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렘브리안트
탄생 ( https://glph.to/gjbdwp )
***
운명.
불가피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정해진 처지.
인류는 먼 과거 이미 존재의 초월을 겪었으나 여전히 종교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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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초월을 거듭하여도 섭리는 질서로 세상을 덮으려 조율이 이루어지고 재구성된다.
우린 정말로 운명을 초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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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구성하는 섭리는 정말로 어떠한 개념에서만 그칠까?
***
렘브리안트는 말없이 홀로그램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 안에서 흘러나오는 건 인류철학의 한 논쟁 강의다. 초월의 힘을 얻은 인류과 운명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누구던 신경쓰지 않고 지나갈 법한 주제였으나, 최근 렘브리안트에겐 이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수호자라는 정해진 존재의 의의를 거부하고 재탄생을 겪은 본인으로선, 운명이란 결코 가볍게만은 지나갈 수 없는 주제다.
렘브리안트는 아득했던 의식 속에서 어떠한 의지와 대화한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형체를 지니지 않았으나 존재만은 확실했으며, 자신을 넘어선 이 넓은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확실이 감지하였다.
해서 렘브리안트는 한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섭리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으로만 존재하진 않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확실한 의지를 지녔으며 편중된 조율을 꾀할 것이다.
라는 가설을 말이다.
가설의 근거를 모으기 위해 관련 지식은 모조리 쌓아 모으는 중이었으나, 렘브리안으는 만족할만한 뒷받침이나 논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채로 단말기의 화면을 끈다.
“렘브리안트!”
“어서오세요.”
렘브리안트가 앉아있는 곳은 한 디저트 카페였다. 새플리와의 약속으로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오래기다리셨나요?”
“전혀요. 그냥 철학 강의 몇가지만 보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탄생 의의라던가, 초월한 존재/ 의식. 운명과 섭리. 이런 것들이요.”
“…오늘은 뭐 먹을까요? ”
공감대를 찾지 못한 새플리가 말을 줄이다 화재를 바꾸었다.
“오늘은 복숭아 파르페로 하고 싶습니다.”
“제가 살게요.”
새플리는 자리의 단말기로 메뉴를 주문했다. 렘브리안트는 그에게 목례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새플리, 요즘 일은 어떠십니까?”
“매일 바쁘죠, 뭐… 함장님 계실 때보다 더 빡센거 같기도하고… 대체 혼자서 얼마나 일하고 계셨던거에요….”
“글쎄요, 별로 차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거짓말….”
준비된 주문이 테이블 위로 올려진다. 렘브리안트는 파르페를 한 입 떠먹었다.
단 맛은 언제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켜주는 맛이다.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뭔데요?”
“함선으로부터 독립하겠습니다.”
“네?”
“독립이요.”
“네?”
“……”
새플리는 렘브리안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 계속 되물었다. 물론 새플리는 렘브리안트의 말을 못 알아듣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을 뿐.
함선으로부터의 독립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함선에서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함선의 지원과 혜택은 뒤로하고 그로부터 떠나 지구로 복귀하던, 우주를 떠나 방랑객이 되건. 아무튼 함선 거주권을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새플리는 다시 되묻는다.
“왜…왜죠? 또 뭔가 일어나는건가요?”
“아무일도 안 일어납니다만 ”
“제가 그걸 믿을거라 생각하시나요?”
“아뇨.”
“?”
혼란스러워 보이는 새플리의 얼굴과 달리 아주 평온한 얼굴의 렘브리안트였다.
“새플리. 전 더이상 코어의 주인도, 수호의 의무를 짊어진 절대자도 아닙니다. 제게 남은 거라곤 삶의 자유라는 걸 누릴 기회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그럼 독립하시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미개척 은하로 가볼까합니다만…”
새플리의 얼굴엔 불안이 더 올라왔다.
“네? 왜, 왜 하필 미개척인거죠..?!”
“제 관심사를 연구하려면 그 은하에 있는 인류의 지식이 필요할거 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가 가면 안된다하면….”
“갈겁니다. 게다가 선원의 거주민 유지권의 조절은 보유자의 것이지 새플리의 권한이 아닙니다만.”
“그런건 저도 안다고요…. 왜… 왜요. 우리 방금 재회했잖아요. 전 아직도 함장님이 제게 알려주지 않은 작전을 실행하셨던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고요.”
새플리가 원망하듯 렘브리안트를 붙잡았다.
헤일로 함장이 전사한 전투의 이야기었다. 헤일로는 탐식의 조율자들의 접근을 밀어내기위해 특이점을 지닌 절대자인 자신 자체를 재물로 내놓았다.
당시 헤일로가 주변을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하듯 일처리를 주변에 넘겨주는 모습에, 불안해했던 상상이 실제로 일어난 트라우마가 새플리에게 다시금 피어나는 듯 하다.
“그건 절대자의 책임으로써 어쩔 수 없었던 일인지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렘브리안트가 새플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지금의 전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마세요.”
부드럽게 웃으며 새플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트라우마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 새플리는 더 괴로워질 뿐이었다.
저 지독하게 자상한 미소는 너무나도 그를 마음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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