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항해
컬렌인퀴 / 인퀴 침입자 DLC 엔딩 후
컬린 재록본 내기 전에 월드 오브 테다스를 읽었어야 했는데…
항해라는 제목의 재록본 이미 뽑아놓고 같은 제목의 글을 이제야 쓰죠? 항해 글이 수록되지 않은 항해 재록본이라니 정말 기묘하다… (이 사유로 재록본 다시 뽑을 예정임 ㅠㅠ)
월드 오브 테다스 2권의 컬렌 챕터를 보고 쓰고 싶은 게 생각나서 씀
쓰면서 들은 BGM: 파랑波浪의 노래 - ForA (포라님께 넣은 가내인퀴 테마곡 컴션)
심문회의 존속을 가리기 위해 개최되었던 고위 평의회는 심문관 이블린 러더포드가 심문회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후 하늘보루로 돌아간 심문관은 심문회 사람들에게 다시 심문회 해산 사실을 고지하고, 그간 평화와 정의를 위해 힘써준 모든 선한 이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심문관의 마지막 연설이 끝났을 때, 전과 달리 환호하거나 소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심문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이들 사이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오긴 했으나, 그걸 지적하는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심문회가 해체되자, 심문회의 이름 아래 모였던 이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자신의 소중한 남동생이자 또 다른 심문관이었던 데빈 트레벨리안과의 작별 인사를 마친 이블린 역시 컬렌의 손을 잡고 갑판 위로 올라섰다. 일깨우는 바다를 건너 커크월까지 향하는 배였다. 둘은 커크월의 상황을 살핀 후, 그곳에서 그들이 책임지겠노라 약속한 이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이블린의 뺨을 어루만졌다. 갑판 아래의 객실에 짐을 내려놓은 후 갑판으로 나온 이블린은 물결치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파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은 바다로 돌아오게 되었구나. 이 파도 소리가 얼마나 그립고도 두려웠는지…….
잠시 그러고 서 있던 이블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갑판 위로 시선을 옮기니 그 끝에 제 남편 컬렌 러더포드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먼저 갑판 위로 올라갔었지. 혹시 뱃멀미라도 하는 걸까? 이블린은 조심스럽게 컬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컬렌, 좀 괜찮아요?”
“예? 아, 네. 괜찮습니다.”
이 남자의 괜찮다는 말은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블린이 말없이 컬렌을 응시하자, 이블린의 눈치를 살피던 컬렌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뒷목을 쓸며 입을 열었다.
“그게… 여전히 좁은 곳은 좀 힘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젠 좀 나아졌을까 했는데, 심문회에 합류하기 위해 퍼렐던으로 내려왔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요.”
이블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게 컬렌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좁은 곳을 힘들어한다고요?”
“일전에 퍼렐던 협회에서 고문당한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그 후부터 사방이 막힌 협소한 공간에서 오래 머물기 힘들더군요. 그런 곳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하던 컬렌이 고개를 돌려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블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곤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래도 지금은 처음보단 많이 나아졌습니다. 정말로요.”
“…왜 말 안 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늘보루에서는 그런 상황이 딱히 없었으니까요….”
이블린은 허물어진 천장과 낡은 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사령관의 처소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며 하늘보루 대부분이 멀끔히 보수되었음에도 그 방만큼은 변함없이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동안 뻥 뚫린 천장 사이로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들이쳤던 적이 몇 번이던가. 난처하게 웃으며 이렇게 된 김에 그냥 남은 업무나 더 처리하겠다던 컬렌을 끌고 자신의 처소로 올라갔던 적은 또 몇 번이던가.
그의 처소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이블린은 이 미련한 남자가 부러 제 처소 보수를 가장 뒤로 미룬 것이리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나 자신보단 타인을 우선으로 생각하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블린은 컬렌을 닦달하기도 하고, 석공 갓지에게 사령관 몰래 보수 공사를 진행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심문회가 해산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방은 그렇게 처음의 어설프고 낡은 모습 그대로 남았다. 그땐 이 사람 고집이 참 심하구나, 정도로 여기고 말았는데….
