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암살] 식은 커피

2018 하피옥윤

-커피가 쓰네요.

-설탕을 넣어야죠.

커피는 더이상 쓰지 않았다. 혼자 마셔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당신을 따라 설탕을 넣고 입에 물었던 티스푼은 그 어떤 것도 닿았던 흔적 하나 없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티스푼에 둥글게 비친 제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목에 둘린 노란 스카프는 낡고 닳아있었고, 잔을 들어 머금은 커피는. 차갑고 텁텁했다. 


식은 커피 (上) 


경성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많았다. 하지만 안옥윤은 늘 같은 곳을 고집했다. 옥윤이 늘 가는 이 층 카페의 창가에서는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전차, 매끈한 석조건물들과 붐비는 거리, 미쓰코시 백화점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그가 카페에 오는 날짜는 불규칙했지만, 시간대만은 항상 같았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커피. 안옥윤은 늘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앞에 놓인 커피는 늘 손 한 번 대지 않은 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를 의아하게 여기던 직원들도 점차 옥윤에게 익숙해져갔고, 그가 나갈 때쯤엔 자연스럽게 커피잔을 치웠다. 

 차가운 바람이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커피는 찬찬히 식어갔다. 와중에도 안옥윤은 그 커피잔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어가면서도 그는 창문 틈을 여닫지 않았다. 직원이 와서 닫아놓아도 유독 옥윤이 앉아있는 자리만은 바람이 거셌다. 옥윤의 손이 바람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봄과 여름이면 커피는 더욱 느리게 식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열려있는 틈이 좀 더 좁았다. 사계절 내내 열려있는 창문 틈에 아주 느린 속도로 커피는 식어갔다. 

안옥윤은 목에 둘린 노란 스카프가 팔락이고, 차가운 바람에 닭살이 돋고 피부가 트여도 창문을 닫지 않았다. 활짝 열린 것도 아니고, 아주 닫힌 것도 아닌 애매한 틈으로 바람은 잘만 들어왔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바람에 뜨뜻한 커피가 식어갈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


 안옥윤은 여전히 총을 들었다. 눈에 입을 맞추었던 그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미츠코로서 살아갈까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으나 잠시에 불과했다. 자신은 독립운동을 해야 했다. 그날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죽어라 버티고 이 악물고 싸우며, 우린 아직 싸우고 있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그는 경성에 홀로 남았다. 떠나고 싶어도,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상하이밖엔 남아있질 않았다. 옥윤은 만주의 동료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경성의 새로운 연락책은 카페 아네모네의 마담이 아니었고, 자신의 동지들은 더이상 황덕삼도, 속사포도 아니었다. 늘 함께하는 이들은 달라졌고, 쓰러지는 이들도 달랐다. 

년수가 흐르고 안옥윤은 독립군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위험하고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고, 그는 자신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양 가능한 한 모든 작전에 참여했다. 경성, 제물포 등지에서 시행된 작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창가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날이 늦으면 그 다음 날에라도 안옥윤은 카페를 찾아갔다. 커피가 나오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 사이로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바람에 흘려보냈다. 당신은 잘 지내? 오지 않을 답신을 기다리며, 옥윤은 식어가는 커피 향 위로 띄워 보냈다.

 우리가 입을 좀 맞춰야 될 것 같애. 

 아버지라도 죽이게? 그건 유행이 좀 지났는데.   

 저새끼 죽이러. 당신은 왜 안갔어.

 미츠코상은 아름답고...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재조합되기를 반복한다. 같은 음악만 반복하는 낡은 카세트테이프처럼, 같은 문장만을 몇 번이고 곱씹고 재생하며 되새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떠오르는 얼굴은 흐려진 구석 하나 없이 선연하다. 커피 향을 맡을 때면 사무치게 그리운 목소리가 울리는 것은 상하이로 떠난 남편의 노란 스카프가 자신의 목에 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스카프에 고개를 묻자 빛바랜 체취가 코끝으로 밀려들어 온다. 닳고 닳은 추억이지만 바로 어제 겪은 일인 양 남편의 목소리는 생생하기만 하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기억 속에서 장소는 흐려지고, 주변 인물들은 지워지고 끝내는 네 얼굴마저 잊을라치면 저는 사라져 가는 너를 향해 손을 뻗지도 못하고, 주먹만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다 못해 떨리는 주먹을, 옥윤은 거두지 못했다. 

*


 새출발할거야. 

그럼, 그래야지.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당신에게 돈없이도 뭐든지 해줄 사람. 

당신 다 잊을거야. 그러니까 나타나지 마.

나타나긴. 당신이 나 불렀으면서. 흠, 미라보엔 안오는거지? 아쉽네, 기다렸는데. 

안붙잡아?

마누라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그래야 남편이라고 장인어른께 변명이라도 하지.

...하여간. 이럴때만 남편이지? 

그때부터 쭉 남편이었는데.

분명 너였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옥윤은 자신에게 속삭이며 열린 창문을 비추는 커피잔의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수면에 비친 것은 자신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공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환상이었다. 알면서도, 옥윤은 그 목소리를 끊지 못했다.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는 것은 옥윤 자신이었다. 그날로부터 너를 잊겠노라 몇 번이고 다짐했는지 모른다. 커피가 온기를 잃어가는 시간 동안 해어질 대로 해어진 다짐 위로 다시 꾹꾹 눌러쓰다, 연필심이 부러지고 나서야 옥윤은 쓰던 손을 멈추었다. 저는 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 피부에 와 닿는 스카프의 감촉이 선명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겠어. 당신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잊어. 



안옥윤. 


 ...워드릴까요? 

가물가물한 상념을 가르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윤이 번쩍 고개를 들자 제 옆에 서 있는 직원의 얼굴을 본다. 고개를 든 제게 조심스레 묻는 직원에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직원이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스친 옥윤의 손가락에 그는 헛숨을 삼킨다. 스친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옥윤은 수그리려던 고개를 다시 든다. 옥윤이 들었던 것은 아주 자그마한 웃음소리였다. 얼핏 들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옥윤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웃음소리. 답신이 온 것이다. 열려있던 창문 틈은 어느새 닫혀있다. 직원이 들고 나간 커피는 식기 전의 미약한 온기 한 줌을 옥윤에게 전한다.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답신이 왔다. 하와이 피스톨. 옥윤이 알고 있는 그의 재산 단 여섯 글자. 옥윤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들이 빙빙 맴돈다. 가야한다. 언제? 지금. 무엇을? 남편과 한 약속을 지켜야지. 왜? 남편 만나러 가야지. 약속을 지키는 데 이유가 있나. 어디로?  미라보로. 카페를 나서는 옥윤의 스카프가 흩날린다.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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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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