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u_에리우

유년기의 끝 ( Childhood's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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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노라. 사람들 위에 걸쳐 있는 먹구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자 모두를.

그런 자들은 번개가 곧 닥칠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예고하는 자로서 파멸해가고 있으니.

보라, 나는 번개가 내려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번개, 그것이 곧 위버멘쉬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서문」, 3, 23쪽

타임라인 설명 : 15세 프로필과 25세 프로필의 시간대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인생, 그리고 삶을 하나의 공간으로 표현하게 된다면. 그의 공간은 대부분이 역재생되고, 다시 재생되어버리는 무수한 테이프들이 자리한 영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장면의 시작부터 끝, 다시 끝에서 시작으로… 한 번의 손짓으로 눌려지는 스위치의 동작으로 역재생되어 거꾸로 움직이는 자신과 타인의 행동들을 지켜보며, 그는 제 나름대로 삶을 복기했다.재앙에서 도망쳐나온 이들의 도시, 벽의 끝자락, 최후의 터전에서 제 어미와 함께 죽었을 운명이었던 그가 지나가던 어떠한 은인의 도움으로 삶을 부여받았고, 그 은인은 앞으로의 풍요를 바라듯 자신이 살린 아이에게 풍요의 신의 이름을 주었다.

그 은인이 준 이름 덕인지, 그는 가을의 끝에서 살아남았고, 겨울의 시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풍요를 기원하고,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던 많은 이들의 염원으로, 겨울을 알리는 노파가 뱉어내는 차가운 숨결을 비껴나갈 수 있었다. 풍요를 기원하고 염원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만, 적어도 그 아이의 주변에는 따뜻함을 보여주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보다 더 오랜 삶을 버텨낸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배웠고, 아낌없는 사랑과 온정을 주고받는 법을 알아갔다. 세상이 보여주는 어두운 그늘을 유리창 너머에서 바라보지 않았고, 세상과 저 멀리 유리되지 않는, 적절한 거리에서 모든 것을 알아가며 세상과 가까워졌으며, 어미의 곁에서, 그리고 둥지를 떠나는 법을 배워나갔다.-그가 원치 않았어도, 어미는 떠나는 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언젠가 홀로 모든 것을 견뎌나가야만 하는 저의 아이를 위해서.

역재생의 끝, 턱- 하고 걸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의 시작점을 알린다. 말 없이 유년기의 테이프를 꺼내고는 또 다른 테이프를 꺼내어 영사기에 집어넣는다. 12세, 빛이 뭉쳐 하나의 긴 창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여느 아이처럼 자신이 특별한 힘을 가진 것에 기뻐하다가도, 안개 낀 장소를 걷는 것 같은 두려움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라났다. 14세, 때아닌 감기에 걸려 입학 시기를 놓치게 되었던.- 음, 아마도 이 시기 즈음에 은연중에 자신의 두려움이 드러났을 것이다. 자신은 애써 그것을 감춰두려 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보며 살아온 이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아이가 열감에 의해 몽롱한 상태임을 알았음에도, 어머니는 말했다.

“에리우, ——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무서운…거 없는데…”

“언젠가 네 힘이 모두를 해치게 될 거라고 말하는 마음 속 괴물이 나타나서 너를 계속 괴롭힐거야. 조그맣다가도 네가 가장 약해진 순간에 크기를 키워서 너를 잡아먹을지도 몰라. 그래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도망치지만 말자, 괴물은 사실 겁쟁이라서. 네가 무서워할수록 몸집을 더 크게 부풀릴거고, 잡아먹히게 되면 그 괴물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

“…잘, 모르겠어… 괴물은 그냥 쫓아내버리면 되잖아… 내가 저리가라고 외치면, 도망가지 않을까? 겁쟁이니까.”

“겁쟁이인 괴물은 저 멀리 도망가지 못할거야. 사실, 괴물도 자기를 봐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어. 에리가 괴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괴물의 정체를 알게 되면 괴물도 더 이상 에리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이름을 줘 버리는 거야. 괴물에게 이름을 주는 거야."

“엄마랑 나를 구한 사람처럼…?”

