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허술한 논리와 치밀한 농담

나는 이럴 때 어김없이 “좋아.”라고 대답한다.

01 by 무차

새얀님과 함께 여름을 주제로 진행한 VOID NPC(아카보시 토오야)드림 합작 웹공개본입니다.

VOID 시나리오의 직접적인 내용 스포는 없지만 HO1 은닉 설정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플레이 이전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새얀님의 멋진 글은 이쪽에서 ▼


0

 

 

0과 1.

꺼짐과 켜짐. 없음과 있음. 연결되지 않음과 연결됨.

무엇이든 좋다.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를 0, 반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 상태를 1이라고 하자. 당신이 0이라면 1이 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무한한 가능성을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고, 결과만 놓고 생각했을 때 아직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0은 안정적이다.

 

하지만 한 번 1이 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모든 1은 0이 된다. 켜진 것은 꺼지고, 있던 것은 사라지고, 연결된 것은 끊어진다. 비록 우연이더라도 어떤 걸 이루었다면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보다 무언가를 잃고 싶은 사람이 더 드물 것이다. 한번 손아귀에 들어온 물건과 사람과 감정에 매번 미련을 쌓아두고 사는 게 우리니까. 설령 그게 상처일지라도.

 

0이 1이 되는 건 필연이 아니지만 1이 0이 되는 건 필연이니, 1은 0보다 훨씬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가 내 이야기였다. 눈앞에 앉은 당신은 평소 버릇처럼 ‘흠’ 소리를 길게 늘여 내고는 짧은 감상을 전했다. 1이 되면 슬프겠다고. 여느 때처럼 태평한 목소리였다.

그날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그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당신은 영원히 0일 테니까, 그럴 리 없다고.

 

1

 

 

매미 소리가 지천을 울린다.

그때 책상 위에는 하루에 한 장씩 넘기는 작은 일력이 있었다. 페이지마다 계절에 맞는 아기자기한 그림과 에세이 같은 느낌의 소박한 문장이 적혀 있는, 그해에 잠시 돌아온 레트로 열풍의 산물이었다. 그 달력을 옆에서 보았을 때 넘어간 페이지가 남은 페이지보다 조금 더 많은 시기였다. 연일 폭염 경보가 이어지고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사람들의 눈빛에는 조금만 더 버티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기대가 일렁였다. 지긋지긋했던 여름이 끝난다는 게 새삼스럽게 아쉬워지기도 하면서.

해가 내리쬐면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냉방기구가 있는 그늘진 실내와 그렇지 않은 새하얀 외부로. 점포에서 관성적으로 틀어놓은 유행가가 바깥으로도 새어 나왔지만 그걸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시절부터 슬슬 한낮이 되면 거리가 텅 비는 게 도쿄의 일상이 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바깥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건 더위를 느낄 수 없는 안드로이드뿐이었다. 직사광선은 그들의 외피에 어떤 고통도 주지 않으니까.

상황이 이러니 여름방학은 몇 년 전부터 거의 두 달에 가깝도록 길어졌다. 방학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고등학생인 나뿐이라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버지의 눈빛은 종종 내게 혼자 두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눈빛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더 잘 버텨내고 싶었고, 아침치고는 과장되게 기운을 내 인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인사는 대부분 ‘사콘, 다녀오마’ 내지는 ‘저녁에 보자’, 나는 ‘잘 다녀오세요’ 외에 큰 변주가 없었다.

혼자 있는 것만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던 중학생 때보다 증상은 확연히 나아졌다. 내가 예민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영화나 책에 깊게 집중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퇴근 시간까지 하루를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잠도 깊은 잠과 얕은 잠이 나뉘는 것처럼 집중력도 그랬다. 그게 얕아질 무렵 바깥에서 아주 작은 소음만 들려도, 그게 재수 없게 떨어진 달력이나 냉장고 소음이라는 걸 머리로 알 때조차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온 집의 방문을 기어코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서성대면서 들어온 적 없는 침입자를 찾아낼 때까지. 한 번 그렇게 되고 나면 다시 방 안에 들어와서 하던 일에 집중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건 시작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열 배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내가 방학 동안 대부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건 다 그것 때문이었다. 도서관 의자가 묘하게 불편할 때는 이전처럼 방학 스포츠 교실에 다니는 걸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꺼낸 적은 없었다. 아직도 혼자 있기 힘들다는 말로 다시금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불필요한 지출을 늘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아버지는 일이 늦어질 때마다 메시지 끄트머리에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고, 그때마다 나는 사과하시지 않길 바랐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것도 미안할 일이 없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아버지에게서 미안할 자격을 영원히 박탈하고 싶었다.

