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별들

답장

테네리스에게 첫 번째 편지를 받은 이후.

드림 by 서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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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풀었다. 인벤토리를 열어 안을 보다가 생각보다도 혼란스러운 모습에 손이 멈추었다. 플란은 물건 정리를 못하지도, 강박스럽지도 않았다. 적당히 편한 곳에 적당한 물건들을 모아두곤 했다. 많은 물건을 사거나 많은 것을 바꾸는 일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그의 가방은 적당히 깔끔했단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방은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가득 찼다. 생활 패턴이 달라졌다는 건 자신이나 다른 것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플란은 최근을 돌아봤다. 오래 가진 않았다. 상단과 축제, 다른 곳에서 찾아온 이방인과 크게 위험하지 않은 사건들. 왜인지 재단된 듯한 기억이 흐릿한 일상들. 모든 것이 끝난 이제야 정리할 시간이 조금 생겼다.

플란은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전부 꺼내었다. 크기대로, 종류대로 나눠놓으니 조금 볼 만 했다. 그러는 도중에 나무가 곁으로 다가왔다.

나무는 가끔 플란의 농장에 찾아오곤 했다. 아니, 종종… 그보다는 자주, 그러니까 생각보다 더 자주였던 것도 같다. 플란은 개의치 않았고, 자신보다 더 자주 농장에 있는 이를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거의 반 동거인이 된 나무가 물었다.

“이게 다 상단 제품에서 나온 것들이야? 저번에 다른 밀레시안들이 엄청 화내는 걸 본 것 같아.”

확률이 이상하다더라, 당첨이 되긴 하냐고 하더라, 상자를 던지는 이도 본 것 같다느니, 나무는 대꾸가 없어도 말하며 정리를 도왔다. 둘이서 나누기 시작하니 자질구레한 것들도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무는 보석들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가-요즘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구나, 식의 중얼거림도 들렸다- 다른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이거 다 교역 같이 가는 애들에게 줄 거지? 따로 둔다?”

“하나는 아닙니다.”

“응?”

플란이 루비들을 훑어보더니 하나를 가져갔다.

“내게 온 선물입니다.”

“…어, 선물? 누가, 아니, 섞였었는데 구분이 가?”

“네. 향이 다릅니다.”

보석에 향이 있어? 나무는 조금 황당한 시선으로 플란을 올려다 봤다. 아무리 밀레시안이라지만 크기도 모양도 아니고 향기로 보석을 구분할 수 있는 지 몰랐다. 플란은 그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오지도 않은 말이 무엇인지 예감한 듯 했다. 실제로 그는 대답을 대신하듯 물건들 사이서 편지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희고 깔끔한 편지였다. 이미 개봉해서 끝이 너덜거리고 인장의 일부가 찢어졌지만, 척 봐도 공들여 편지를 쓰고 꾸민 걸 알 수 있었다. 나무는 빠르게 생각했다.

‘누구지? 내가 아는 기존의 누구도 이런 식으로 편지를 부치진 않을 텐데? 모르는 애들인가? 아니면, 모르는… 밀레시안?’

나무는 플란의 다른 대답을 기다렸지만, 오는 건 침묵 뿐이었다. 결국 시선을 굴리다가 물어봤다.

“누구에게 온 건데?”

“모릅니다. 편지를 보내니 답장이 왔습니다.”

“이게 무슨 1 더하기 1은 2인데 2를 모르겠단 말이야.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 보냈어?”

나무는 황당해서 물어봤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플란의 대답은 깔끔했다.

“네.”

“……처음부터 설명해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무는 제 관자놀이는 살며시 눌렀다. 그러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다가와서 대신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요즘 이상한 밀레시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 들어줬냐며 한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부탁한 이의 상황을 고려하고, 내용 또한 무례하거나 위험하지 않다고 여긴 그의 판단에 뭐라고 할 순 없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단다. 대필해준 자신에게도 말이다. 편지를 열어보니 향이 났다. 꽃을 닮았기도 한데, 자연적이지 않은 묘한 향도 같이 느껴졌다고. 아마도 향수 특유의 화장품 냄새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플란은 대체로 향수를 뿌리지 않으니 낯설었을 것이고 원체도 기억력이 좋은 그가 그 향을 기억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같이 온 보석에도 향이 어렴풋이 남아있어서 그걸로 찾았다, 라는… 나무로서는 도저히 이해 안 가는 설명이었다.