이블린은 컬렌이 매일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걸 알았다. 그를 괴롭히는 악몽 대부분이 그가 퍼렐던 협회에서, 그리고 커크월에서 겪었던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사실을 곱씹던 이블린은 악몽 속에서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에서 깨어난 컬렌을 상상했다. 그렇게 깨어난 그가 마주할 주변 풍경들도 함께. 만약 처소가 완벽히 보수되었다면, 그 좁은 공간이 그 어떤 틈도 없이 빽빽하게 막혀 있었다면, 가뜩이나 리륨 금단증세로 인해 정서가 불안했던 그로서는 더더욱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진작 말해줬으면 내가 당신 처소 보수 좀 하라고 그렇게 쪼아대진 않았을 것 아녜요.”
“죄송합니다.”
“아니,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 원래도 그렇게 사과를 자주 해요? 아니면 내가 당신 상관이라 그런가요? 어차피 이제 난 심문관도 아니니까 그렇게 습관처럼 사과할 필요 없다고요!”
“죄송… 아, 음.”
“에휴, 됐어요. 내가 미안해요, 컬렌. 전혀 몰랐어요.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알았으면….”
“이러실 것 같아서 얘기를 안 한 겁니다. 이건 당신이 사과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어색한 정적이 둘을 감싸자 컬렌은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파도가 규칙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스러졌다. 컬렌은 전에도 이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이던가. 당시 퍼렐던 협회의 그레고어 기사단장은 컬렌을 자유 동맹으로 보냈다. ‘그 사건’ 이후 완전히 달라진 컬렌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그는 컬렌이 퍼렐던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마음을 좀 추스리고 돌아오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컬렌은 퍼렐던 협회 탑을 뒤로 한 채 커크월행 함선에 올라탔다. 갑판에 발을 디디자마자 컬렌은 막연한 안도감을 느꼈다. 드디어 그 생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났구나, 하는. 퍼렐던 협회에서는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으니까.
그러나 해를 삼킨 바다가 시커먼 어둠으로 바뀌어 넘실댈 때, 그제야 컬렌은 무슨 짓을 해도 이겨낼 수 없는 난관이 제 앞에 드리웠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갑판 아래의 객실로 내려가는데, 컬렌은 도저히 그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다.
창문조차 없는 어두운 밀실 아래로 한 발짝 내딛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꾸역꾸역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그때의 무력감, 공포, 혐오감, 자책감… 그 모든 질척거리는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자신을 덮쳤다. 또 갇혀버리면 어떡하지? 이번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으면?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걸 다시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한다면?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컬렌은 갑판의 난간을 붙잡은 채로 아까 먹은 모든 걸 게워 내고 있었다.
결국 그 이후 배가 커크월에 정박할 때까지 컬렌은 단 한 번도 갑판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선장이 내려가서 잠을 좀 자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걱정했지만, 컬렌은 한사코 고개를 내저었다. 저 아래에 갇히는 것보다야 차라리 갑판에서 쪽잠을 자며 버티는 게 더 편했다.
컬렌은 그 시절의 자신을 회고할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한심하고, 볼썽사납게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전보단 누그러진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어렸으며, 견디기 힘든 거대한 사건을 겪었었다. 그러니 그 여파로 정신이 망가진 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그게 전부 내 탓은 아니라고….
전부 지금의 당신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죠.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컬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한편 그 말을 해준 장본인―이블린은 컬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블린은 컬렌의 얼굴을 하릴없이 쳐다보다가, 곧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내려가서 담요를 좀 가져올게요. 해가 지면 바닷바람이 더 매서워질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따뜻한 차도 함께 가져와야겠어요. 식어도 내가 데우면 되니까 괜찮겠죠.”
“그래 주신다면…… …아니, 잠시만요. 당신도 여기서 밤을 보낼 생각입니까?”
“당연하죠. 당신을 갑판 위에 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이미 몇 번 해봤고요. 하지만 당신은, 하물며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심한 부상까지 입었는데…….”
그 말에 이블린과 컬렌의 시선이 모두 이블린의 왼팔로 쏠렸다. 이블린이 멋쩍은 듯 왼팔을 으쓱이자 텅 빈 튜닉 자락이 바닷바람에 나풀거렸다. 이블린은 제 오른손으로 왼팔 소매를 잡아 바람에 흩날리지 않도록 느슨하게 묶었다.
이블린을 하늘보루라는 섬에 묶어두고 있던 닻은 그의 왼팔과 함께 영영 사라졌다. 그 탓에 더는 육지에 머물 수 없게 된 이블린은 별수 없이 돛을 펼쳤다. 그리고 컬렌과 함께 키를 잡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항로를 따라 배를 몰았다. 그러므로 이게 제 남편을 망망대해 위에 버려둔 채 안락한 지하로 기어 내려갈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블린 역시 컬렌과 같은 항해자였으므로.
