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ogant, Big Shot: No Time To Die 1 (with. Jane)
자캐 커뮤니티 AU 로그
7월 17일 오전 7시 35분.
제인 오스몬드는 어젯밤 받은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가지고 뉴욕 웨스트 4번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제법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고 안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어른이 되어 직접 마주한 사회는 사납고 냉정했다. 고고학과를 졸업한 제인은 그녀가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닥치는 대로 자신의 논문과 이력서를 밀어 넣었으나 단 한 곳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같은 고고학자인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마저도 제인이 여자라는 이유로 함께 일하기를 거부했다.
딸이 자신과 같이 고되고 어려운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그녀를 무시해서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건 제인은 아버지와 오빠의 거절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반드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보란 듯이 학자로서 성공하겠다고 마음 먹었건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사회인에게 현실은 냉혹해도 너무 냉혹했다.
그러던 중 제인에게 어떤 기회가 찾아왔다. 스물일곱 번째 낙방을 맞아 카페에서 조촐하게 자아비판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잘생긴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와 까만색 직사각 명함을 내밀며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요새 사이비는 얼굴로 승부를 하나, 생각한 그녀는 대화를 거부했으나 남자는 그녀의 거절에도 아랑곳않고 참을성 있는 태도로 자신이 어떤 국제 조직에서 나왔고 그곳에서 제인을 스카우트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제인은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이보세요, 사기 치곤 너무 거창하지 않나요?’ 하고 되물어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는 그 이상 설명을 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7월 16일 밤에 우편이 하나 갈 겁니다. 그대로 찾아오시면 됩니다.’라고 한 뒤 자리를 떴다.
그때 제인의 머릿속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심란한 시기인데 웬 미친놈이 나타나서는, (제인은 이때만 해도 그가 분명 사이비이거나 사기꾼일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속을 다 뒤집어놨다. 게다가 이 사기 행위는 그리 성의가 있어 뵈지도 않았다. 갑자기 ‘어떤 국제 조직’이라니?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내용은 애매모호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실없는 사기꾼으로 단정지은 제인은 금세 그 일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7월 16일 그녀의 집에 정말로 편지 한 통이 날아오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두 사람은 인사 몇 마디와 의심의 눈초리를 주고 받은 게 다였는데 그녀가 알려주지도 않은 주소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 혹시나 만에 하나 만약 그 ‘어떤 국제 조직’이 진짜 있는 곳이라면 대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캐물을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남자는 사기꾼이 확실하고, 그날 헤어지는 척 하면서 그녀의 뒤를 밟아 주소를 알아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도 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7월 16일은 그녀가 서른두 번째로 취직에 실패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제인은 이제 정말이지 지푸라기도 잡고 매달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결국 제인은 편지가 시키는 대로 오전 7시 40분에 맞추어 뉴욕 웨스트 4번가로 나왔다. 그녀의 집에서 차로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이런데 만일 이번에도 허탕이거나 그 남자가 정말로 사기꾼인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거꾸로 매달아 탈탈 털어 버려야지. 제인이 남 모르게 결심하며 눈을 빛낼 때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제인 오스몬드 씨 맞지요?”
통통 튀는 발랄한 목소리가 제인의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희게 빛나는 은발을 깜찍하게 양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제인을 보며 히히 웃고 있었다. 황금색 동그란 눈이 방긋방긋 웃으며 제인을 바라보다가, 제인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닌가? 제인 오스몬드 씨, 아니에요?”
“…마, 맞아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야호! 하고 팔짝 뛴 소녀가 제인의 손을 덥썩 잡고는 골목 한 곳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따라오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
믿어도 될까? 따라가도 될까? 괜히 내가 내 무덤 파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들었지만 제인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용감하게 한 걸음 내디뎠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라고 한 번 걸음을 내딛자 그 다음 걸음은 아주 쉽게 쉽게 나아갔다.
제인의 손을 꼭 잡은 소녀는 그녀를 골목 구석의 어느 전화 부스로 이끌었다. 소녀는 제인을 먼저 전화 부스 안에 밀어 넣은 뒤 따라 들어와 부스 문을 꽉 닫았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까지 꼼꼼히 체크한 그녀는 흠흠, 하고 콧노래를 부르다가….
“움….”
부르다가….
“우움….”
미간을 힘껏 찌푸리곤 이마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곤란한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제인으로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좁은 전화 부스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고민하던 소녀는 급기야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죽죽 잡아 당기다가, 으앙! 하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가, 히유우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울상을 한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꾹꾹 힘주어 눌렀다.
오래지 않아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이이이─”
[왜 또 우는 소리야.]
“저요오,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요─”
[….]
전화 부스 안에 순간 아주 짙은 침묵이 맴돌았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제인도 차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동그랗고 작은 소녀만이 잉잉 우는 소리를 내며 ‘오라버니’에게 투정을 부렸을 따름이다.