하필 그날은 대대적인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만큼 치안은 어수선해지고 경찰은 바빠지기 마련이라, 이미 오전에 아버지는 오늘 귀가가 늦어질 것 같다는 메시지를, 어김없이 짤막한 사과와 함께 보내왔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체 휴일이 끼었던 모양인지 자주 가던 구립 도서관도 오후 6시까지 단축 영업이었다. 혹시나 하고 5시 반부터 자주 알던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가족 여행이나 외출 같은 일로 집을 비운 채였다.

도서관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점처럼 작아지면서 어디론가 흩어졌다. 직원들이 정리를 마치고 건물 문단속을 할 때까지 나는 도서관 입구 구석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를 흘끗 돌아보는 관리인의 시선이 옆얼굴에 꽂히는 그때까지도 바깥은 아직 후덥지근했다. 오는 길에 지나친 카페들까지도 모조리 불이 꺼져 있던 게 떠오르고 나서야, 이제 내가 향할 곳은 정말 한 곳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해가 제법 기울었는데도 기온은 낮과 큰 차이가 없었다. 며칠째 이어진 열대야가 오늘 갑자기 잦아들 이유도 없고, 괜히 열심히 걸어봤자 더 빨리 더워질 뿐이라 나는 길 위에서 최대한 미적거렸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던 그 모든 노력이 실패한 탓에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고집은 딱 그 정도였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봤자 자정 언저리. 이러나저러나 밤이 되면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게 두 시간이나 당겨진 걸 참을 수 없는 게 그때 내가 가진 이상한 삐딱함이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은 유달리 선홍색이었다. 땅거미가 지면서 그 색은 점점 선명해져 나중에는 타는 듯한 오렌지색으로 하늘이 물들었다. 집 근처 철로에 다다르자 서서히 차단기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그 앞에 서서 전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보인, 좌우 번갈아 번쩍이는 경고등의 붉은색. 불 꺼진 주택가의 침침한 그림자. 여름을 맞아 무성해진 나무의 칠흑 같은 그늘. 나는 책에 종종 나오는 아름답기에 불길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뒤늦게라도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날이었다.

현관 앞에 붉게 드리운 석양의 자취에 눈이 닿았을 때 나는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여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없는 누군가의 비명이 그 소리보다 선명한 적색으로 번져 눈앞을 휘감았다. 근원을 찾을 수 없는 공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그 밑바닥에는 제대로 이어지는 장면 하나 만들지 못하고 조각조각 깨진 기억이 있었다. 과거에서 출발한 불연속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색채가, 소리가, 온도가, 날카롭게 모습을 바꾸어 머나먼 현재에 꽂혀왔다. 양쪽 사이에 명확한 연결고리라 할 게 없어도 내가 과거에 붙박일 수밖에 없도록.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현관문을 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여기가 아니면 어디로? 그 답을 막연히 찾으려 몸을 돌리던 나는 누군가와 가볍게 부딪혔다.

 

2

 

 

“뭐야, 어디 가려고?”

예상치 못한 조우에 비명도 탄식도 아닌 어중간한 소리가 맥없이 새어 나왔다. 더 꼴사나운 소리를 내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곤두섰던 신경이 시선이 맞는 순간부터 천천히 잦아들었다. 퇴근 후에는 한쪽 팔에 걸치고 다니는 살짝 구겨진 제복, 어딘가 얄궂게도 보이는 휘어진 눈매. 의아함이 깃든 적색 눈동자. 아카보시 토오야. 모범생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못하는 걸 그의 천성으로 여길 만큼 어딘가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흐트러짐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런 날씨 따위 큰 문제가 아니라는 양 번듯한 건 때아닌 치밀함처럼도 보였다. 꼭 이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런 말초적인 결벽을 보고 있으면 나는 어딘가 간지럽혀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장난처럼 말을 건넸다가 상대가 굳어버린 탓에 그의 얼굴은 의아함을 지나쳐 의구심이 번지고 있었다. 내가 그때 돌이라도 된 것처럼 멀거니 그를 쳐다보기만 한 건 다른 것 없이 물에 빠진 것처럼 축축한 몰골이 창피해서였다. 그를 만나서 반갑지 않은 날은 한 번도 없었지만, 최근 들어 이유 모르게 피하고 싶은 날만큼은 있었다. 지금처럼 스스로가 너저분해 보일 때만큼은 더더욱. 나는 뒤늦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가볍게 훔쳤다.

