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리퀘스트] 라리안이 잠에 들었는데 엔리카를 만나는 꿈이요

2018.12.16

꿈속에서는 맡은 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학자이고 그 사람의 지인이다. 그 사람도 학자이고 각각 임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사이는 원만하다. 원만하다는 단어를 쓰는 건 내쪽이다. 좀 더 인간관계에 감성적인 입장을 가진 그 사람이라면 친밀하다고 칭할 것이다.

그 사람, 엔리카 페 아르다와 나는 먼 친척이다. 학자와 친척이라는 연 덕분에 그 집안에서 모은 서적을 대여해볼 수가 있었다. 그들, 아르다 가는 방대하고 귀중한 서적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집을 책장으로 채우다 못 해 집 외부에 서가를 만들어두었다고 했다. 내가 필요한 책은 미나르 숲에 동떨어진 서가에 있었고 그 사람이 나를 안내했다. 하루 이상은 꼬박 걸어야했다. 엔리카는 숲을 익숙하게 걷는 이었다.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없이도 딛어야 할 곳을 자연스럽고 바르게 짚었다. 어린시절을 숲에서 보냈다고 생기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에서 포석을 밟으며 자란 나는 푹 꺼지는 낙엽밭에 발을 두어번 헛짚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숲속에 집이 한채 있었다. 그 사람은 익숙하게 결계 마법을 해제하고 나를 안내했다. 어서오세요! 이곳이 저희 서가입니다. 여기 오는건 저도 오랜만이네요. 책은 이쪽에 꽃혀있어요. 많죠? 원하는게 어떤거라고 했던가요? 아, 그 분야는 이쪽에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의 안내를 따라 책을 골랐다. 딱 어떤 책을 찾아야겠던게 아니라 필요할 법한 자료를 선별해 가져가는 것이었으므로 몇권을 펼쳐보고 다시 꽃기를 반복했다. 고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고 그 사람은 할 일이 없어지자 옆에서 책을 한권 뽑아들고 읽어내려갔다. [꿈의 실존] 표지가 익숙했다. 나도 언젠가 읽었던 책인듯 싶었다. 둘다 그렇게 묵묵히 있다가 그 사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고요하네요.
......그렇군요.
......
......고요한걸 싫어하십니까?
아니요, 좋아해요. 마음이 평온해지잖아요. 라리안씨는 어떤가요?
별 생각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시끄러운것보다는 선호하는군요.
하하, 그런가요. 아, 차라도 내드릴까요?
감사히 받아들지요.

나는 책을 살피는 일을 중단하고 탁자에 앉았다. 그 사람도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말을 하는건 엔리카였고 나는 대부분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토론거리가 생기면 내쪽에서 훨씬 길게 말을 늘어놓곤 했다. 그 사람도 지지않고 의견을 내놓았다. 역사와 법, 자연의 이상현상에 대한 분석과 화제로 떠오른 새로운 마법 수식을 한번씩  건드리고 주제는 다른것으로 넘어갔다. 꿈이었다.

시간의 시전의 신관들은 어쩌면, 이 현실이 륀느 여신의 꿈으로 이뤄져 있을 수 있다고 말한대요.
기묘한 믿음이군요.
그런데 이론적으로 불가능한것은 아니라던데요.
환각마법을 말하는겁니까?
아니요. 마법 이상의 것이랍니다.

그 사람은 찻잔을 손끝으로 쓸며 천천히 설명했다. 증명되지는 않은 이론이다. 특정한 유의미한 구성원이 공유하는 함께 공유하는 가상현실이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가상현실에 기반한 다른 세계가 탄생하여 실제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 구성원들은 본질은 같으나 현실과 비슷하거나 다른 직책을 맡게된다. 나는 평행세계 이론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원래의 현실에 언젠가는  돌아오게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 이어서 원본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내부에 속한자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끝이 있기에 꿈이라고 칭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턱을 괴고 듣다가 말했다.

단순히 철학자들 사이에 떠도는 오랜 논쟁거리 같군요. 자신이 보는 모든 것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종류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개념이 탄생했다면 이 모든 것이 속칭, 꿈일지도 모른다는 주장하는 이들이 생긴건 이상하지 않군요. 아니, 순서가 반대겠군요. 신관들의 그런 주장이 있었기에 개념을 만들어냈을련지.
그렇지만 흥미롭지 않나요? 라리안씨.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어떠실것 같아요?

그 사람은 정말 재미있는 주제라는 태도였다. 때문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섬뜩하다고 여길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라리안은 의문은 제쳐두고 일단 질문에 답했다.

의미없는 가정 같습니다. 꿈이 현실과도 같고 분간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현실도 꿈과 같고 어떤 꿈도 현실과 같을텐데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둘을 동등하게 여기는 건가요?
아닙니다.  가정이 의미 없다는 걸 말했을 뿐이지 허상에 가치를 두진 않습니다.
그저 허상이라......정말 가치가 없나요?
꿈이란 깨어버리는 순간 사라질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부 무로 돌아간다는데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어쩌면 누릴 수도 있었던 수많은 삶을 겪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에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필요없습니다.

엔리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가차없이 답했다.

