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할 세계의 총력전
펜슬 오픈 기념 7년 전 썼던 단편소설부터 올리기
사람들은 이 세계를 「아르데(Aarde)」라 불렀고, 아르데는 멸망할 예정이었다.
수 개월 전, 아르데 3대 학술 조합─현자의 탑, 진리의 대양, 불멸의 빛─은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한 가지 관측 결과를 공표했다. 「에테르」가 머지않은 미래에 고갈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최근 들어 계속된 천재지변을 연구하던 중, 대기 내 「에테르」의 농도가 급속도로 희박해지고 있음이 그 근거였다. 구체적인 시한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지만, 모든 학자들은 짧게는 1년부터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년 안에 이 세계의 「에테르」가 고갈될 예정이란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의 종말을 의미했다.
「에테르」. 약 천 년 전 어느 연금술사에 의해 존재가 확인된 이래 인류에게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준 에너지원. 「에테르」가 없어지는 순간 연금술과 마도술,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이뤄진 아르데의 문명은 무너진다. 「에테르」에 생태를 의존하던 드래곤 외 일부 종족은 멸종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에테르」로 유지되던 모든 자연 법칙이 붕괴해 이 세계의 존속마저도 불확실해진다. 세계 자체가 무너지는 셈이니 도망갈 곳조차 없다.
이 절망적인 소식을 접한 전세계는 당연하게도,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는 부정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얼마 뒤에는 분노와 좌절에 이성을 잃은 이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러한 폭력이 체념으로 사그라들고서야 사람들은 멸망까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로 타협했다.
연구에 전념하던 학자가 절규 섞인 유서를 남긴 채 연구실에서 목을 멘 채로 발견되거나, 한 연금술사 길드가 개발한 미완성 인조 에테르가 폭주해 일국의 국토를 반절 이상 날려버리고, 종말론을 위시한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는 등의 절망 어린 소식이 새삼스럽지도 않게 된 어느 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그간의 분쟁을 덮고 아르카디아 제국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국제 회의에 초청된 학자들은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탓인지 창백한 낯빛이었다. 그들은 제왕과 대공에게 '가능성'을 설명했다. 물리 법칙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에 속한 물질은 그 성질과 형태가 변할 지언정 총량 자체는 불변한다. 「에테르」도 이러한 순환에 의해 본래대로라면 그 총량은 변하지 않았어야 했으나, 실상은 그와 정 반대였다.
실마리로 지목된 건 얼마 전부터 출몰한 「이계의 존재」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복장을 하고 홀연히 이 세상에 나타난 자들. 불빛과 그림, 소리를 뿜는 기이한 판을 들고, 장인 길드조차 생산하지 못하는 정교한 옷을 입은 그들은 아르데 사람들에게 인간도 신도 아닌 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이 「이계의 존재」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아르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짙은 농도의 에테르의 흔적이었다.
학자들은 몇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첫째, 아르데 밖에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 최소한, 「이계의 존재」들의 "고향 세계"는 확실히 존재한다.
둘째, 「이계의 존재」들은 검술이나 마도술, 연금술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정말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 그 세계는 에테르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발달한 미개 문명이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셋째, 「이계의 존재」들이 온 세계의 에테르는 무척 풍부하게 남아 있다.
넷째, 물질은 세계와 세계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 「이계의 존재」가 이 세계로 넘어왔듯이, 에테르는 우주에서 다른 우주에 걸쳐 순환하고 있을 수도 있다.
도출된 결론은 전쟁이었다.
물론, 평화로운 협상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일정 규모의 영토와 에테르를 이용할 권리를 저쪽에서 보장한다면야. 하지만 인간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각국의 지도자들과 학자들은 지난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같은 세계에 사는 형제에게도 창과 칼을 들이미는 게 사람이지 않은가. 거기에 한쪽은 생사존망이 걸린 처지였다. 협상을 기다리다가 언제 에테르가 고갈돼 우주가 붕괴될 지 몰랐다.