“콘쨩, 괜찮아?”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과 말 사이의 자연스러운 간격보다 한 박자 빠르게 나는 입을 열어 버린다. 도서관에 뭘 놓고 온 게 생각나서, 생각해 보니 역 앞에 편의점 좀 들르려고 했는데, 오늘 휴일인데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 말의 속도와 타이밍이 누가 보아도 부자연스러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솔직하게는 그냥 혀를 깨무는 게 나았을 텐데….

나이 어린 사람의 심상은 나이 든 사람이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별세계의 것이기도 하지만, 이따금 읽어내는 게 아주 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때에는. 제아무리 단단하게 굳은 시멘트처럼 꾸며 놓아도 어른의 눈에는 조금만 건드려도 푹 꺼지기 좋다는 게 바로 들통난다는 걸 나는 믿는다. 나는 갑자기 아는 사람을 만나 당황한 사람처럼 굴고 싶었지만 토오야의 눈에는 내가 끝내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까지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갈 곳을 찾아 헤매던 모습까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겠지.

이럴 때 토오야가 ‘예전 일 때문에 그래?’라던가 ‘저녁까지 같이 있어 줄까?’라고 물었으면 나는 금세 꼬리를 내리고 솔직해졌을지 모른다. ‘응, 사실 그랬어. 아직도 조금 힘든 것 같네.’ 이런 대답도 오랜 시간 준비한 것처럼 곧장 튀어나올 수 있다. 그는 나를 전보다 그다지 나아지지 못한 애처럼 취급해 주고, 나는 그런 연민을 고맙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런 상태는 마냥 좋다고 할 순 없지만 확실하게 편하다. 나는 그가 세운 테두리에 의지할 수 있고, 걱정해 주는 사람과 걱정스러운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명확해지니까.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내가 되는 대로 내뱉는 거짓말도 우선 믿는 듯이 넘어간다. 그리고서 은연중에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걸 드러내 보인다. ‘사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널 믿어 줄게.’ 같은 태도로. 그런 애매한 배려를 다정하다고 해도 좋을지는 지금의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다. 사실 빠뜨리지 않았고 일부러 집어던진 게 철로 된 도끼였다는 괘씸한 거짓말조차 무슨 이유에선지 봐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면이 약간 밉기도 했지만 절대 싫지는 않았다. 괜찮은 척하는 거짓말에 선선히 속아 넘어가 주는, 그런 어른 대접이 어딘가 사람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내가 처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누가 보아도 심란한 몰골에 대해서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상황에 자주 지어 보이는 느긋한 미소와 함께, “그랬구나.”라고만 말하며 그 문제를 그쯤 정리했다. 내가 다음 말을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토오야는 그답게 영리한 제안을 하나 했다.

“조금 걸을래?”

그리고 나는 이럴 때 어김없이 “좋아.”라고 대답한다.

 

3

 

 

조금이라도 의젓하게 보이고 싶은 고등학생의 체면을 그렇게라도 살려주는 게 참된 어른의 미덕이라고, 나는 토오야와 지내면서 조금 배웠다. 걷자고 말한 데 비해 우리는 금세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는데, 연휴 동안에 문을 닫지 않은 한 프랜차이즈 카페 창가 자리였다. 그 사이 바깥은 어둠이 깔려 휴일의 고요한 거리가 내다보였고 그 위로 조금씩 열이 식어가는 내 얼굴과 변함없이 여유로운 토오야의 옆얼굴이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가족과 친구, 지인 중 그 어떤 단어로도 온전히 그의 소속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인보단 가깝지만 친구처럼 허물없이 굴 순 없는, 그렇다고 가족처럼 밀접하다기엔 다소 격의가 있는 위치. 보편적인 인생에서 이런 위치의 사람을 갖기도 쉽지 않겠지. 토오야는 그 위치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태 물어본 적은 없지만 토오야에게 나와 아버지는 어떤 의미일지가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가지는 생각만큼, 그도 나를 가깝지만 어렵고 밀접한 한편 격의 있는 사이로 여겨 줄까.

“휴일이니까 일찍 들어가라고 그러셔서. 집에 갈까 하다가 콘쨩 생각이 나서 말이야.”

“일부러 왔다고?”

“자주 그랬잖아? 요즘은 좀 바빴지만. 안 그래도 집에 있어봤자 더우니까 뭐라도 마시러 가자고 하려 했거든.”

