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eath"tination 6화
Act. 1 화려하게 폈던 꽃
나무판자로 된 바닥에 어울리는 가구들이 놓여있다.
그런 가구들이 놓인 정중앙에 있는 탁자와 의자에 앉은 백성현은 묵묵히 한 쪽면에 곡괭이와 검이 교차되어 있는 심볼이 새겨진 철패를 만지작거렸다.
뒤집었다. 한글로 큼직하게 써져있는 ‘백성현‘이라는 글씨와 그 밑에 새겨진 이곳의 문자로 역시나 백성현의 이름이 쓰여있다. 설령 읽지 못한다해도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목패와 석패 다음이 철패였던가.’
모험가 증명패, 통칭 증명패라고도 불리는 이 철패는 원래 이름과 같이 모험가임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인다.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필수로 있어야하며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동 또는 패의 재질에 따라서 국가와 국가나 대륙과 대륙 사이까지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신분증이자 여권이기도한 셈이었다.
목패와 석패 그리고 철패까지는 도시과 도시 사이의 이동도 어렵기에 백성현은 사실상 레인투스에 발이 묶여있지만 도시 자체가 대륙에서 제일 넓은 도시로 유명했기에 아직까지는 크게 불편함이 없다.
‘원래부터 골목끼고 다니긴 했으니.’
창문에 투과한 빛이 철패에 닿아 눈에 쏘여졌다. 순간 눈쌀을 찌푸렸지만 손으로 쥐어 빛을 없앤 후에 정면을 바라봤다.
위에서는 아젝트의 치료가 한창이다. 빛의 마력을 가진 안나가 날뛰는 마력을 안정시키고 호출한 치유사가 아마 회복 마법을 사용 중일 것이다.
당연하지만 호출하여 온 치유사는 목에 걸린 호루라기와 손에 쥔 철패를 보내준 곳에서 온 사람이었다. 호출과 동시에 문을 두드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저 그뿐, 그 이상으로 무언가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끼익끼익.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눈에 띄는 깔끔한 백발을 한껏 올린 꽁지머리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깔끔해보이는 머리색과 다르게 이마에서 시작된 흉터가 그의 인상에 영향을 줬지만 그렇다고 그의 외모가 가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고 백성현의 건너편에 앉았다. 잠깐 숨을 돌리던 그는 백성현 손에 들린 철패를 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마 곧 깨어날 거고 금방 움직일 수는 있을 겁니다. 물론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하겠지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어린 친구가 목숨을 건진 것 같군요.”
“매드캣이 움직였다고해서 혹시나하고 와본 것 뿐입니다.”
치유사는 땀을 닦아낸 손수건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자글거리는 주름이 살짝 깊이 파여있다. 마치 관찰하는 듯 동시에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백성현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보고서로만 접하다가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불사자 백성현 씨.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굳이 그런 식으로 부를 거면 히어로명…, 자경단식 이름이 따로 있지만 그냥 백성현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아!”
백성현은 마침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제 이름에서 성씨가 백씨인데. 제 고향에선 하얗다라는 뜻이거든요? 그쪽 머리도 하얗고 제 성씨도 하얗다니까 무언가 운명처럼 느껴지네요. 오필리아 씨도 그렇게 느끼죠?”
찻잔이 진열된 가구를 뒤적이더니 찻잎이 들어있는 통을 꺼냈다.
아직 제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린 치유사-오필리아는 짧은 침음을 흘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성현을 바라봤다.
마침 찾던 걸 바로 찾았는 지 빙글 돌면서 제자리에 돌아갔다.
“그런 의미로 최근에 입수한 찻잎을 보여드리죠. 무려 백차라는 이름을 가졌네요. 이런 우연이! 효능이 무려…! 기억이 안나네요. 사실 알아본 적도 없지만요. 그래도 신기한 거 있죠? 제가 살던 곳에서도 있던 게 이 세계에서도 발견 가능하다는게. 잘하면 ■■도 만들 수…. 아, 이건 통역이 안되네.”
“제가 올 거란 걸 알고 계셨군요.”
