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도는 우리는
강혜성, 서배희
*
“네 맘대로 갖고 놀 거라. 아, 사지 멀쩡히 살려두는 건 잊지 말거라.”
기어코 나올 말이 튀어나온다.
강혜성의 몸이 힘 없이 바닥에 내던져진다.
강혜성은 청화람을 노려보았다.
그의 앞으로 명령을 받은 이가 천천히 걸어온다. 아무리 눈을 마주치려 해도 마주칠 수 없는 자.
“...배희야.”
강혜성은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허리춤에서 뽑힌 칼날이 서슬 퍼렇게 날아든다.
“!”
강혜성은 몸을 굴려 날을 피했다.
“배희야.”
다시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마주친 그는 강혜성이 아는 그가 아니었음에도 강혜성은 제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날아오는 건 정 없는 몸짓이었다.
묵직한 타격이 몸의 한편을 덮친다.
함에도 강혜성은 어떤 신음도 내지 않았다. 팔을 들어 올려 방어했으나 무용지물이다.
갓 회귀한 몸으로는 평생을 단련한 무인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오른팔에 퍼진다.
‘부러졌군.’
담담한 강혜성의 감상이었다.
회귀를 수없이도 반복한 강혜성은 고통에 익숙하다. 이런 것에 무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함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건 좋은 미래에 대해 방해만 될 뿐이었기에 자연스레 인내하는 법을 터득했다.
강혜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왜 이번은 이전과 다른 걸까?
왜 이번은 자신의 부름에 다정한 눈빛을 보내주지 않는 걸까?
이어지는 상대의 연격에 강혜성의 몸은 금세 넝마가 될 뿐이었다.
밀리고 밀리던 강혜성의 몸이 담장에 가까워졌을 때 즈음, 강혜성은 자신이 의도한 때가 왔음을 감지했다.
강혜성은 몸이 단련되지 않았을 뿐, 결코 누군가에게 밀릴 무위를 갖고 있지 않다.
반복되는 회귀, 천마로 살아온 삶. 여러 강호를 누비며 담아온 견식. 그것은 감히 최강에도 도전할 수 있는 지식이다.
“안되면 죽기 봐야 더 하겠어?”
강혜성은 긴 나뭇가지를 꺾어든다.
고도로 단련된 무인은 나뭇잎으로도 검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강혜성 또한 가능하다.
단련하지 못한 내공은 선천지기로 충분히 덮어나갈 수 있다.
내공은 지겹게도 사용해 봤으니 강혜성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시전자의 생명력? 이대로 정신 차리지 못하는 저이에게 죽느니, 선천지기로 생의 힘을 바닥내던지.
어차피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나아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왼손에 가지를 쥐고선 강혜성은 포기 않고 그이의 이름을 부른다.
“배희야, 우리 대련할까?”
*
서배희는 눈앞의 교주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불쾌한 검붉은 눈동자였다.
“그리 노려보지 말거라. 정말 죽여버리는 수도 있단다.”
서배희의 앞에 앉은 이는 느긋하게 팔을 움직여 턱을 괸다.
잠시 서배희를 내려다보더니 그는 이내 픽 웃음을 흘린다.
“아, 죽이면 안 되나? 그럼 네가 좋아해 마지않는 그 아이에게 돌아가지 못하지 않나.”
서배희 앞에 앉은 그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해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함에도 서배희는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곳에서 멈추기엔 서배희는 이제 눈앞의 사내의 성정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비틀리고 꼬인 저 성정은 영생을 바라는 목적의 재료 중 하나인 강혜성을 절대 포기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에 서배희는 생각한다.
죽으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아득한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저가 보는 이의 글러먹은 성정은 자신의 상태를 언제고 숨기지 않을 테니. 다시 대치하려 돌아올 것이다.
자신 하나 때문에!
서배희는 눈앞의 사내에게 달려든다.
사내는 서배희의 돌발행동에 당황한다.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든 서배희는 망설임 없이 제 목으로 향했다.
시야는 뒤집힌다.
*
서배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곳은 마치 방금 전에 있던 곳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아득한 무저갱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빛을 닮은 은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객성의 동반자여, 예견대로 이곳에 닿았군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 목소리였다.