편지가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플란의 반응으로 보건데 딱히 악의가 있거나 이상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닌가? 생각해보니 플란이라면 엄청난 욕과 인신공격이 편지로 온다 해도 저 표정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내용을 알려달라고 할 순 없잖아!’

나무는 자신의 호기심과 걱정과 양심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 사이에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답장을, 써야 하는 거지요?”

“응? 그걸 왜 나한테 물… 아니, 그, 음, 내용에 따라서?”

“…….”

“…….”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아, 아니! 알려달라고 한 건 아니었어!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하라고!!”

그의 무덤덤하고 깔끔한 반응에 오히려 양심이 아파왔다. 못된 생각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남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답장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뭘 그런 걸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그래. 예전에 그 밀레시안에겐 잘만 했잖아. 그렇게 보내.”

“예전이요?”

“그… 음, 다른 밀레시안 있지 않았어? 작은 인간 밀레시안. 걔가 편지 보냈다고 했잖아? 한동안 편지 쓰는 거 봤어. 펜팔 친구라도 된 줄 알았는데.”

플란은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다 봤다. 한동안 편지를 썼다. 무기만 들고 다녔는데, 어느날은 자리에 앉아 펜을 들고 종이에 글자를 썼다. 그게 너무나도 어색해서 모든 글자에 힘이 들어갔다. 한 통, 두 통, 다섯 통, 일곱 통, 열 통… 숫자가 두 자리 수가 되었지만, 그 사이 습관이 되었는지 나아지진 않았다.

그리고 좀 더 쓰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플란은 종종 불합리한 충동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곤 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이성적이고 신중할 수 있었다.

“…호, 혹시 답장이 안 온 거래도 너무 신경쓰지 마. 밀레시안은 원래 좀 갑자기 나타났다가 나오기도 하고, 좀 다른 거 하다보면 자주 까먹기도 하잖아. 여행이라도 간 거면 늦을 수도 있고…….”

침묵이 길어지자 답장을 못 받은 건가 싶어서 나무가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나무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작고 초록빛의 아이가 가볍게 말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런 성정이라면 귀찮아서 답장을 안 했을 수도 있다, 고 추측했고 최대한 모르는 아이와의 일을 지레짐작해서 말한 듯 말을 건냈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플란은 괜찮았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나 편지를 쓸 수 있던 이유도 하나였다.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렬한 충동이 이끄는 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자기 만족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한 남자의 머리가 나왔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성가신 남자는 꿈에서도 그랬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갔다. 어느 불온한 제단 위에 가득 올라간 편지를 보았다. 어디로 보내면 좋을 지 몰라 한 신을 위한 제단에 올려두었었다. 뜯어지지 않은 채 먼지가 쌓인 종이들을 보았다. 받는 이가 없다면 편지는 쓸모없었다. 열리지 않는 편지는 쓸모없었다. 내가 원해서 한 것이라고 중얼거렸지만 속이 상하는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불편한 감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그것들을 모아다가 어디에 버리면 좋을지 불태우는 게 나을지 고민했다. 이제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구분하진 않았다. 의미 없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네요. 이건, 답장을 보낼 수 있습니다.”

플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나무는 혼자 일하고 있었다. 마치 준비물을 챙겨주는 엄마가 된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가방 정리를 마무리 해줬다. 싫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그가 선물은 무엇이 좋을 것 같냐고 질문 했을 때, 당황했던 것도 같다.

“선물도 주려고? 굳이?”

“받았으면 답례를 하는 게 사람의 예의고 도리라고 알려준 건 나무 입니다.”

“아니, 그치만 받은 건 네 대필에 대한 감사였던 거고, 내 말은 그래도 모르는……. 아니다. 그래,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 괜찮겠지. 대충 뭐, 먹을 거라도? 가벼운 사탕이나 주전부리 같은 게 괜찮지 않을까?”

그 말에 플란이 요리 도구들을 꺼냈다. 나무는 그냥 사는 게 낫지 않겠어? 라고 말했지만, 플란은 재료도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물었다. 굳이, 라는 말은 직접 한 요리에 더 어울리지 않나?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리 그렇게 잘 하는 편은……. 그 말을 꺼내기엔 이미 거대한 손이 서툴게 반죽을 치대는 게 보였다.

어쨌든 플란은 원하지 않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이였다. 상대를 괜찮게 여겼다는 것일지도,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뭐라도 하려고 하는 건 보기 좋으니 나무는 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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