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로맨스
겸한
새벽 2시. 정한이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늦은 저녁 갑작스럽게 연속으로 울리는 전화 진동은 지옥에서 부르는 손짓과도 같았다. 전화가 오는 곳이 다양하기도 했다. 승철이 세 번, 민규 두 번, 승관이 두 번. 학번과 학과를 가리지 않고 모여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놈도 분명 거기 있다는 뜻인데.
카톡은 들어가서 읽는 순간 '윤정한 안 잔다!' 라고 소리 지를까 봐 읽지도 않았다. 짜증을 내던 정한이 핸드폰을 옆으로 휙 던졌다가, 또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에 몸을 던져 화면을 확인했다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러다 부재중 목록을 열어 한참을 내려본다. 쌓여있는 부재중 사이에 찾고 있는 세 글자가 보이질 않는다. 몇 번의 스크롤 뒤에야 뜬 이름 세 글자, 이석민. 위에는 몇 주 전 날짜가 띄워져있다.
석민은 정한에게 처음부터 특별한 건 아니었다. 착하고 순진하다고는 생각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민규나 승철이 같은 애가 전화해서 진짜 너 밖에 없어서 그래. 하는 몇 마디가 담긴 간절한 전화 한 통이면 곧 야구모자를 쓴 익숙한 얼굴이 과방 문을 두드려왔다.
그러다가 하도 시키는 것 같길래. 열심히 일하는 게 고맙기도 해서 "너넨 석민이 밥은 사주고 시키는 거야?" 하고 몇 마디 거들었더니 어느새 제 옆에 앉아서 제 모니터와 얼굴을 번갈아가며 빤히 보고 있었다. 마음의 거리가 몸의 거리와 같은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면 머쓱하게 "안녕하세요, 형." 하고 인사하길래 아까 우리 인사 안했냐고 물으며 웃으면 머쓱하게 따라 웃는 게 귀여웠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착하다 못해 순한 애.
그렇게 보내다보니 승철이나 민규가 없어도 둘이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심심하면 생각이 났고, 밥 먹을 때면 '오늘은 뭐 먹을까요?' 하고 오는 카톡이 일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이를 정의할 만큼 무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사이였다.
그렇게 평소처럼 왁자지껄 아는 사람 다 모여서 술을 마시던 그 날. 부어라 마시고 바람을 쐬러 나오는 길. 아직 꽃이 피기엔 밤바람이 서늘했다. 돌아갈까 망설이던 정한은 뒤를 따라 나온 익숙한 야구모자를 보고 손을 뻗으니 자연스럽게 제 겉옷을 쥐어주던 걔와 나란히 걸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산 메론맛 아이스크림을 너 한 입, 나 한 입 나눠 먹다가 아이스크림에 남은 제 잇자국과 저를 번갈아 쳐다보던 석민이 하던 소리가 잊혀지질 않았다.
"형은... 앞니도 예쁜 거 같아요."
듣도보도 못한 플러팅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던 그 날.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으면서도 술기운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감은 정한의 볼을 감싸던 손은 생각보단 거칠었다. 한참을 겹치고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나서 정한은 제 어깨에 걸쳐있던 걔의 옷이 떨어진 걸 알았고, 그걸 주우려고 걔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이석민이 도망갔다.
술자리로 돌아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정말, 진짜 이석민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내 너를 찾으면 가만두지 않으리. 봄날 벚꽃 아래 로맨스가 추격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난 정한이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종강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였다. 정한은 원래 성미가 참을성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몇 주를 참은 건 조금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윤정한은 윤정한이었다. 세봉대학교를 다니면서 정한을 모르면 둘 중 하나였다. 간첩이거나 주변에 한 톨도 관심이 없거나. (사실 정한을 모르면 무조건 간첩이었는데 최근 입학한 승철의 동생~최한솔~이 정한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하여 정정되었다. 대상이었던 정한보다 형에게 관심이 없냐며 승철이 더 서운해했다.)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플러팅을 처음 당해보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석민은 이상하게 특별했다. 살면서 앞니가 예쁘다는 플러팅을 한 놈이 전무후무 할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사람 마음을 기대고 싶게 만드는 마법이 있는 놈이었다. 본인은 평범함이라는 고속도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살았을 것 같이 굴면서도 다른 사람의 별난 모양을 구기지 않고 안아주는 애. 그래서 걔 품에 들어갈 땐 그 애의 품에 맞춰 나를 구기거나 숨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됐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받아들여줄 곳이 있다는 건, 정한에겐 큰 위로였다.