“그새 날밤을 새우는 버릇이 들어서 그런가, 별로 피곤하지도 않은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걱정 말아요. 자, 그럼 나는 내려가서 필요한 걸 좀 가져올 테니, 그동안 혼자 바다 구경 좀 하고 있어요.”
컬렌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이블린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니 더는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컬렌은 이블린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이상 자신이 뭐라고 항변한들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게 훤했다. 게다가 커크월에 도착하려면 아직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테고…. 그렇다면 컬렌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창조주시여, 부디 별일 없이 무사히 커크월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저희를 어여삐 여기신다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저희에게 순풍을 내어주시기를. 이블린이 돌아오기 전까지, 컬렌은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기도했다.
그사이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컬렌과 이블린은 바닥에 방석을 깐 뒤, 그 위에 앉아 담요를 나눠 덮었다.
꽤 안락한 환경이 갖춰지자, 이블린은 자신의 소장품 중 하나인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찻잔을 꺼내 컬렌에게 건넸다. 갓 우려낸 찻물에서 김이 포슬포슬 솟아올랐다.
익숙한 찻잔에 웃음을 터트린 컬렌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으슬으슬 떨리던 몸 곳곳에 따뜻한 찻물이 스며들자 컬렌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이블린은 혼자 또 무얼 떠올렸는지 잘게 키득거렸다. 컬렌이 이블린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이블린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밀항자 같네요, 우리.”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그럼요. 지금 이 상황, 꽤 낭만적이지 않나요? 나중에 이 얘기를 캐시나 조시에게 해줘야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만….”
“저 정말 괜찮아요. 당신 몸이 따뜻해서 별로 춥지도 않고.”
이블린은 그렇게 말하며 컬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컬렌은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이블린의 머리에 제 머리를 조심스레 기댔다. 예전에 갑판 위에서 꼬깃꼬깃 쪽잠을 잘 땐 무척 불편하고 추웠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따뜻했다. 따뜻한 차와 담요, 방석 덕분일까?
“당신이 무서워하는 걸 하나 얘기해줬으니, 나도 하나 알려줄게요.”
“좋습니다.”
“전에 보고서로 보셨을 것 같지만, 음. 사실 저 거미를 꽤 무서워해요.”
컬렌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가 아차 하고선 이블린 쪽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블린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웃음이 드리워 있었다.
“세라한텐 큰 것만 무서워한다고 그랬는데, 사실 좀 작은 것도 무서워해요. 그게… 거미는 꽤 징그럽게 생겼잖아요. 이런 말 하면 너무 곱게 자란 아가씨 같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거미를 싫어하는 사람은 꽤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에 영계에 갔을 때 공포의 상징으로 거미가 나왔잖아요. 어휴, 그땐 좀 기절하고 싶었어요.”
“정말로 무서워하시는군요.”
“다리 많은 것들만요.”
컬렌은 제 아내의 고백에 귀엽단 생각을 해도 되는지를 또 고민했다. 마침 마주한 이블린의 얼굴이 여전히 즐거워 보였으므로, 컬렌도 마음 편히 제 아내를 귀여워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벌레가 나오면 제가 전부 잡아드리겠습니다.”
“와, 정말 든든한데요.”
컬렌의 다정하고 듬직한 선언에 이블린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블린이 들고 있던 잔 속의 찻물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일렁였다. 다행히 내용물이 넘치지는 않았다. 갑판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탓에 혹시라도 차를 쏟지 않도록 부러 찻물을 반 정도만 담았던 덕택이다.
“내가 거미를 무서워한다고 한심해 보이진 않잖아요. 아니, 좀 나약해 보이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그래요. 만약 당신이 물고기를 무서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컬렌, 당신만 괜찮다면… 아니지, 혹시라도 힘든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거라면, 굳이….”
“아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컬렌은 이블린의 말에 빈손을 다급히 내젓다가, 곧 제 뒷목을 쓸며 잠시 이블린의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당신에겐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저의 그런… 나약한 부분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혹은, 나를 버겁게 여기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저는 당신께 너무 많은 추태를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컬렌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한때 마법사들을 향한 비틀린 증오를 품은 적이 있으며, 지켜야 할 이들을 지키지 못한 데다 리륨 중독까지 겪고 있다. 물론 그게 오롯이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아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법이다.
