는 어째 모습이 탐정사 개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다자이가 처음 들어갔을 때도 그들은 넉살 좋게 웃었다. 정말이지, 좋은 녀석들이었다. 이따금 다자이는 홀로 술을 마시며 옛 과거를 회상했다. 만약 이런 곳에 오다 사쿠가 있었더라면,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텐데.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하면서 모두와 잘 어울리겠지. 그뿐만이 아니라……. 다자이는 생각하는 걸 관두었다. 이미 삼도천을 건넌 이를 떠올려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진작에 모든 걸 잊고 새 삶을 살 거다. 다자이는 조금이나마 오다 사쿠가 부러워졌다.

살아가기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시절을 잊을 수 있다니. 다자이는 평생 환생이나 윤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이론은 다자이의 관심 밖이었다. 얼핏 겉핥기식으로 알아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 지식을 드러내는 건 여자를 꼬실 때 외에는 없었다. 나머지는, 글쎄다.

달력에서 눈을 떼자 이번에는 창 너머가 보였다.

탐정사의 기숙사는 낡았으나 필요한 건 최소한 갖추고 있었다. 조금 더 돈을 모은다면 좋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겠지만, 다자이는 예전부터 거처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누워서 편히 잘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않나. 낡은 집에서 홀로 술을 홀짝인다고 해서 그 맛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뭐,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거야 쿠니키다를 데려오면 그만이다. 그럼 그는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하며, 자신의 이상론을 펼치겠지. 다자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쿠니키다의 속을 살살 긁으면 된다.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저번 달에는 무척 추웠다. 평소처럼 가볍게 입고 나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쿠니키다에게 SOS를 보냈다가 잔뜩 혼났지. 뭐라고 했더라? 아무리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고 해도 주의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자이는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뇌전은 그야말로 다자이를 위한 독무대였다. 그래도, 뭐. 여기서는 예전보다 머리를 덜 써도 되는 점은 좋았다. 몇 겹의 함정을 파놓은 채 상대가 걸릴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상대의 죽음, 자신의 이득만이 남았다.

‘역시 포트 마피아에서 나오길 잘했네.’

다자이는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창틀에 턱을 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으나 바깥은 여전히 추웠다. 냉기가 다자이 곁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때리고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었다. 다자이는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는 감각을 느꼈다. 낮게 숨을 토해내자 차가운 입김이 모락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자이는 창틀에서 떨어졌다. 이대로 있다가 방이 싸늘하게 식어버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겨울에는 난방이 잘되지 않았다. 아예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방을 따뜻하게 데우려면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기다리는 건 질색이었다. 다자이는 얇은 연갈색 코트를 두르고 밖으로 나섰다. 그의 목과 팔에는 꼼꼼하게 붕대를 두른 채였다.

방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시원함이 그를 맞이했다. 다자이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었다. 아, 맞다. 탐정사로 가야지. ……다자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에는 커다란 흰 구름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날도 좋다. 조금만 따뜻해지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엊그제부터 란포 씨가 벚꽃 구경할 준비를 하던데. 온갖 사소한 생각이 다자이의 머릿속에 고개를 내밀었다.

다자이는 평생 평화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작년이 되어서야 겨우 오다 사쿠의 말을 듣고 멋대로 포트 마피아를 빠져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트 마피아 입장에서 다자이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가진 채 빠져나간 생쥐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배신자였다. 당장 포트 마피아에서 인재를 보내 자기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여태껏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보스의 넓은 마음씨?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 보스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전 보스를 태연하게 죽이지 않았나. 그러면서 자신에게 입막음도 시켰다.

다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생각에 잠긴 채 걸었더니, 어느새 밝은 시내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카페를 비롯하여 여러 가게에서 달콤한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다자이의 시선이 한 가게로 향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은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 앞에는 체크무늬 천을 덮어둔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가득 상자가 쌓여 있었다. 옅은 분홍빛 포장지에 붉은 리본으로 포인트를 둔 상자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자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녀와 상자를 응시했다. 소녀는 다자이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다. 대충 들어보니 초콜릿을 파는 것 같았다. 다자이가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소녀는 손님이 왔음을 직감하고 환히 웃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초콜릿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네, 그럼요.”