소리를 의식하니 목소리의 주인이 보인다.
긴 백발의 머리를 한 여성이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서배희를 선명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배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전 예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니, 당신께서 선택하시면 됩니다.”
대꾸가 없어도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전 그저 예견대로 인도하는 자일뿐.”
그가 말을 마치자 서배희의 앞과 뒤로 두 개의 길이 나타났다.
어떠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본능적으로 길의 각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 그리고 무림으로 돌아가는 길.
가히 신기한 일이었지만, 말도 되지 않는 일이 한두 번이었나.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 걷는다.
뒤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설까 싶었지만 서배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운 그의 집, 무대, 삶. 노력으로 이루어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함에도 서배희는 감았던 눈을 떠 발을 한걸음 내딛는다.
-...찮아.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괜찮아….
기억 속의 다정한 미소가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너는 지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겠지.
낯선 이 세계는 서배희에게 결코 달갑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지금껏 수많게 겪은 위기들과 죽음의 기억이 선명하게 서배희를 덮친다.
온몸이 떨려온다.
‘혈옥’의 일부가 없이 홀로 처음 맞는 위협의 공포다.
서배희는 생각한다.
이 세계는 너에게도 결코 달갑지도 친절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럼에도 너는 어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면서도 한없이 포근했던 이가 떠오른다
‘정말 좋아해, 애들아.’
그 다정한 손을 몇 번이고 내밀며 함께 이겨나갈 용기를 준 이가 떠오른다.
‘정말, 정말 좋아해.’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냥 돌아가. 내가 너보다 한참 어른이야.”
그 용기에 서배희는 용기를 얻는다.
어둠으로 가득 찬 길에서 하나의 빛줄기가 보인다.
“예견은 인도하고 운명은 개척하는 것입니다. 바라시는 바를 이루시길.”
서배희의 뒤로 자신을 인도해 준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배희는 뒤돌아 그에게 인사한다.
그도 마주 인사한다.
서배희는 마저 빛으로 나아간다.
망설임 없이 난투의 장으로 뛰어든다.
*
“큽.”
강혜성은 이를 물고 공격을 버틴다.
안쪽까지 깊숙이 울리는 타격파가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는 격통을 준다.
강혜성은 그저 믿고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형형한 살기를 뿜고 있는 저이는 이따금 정체성을 헷갈리던 자신의 친구일 것이라고.
이번에도 잠시 헤매고 있는 것이라고,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강혜성은 손에 쥔 나뭇가지를 강하게 쥔다.
아직 내공을 제대로 단련하지 못한 시점이었으나, 기를 사용하는 건 이 방법만이 있는 건 아니다.
선천 지기, 사람 모두가 갖고 있는 고유의 힘.
직접적인 생명력을 갉아먹기에 그리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다만, 그런 걸 따질 때인가.
친구의 손에 죽든, 자신의 삶이 다해 죽던. 결과는 같다.
강혜성은 조금 더 효율적인 확률을 가진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단전에 억지로 기를 순환한다.
아랫배로 강한 통증이 느껴진다.
하나 통증에 신경 쓸 시간 따윈 없었다.
혈옥이 가지를 집어 든 강혜성을 우습다는 듯 비웃으며 검을 들고 빠르게 쇄도한다.
쾌의 묘리가 담긴 초식이 강혜성에게 휘둘러진다.
강혜성은 그 검날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강기를 담은 날이 강혜성의 급소를 아슬하게 피한 몸의 중심부를 노린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뱉은 혜성 또한 손에 쥔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선천지기의 힘이 담긴 나뭇가지는 강기의 힘도 견뎌낼 수 있다.
“...!”
혈옥은 강혜성이 나뭇가지에 강기를 담아내는 모습에 한 번,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 자신의 검날을 깔끔히 흘려내는 그의 무위에 두 번 놀란다.
“네놈… 어설픈 건 죄 기만이렸다.”
혈옥이 강혜성을 노려본다.
“뭘 새삼스럽게.”
강혜성이 가라앉은 눈으로 혈옥을 내려다본다.