컬렌은 여전히 지난날의 자신이 품었던 눈부신 이상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그와 함께 이 길을 택했던 이유, 유년기의 자신이 꿈꿨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여덟 살 꼬마 아이는 정의롭고 숭고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내가 모든 이를 지킬 수 있다면, 그만큼 보람찬 삶이 또 있을까? 아무것도 몰랐기에 꿈꿀 수 있었던 가장 순수한 꿈.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이상.
헌데 지금의 자신을 보라. 제 몸은 진흙과 상처투성이가 됐고, 걸어온 길을 뒤로 한 채 전혀 새로운 활로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만 했다.
그래. 어쩌면 정의롭고 숭고한 영웅은 나보다는 바로 당신. 안드라스테의 사도이자 심문회의 지도자였던 당신에게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 이 감정은 질투인가? 아니, 창조주께 맹세코 그런 사특한 감정은 아니다. 그보다는 동경. 혹은 경외, 염원, 추앙…….
“당신이 제겐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거 알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어요.”
“당신 앞에 서면 제가 너무 작고 초라하단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해해요.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어쩌면 괜찮아졌을 거라 믿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정말 옳은 길을 선택했으니까, 전처럼 나약하게 과거의 일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지도요.”
“실제론 그렇게 빨리 괜찮아질 수 없는데요. 그렇죠?”
어떤 기억들은 좀처럼 잊히질 않는다. 컬렌은 여전히 제 앞에서 죽어가던 동료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커크월의 교수대에서 억울하게 처벌당한 동료 성기사들과 마법사들도, 그 끝에 결국 코리피우스와 손을 잡았던 샘슨의 최후나, 그의 휘하에서 일하며 끔찍한 모습으로 변이한 캐롤에 관한 이야기도….
금단증세로 인한 불안증이 심해질 때마다 컬렌은 종종 자신이 여전히 얼드레드가 만든 마법 벽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들은 사실 찰나의 꿈에 불과하고, 나는 여전히 퍼렐던 협회 탑에 무력하게 갇힌 채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길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나는 여전히 그가 세운 벽 안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고통이라는 벽 말이다. 이 벽이야말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빠져나오는 데 성공해 자유롭게 살아가더라도 언제든 어떤 계기로든 다시 자신을 옥죄리란 걸, 컬렌은 알았다. 그나마 지금은 그 두께가 비교적 얇아진 데다 커다란 구멍까지 생겼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퍼렐던 협회 사건 이후 몇 년 동안 컬렌은 지독한 의문들에 시달렸다. 지켜야 할 이를 지키지 못한 기사도 여전히 기사일 수 있는지. 자신의 신앙심이나 직업의식은 변함없건만 왜 동료들은 나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지. 그레고어 기사단장님은 대체 왜 나를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 나는 대체 왜 좁은 곳을 두려워하는지. 마법사들이 너무 두렵고 증오스러운데, 그럼에도 그들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로 다른 마법사들은 무고할까? 이렇게 망가져 버린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일까? 내가 성기사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준 나의 형제자매들, 그들은 대체 무슨 낯으로 봐야만 좋은 걸까. 그들 앞에서 정말로 떳떳하게 내가 유년기의 꿈을 이루었노라 말할 수 있나?
컬렌은 그 모든 질문에서 도망쳤다. 교수대의 마법사들, 심지어는 성기사 동료들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으며, 가족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말하지조차 않았다. 제가 하는 일이 옳다는 맹목적인 믿음만이 그를 지탱해 주던 시기였다.
그러한 도피 끝에 결국 컬렌이 다시 그 모든 의문을 직면하게 된 건, 언젠가부터 동료들의 눈이 제 눈과 같아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공포와 고통에 신음하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컬렌은 자신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정말로 옳은 일인가?
결국 컬렌은 그 질문에 답을 했다. 메러디스 기사단장을 향해 칼을 겨눔으로써.
“…종종 누군가의 인생을 배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만약 제 인생이 한 척의 배라면, 저는 아마 닻이 없는 배였을 겁니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그 외에 다른 정착지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 답답한 배였겠죠.”
“그렇지만 결국 항로를 틀었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고요.”
“예. 그렇게 되기 전까지 난파하지 않았던 게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주께서 보살피신 덕분인지, 아니면 남동생이 준 그 동전 때문인지.”