다자이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를 입에 담았다. 소녀는 이런 다자이의 모습에 잘 생겼다며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남자가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도 좋다며 샘플로 추정되는 모형을 꺼냈다. 모형은 한입에 넣기 딱 좋은 크기로만 이루어졌다. 총 9개였다. 다자이는 힐끗 상자를 보았다. 저 작은 상자 안에 9알의 초콜릿이 들어있다니. 초콜릿과 초콜릿 사이의 빈 공간이 작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다자이는 아무 고민도 없이 초콜릿 상자를 하나 들었다.

“어디서 계산하면 될까요?”

“아, 네! 저쪽 문으로 들어가셔서 보여주시면 될 거예요.”

상자를 손에 쥐었을 때 소녀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소녀는 제 뒤에 있는 가게 문을 가리켰다. 계산은 가게 안에서 하구나.

가게는 검소한 카페로 보였다. 얼핏 보았을 때 창 근처에 앉은 손님이 여럿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란스러웠던 바깥과 다르게 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렀다. 분위기도 제법 아늑한 게, 시간만 있다면 이런 곳에서 커피를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흐음. 탐정사 밑에 있는 카페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끔은 다른 곳에 있어도 되겠지. 다자이는 머릿속으로 이 카페의 위치를 기억했다.

상자를 들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살집이 있는 중년의 아저씨가 카페의 주인이었다. 그는 남자가 초콜릿을 사는 것을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얼핏 다자이를 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카페 주인은 예쁜 쇼핑백에 상자와 함께 서비스를 한껏 넣어주었다.

“자, 여기 있구려. …이건 내 개인적인 질문이네만, 혹시 초콜릿을 줄 상대가 있나?”

“글쎄요. 특별히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어서요.”

“흐음. 얼핏 초콜릿을 볼 때 당신의 눈빛이, 꼭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고?

다자이는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카페 주인을 보았다. 카페 주인은 자신이 잘못 내뱉은 발언이라는 걸 깨달은 듯 아무것도 아니라며 제 콧수염을 만졌다. 그러면서 흘긋 다자이에게 응원해주었다. 이게 무슨.

다자이가 초콜릿을 산 건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물이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한껏 목소리를 높인 채 파는 소녀에게서…. 잠시, 지금. 누군가 떠오른 것 같았는데. 다자이는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카페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이 제 귀를 마구잡이로 찢어 놓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카페 밖에서 나오자 다자이의 속내를 모르는 소녀가 반갑게 잘 가라며 인사했다. 다자이는 어색한 손길로 인사해주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쇼핑백 안에는 작은 초콜릿이나 사탕, 쿠키 등이 들어있었다. 초콜릿과 쿠키는 직접 만든 거 같았다. 사탕은 낱개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겉면에는 비교적 싼값으로 유명한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다자이는 망설이지 않고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우유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그다지 달지 않았던 탓에 다자이도 무난히 먹을 수 있었다. 사탕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까 카페 주인이 말할 때 왜 그렇게 당황했을까. 최대한 놀란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무심코 두 눈을 크게 뜬 것 같았다. 그래서 카페 주인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본래 다자이 오사무는 이렇게 사소한 반응도 잘 내뱉지 않은 사내였다. 포트 마피아에선 그에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걸 요구했다. 사소한 약점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누군가가 다자이의 뒤를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명석했던 다자이는 방심하지 말라는 말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다자이를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내인 척 태평하게 연기했다. 발톱을 잘 갈무리한 채 숨겼다. 자신의 뒷통수를 노리는 이가 생기면 온갖 함정을 준비했다. 함정에 빠진 적을, 다자이 오사무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준비한 계획을 모두 읊어주었다. 그러면 상대는 패닉에 빠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다자이는 그 틈을 노렸다. 포트 마피아에 들어갔을 때 다자이는 일부로 잔혹하게 자신을 노린 이를 죽였다. 그럼 자신의 악명이 높아졌고,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다. 다자이는 간부가 되기 전까지 일부로 그렇게 움직였다. 헛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도록.