탁. 찻잎이 들어있는 통이 탁자 위에 올려진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찻잔이 오필리아와 백성현 앞에 놓였고 언제 끓였는 지 모를 차가 주전자를 통해 잔을 채웠다.
“나름….”
백성현은 차를 입술에 갖다대어 향을 맡은 후 내려놨다.
“자료조사는 저에게 있어 생명줄이니까요. 오필리아 씨가 치유사라는 정보를 얻고 난 후에 어느 정도 예측했습니다. 죽지 않는 생명체는 꽤나 매력적이잖아요.”
딸깍, 딸깍
마치 무언가 신호를 주는 듯 컵받침과 컵바닥을 두번 두드렸지만 무언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의 흐름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오필리아는 다리를 꼬고 무릎에 손을 포갰다.
“사실 단순히 치유사라서라는 이유보다는 오필리아 씨의 지위라던가, 여러 기타등등도 조사했었죠. 굳이 따지자면 순서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사아악. 찻잔을 돌리자 컵받침에 쓸리며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찻잔과 컵받침이어서 그런지 깔끔한 소리였다.
“보르니아 후작령의 영지 전반을 담당하는 모험가 길드 [레바테인]의 서열 3위이자 길드의 치유사와 포션제조사들이 소속된 의무지원부 부장, 길드의 제 3 던전공략대 대장. 국가급 마법사이자 보석패 모험가. 와오! 세상에 세간에 알려진 것만으로도 이정도로 기네요.”
오필리아의 수식어들을 나열하던 백성현은 놀랍다는 듯 양 팔을 벌렸다.
“경험상 미친 [과학자]와 마법사는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과학자]? 아 연금술사같은 부류라면 확실히 마법사와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올 거란 것을 예상이 아닌 확신이었겠군요 ”
백성현은 방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네모난 무언가를 꺼내 탁자 한가운데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몇번 톡톡 치고 조작을 하더니 네모난 무언가의 넓쩍한 면이 빛나기 시작했다.
“에이. 예측이라니까. 제 12 던전공략대장님도 마법사니까. 그쪽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요. 역시 그분도 의무지원부 소속이고요. 그 외의 후보도 생각했지만…. 가능성이 그나마 가장 높은 사람은 눈앞에 있는 대장님과 아까 말한 12번 대장님.”
넓쪽한 면에서 나는 빛이 뭉쳐 어떠한 문자열을 만들었다. 오필리아에게는 생소한 문자의 나열이었지만 그 나열된 문자들과 수식들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원하는 사람이 오셨으니 보여 드리는 겁니다.”
공중에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빛무리들이 만든 문자들과 수식들을 보는 오필리아의 눈에 이채가 감돌었다. 어지럽게 나열되어있지만 평생을 마법사로 살아갔다는 것은 어찌보면 한평생을 연구자로 살았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불사자 백성현에 대한 연구 기록.”
“정답. 번역에 시간이 필요하니 당장은 못드리지만 번역이 되는 대로 드리죠. 그리고 이건 선불입니다.”
백성현이 품에서 붉은 액체가 들어있는 샘플병을 건내자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오필리아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았다. 백성현은 간사한 웃음과 함께 손을 비볐다.
“원하는 건?”
“별거 없어요. 그냥 가족처럼 대해주십쇼. 헤헤.”
….
…….
백성현의 거처에서 나온 오필리아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눈이 순간 돌아버린 탓에 손을 잡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답변을 주고 빠져나왔다.
“가족처럼인가….”
세상에서 제일 애매하고 요구범위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존재하지만 굳이 저런 표현을 쓴거라면 무슨 짓을 벌이든 눈을 감아달라는 의미이거나 아낌없는 지원을 달라는 의미겠지.
‘아직은 저자가 어떤 성향인지 전부 파악하지 못 했어.’