결국 지도자들은 전쟁을 외쳤다. 생존욕이 호전성을 자극했다. 이미 멸망을 약속받고 세계와 죽어가는 시한부 처지가 된 마당에, 살아남고자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할 각오가 있었다. 상대가 가진 걸 모두 빼앗고 싶다는 탐욕도 한 몫 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을 막대한 「에테르」가 세계 저편에 있다는데!
마지막까지 개전을 반대하던 아르카디아의 케이어스 3세는 회의 세 번째 날 십만 명에 달하는 신민의 탄원을 접한 끝에 한 가지 조건을 걸며 의견을 번복했다.
아르카디아의 최정예부대인 「비룡기병대」가 선발대로 나서 아르테 전체의 총의를 이계에 전달할 것.
최정예인 만큼 기습을 당한 들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고, 기동성 또한 높기에 이계의 형편을 알아낼 첨병으로서도 적합하다는 이유였다. 이쪽의 무력을 실감한 「이계의 존재」들이 제발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양측의 피해 또한 최소화할 수 있다면서.
회의에 참석한 72개의 크고 작은 나라의 지도자들은 케이어스 3세의 타협안에 동의했다.
몇 달 후, 현자의 탑, 진리의 대양, 불멸의 빛 소속의 연금술사와 마도술사들이 이계로 진입하는 대 포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나마 세계에 잔존해 있던 에테르의 3할 가량을 소모해야 했던 뼈아픈 시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대들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수 백만의 군세 앞에서 포부 당당하게 외치는 금발의 청년은 아르카디아의 제13대 황제, 케이어스 3세다. 오로지 제왕에게만 허락된 금 자수 장식의 푸른 망토 아래에 백금과 황금으로 치장한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한 남자. 앞을 올곧게 바라보는 눈과 굳게 다문 입에서는 연륜 그 이상의 관록과 지혜가 느껴졌다. 이제야 30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젋은 군주에 붙은 「계명제」, 즉 새벽별과 같은 황제라는 이명은 그의 성품과 자질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의 발 아래 전열을 가다듬은 군세는 각기 다른 깃발 아래 무장하고 있었다. 푸른 천에 금색 자수로 그려진 사자의 깃발을 든 이들은 아르카디아의 군세다. 녹색 바탕에 은색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은 남부의 공화국 알비온, 검은 바탕에 흰 늑대가 그려진 깃발은 북쪽 대륙의 라스카의 것이다. 서로 이웃하며 작은 영토를 놓고 으르렁거렸던 나라의 군대가 같은 자리에 질서정연하게 서있다.
운명을 바꾸고자, 전 세계에서 수천 만의 군대가 모인 것이다.
젊은 황제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살기 위해서, 어쩌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인 영웅이 이렇게 많았다니.
"그대들은 무엇을 구하기 이 자리에 섰는가. 신념, 조국일 수도 있으며, 가족이거나 벗, 혹은 연인, 재산일 수도 있겠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대들이 이 세계를 포기할 때 그것들 또한 세계와 함께 공멸한다는 것이다. 짐 또한 잃고 싶지 않을 것이 있다!"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케이어스의 검이 칼집에서 끄집어내졌다. 잘 닦인 칼날 만큼이나 날카로운 반사광이 서슬퍼렇게 번뜩였다.
"일어나라, 아르데의 무수한 신과 영웅들의 후예들이여! 우리는 종말을 막아낼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몫으로 절멸의 운명이 주어질 지라도, 그때가 오늘은 아닐 것이다! 만신(萬神)들과 영웅들이, 우릴 굽어보시리라!"
'한 세계'의 총력이라 할 수 있는 정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하늘 끝에 닿을 듯한 함성을 뒤로 하고 케이어스는 침통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전쟁.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죽고 또 죽일 것인지.
어쩔 수 없었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한, 산 자는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법이니.
대 포털을 넘어 아르카디아의 비룡기병대가 다다른 곳은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였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점에 난처해하던 비룡기병대는 곧 기병대장의 재량에 따라 우선 해가 뜨는 동쪽으로 기수를 향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일차적인 임무는 협상(과 불가피하다면 선전포고, 정탐)이었다.
수평선을 따라 하얀 구름을 헤치고 무작정 날아가기를 수 시간이 지났을까.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의 마천루 숲이 비룡기병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 : 어서 와! 미국은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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