문득 주위가 어두워졌다. 다자이는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았다. 다자이는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여기가 포트 마피아의 숨은 아지트로 향하는 길임을 눈치챘다. 아. 자신도 모르게 포트 마피아에 있을 때 생각하며 걸었더니 여기로 온 모양이다. 일찍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대로 갔더라면……. 다자이는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1년이 지났으니까 자신이 모르는 얼굴도 잔뜩 들어왔겠지. 다자이를 모르는 말단 직원이라면, 그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무기부터 꺼냈을지도 모른다. 다자이는 다양한 체술 등을 익혀두었다.

세상에는 이능력자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다자이의 이능력은, 같은 이능력자를 앞에 두었을 때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포트 마피아의 말단은 대부분 평범한 비능력자였다. 그들은 간편한 나이프나 총을 선호했다. 특히 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권총은 멀리서 겨눈 채 상대에게 협박할 수 있었다.

흐음.

다자이는 불량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골목은 쥐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오로지 적막만이 펼쳐졌다. 안쪽에서 얼핏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자신이 있다는 걸 숨기지 않은 듯했다. 이러다가 마주치면 곤란하겠지. 다자이는 한쪽 발을 뒤로 뺐다. 이대로 몸을 틀어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기, 누구야?”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다자이의 귓가에 꽂혔다. 다자이는 순간 멈칫했다. 제 귓가에 들린 목소리를 의심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다자이의 시선이 골목 안쪽을 향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으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히…….

검은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물결을 형성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마치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상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과거의 자신처럼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아사쿠라 체리. 약 1년 만에 그를 마주했다.

쿵쿵 뛰는 심장이 보다 제 존재를 드러냈다. 이대로 있다가 제 심장 소리가 체리에게 들릴 것 같았다. 그늘이 진 탓에 체리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다자이를 훑었다. 예상하지 못한 생쥐를 발견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태평하게 인사라도 해야 하나?

포트 마피아에 있을 적에 두 사람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다자이는 체리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품고 있었지만, 체리는 제 주변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다자이는 그런 체리의 한결같은 반응에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포트 마피아에서 나오기 전에, 그를 봤음에도 다자이의 심장은 죽은 듯이 조용했으니.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재회에서 거칠게 뛰는 제 심장이 낯설었다. 마음을 진즉 접은 줄 알았지만, 그때는 소중한 친우가 죽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을 뿐이다. 다자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체리를 보았다. 체리는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다. 옛날처럼 무덤덤한 눈빛으로 다자이를 훑을 뿐이었다. 그 시선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체리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 지옥 속에서 사지 멀쩡하게 있는 걸 잘 지낸다고 할 수 있을까? 흔한 안부조차 건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체리는 흥미가 없는 눈을 하면서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쉽게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안 그래도 포트 마피아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을 거다. 체리는 비밀 아지트로 들어가는 골목 안쪽에서 나왔다. 여전히 포트 마피아에 소속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아사쿠라 체리는 다자이 오사무의 목숨을 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얼핏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쇼핑백을 쥐고 있는 손이 미끄러워졌다. 이대로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움직여야 하나? 체리는 아무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우뚝 선 채 다자이를 보았다. 따로 동료들에게 연락하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골목 안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는 걸까? 여기는 곧바로 시내로 이어져서, 많이 사용하는 골목이었는데도?

그렇다면 다자이는 운이 좋았다. 자신의 체격을 고려했을 때 체리 한 명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었다. 탈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손에 쥐고 있는 쇼핑백을 이용해 시선을 돌린 뒤, 그대로 도망치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다자이는 영 내키지 않았다. 체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일절 하고 싶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자이는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체리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분명히 몇 번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없는 포트 마피아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 걸까? 1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특히 포트 마피아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많은 사람이 죽고, 새로 들어왔다. 당장 자기 자신만 해도 포트 마피아에서 죽은 사람을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체리는 자신을 잊어버린 걸까?