정말로 그런가요?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을 다시 보고, 만나고, 듣을텐데요.
허상으로 이뤄진 행복에는 관심없습니다. 그 안에 안주한다면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안쓰러워하는 시선이었다.

더 이상 바꿀 수 있는 현실 같은게 없다면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절대적인 마력이나 재앙 앞에서 우리 둘 모두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이 있답니다. 세계는 물론이고 자기자신마저 잃게 되지요. 그런 현실이 지속되는 것 보다는 꿈에서라도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예시가 모호하군요. 죽음을 말하는 겁니까?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런 방식으로까지 연명할 생각없습니다. 저는 죽음을 원하는 이는 아니지만 그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이상적인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건, 도피죠.
라리안씨.

엔리카의 시선이 올곧게 라리안을 향했다. 그녀는 찻잔을 놓았다.

나는 그것을 도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실에 대한 패배라고도, 순응이라고도 여기지 않아요. 

엔리카가 말했다. 강인하고 단단한 어조였다.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연인이 있는데 현실에서는 죽음과 어둠에 의해 갈라졌답니다. 그와 함께할 시간을 누릴 길이 있다면, 그것이 불완전한 꿈일지라도, 나는 그것을 다른 삶으로 여기고 그 순간을 성실히 살아갈거에요.

...... 엔리카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묘하게 걸렸다. 어떻게 저런 감상적인 태도로 굳건할 수 있는가? 게다가 그 생각에도 동의할 수가 없어서,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엔리카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당신은 나보다 몇년 더 살았고 과거의 지식을 습득했으며 내가 살고 있던 때 보다 발전된 미래의 학문을 배웠겠지만 꿈에 관해서는 내가 당신보다 경력자에요, 라리안.

꿈에서는 자신이 맡은 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꿈속에서 약속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언가를 알아차렸고, 검증 없이 받아들였다.

이건 꿈이군요.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인정하자, 꿈밖의 정보가 한차례 스며들었다. 나는 당신을 알았다. 당신의 결말을 알았다. 당신은, 전쟁속에서 모든 지인을 잃고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홀로 몇년을 지내게 된다. 그때의 당신은 불안정했다. 당신이 흔들리는 글씨로  '고요를 견딜수 없다'고  적어둔 것을 뒤섞인 식물 관측 기록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몇백년전의 기록이었다. 나는 당신을 알지만 이것이 꿈이라면,

당신은 과거의 사람이군요.
당신은 미래의 후손이지요.
후손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르다 가문은 멸문한지 오래입니다. 부모님도 저희도 그 성을 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애정은 전해졌겠죠?
아니요. 저는 필요에 의해서 학문을 습득합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해서, 당신과의 만남이 꿈이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달라고 요청하시는겁니까?
그래준다면 좋겠지만, 이 순간만을 말하는게 아니었어요.
이 순간만을?
그래도 당신이 속한 다른 꿈은 잘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그 속에서 당신이 당신에게 소중한 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꿈에서 깼다.





눈을 떴다. 겨울의 숲이였다. 온 세상이 회색이었다. 나무도, 하늘도, 대지도, 사람들도. 온도가 제법 낮을텐데 춥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도 떨지 않았다. 온기를 가득 머금은 흰 숨을 내뱉는 이도 없었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으며 목적없이 배회하며 목을 긁어내는 소리를 흘리며 그렇게, 그렇게 멍하니, 이미 정신이 죽은 채로, 감각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나 또한 거기 있었다.




“라리안.”

라리안은 눈을 떴다. 고서들이 수북히 꽃힌 어두컴컴한  지하실이었다.  라티에가 램프를 바닥에 놓고 라리안의 어깨를 흔들어보는 중이었다.

“라리안이 잠시 찾을게 있다고 내려갔었는데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서 내려왔어요.”
“......미안하구나. 깜박 존 모양이다.”
“라리안이요? 많이 피곤한가요?”
“아니. 괜찮단다. 올라가자.”

라리안은 책장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코트자락에 놓였던 책이 떨어졌다. [꿈의 실존].익숙한 표지였다. 라티에가 그 책을 책장에 다시 꽃아두었다. 둘은 나선 계단을 올랐다. 램프를 들고 앞장서던 라티에가 말했다.

“편지가 왔어요. 발신지는 연합이에요. 받아서 위에 두었어요.”
“......그거 이상하군. 통상 임무라면 레지스탕스를 거쳐 전달될텐데. 좀비사태와 관련해서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라리안.”

라티에는 멈춰서 뒤돌아보았다. 노란 램프 빛에  눈동자가 압녹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 좀비사태에서 아무일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 맞죠?”

라리안은 그렇다고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울린 괴성이 대답을 가로막았다. 목을 긁어내리는 소리였다. 라리안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신경을 바싹 세웠는데 뭔가 이상했다. 라티에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 한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맞나요?”

그저 재차 묻기만 했다. 라리안은 신경이 쇠약해졌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갑자기 졸음에 빠진다거나, 환청이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서.....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당장은 해야할 일이 많다. 이번 연합의 일이 끝나면 회복할 시간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라리안은 라티에에게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 아무일도 없었단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18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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