처음부터 혼자 항해하지는 않았다. 컬렌의 곁에는 수많은 배들이 있었다. 그러나 폭풍우에 휘말리거나, 암초에 걸리거나, 함포에 저격당하면서 한 척, 한 척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끝에 자신만이 남았다. 그제야 컬렌은 망원경을 들어 제 항로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폈다. 보물섬 같은 걸 기대했었나? 아니면 나를 환대해 줄 사람들로 가득한 항구 도시를 꿈꿨었나.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노쇠한 성기사가 겪는, 리륨 중독 말기라는 낭떠러지 말이다.
컬렌은 다급히 닻을 찾았다. 그렇지만 그의 배에 닻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끝없이 질주하다 끝내 추락해 버릴 운명인 건가? 어차피 막다른 길이라면, 그렇다면…….
“당신이 난파하지 않은 건, 당신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옳은 길을 택할 수 있는 조타수였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키를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어요.”
다른 길이 딱 하나 있었다. 멀리서 봐도 거센 풍랑이 보이는, 언제든 난파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길이었다. 게다가 컬렌의 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저리로 간다고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 걱정 없이 낭떠러지를 향해 달릴 것인가, 배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험을 택할 것인가. 컬렌은 망설임 없이 키를 돌렸다. 그러곤 이미 저 멀리 용맹하게 나아가고 있는 함선들—심문회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컬렌은 십 년 만에 다시 일깨우는 바다를 건너 퍼렐던으로 돌아왔다. 처음 바다를 건넜을 때와는 달리, 남들의 강요 때문이 아닌 컬렌 자신의 선택으로.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향해서.
이블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컬렌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겨울밤은 유난히 길었고, 이따금 옷 틈 사이로 새어드는 바닷바람은 자꾸만 그의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자 나온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설고 어려운 길이었다. 심지어는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길마저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은 고심 끝에 저마다 다른 길로 걸어갔다. 컬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자 가장 친숙한 원동력, 신앙을 좇았다. 그러다 보니 맨 앞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거침없이 갈래 길을 나아가는, 그럼에도 낙오되는 이가 없는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피는, 때론 두려워하고, 때론 괴로워하고, 때론 즐거워하며 모두의 길잡이가 되어주던 나의 주군, 나의 심문관.
작금의 컬렌에게 주어진, 저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한 선택지는 분명 안드라스테께서 제게 인도해 준 것이리라. 이런 말을 하면 그분의 전령—이블린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창조주가 개입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선택한 건 당신이에요.”
이상하게도 컬렌은 그 말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이블린이 안드라스테가 아닌 교황 저스티니아 5세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더라도 그가 여전히 안드라스테의 전령인 것처럼, 제가 그 모든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한 것 역시 전능하신 주님의 아량이며, 나는 그분의 뜻을 충실히 이행한 끝에 이곳에 있는 것일 테니.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며, 그 끝에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게 된 것 또한 축복일지어다.
그렇게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컬렌은 이블린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이블린을 바라보니, 그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모습 그대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컬렌은 고요히 미소 지으며 이블린의 어깨에 덮여 있던 담요를 조심히 갈무리해 주었다.
언젠가 콜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블린에게 파도 소리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그에게 바다는 그리운 고향과 갑갑한 협회를 모두 의미한다고. 그래서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지만, 결국은 돌아가야 할 거라고.
갑판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나와 바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당신이 어쩌다 지금 이곳, 일깨우는 바다 위에 있는지, 사람 운명이란 정말로 모를 일이다. 내가 커크월에 다시 돌아가는 것도, 당신이 오스트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일깨우는 바다를 건너지 않았을 테고, 내가 없었다면 당신은 그리운 고향 대신 협회 탑으로 향했을 테니까.
담요를 조심히 잡아당기던 컬렌의 시선이 이블린의 왼팔로 향했다. 본디 닻이 없던 나와 끝내 닻을 잃어버린 당신. 닻이 없는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바다 위를 떠돌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우리의 배는 낡았고, 본래의 형체와도 많이 달라졌으며, 그곳에 새겨진 상흔은 아마 평생 우리의 항해를 괴롭힐 테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번엔 혼자가 아닐 테니까. 아무리 거센 풍랑이 우릴 집어삼켜도 함께 이겨나갈 수 있을 테니까.
이 험한 바다 위에서 함께 항해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그런 생각을 하던 컬렌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밤은 길고, 바다는 그보다도 넓었다. 둘의 기나긴 항해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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