토오야는 거기까지 말하고 익숙하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다른 것을 전혀 고민하지 않는 듯, 아니면 보통 어디서든 이것만 시키는 듯 거침없는 선택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는 나였지만 액정에 떠오른 메뉴판을 읽어도 이상하게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주스류를 고르려다 생각을 바꾸어 제일 앞에 있는 블랙커피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내심 한 마디 물어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 커피도 마셔?”

“…자주 마시는데.”

“헤에, 전혀 몰랐네. 이 시간에 마시면 못 잘지도 몰라.”

“잘만 자니까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전까지 커피를 마셔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로였다. 다행히 마시고 잠이 안 오거나 심장이 빨리 뛰는 문제는 없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자주 불안한 사람에게 커피는 딱히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날 저녁 내내 어쩐지 안절부절못했던 이유는 그 커피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커피 때문이다.

그렇게 따로 시간을 낸다 한들 특별한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진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도적으로 언급을 꺼렸기 때문에 일상적이고 사소한 화제가 둘 사이를 채웠다. 최근 읽은 책이나 저번에 친구와 갔던 곳 같은, 나에게는 중요하지만 토오야에게는 평생 상관없는 일들을 그는 제법 흥미롭다는 듯 들어주었다. 그런 능숙함. 어린 사람과 적당히 어울려 주는 듯한 산뜻한 반응 앞에, 왜 그렇게 무엇이든 꺼내어 말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평생 노력해도 그런 면모는 가질 수 없고, 그게 결코 닿을 수 없는 별과 같다는 점에서 나는 아카보시 토오야를 동경했다.

커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 새삼스럽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내가 말한 무척 사소한 것도 토오야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거 5월 정도에 같이 조 활동 했다는 친구지?’처럼, 말해버린 뒤에 나조차 잊어버렸던 사사로운 정보를 토오야는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그의 직업은 아버지와 같은 경찰이니 그런 것까지 기억하는 건 직업병일 거라고, 마음속의 배심원 대부분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많아야 두세 명 정도는 자꾸만 다른 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토오야에게 있어 내가 제법 중요하고 신경 쓰이는 사람일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건 사연 있는 사람을 딱하게 여기는 연민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마음에 드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기대가 오르내릴 때마다 어딘가 갑갑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저 시선을 거절하고 나서 내가 새로 제안할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미는 사람 없이 혼자서 흔들리고 있었다. 커피는 쓰기만 하고 정말 별로였다.

 

4

 

 

내가 꺼낼 말이 거의 떨어지자 토오야는 이미 끝난 지 조금 되어 매스컴에도 오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건의 주체는 인간이었으나 목격자가 안드로이드인 사건이었다. 저녁 뉴스에 한두 번 보도되었으나 몇 개의 헤드라인을 넘나들 정도의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고, 비극적이지만 그만큼 흔한 일이라 세간의 관심이 빠르게 흩어진 걸 기억한다.

“그냥 흔한 일이었어. 원인이야 골이 깊은 감정싸움처럼 보였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돈에 있었고.”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범인은 자신이 일하는 공장으로 피해자를 불러내 살해 시도. 여기까지는 뻔한 플롯이지만, 한 가지 변수는 범행 현장에 공장에서 쓰던 안드로이드가 있었던 거지.”

그 안드로이드의 주인은 이 사건의 범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안드로이드에게 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기계는 주인의 명령에 충성하기 마련이니 범인은 아마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 안드로이드는 주인의 범행을 순순히 시인했다. 기계의 증언 덕에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었지만,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해당 기체는 현재 폐기 처분되었다는 결말이 건조하게 이어졌다.

토오야가 하필 이 사건을 꺼낸 이유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 것처럼 일하다가 알게 된 여담을 전해준 정도겠지. 뉴스에는 사건의 개괄만 나왔을 뿐 안드로이드에 관한 내용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기억이라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이 정도 이야기를 듣는 건 큰 부담이 없었기에 나는 짤막한 감상을 전했다.

“돌발행동을 하는 안드로이드라니, 무서운데.”

“나쁜 일을 신고했는데도?” 그가 다시 물었다.

“다른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매번 좋은 일이라는 보장도 없고.” 어쩐지 내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나와 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걸 언제나 염두에 두는 걸 진정한 어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매번 실제로 생각한 것보다 강경한 어조가 되었다. 말을 꺼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설득하는 것처럼. 내가 그때 조금 다른 대답을 했어도 토오야의 표정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는 나에게 기대하는 정답이 없다.