잠시 후, 한숨을 쉰 상대가 말했다.
[네가 일을 맡겠다고 했으면 혼자 힘으로 해내야지.]
“그치만 라니냐 혼자 나온 건 처음인걸요!”
[그러게 내가 너한텐 아직 무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비밀번호 하나 못 외워? 네가 정신이 있어, 없어?]
“힝….”
소녀가 입을 비죽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제인은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전화부스 천장만 쳐다보았다. 나는 언제쯤 이게 고도의 사기극인지 아니면 ‘진짜’ 취직의 기회인지 알 수 있을까…. 제인의 시선이 점점 힘과 빛을 잃고 불투명한 해탈의 색으로 물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소녀의 ‘오라버니’는 소녀를 오래 혼내지 않았다. 소녀가 혼자가 아니고, 데려와야 할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까칠한 잔소리 몇 마디를 쏟아 놓은 그는 스스로를 ‘라니냐’라고 부른 소녀에게 여덟 자리의 숫자를 불러 주었다. 소녀가 공중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그가 불러준 숫자를 누르자, 누르자….
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를 둘러싼 전화부스가 천천히 회전하더니, 점점 빠르게 회전하더니, 이윽고 문이 탕! 열리며 눈앞에 넓고 번쩍이는 건물의 내부가 나타났다.
입을 떡 벌린 제인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사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소녀가 히히 웃으며 통통 뛰어 먼저 전화 부스를 나갔다. 제인도 그녀의 뒤를 따라 급히 전화 부스를 나가니, 탕 하고 열렸던 문이 다시 탕 하고 닫히며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커다란 회전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만이 보였다. …마법인가?
21세기 학자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뉴욕 웨스트 4번가 어느 골목 안이었는데 갑자기 휘황찬란한 은빛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의 중앙에는 빛나는 구(球)형 시계가 사방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벽 여기저기에서 문이 생기며 흰색 계단이 바닥으로 스르르 뻗어 내려왔다.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소녀의 뒤를 따르던 제인은 문득, 소녀가 신나게 손을 흔드는 걸 보았다. 소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니 칠흑처럼 짙고 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금색빛 눈의 미인이 계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인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말했다.
“에우리디케.”
“오라버니!”
“오라버니라고 부르지도 마라. 널 생각하면 아주 골치만 아프다.”
“그치만 라니냐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제대로 모셔 왔어요!”
“제대로 모셔오긴, 뭘 제대로 모셔와? 내가 전화를 못 받았으면 어쩔 뻔 했느냐? 어쩌자고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그럼 빅토리아 언니한테 전화하지요.”
“허튼소리! 네가 아직도 일곱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아느냐? 어찌 홀로 설 생각은 못하고 이리저리 기댈 생각만 해?!”
“잘 비비고 잘 기대는 것도 재능이랬어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빅토리아 언니가요!”
“….”
‘오라버니’는 당장이라도 혈압이 솟구쳐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제인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쓰러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 물론 쓰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제인은 아직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긴급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도 몰랐다. 911을 부르면 되나? 아까 자신이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면, 평범한 곳은 아닐 것 같은데, 911이 이곳까지 올 수 있을까?
다행히 남자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고, 소녀를 한 번 쏘아본 후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제인에게 손짓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뜻 같았다. 제인이 잽싸게 그의 뒤에 따라붙자 남자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를 어디론가 인도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제인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 불안함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신비로운 ‘현상’을 눈으로 목격한 이상, 어떤 비밀이 이곳에 숨어있는지 파헤치겠노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국제 연합 기구 직속 주재 국제 이상 현상 및 특수 종족과 특수 범죄 관제 총국]
통칭 ‘국제특수총국’. 이들의 역할은 각종 초자연적 사건과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식별하고 이와 관련된 특수 범죄를 처결하며,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본래 각 국가에서 제 나라의 일을 각기 처리하기 마련이었으나, 세계가 ‘글로벌’화 되고 국가와 국가 간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소위 ‘이상 현상’들도 기원과 출신을 불문하고 국경을 넘어 마구잡이로 섞이게 되었다.
이렇게 처치곤란이 된 사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국제적인’ 이상 현상을 처리하고 특수 범죄자들을 추적할 조직이 필요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가 바로 국제특수총국이다. ‘몽상약초 솜누스의 향 트라이앵글 밀수입 사건’이라든가 ‘공해에 발생한 의문의 소용돌이’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 불법 사육 사건’ ‘흡혈귀 살인 사건’ ‘원인 불명 비행기 연쇄 실종 사건’ 같은 것이 이 국제특수총국의 업무에 속했다.