얼핏 말이 되는 것 같았지만……. 다자이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체리가 자신을 잊었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도무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체리는 어느새 골목의 어둠에 삼켜진 채 자리를 떠난 뒤였다. 뚜벅거리며 걷던 발소리가 점차 옅어졌다. 예기치 못한 찰나의 만남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차라리 먼저 용기를 내서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자이는 그대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이 골목은 유독 길이 복잡하게 얽혔다. 포트 마피아에서 제법 오래 지낸 사람이 아니면 길을 기억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따라가면 체리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될까? 다자이는 체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가는 게 아니다. 그는 단순하게도 체리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엄청난 욕심이라는 건 안다. 마피아에 있었을 적 체리와 다자이가 마주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짧은 만남은 모두 강렬한 추억이 됐다. 다자이는 골목 입구에서 여전히 서성거렸다.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혹시 체리가 저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오지 않을까. 골목은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에 묻혀버린 것 같았다.

다자이는 그대로 벽에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꼴사납게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골목 입구에서 떡하니 앉은 다자이는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았다. 쇼핑백 안에는 여전히 한입에 넣을 수 있는 간식이 잔뜩 있었다. 다자이는 그대로 쇼핑백 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탕이 나왔다. 조금 전에 먹었던 우유맛이 아니었다. 다자이는 거칠게 포장지를 뜯어내 사탕을 입에 넣었다. 옅은 단맛이 지친 다자이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문득 쇼핑백 안에 든 초콜릿 상자가 보였다. 상자를 보자마자 카페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던 말이었는데, 아득히 옛날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눈빛이, 꼭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카페 주인의 말은 정답이었다. 다자이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체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포트 마피아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체리라서 그런 걸까? 아님, 아님 범상치 않은 첫 만남 때문일까?

종종 다자이는 체리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자신을 잃었다. 체리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 무심한 눈빛이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움직일 용기가 없었다. 다자이는 한없이 뒤를 기약했다. 그때만 해도 다자이는 자신이 포트 마피아에 쭉 있을 줄 알았다. 여기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오다 사쿠의 마지막 말에 그렇게 동요했다.

스스로 처지가 우습다는 건 알고 있다.

눈길 한 번쯤 끌겠다고 광대처럼 행동하려는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원래 이런 존재였나? 어떻게 된 게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지? 다자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입꼬리를 잔뜩 올렸어도 그는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에서 한가득 부정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다자이는 쇼핑백을 한없이 노려보았다. 자신이 바보 같이 행동한 탓에 초콜릿은 가야 할 상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어떻게 해야 하나. 체리가 자리를 뜬 지 한참이 지났다. 이제야 찾아간다고 해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턱없이 낮았다. 오히려 다른 말단 직원과 마주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다자이는 여러 번 숨을 토해내며 심호흡했다. 그래도 체리에게 큰 상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멀쩡하게 잘 지낸 거 같았다. 나중에 다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다자이는 포트 마피아 내부로 향하는 비밀 장소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이용하면 체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평범한 말단 직원인 척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체리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었으나 운 좋으면 한 번에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자이는 덧없는 희망을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체리와 관련된 일이면 그런 덧없는 희망에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추해진다. 다자이는 무심한 눈빛으로 쇼핑백 안에 고이 모셔진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를 벗기자, 소녀가 보여주었던 샘플과 똑같은 초콜릿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다. 다자이는 조심스럽게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났다. 다자이는 자기 처지에 정말 잘 어울리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초콜릿을 한 자리에서 다 비웠다. 빈 상자를 보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눈빛에서 벗어났다. 추운 날에 골목 어귀에서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다자이는 두 팔을 위로 올려 가볍게 움직였다. 빈 상자는 그대로 쇼핑백에 넣었다. 단 걸 잔뜩 먹었더니 짭짤한 게 끌렸다.

다자이의 발걸음은 탐정 사무소가 아닌, 이 근방에서 적당히 싸고 맛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훤한 대낮부터 술 마시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는 방법이 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자이는 일단 예의상 쿠니키다에게 술 마신다고 문자를 보냈다. 분명 이걸 본 쿠니키다는 잔소리를 잔뜩 퍼부을 준비를 하며 다자이를 찾아다니겠지. 다자이는 일부로 쿠니키다에게 장소를 알려주지 않은 채 술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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