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1

2P 슈가하르 대학AU

“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다들 수고했다. 이번 과제는 다음 시간까지 제출하는 거 잊지 마라. ”

교수님의 입에서 강의가 끝났다는 말이 들리자마자 학생들은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일제히 일어났다. 교수님이 강의실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한 어느 학생이 제 뒷자리에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진짜. 자기 강의만 듣고 있는 줄 아나~ 다른 교수님들이 준 과제도 해야 하는데. 게다가 쉬운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 ”

“ 꼬우면 네가 교수 하든가. ”

“ 그럴 정도의 공부 머리는 없어서 유감. 곧 점심시간인데 밖에서 먹을 거? 아니면 학식? ”

“ 아침을 간단하게 먹어서 고기 먹고 싶은데. ”

“ 너 진짜 고기 좋아한다. 평생 고기 먹어도 좋아하겠어. ”

“ 두말하면 잔소리. 그리고 운동하다 보면 금방 배고프니까. ”

“ 그건 그래. 일단 내려가자. ”

그들은 가방을 챙기고 복도로 향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남들보다 다부진 체격을 가졌으며 머리도 긴 편에 속해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곧바로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나로 얇게 묶은 머리가 살랑거리며 움직였다. 누가 불렀나 싶었더니 방금 전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갔던 교수였다. 교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하르헤레, 잠깐 내 교수실로 와주겠니? 오래 붙잡진 않을 거야. ”

“ 네? 아, 네. 알겠습니다. ”

갑자기 왜 자신을 부르는 걸까? 의문이 들던 참에 차츰 멀어지는 교수를 바라보던 친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뭐야? 점심시간에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왜 너만 따로 불러? ”

“ 내가 알겠냐? 배고프면 기다리지 말고 너 먼저 내려가서 먹고 있어. ”

영문을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 그는 친구를 먼저 보내고 서둘러 교수님의 뒤를 쫓아갔다. 조금 더 걷자 교수는 제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실은 대체로 책장에 다양한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는데, 이 교수실도 다른 교수실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교수는 새 것처럼 반질반질한 가죽 의자에 앉더니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학생이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수신호였다. 편하게 앉으라는 말을 듣곤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교수실은 거의 들를 일이 없어서 편하게 앉으라고 해도 그는 이미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다. 교수가 운을 띄우기 전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 혹시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

“ 네가 스포츠과에서 제일 활발하고 운동을 잘한다고 하길래. 무거운 얘기는 아니고 가볍게 부탁할 게 있어서. ”

교수는 책상 아래에 딸린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받아들고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니 크로키 모델을 구한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크로키 모델 구인글에 익숙한 학교의 사진이 실려있으며 장소 또한 그가 이미 알고 있는 학교였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교수님이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은지 대략 이해가 되자 그는 구인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교수님, 이건……. ”

“ 다 읽었니?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거란다. 몸이 튼튼하고 유연하면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 그리고 학생들이 크로키 하기 수월할 거고. 원래 다른 모델을 초빙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안 되는 모양이야. 아, 누드 크로키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렴. 일정은 거기에 적혀있는 대로 진행할 거야. 어때, 할 생각이 있니?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된단다. ”

“ 음……. ”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런 대가 없이 모델로 쓰는 거라면 거절했겠지만 사례금이 적혀있어 단칼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적은 금액도 아닌데. 게다가 문제없이 크로키 모델을 맡는다면 교수님도 좋게 보실 것이다. 제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대학생이라면 교수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든 다 알고 있다. 교수님의 부탁을 들어줘도 손해 볼 건 없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결론이 나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저에게 있어서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

“ 그래, 고맙다. 학교에는 따로 내가 연락을 넣을 테니, 주의사항은 그쪽에 가서 얘길 들으면 된단다. 잘하고 오렴. ”


‘ 시선이 엄청 따갑네……. 크로키 모델들은 이런 시선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겠지? 교수님께선 너무 의식하지 말고 다른 곳 쳐다보면 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 ’

그는 교수님의 부탁대로 자신의 학교 건너편에 있는 미대에 방문하여 크로키 모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몇 분 간격마다 여러 자세를 취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캔버스들 너머로 느껴지는 미대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그는 몸이 간지러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편이라곤 하지만 연필이 사각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만 강의실에 울리고 있으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벽에 붙어있는 게시판을 보거나 시계를 쳐다보았다. 바깥 풍경도 얼핏 보였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열려있는 창문을 보기 힘들었다.