좀처럼 타인에게도 친우에게도 제대로 무위를 발휘하지 않는 강혜성의 기세를 끌어올린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인가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눈빛에서 익숙한 압도감을 느낀 혈옥은 뒤로 물러서 다시 중단세를 잡는다.
그저 본능적인 반사행동이었다.
혈옥은 서둘러 제 뒤편의 주인의 기색을 확인한다.
여전히 관심 없는 듯한, 권태로이 앉아 내려다보는 얼굴이었다.
혈옥은 자신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그리고 강혜성을 향한 적개심을 올린다.
신교의 장로에게 가히 견딜 수 없는 치욕이기에, 혈옥은 강혜성을 온전히 두지 않겠다 결심한다.
“이길 수 있겠어?”
엉망이 된 몸과는 정반대의 기세로 강혜성이 혈옥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그 도발에 혈옥이 다시 달려든다.
강혜성이 그에 맞서 한 발짝 내디디며 올려 벤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두고 아주 거만한 움직임이었다.
정말로 강한가?
혈옥은 의문을 갖는다.
거침없는 듯 여유로운 보법과 그저 올려베기임에도 모든 걸 삼킬 듯 선명하고 패도적인 검로.
강혜성의 완벽한 호선에 혈옥은 회피를 택했다.
곧바로 손안에서 나뭇가지를 역수로 돌려 쥐어 회피한 혈옥을 쫓아온다.
혈옥은 추격의 날을 맞받아쳐냈다.
익숙한 무겁고 거친 기운이 느껴진다.
“네놈…”
혈옥에게 말할 시간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다시 고쳐 쥔 강혜성은 혈옥의 검을 찌르려 들어온다.
이 또한 올려베기처럼 단순했으나 기세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이었다.
혈옥은 익숙한 기시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혈옥은 미간을 찌푸린다.
“네놈 어떻게 그 무공을…!!”
이것은 그의 충성을 맹세한 단 하나뿐인 주인.
천마의 무공과 무척이나 유사했다.
아니, 그 자체였다.
“......”
강혜성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척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는 이마저 안타깝게 만들 만큼 괴로운 얼굴이었다.
“상관없다. 명을 마치고 알아내면 될 일.”
혈옥이 다시 강혜성에게로 뛰어든다.
강혜성의 부러진 팔을 노렸다.
강혜성은 방어했지만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이 틈을 타 혈옥이 더욱 깊게 파고든다.
강혜성은 위기에도 당황치 않고 허리에 둘린 대대를 풀어내며 허리를 뒤로 젖혀 물러난다.
쉬지 않고 들어오는 검격을 대대로 쳐낸다.
“창포술… 잡기술을 익혀뒀구나.”
“너같이 날 괴롭히는 사람이 많아서.”
강혜성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강혜성은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는다.
아직 넘어갈 때가 아니다.
혈옥은 더 빠르게 날을 움직인다.
고통스럽고 성가시게. 하지만 하늘의 명대로 숨과 육신은 온전할 수 있게. 마치 섬세한 조각을 하듯 겸격을 날렸다.
고작 천으로는 나뭇가지만큼 유사한 검격을 낼 수 없다.
혈옥의 거침없는 검격의 앞에선 순간의 흐름에 힘을 싫어 방어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체력 또한 다해간다.
강혜성의 코에서부터 흐르는 선혈에 혈옥이 조소한다.
“벌써 지치면 곤란하지.”
“하지만, 우리 대련은 이렇게 길게 한 적 없는걸.”
체력은 한계였으나, 강혜성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강혜성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배희야, 괜찮아.”
혈옥이 다시금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나 여기 있어.”
불쾌감을 견디지 못한 혈옥이 강혜성의 목을 향해 덮쳐온다.
대대를 휘둘러 단단히 붙잡은 강혜성은 더 이상 한계였다.
조금씩 힘이 밀렸다.
“배희야.”
괴로울수록 미소 짓는 이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배희야, 거기 있어?”
검을 붙잡는 손에 힘이 풀린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대대는 그저 평범한 천자락일 뿐이다.
대대는 검날에 잘려 떨어진다.
강혜성의 몸이 떨어진다.
이윽고 혈옥의 검도 내려간다.
떨어지는 혜성을 그의 손이 받아낸다.
서배희는 대답한다.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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