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성단 by 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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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를 빠져나오니 약한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손을 펼쳐 빗속으로 뻗어보니, 차가운 빗방울들이 손바닥에 닿았다. 봄비인가…. 봄은 봄인 모양이로군. 우산은 없었지만 우산이 없어도 그럭저럭 걸어갈만한 세기의 비였다. 큰 고민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옷이 느긋하게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교실로 돌아가기 전에 기숙사에 들려서 옷이나 갈아입고 갈까. 시덥잖은 선택지를 떠올리며 어느 건물을 목적지로 택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쿄야 씨!”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히이라기가 우산을 든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점심 시간에 이런 먼 곳까지 온 거지? 설마 오늘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걸음을 멈추고 히이라기를 살피고 있자, 히이라기가 주변을 살핀 다음 내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번에는 나를 이용해서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원하는대로 해줄 수는 없지. 히이라기가 어떻게 나오든 대처할 수 있도록,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양손을 빼냈다. 마침내 히이라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히이라기는 숨을 몰아쉬며 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산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태연해요?!”

“…어?”

히이라기가 우산을 기울여 내가 우산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순식간에 빗소리가 멀어지고, 세상이 조금 조용해졌다.

“옷은 안 젖으셨어요? …아, 역시 젖었네요. 정말이지….”

히이라기가 내 옷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멍하니 히이라기를 바라보고 있자 히이라기가 눈을 깜빡이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방금 전까지 자네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히이라기는 참, 아무래도 좋은 일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는군.”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니에요.”

“어째서?”

“쿄야 씨도 저희 반의 일원이니까요. 반의 리더인 제가 당연히 참견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는 못 당해내겠다니까. 뭐, 어른으로서 여고생의 반장 행세 정도는 어울려주도록 할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앗, 쿄야 씨!”

“뭐지?”

“저기, 보이세요? 무지개가 떴어요!”

히이라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섬에서 멀게 떨어진 하늘에. 작게 무지개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저쪽 지역은 벌써 비가 그친 건가. 새삼스레 이 섬이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도, 흐린 하늘 속에서 잔잔하게 제 색을 내고 있는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그친다면, 하늘이 맑아진다면, 저 무지개의 색을 더 또렷하게 감상할 수 있을텐데…. 여기도 비가 그치면 무지개를 볼 수 있으려나.

무지개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히이라기를 바라보자,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히이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 무지개를 바라본 시간보다도 오래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면 무지개 같은 건 살면서 몇 번이고 봤을텐데.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건가….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아가씨라니까. 히이라기가 충분히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도록 기다린 다음,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이라기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도 얼른 무지개가 뜨면 좋겠네요.”

“어째서? 비가 오는 건 싫으니까?”

“…무지개는 아름다우니까요. 쿄야 씨는 감수성이 부족하시네요.”

“미안, 장난이었다. …나도 무지개는 좋아해. 무지개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의 감수성도 있고.”

“그건 다행이네요.”

“다행이지.”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차게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이 곳의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히이라기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이유는 없을테고. 비가 그치면 히이라기는 아마도 다른 곳으로 가버리겠지. 그래도,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이면.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지개가 뜬다면, 분명 이 섬의 어딘가에서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을 히이라기가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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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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