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새해 봄과 함께_알카이드의 새해(2)

알카이드의 새해(1)

브금

알카이드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내 옆에 앉았다.

‘Radiant’의 표지를 펼친 나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펼쳐지는 장대한 경관에 압도당하며 무심코 그에게 기대었다.

처음에는 어깨에 가볍게 기댄 정도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어느새 그의 가슴팍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물론 잡지에 정신이 팔린 나는 눈치채지 못한 지점이었다.

마치 사진 속을 우아하게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

문득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완전히 해가 지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소화가: 어…… 선배? 나 잠들었었어요……?

알카이드: 괜찮아. 그보다는 머리가 풀려서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알카이드의 무릎을 차지하고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일어나자 확실히 머리카락이 전부 풀려서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서둘러 정돈하려는 순간, 알카이드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알카이드: 내가 해줄게.

그는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모으더니 몇 가닥으로 나누어 정성스레 땋기 시작했다.

한 번씩 목덜미에 닿는 손끝이 어쩐지 조금 간지러웠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다.

머리땋기에 집중한 그 진지한 표정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알카이드: 자, 다 됐다.

나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미용실에 온 것처럼 마무리를 확인했다.

묶는 방법이 느슨한, 초보자의 방식이었다.

알카이드: …어때?

언제나 긴장하는 법이 없는 알카이드가 마치 쪽지시험 채점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화가: 응, 좋아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

알카이드: 그건… 헤어스타일이? 아니면 내가?

소화가: …네?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분명 지금쯤 얼굴이 귀까지 새빨갛게 익었겠지.

그런 나를 보며 알카이드가 미소 지었다.

알카이드: 괜찮아,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안되네.

알카이드: 다음에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물론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카이드에 대해 같은 마음이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까, 작은 것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조금씩 그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도록.

소화가: 아, 그럼 그것도 적어놔요. ‘머리 땋는 연습’.

나는 계획표에 추가시키려고 종이에 손을 뻗었지만ㅡ

그러자마자 알카이드에게 종이를 빼앗기고 말았다.

알카이드: 아직 보면 안돼.

소화가: …?

알카이드: 다 안썼으니까.

이렇게 저지당하니 괜히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소화가: 그럼 얼마나 썼는데요?

알카이드: …별로, 못썼을지도.

충동을 주체할 수 없게 된 나는 그를 결박하고 계획표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어 종이를 내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종이에 손이 닿지 않았다.

계획표는 알카이드의 몸 너머에 잘 숨겨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빼앗기는 커녕 건드려볼 기미조차 없었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나 혼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알카이드는 무슨 기싸움을 했냐는 양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소화가: 선배, 승부해요!

알카이드: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 같은데.

소화가: 이거 말고 다른 방식으로요!


브금

알카이드: 소화가, 다른 방식이라는 게 혹시…… 눈싸움?

긁어모은 눈을 하나씩 뭉치면서 나는 득의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가: 룰은 이거예요. 눈덩이를 열 개 던져서 하나라도 맞으면 내 승리. 만약에 선배가 지면 그때는 어른스럽게 계획을 보여줘요.

알카이드가 보기 드물게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많은 것을 함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알카이드: 만약 내가 이기면?

이 승부에서 나는 내가 이기는 경우의 수를 제외하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어떻게든 대답을 짜냈다.

소화가: 그때는…… 내가 그 계획을 봐주는 걸로…….

알카이드가 작게 웃었다.

처음으로 던진 눈덩이는 그를 맞추지 못했다. 이건 예상대로였다.

ㅡ나와 그의 사이에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었다. 내가 던진 공은 속도도 느리고 쉽게 피할만 했다.

하지만 몇 번 던지다보면 요령이 생길 것이다.

알카이드: 조금 더 가까이에서 던져도 괜찮아.

소화가: 빈틈! 에잇ㅡㅡ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알카이드를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힘을 주기라도 했는지, 눈덩이가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다음 눈덩이를 만들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알카이드는 내 움직임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열 번째 눈덩이를 손에 쥔 나는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이 그에게 다가가 있었다.

과연 이 거리에서는 못맞출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알카이드는 지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지 웃음을 흘리며 충고할 뿐이었다.

알카이드: 마지막 기회니까, 확실히 던져야해.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대로 눈덩이를 휘둘렀지만ㅡㅡ

그 손은 허공에서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소화가: 어……?!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도 깨닫지 못한 사이, 나는 그대로 힘차게 끌려가 알카이드의 품으로 들어갔다.

알카이드: 눈싸움에서 눈덩이가 스스로 굴러 들어오는 경우도 있네.