이렇듯 중요한 일을 맡은 단체임에도 국제특수총국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아니, 전세계 사람들을 탈탈 털어도 국제특수총국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겨우 3%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나마도 모두 국제특수총국의 직원이거나 요원일 것이고 말이다.
국제특수총국의 업무 지침은 첫째도 비밀 유지, 둘째도 비밀 유지, 셋째도 비밀 유지였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21세기, 과학이 발전하고 신화가 쇠퇴한 세대, 진화론이 득세하고 창조론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이 시대에 ‘인간 아닌 것’의 존재가 드러나고 각종 전설과 동화가 현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세계에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따라서 국제특수총국에 소속된 전 직원과 요원들은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근무지를 알릴 수 없었고 언제나 엄격한 보안 지침 아래 행동해야 했다. 근무 복장 또한 하얗고 검은 정장으로 통일되어 모르는 사람(국제특수총국에 속하지 않은 97%의 전세계 일반인들)은 그들을 보고 신흥 마피아 세력이나 몰몬교 신도, 모델 에이전시 직원으로 착각하곤 했다. 이 때문에 국제특수총국의 직원들은 총국의 보안 지침에, 특히 근무 복장 규칙에 아주 불만이 많았다. 차라리 자유로운 사복 차림으로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단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리고 빅토리아 마치로 말하자면, 이 근무 복장 규칙에 가장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국제특수총국 안에서도 최고위 부서에 해당하는 비밀정보부 제3부서 특공팀의 팀장이었는데, 그런 그녀도 빌어먹을 근무 복장 규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빅토리아는 올가미처럼 그녀의 목을 죄어오는 검은 넥타이를 죽죽 당겨 느슨하게 만든 뒤, 꽉 조인 벨트를 풀다가 성질이 나서 쓰레기통을 냅다 걷어찼다. 그리고….
“기물 파손은 벌금입니다.”
“아 깜짝이야!”
“아무리 팀장님이시라도 총국 내에서는 행동에 주의 부탁 드립니다.”
“….”
우리 젊은 꼰대가 오셨군…. 한 소리 듣고만 빅토리아가 애써 웃음 지었다. 나이를 알아볼 수 없게 아름다운 얼굴의 미인은 보기보다 훨씬 깐깐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국제특수총국 제3부서의 행정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빅토리아와 사사건건 부딪쳤는데, 그때마다 처절하게 패배한 (하… 주먹으로 싸우면 내가 이기는데, 말싸움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혓바닥 긴 놈이 이기게 되어 있어….) 빅토리아는 이제 그의 말에 절대로 토를 달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아주 무서운 권력까지 갖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가 바로 제3부서의 예산 편성과 관리를 담당하는 인물이라….
“비키 언니!”
“아이고, 우리 라니냐!”
“언니, 저 해냈어요! 성공했어요!”
“그래? 그랬어? 아이고 잘했다, 잘했어!”
남자의 뒤에서 쪼르르 튀어나온 은색 머리 소녀, 라니냐가 폴짝 뛰어 빅토리아의 품에 안겼다. 빅토리아가 빙글빙글 돌며 그녀를 높게 높게 띄워주자, 라니냐가 신이 나서 까르르 웃었다. 사이가 매우 좋은 자매, 아니 이모와 조카 같은 모습이었다. 보기에 나쁜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이 근무 시간만 아니라면.
손목시계를 힐끗 곁눈질해 시간을 확인한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라니냐를 불렀다.
“에우리디케.”
“잉.”
“잉은 무슨 잉. 이리 와라.”
“이이잉.”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이이잉….”
마지못해 땅에 내려온 라니냐가 신발을 질질 끌며 남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오른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소녀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손을 올리기도 전에, 팔짱을 낀 빅토리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좀 느슨하게 풀어주는 게 어때? 라니냐는 아직 어린 애잖아.”
“열다섯짜리 어린애지요. 이젠 홀로 서기를 준비해야 할 땝니다.”
“고작 열다섯이라고는 생각 안 해?”
“고작 열다섯부터 준비를 해야 스물이 되어도 서른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겠죠.”
“에르체베트.”
“제 교육 방침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곤란한 게 있다면 그때 여쭙지요. 팀장님은 지금 근무시간이시니 업무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
…정말 이길 수가 없다. 저 혓바닥. 길어도 너무 길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빅토리아가 남자, 에르체베트의 뒤에 서있던 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때에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깜짝 놀란 제인이 어쩔 줄 모르고 안경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은 빅토리아가, 친근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제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인 오스몬드 씨, 맞죠?”
“아, 네, 네….”
“저는 빅토리아 마치입니다. 여긴 국제특수총국, 그 중에서도 비밀정보부 제3부서 특공팀이고요.”
“비밀… 뭐요?”
방금 뭔가 무서운 단어가 들렸었는데. 제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더 활짝 웃은 빅토리아가 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니까. 자,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제가 설명해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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