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처
날 잡는 것처럼 널 놓지 마.
원치 않았던 삶일 지라도 마땅히 부여받은 생이기에 오늘을 살아가고, 스스로 찾아낸 두 가지의 역할에 충실하여 살아가는 한 명의 평범한 인간. 그 삶의 여정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수 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그의 고요한 눈동자 아래에서 길어내어 가벼운 종이 위에 무겁게 눌러 담는다.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노라 카메라 바깥의 이들이 아우성친다. 잠깐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이를 흰 색의 종이 위에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빈 여백과 빈 소음이 남는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 사이에 맑고 투명한 보석이 떨어져 내린다.
원했던 삶을 부여받은 찬란한 생을 아낌없이 빛내고, 찰나의 달콤함에 안주하는 것을 최선의 행복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깊은 곳에 도달하게 된 한 명의 평범한 인간. 평안한 삶을 살았다는 것 정도는 종이 한 장 위로 누구나 알 수 있었기에, 지금의 생을 검은 색의 종이 위에 흰 색의 글자로 눌러 담는다.
누군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을 지켜주기 위한 행동을 멋대로 소비하지 말라는 듯, 혹은 스스로가 마음에 품은 신념을 보호하려는 듯 조각조각 깨져 있는 렌즈 안의 편린을 들여다 본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정확하고 낮은 목소리 사이로 진득한 상흔이 깊은 안쪽을 향해 삼켜진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 혹은 편히 쉴 수 있는 곳, 바쁘고 피곤한 삶의 한 켠에 존재하는 공간이란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가.
쌉싸름하고 다정한 애정이 존재하는 곳, 맞잡은 손이 단단하게 얽혀지다 하나가 되는 공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알고 있기에 섯불리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 다정에 기대어 내일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 내일이 너에게 조금 더 다정한 하루가 되기를, 나에게 조금 더 반짝이는 하루가 되기를.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공간에 내가 존재해도 되기를.
침묵과 발화의 역할은 대체로 불가분의 것에 가깝기에 이 순간은 발화가 물러나고 침묵이 내려앉기 적절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곳은 안식이라는 것에 한없이 가까이 맞닿기 시작했다. 수열의 극한과도 같은 감각은 손 안의 미지근한 체온이 제자리에 머물러 점차 그 단계를 높여가는 것에 비례해 커지고, 그 손을 좀 더 굳게 쥐는 순간 곧 하나의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손 안의 것이 부재한다면 불가능했을 것임을 이제는 알았고, 나는 자격지심에 그것을 멀리할 마음이 없었다.
한때 환하게 피어났던 꽃이 시들어간다. 심플한 디자인의 화병을 새로 차지한 싱싱한 꽃이 지나간 꽃을 대신하여 수수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시들지 않는 꽃을 머리에 장식하고 다니는 이가 삭막하게 마른 나무의 향이 감도는 공간에 고요히 존재한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 가는 법 밖에는 모르던 사람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달리던 걸음을 늦추고, 누군가의 옆에 서 있는 것을 택한다.
나는 그것이 언젠가 말라갈 운명을 가진 꽃들의 잔재인줄로만 알았다. 언제고 떠돌아 시들지 않는 꽃은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머물러 흘려보낼 향기가 없을 것이라 믿었으므로, 아주 늦게서야 옆을 볼 수 있었던 순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 대신 오선지만이 가득하던 백색의 공간에 새로운 발자국이 찍힌다. 노이즈로 가득한 사람과 찢어진 종이가 가득하던 흑색의 공간에 흰 색의 발자국이 찍힌다. 두 사람 분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걸음을 맞춰 걷는다. 음표와 글자가 혼합된 종이들이 발치를 간지럽힌다. 방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나갈 마음이 들 때 까지 휴식을 취하면 될 일이다.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하며 흩날리는 푸른빛의 꽃잎들 사이로 춤을 춘다. 맞잡은 손 사이로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흐른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렌즈의 파편들이 자연히 마모되기를 바라며 아프지 않은 방향을 향해 서로의 손을 이끈다.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곁에 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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