“안드로이드가 학습하는 내용에는 일반 도덕에 관한 것도 있으니까. 어떤 오류로 인해 주인의 명령보다 도덕이 조금 더 앞섰을지도 모른다, 그게 경찰의 결론이었어.”

“오류.” 나는 그 단어를 한 번 따라 했다. “그만큼 바람직한 오류도 없긴 하겠네.”

토오야는 “응, 그렇지.”라고 말한 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대화는 거기서 충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거기서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하기에 나는 딱히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안드로이드를 무서워하는 사람. 순수하고 유익한 안드로이드를 보고서도 바짝 긴장하고 마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게 전화기나 세탁기처럼 악의 없는 도구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무던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침묵을 깨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기계에는 목적이 있잖아.”

“응.”

“만약 뭔가 변수가 생긴다면,” 나는 말을 조금 고민했다. “그건 안드로이드와 인간 모두에게 비극 아닐까.”

“비극?”

“응. 비극.”

그때 마주한 토오야의 시선은 평소와 달리 나에게 의문을 표하고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가 구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명을 조금 덧붙였다. 기계는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이 분명한 존재인데, 변수가 생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다른 게 멀쩡해도 폐기된다. 인간은 그 기계에 대해 예상하던 게 틀어지면 여러모로 손해다. 때에 따라서는 위험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서로 간에 비극이라고.

내가 0과 1 이야기를 꺼낸 건 이것 때문이었다. 나는 폐기 처분된 그 안드로이드가 증언하는 순간 분명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안드로이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믿지 않지만, 양심이라는 오류가 생겼다면 분명 그랬으리라.

 

5

 

 

가게의 영업시간이 끝날 때가 되어 우리는 다시 습한 밤거리로 밀려 나왔다. 그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허기가 몰려오는 게 이상했다. 토오야는 고맙게도 저녁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그래 놓고 이런저런 핑계로 아버지가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켜 줄 심산인 걸 알았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어느 집 흰 담벼락에서 능소화가 쏟아졌다. 닦아 놓은 듯 맑고 검은 하늘 아래 반짝이는 도시의 빛. 그리고 그에 굴하지 않고 이곳까지 다다른 먼 우주의 별들이 보였다. 그런 풍경은 사람을 금방 감상적인 기분으로 만들기 마련이라, 말없이 골목길을 나란히 걷는 동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세상은 혼자 있는 나에게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집 안에, 아버지와 토오야가 새로 만들어 준 방파제 안에 있을 때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낮 동안 나를 괴롭힌 이유 모를 불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오직 잔잔함만 남은 이유를, 옆에 있는 토오야 덕분이라고 여기는 게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그걸 다시 정리하는 척 흘끗 올려다보면 마주 내려오는 붉은 시선. 그게 교차하는 순간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는 게 좋았다. 가끔 그가 ‘왜?’라고 물어볼 때는 더.

두어 시간 만에 다시 도착한 집 앞은 변함없이 고요했다. 금속으로 만든 두꺼운 대문을 밀자 익숙한 쇳소리가 났다. 그걸 빠져나오면서 토오야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이야기 말인데, 0이랑 1.”

“아직 생각하고 있었어?”

“응. 콘쨩 착하구나 싶어서.”

“그 이야기의 어딜 보고 그런 결론이 나와?” 나는 살짝 싱겁다는 듯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1이 되는 건 언제 알 수 있는 거야?”

“응?”

“그거, 뭔가 신호가 있나?”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현관 앞에 멈췄다.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대단한 철학 이론도 아니고 그냥 커피 때문에 되는대로 꺼내 본 말이었으니까. 한참 동안 열심히 말해 놓고는 그건 잘 모르겠다고 하기도 창피해서, 나는 뭐라도 그럴싸하게 답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그것이 뭐든 곧잘 진지해지는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떠올릴 틈도 없었다.

그는 나를 생각하도록 둔 채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저렇게 무언가 복잡했던 일이 풀린다면. 굳게 닫혀있던 게 열린다면. 뭔가를 믿게 된다면. 그게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면…. 그 문장 중 무엇도 모든 상황에 들어맞을 완벽한 답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떠올린 다음 나는 어떤 생각도 계속하지 못했다.

“안 들어올 거야?”

환히 빛나는 문 안쪽에서 이쪽을 가만 바라보는 토오야. 그냥 장난이라고 말하는 듯한 여상스러운 미소를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극적인 연출이나 대단한 설명 없이 갑자기. 그렇게 갑자기 1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로. 그때 내가 느낀 복잡한 감정 안에는, 틀림없이 슬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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