“……”

열병의 끝자락은 먹칠을 한 듯 거뭇거뭇하게 틀어져 회상을 방해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고는 빠르게 재생을 돌려 새로운 곳에 도착했을 시절에 멈춰서게 했다. - 그의 유년은, 아마도 아이들을 이끌던 대장 노릇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을 것이다. 영사기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추억 속에서 회상하며 놓아두고 싶은 이야기였으니. ‘예비 개척자 ’ 라는 15세의 아이에게 무거운 책임을 주는 어른들을 뒤로하고서, 그는 그 속에서 평온한 유년을 보냈다. 다 같이 조잘거리며 밤을 지새우던 것도, 함께 사진을 찍으며 웃어보이던 그 순간과, 유년기를 벗어나 성년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을 찾지 못해 주변을 맴도는 미성숙한 시기였기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성적도 나름대로 적당하게 유지했으며, 방학 때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즐거웠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세, 자신이 여태껏 무시해왔던 모두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든 괴물이 자신을 마주하여 이죽이던 날이 있었다. 수 없이 계속된 외침에 무력해졌던 찰나의 순간, 수 십개의 창이 지면에 내리꽂아지며 그 주변을 태워버렸을 때. 마침내 그는 몸집을 크게 키워 저를 바라보고 있는 괴물, 그 두려운 형체를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마냥 무찌르고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나서야, 그는 그 괴물이 태어나게 된 근원을 찾아내려 애를 쓰며 영사기를 수 백번 재생하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익혀나갔다. 익숙한 감각을 다시금 새로 배워나가며,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고, 올바르게 나아가는 법 또한 새로 익혔다. 미숙하지만 나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며, 그렇게 자신의 유년기와 작별하였다.

그 이후, 자신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가장 작고 약했던 두려움에게 말을 건네듯 서서히 그 괴물을 인지해나갔다. ‘모두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너무나도 사소한 소망에 불안이 덮어씌워진 것에 다름없었다는 것, 결국 ‘나’는 뒤쳐지는 이들을 무시하고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아버렸던 것에. 나름대로의 안도를 표했다.


“결국 이런 이야기예요, 스스로가 너무 불안해서… 그걸 마주하지도 못하고 계속 도망치기만 했다. 그런데 폭주를 계기로 그걸 돌아보게 되었다~ 같은… 시시한 이야기랄까요?”

“그 시기 이후로 계속 상담을 받기로 했다는 게… 나름의 다행이네요, 초반에는 엄청 낯설어하지 않았나요. 어색하다면서 저에게 반 즈음 너덜거리는 고양이 인형들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너덜거리지 않아요… 그리폰이랑 파프닐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음, 나름대로 안정을 취하고 있어서 다행이예요… 실습때의 평가도 좋았고, 안정적인 상태가 자주 보이는 것도 성과겠죠.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는 거 인정하시죠?”

“당연한 거 아닌가..? 다 자기 성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 있어요?”

“자, 이번 주 차 상담은 끝났어요. 곧 소집일이니, 잘 다녀오세요.”

“하하.. 잘 다녀올게요! 다쳐서 오면 선생님이 걱정하실 것 같으니까.. 튼튼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실존적 건강을 향한 첫 단계로서 경멸과 몰락은 인간을 그의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니체의 철학적 방법론이다.

경멸과 몰락은 새로운 자기의 탄생을 위한 자기구원의 춤으로 드러난다. 자기 자신에 대한경멸과 새로운 삶을 향한 몰락의 선택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서는 창조적인 존재로 변화되어간다.

하지만 이 과정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야만 한다.

건강한 인간유형으로서의 위버멘쉬 | 이상범

The Übermensch as Human type of Healthy Man : Focused on Interpretation of Übermensch und his existential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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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2


  • 여유로운 까마귀

    안녕하세요, 선생님! 연합우주에서 흘러들어왔습니다~ 와! 일단 저는 되게 즐겁게, 재밌게 읽었어요. 초반에 영사기 비유가 있어서 그런가, 글 군데군데가 되게 삽화 같다는 인상도 있고, 그런 원근조절에 능숙하신 거 같아서 그런 부분들이 정말 좋아요!! 마른 회색인 겨울날, 가루눈은 날리되, 그 설원에 서 있는 모닥불 켜진 오두막 같은 느낌의 글!! 정말정말 좋았습니다1!! 어딘가 온기를 간직한 글이라서 정말로 그 점이 최고같아요.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 LUPA 창작자

    논문 출처 : 건강한 인간유형으로서의 위버멘쉬 | 이상범 한국니체학회2019.04 니체연구 권 35호 171-214(44pages) https://kiss.kstudy.com/DetailOa/Ar?key=5202306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5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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