확실한 건 그의 존재 덕분에 그동안 손이 부족해 건들지 못 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저 현상금 사냥꾼 정도의 인식이었을 때도 있었으나 생사불문인 범죄자도 불구로 만들 뿐 절대 죽이지 않는 점, 아직 현상금이 등록되지 않는 범죄자도 거리낌없이 잡아내는가하면, 특히 마약을 다루는 집단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즉각적으로 움직였기에 길드 내부에선 무언가 목적을 가진 중급 경계인물로 자리잡았기에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살인을 최소화, 아니 사실상 불살주의자에 가까우며 차라리 죽는 게 편할 정도로 폭력을 행하는 것이 마치 살아만 있다면 살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신기하다며 관심을 가지는 간부들도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깊게 잠겨있던 생각이 걷혔다. 분홍빛 말총머리의 청년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채 있었다.
백성현이 예측했던 또 하나의 마법사.
20살이라는 나이에 제 12 던전공략대장이자 의무지원부 소속 전투지원과 과장이라는 직책을 얻은 천재 마법사.
배틀메이지 카이나.
현재는 제 3 공략대와 함께 이번에 영지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동행한 상황이었다.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니 제 3 공략대와 제 12공략대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던전 주변을 조사하고 있었고 구석에는 던전에 선행 투입될 범죄자들이 묶여있었다.
묶여있는 범죄자 중에는 석화된 빛의 마력 소유자를 가둔 창고를 관리하던 간부이자 최근 막 잡혀 들어온 [골목]의 간부 예거도 끼여있었다.
‘그러고보니….’
불사자가 너무 임팩트가 있어서인지 다른 둘이 묻혔지만 그 둘도 보통은 아니었다.
빛의 마력을 보유했다고는 하지만 전신석화 상태로 한달을 견딘 것은 보통 정신력이 아니다. 만약 평시에 만났다면 스카웃 제의를 하고 싶었을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당장 치료가 급한 탓에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법사.
불사자와 빛의 마력에 비하면 초라해보이지만 이중마법진을 다룰 줄 아는 건 마법사들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마법사에게 전수받지 않으면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나 역시 이중마법진을 몸에 새기고 있다.
“카이나 양.”
“네넵! 제 3 대장님!”
“혹시 동문 중에 아젝트라는 이름이 있나?”
아젝트의 이름을 듣자마자 카이나의 몸이 떨렸다.
굳어있던 몸은 점점 풀어지더니 손으로 목을 쓸어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침음을 흘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카이나는 짧게 주문을 외었다.
소리 차단 마법의 주문. 범위는 상당히 좁았다. 단순히 다른 사람 뿐 아니라 같은 대원들에게도 비밀로 하려는 듯 했다.
“제 3 대장님께서는…, 제 등에 새겨진 마법진을 보셨잖습니까?”
“그래, 상당히 복잡하고 심도가 깊은 마법진이었지.”
그의 등에 새겨진 마법진을 연구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당연히 전체가 아닌 일부만 허락받았지만 그조차도 오필리아에겐 좋은 자료였고 카이나의 스승이 누구인지도 파악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승님이 다른 동문들과 달리 마법진을 새기는 일만 시켰던 소년. 그의 이름이 아젝트였고 10살 때 일입니다.”
하. 오필리아는 어처구니 없었다. 등에 새겨진 마법진을 일부라고 해도 봤기에 더 기가 찼다.
조금만 어긋나도 발동되지 않는 구조였다. 실수가 있으면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정교했다. 그런 마법진을 평범한 바닥도 아니고 사람 몸에 새겼다. 난이도는 몇배, 아니 몇십배는 뛸 것이다.
“그 친구가 이중마법진을 작성하고 발동한 거 알고 있지?”
“보고는 받았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아젝트가 아니면 작성할 사람은 기껏해야 스승님일텐데….”
“네 스승은 지금 중앙대륙으로 가셨지.”
던전 공략을 앞두고 걱정거리가 늘어나면 좋지 않는데….
오필리아는 욱신거리는 흉터를 어루만지며 반대쪽 손을 휘저어 소리 차단 마법을 해체 시켰다. 앞서 던전에 범죄자들을 투입할 때 감시 마법으로 내부를 탐색하던 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던전에 들어갈 시간이니 마력을 되도록 아껴야한다.
“앞으로 시끄러워지겠구나.”
소원이 있다면 불사자, 빛의 마력보유자, 그리고 이중마법진 발동자가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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