‘ 그래도 다들 열심히 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림 그리기 힘들어지니까, 조금만 더 버텨야지. …… 응? ’

강의실 뒤편에 있는 벽을 오래 쳐다보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자 교탁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 다른 자세를 취했을 때, 그는 눈에 띄는 학생을 발견했다. 대리석만큼 새하얀 피부와 허리에 길게 닿는 머리카락, 그리고 보기 드문 빨갛고 흰 오드아이.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빛날 것만 같은 조각상처럼 보였다. 나무 이젤 앞에 앉아있어 키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마른 체형에 비해 키가 큰 편인 듯했다. 그때 캔버스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로 향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법. 그는 서둘러 칠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 학생이 상당히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약간 조바심이 들었다.

“ 자, 크로키는 여기까지. 고생했어요, 하르헤레 군. 덕분에 무사히 수업을 마칠 수 있었어요. ”

“ 아뇨,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다음에 또 해보고 싶네요. ”

수고비는 학교에서 보내준다고 했으니 어련히 잘 보내주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그는 가볍게 몸을 풀곤 벗어뒀던 옷을 다시 입었다. 그리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 자신과 시선이 마주칠 뻔했던 학생을 찾아 사과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 학생은 아직 짐을 챙기지 않고 눈앞에 있는 스케치북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걸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그는 걸음을 옮겨 학생에게 선뜻 말을 건네었다.

“ 저기, 아까는 죄송했어요. ”

“ …… 네? ”

“ 그림에 집중하고 계시는데 제가 너무 쳐다본 것 같아서. 방금 전에 눈 마주치지 않았나요? ”

“ …… 아뇨? ”

“ 아, 그랬군요. 그래도 기분 나쁘셨을 것 같아서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

“ … 괜찮아요. ”

어렵다. 이 사람은 상대하기 어려운 유형이다. 그는 확신했다. 본인처럼 사교적이고 붙임성 좋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이 말 걸기 어려운 타입이 분명했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도 무척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대화할 때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봤지만 저 사람은 유독 경계가 심했다.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캔버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 저는 여기서 도보로 몇 분 더 걸으면 보이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체대생이라 그림에 문외한이다 보니,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크로키, 잘 하신 것 같아요. ”

“ 아, 네……. 정말……. ”

“ 네? ”

“ 정말 미술에 대해 잘 모르시네요. 고칠 곳이 눈에 보이는데. ”

“ 앗. …… 하하! 전공이 체육이라서 제가 무지합니다. 그래도 저는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

“ 감사, 합니다……. ”

“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네요. 저는 하르헤레 게네크라고 합니다. 스물세 살이고요. ”

“ … 슈가니르 만카드. 스무 살……. ”

“ 어, 혹시 말 놓아도 괜찮을까요? ”

“ 아뇨. ”

“ ……. ”

“ … 농담이에요. 저는 상관없어요. ”

아무래도 초면에 말을 편하게 놓는 것은 슈가니르와 같은 내향인에게는 몹시 부담스럽지만, 거절 당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하르헤레의 모습에 슈가니르가 한 순간 미소 지은 것은 착각인 걸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어 정말로 웃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는 슈가니르에게 허락 받자마자 금방 기운을 되찾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참, 여기는 건물이 많아서 길 잃기 쉬워 보이더라. 혹시 시간 괜찮으면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

“ 학교 정문까지만 바래다 줄게요. ”

“ 그래도 좋아! 크로키 모델,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 다음에 또 모델로 와서 널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너는 어느 학과야? 나는 스포츠과인데 어렸을 때부터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

‘ …… 말 많아. ’

슈가니르는 자신보다 작은 그를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사실 쓸데없이 말이 많고 재잘대는 사람은 마주하기 껄끄럽지만, 이상하게도 옆에 있는 그에게는 심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배려가 느껴졌던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슈가니르는 실로 오랜만에,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느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