세봉대학교 사람들이 윤정한을 모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얼굴이 맞지만, 또 다른 하나는 정한의 뒷배경에 있었다. 정한은 뉴스에도 몇 번 나온 적이 있었다. 물론 얼굴 때문은 아니고 그의 핏줄 때문이었다. BSK라는 대기업, 드라마에도 종종 나오는 재벌들. 시대를 풍미한 건 아니지만 아름다움이 뒤처진 건 아니었던 배우 윤정빈이 품은 아이의 핏줄은 BSK의 상속자이며 약혼자가 있는 남자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윤정한이 됐다. 그 이후 BSK에서 일어난 일은 윤정한과는 알 바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가십거리는 되었다. 그런 윤정한이 숨을 수 있는 방패가 되어준 사람들이 지금의 친구들이었다.
뉴스에 흘러나오는 BSK 관련 소식에 얘 살던 데선 주로 있는 일이라며 뼈해장국을 먹던 승철과, 캘리포니아의 일상은 아니지만, 할리우드에선 종종 있는 일이라고 답하며 다음엔 묵은지 말고 우거지를 시켜달라는 말을 덧붙이던 지수는 정한의 든든한 친구들이었다. 웬만한 놈들이 덤벼도 두렵지가 않았다. 굳건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단한 방패말고 푹신한 쿠션 같은 게 필요할 때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몸을 던져도 자길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타난 게 걔였다. 정한의 뒷배경을 다 알고 나서 이석민이 처음 물어본 질문은 이거였다.
"재벌들은 진짜 요플레 뚜껑 안 먹고 버려요?"
.....글쎄, 마주보고 요플레를 안 먹어봐서 모르겠는데. 정한의 대답에 석민은 굉장히 아쉬워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 이후로 정한의 앞에서 굳이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가족에 관한 말을 아끼거나 삼가지 않았다. 석민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형과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단란한 가족 이야기를 하면 처음엔 다들 정한의 눈치를 봤다. 가족에 관한 가십이 드물지 않게 뉴스를 타고 있으니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한도 어머니와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아들이었다.
정한은 석민 덕분에 자기 가족 이야기를 가볍게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간만에 본가가서 엄마랑 영화봤어. 엄마랑 여행 다녀왔어. 엄마가 반찬 보내줬어. 예전엔 엄마, 만 나와도 눈치를 보던 애들이 이젠 엄마보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 어딜 다녀왔는지를 더 궁금해했다. 석민은 모르겠지만 그건 정한에겐 새로운 일상이었다. 커다란 고마움이었다. 걔 앞에선 자기가 BSK의 혼외자가 아니라 그냥 윤정한이 된 것 같았다. 무언가 한 겹 벗어낸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가볍고 붕붕 떠올랐다. 눌러담아져있던 마음에 빈틈이 생기니 점점 무언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즐거움이기도 했고, 설렘일 때가 많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정한이 다시 몸을 돌려 제 겉옷을 벗었다.
봄 날씨였다. 그리고, 추우면 제 것으로 덮어줄 놈을 만나러 갈 거니까.
빠르게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던 정한의 앞에 가로등 아래 익숙한 야구모자를 쓴 실루엣이 보였다. 봄바람을 가르고 열심히 달려갈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달려갈 거리가 단거리였다. 정한이 그대로 전봇대 앞으로 달렸다. 앞에 서자마자, 퍽 소리가 나도록 석민의 옆으로 발을 짚어 그대로 퇴로를 막았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혀, 혀. 형..."
"마침 잘 됐다. 나 너 찾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저를요? 석민이 전봇대 틈으로 쭈그려 들어갈 기세로 어깨를 앞으로 쭈그리며 말했다. 응. 정한의 대답에 석민이 쪼금 더 쪼그라들었다. 왜, 왜요....
"넌 왜 왔는데."
"저는 형... 형 보고 싶어서 왔죠."
"그치, 입술 부비고 나니까 더 보고 싶었지."
"....형 그게요. 제가 실기를 앞두고 있는데 도저히 못참겠고, 그래서 형한테 뽀뽀를 했는데요. 근데 실기가 끝났어요. 그래서 형이 너무 보고싶은데. 전화도 하고 싶은데 제가 맘대로 전화를 또 못하겠어서."
"모자 벗어."
네? 모자 벗으라고. 모자요? 답답하게 되묻는 석민에 정한이 손을 올려 맘대로 걔의 야구 모자를 잡아 벗겼다. 누가보면 옷이라도 벗긴 것처럼 기절초풍하는 표정에 정한이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었다.
"너 나 좋아해?"
"...당, 당연하죠. 형 제가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그러지는."
"그럼 됐어."
정한이 짚고 있던 발을 내려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마음의 거리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 거리를 기억하라고 밀착해 붙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맞붙었다. 힘을 줘서 단단하게 굳어있던 입술이 힘이 풀리면 몸을 쭉 늘인채로 있던 정한을 배려하듯 품으로 안아드는 손이 있었다. 그대로 푹신하게 품 안에 골인이었다. 싱거운 추격전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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