알카이드: 그렇게까지 나를 이기고 싶었어……?

한꺼번에 쏟아지는 눈 속에서 알카이드의 따뜻한 숨결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알카이드: 좋아, 네가 이겼어.

알카이드: 하지만 승부에서 패배한 내게도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은빛으로 빛나는 달빛이 눈 위에 반사되어 알카이드의 눈동자에도 비쳤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나는 까치발을 들고 살며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소화가: 이런 보상은……?

돌아온 것은 입술 사이로 떨어진 한 송이의 눈조각이었다.

호흡이 섞이는 깊은 입맞춤 가운데 처음 닿은 눈은 금세 녹아내렸고, 차가운 물이 된 그것에서는 희미한 단맛마저 느껴졌다.

알카이드: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브금

소화가: …….

어쨌거나 눈싸움은 나의 승리로 끝났고, 알카이드는 어른스럽게 신년 계획표를 보여주었다.

선선히 종이를 내미는 그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어쩐지 내가 나쁜 짓을 하고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카이드: 정말로…… 못 썼어.

그래, 그 말대로 다시 본 ‘신년 계획표’는 맨 처음에 본 것에서 조금도 진전된 게 없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화가: 그래요, 알겠어요.

알카이드: 알겠다니…… 뭐를?

소화가: 나와의 계획 같은 거,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어차피 선배의 제안을 제가 거절할리가 없으니까요.

그간 알아온 알카이드라면, 내가 이런식의 발언을 했을 때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마음껏 농담을 던질 수 있었다.

이런 말이 상대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거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알카이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아왔다.

알카이드: 너와의 계획은 더 대단한 게 있지.

그는 내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셀레인 섬의 새해 전야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 소리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브금

알카이드: 실은, 이것 말고도 계획표가 더 있거든. 그쪽은 하고싶은 것들을 전부 적어둔, 일종의 버킷리스트라고나 할까. 앞으로의 인생에서 하고싶은 것들을 하나씩 체크해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알카이드: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계획 속에 네가 나타난거야.

알카이드: 너와 여행을 가거나, 빙하가 보이는 작은 마을에 가거나. 고향에 데려가서 아는 이들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싶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됐어.

알카이드: 앞으로 너와 정말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싶어. 너무 많아서, 이걸 전부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ㅡㅡ

그의 인생 속에서, 내가 확실히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소화가: 그럼 왜 신년 계획표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어요?

알카이드: 그건…… 쓰려던 차에, 내게 기대고 있던 네가 잠에 들었다는 걸 깨달았거든…….

알카이드: 너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이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또 그만큼 사랑스러운 이유.

힘차게 그의 손을 맞잡은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소화가: 그럼…… 연말에는 뭘 하면서 지낼까요?

분명 알카이드가 세운 계획에는 ‘셀레인 섬에서 새해맞이’ 라는 항목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내게 물었다.

알카이드: 좀 전에 했던 말은 진심이야?

소화가: 좀 전에 한 말 어떤거요?

알카이드: 내 제안은 거절할 리가 없다는 말.

나는 조금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카이드: 자, 그럼 나가자.


알카이드와 손을 맞잡고 연말 파티로 물든 거리를 걸었다.

집에서 새해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단 10분만에 짐을 챙긴 알카이드는 자동 급식기에 푸짐한 고양이 사료를 준비했다.

소화가: 저기 선배, 우리 어디로 가요……?

알카이드: 우선은 거리를 조금 돌아다니려고. 지난번에 군고구마 먹고 싶어 했지? 군고구마 트럭이 여기 어디 있을지도 모르니까.

‘캐리어를 끌고 군고구마 트럭 찾기’……?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 걸까.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를 보고 알카이드가 미소 지었다.

알카이드: 군고구마 트럭은 가장 첫 계획이야.

소화가: 첫 계획이요? 그 다음은요?

알카이드: 공항이지.

알카이드: 아직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못했지만. 혹시 아까 읽은 잡지에서 가보고싶은 곳 있었어?

소화가: 마빈 슐리 씨가 찍은 사진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어디더라…….

알카이드: 그럼 가장 먼저 오는 비행기를 타고 가본 적 없는 곳을 가보는 것도 괜찮고.

나의 손을 따뜻한 겉옷 주머니에 넣은 알카이드가 주저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불확실하고 로맨틱한 생각이 내 마음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비행기는 언제 출발하고, 어디서 내릴까?

우리는 어떤 새해를 맞이하고, 어떤 한 해를 보내게 될까?

답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의 곁에 있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 여행이 끝나면 다음 봄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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