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아침
겸한
정한은 잠든 척 눈을 꼭 감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느지막이 잠에서 일어나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인다고 해도 뭐 하는지 다 보일 것처럼 구는 애와 살면 이런 재미가 있었다. 베갯잇을 꼭 쥐고 끌어당기며 자세를 고쳐잡은 뒤 이불을 끌어 올려 덮은 채로 잠에 들듯 말듯 한 기분을 즐기며 정한은 소리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음, ……. 시리얼을 먹고 있는 것 같다. 스푼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바삭바삭 먹는 소리. 이어폰을 끼고 영상이라도 보고 있는지 낮게 웃는 소리도 들린다. 크게 웃음이라도 터질만하면 큰 한숨을 뱉으며 애써 참아내는 소리까지 듣고 나면 한 번 크게 웃으라는 아량으로 “석민아.”하고 부른다.
“…형 나 불렀어?”
“나 물-.”
급하게 일어났는지 드르륵, 하는 의자 끌리는 소리. 제 잔소리가 걱정됐는지 뒤늦게 의자를 들었다가 내려놓는 소리. 띵동하고 정수기 버튼 소리. 그리고 물이 한참 떨어지는 소리. 따듯한 물을 섞어서 오는지 버튼 소리가 여러 번 울린다. 타타타, 강아지 발자국처럼 슬리퍼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나면 문 열리는 소리. 침대 앞까지 걸어오는 소리.
“형, 일어나봐. 물 일어나야 마시지.”
“…귀찮아.”
억지를 부리면 웃으면서도 침대 옆에 걸터앉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아 줄 거라 믿고 있으면, 꼭 그 믿음을 읽은 것처럼 등 뒤로 따스한 손이 닿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차- 하는 소리와 함께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키고 그대로 제 옆에 앉아있는 놈에게 푹 기대면 입술 앞까지 물잔이 온다. 몇 모금 마시고 나면 숨이라도 쉬라는 듯 알아서 컵을 떼어준다. 그러면 그쯤.
“…형 눈 뜬 거 보기 너무 힘들다. 진짜.”
투정 부리는 강아지 하나가 눈앞에 대령 되어 있는 것이다.
흔한 아침
이석민 윤정한
윤정한은 센티넬‘이었다’. 지금은 은퇴했다는 뜻이다.
센티넬은 대부분 인간이 가진 오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정한은 청각을 사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릴 땐 상상 속 소리를 듣는다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덕에 병원에 갔고, 검사를 받았고. 센티넬이라는 판정을 조금 더 일찍 받을 수 있었다. 빠른 가이딩이 아니었으면 아마 정한은 정말 상상의 소리와 진짜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 소리를 막기 위해 제 귀를 뜯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조절하는 것을 배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원래 정한은 몸으로 하는 것은 다 잘하는 편이었기에, 당연히 능력도 그럴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신체보다 정신이 문제였다. 어린 정한은 방사 가이딩과 약물로 버티며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가 가진 가이딩 능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어린 센티넬들이 범죄에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19세 미만의 센티넬에게 과도한 접촉 가이딩을 진행한 가이드는 그 즉시 페어가 끊기고 센터에서 퇴출당하며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건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동일한 행위를 했을 때도 적용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가이딩 캡슐에서 나올 때마다 정한은 사람의 품에서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짝’ 같은 차가운 캡슐 안에 누워서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모르는 파장에 떨려오는 신체를 받아들이는 건 어렵고, 가끔은 구역질도 나는 일이었다. 19살이 빨리 넘어서 아무 가이드나 붙잡고 가이딩을 받고 싶었다. 이명처럼 남아있는 잡다한 소리들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렇게 간신히 19살이 되던 해의 정한은 정말 이렇게까지 ‘아무나’ 자신과 가이딩을 하게 될 거라면 이런 생각은 안했을 거라고 말했다.
정한의 눈앞에 나타난 건 몸만 헛자란 것 같아보이는 남자애였다. 가이딩 교육 센터에서 교육을 수료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샛파랗게 어린 가이드. 나이를 들어보니 17살이었다. 성장하는 아이들 사이의 2년은 너무나 큰 간극이었다. 정한은 하루에도 몇 번씩 페어 센터에 찾아가 진짜 저 어린 애가 가이드가 맞냐고 물었다. 그럼 그의 앞엔 몇 번이나 본 서류가 내밀어질 뿐이었다. [파장 일치도 S - 즉시 페어 연결 진행] 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가이딩 등록서에는 이석민이라는 이름이 아직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쓰여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고작 열일곱과 뭘 하겠나 싶었는데, 파장이 맞는 가이드의 존재는 달랐다. 손끝이라도 스치면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가득 채우던 사소한 소음이 사라지고 하고 싶은 생각만이 남아 명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순간이 좋았다. 가끔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해 두통에 시달리는 정한을 보면 석민은 제 손으로 정한의 귀를 덮어주곤 했다. 고작 인간의 손으로 막아질 수 있는 소음이 아니었으나 그 행위가 자신을 진정시킨다는 것은 정한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정한은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제 귀에 손대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그게 자기 자신이더라도 그랬다. 석민을 만난 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게된 건, 사람들이 원래 서로의 귀를 만지진 않는다는 것도 있었고 방사 가이딩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실험이나 검사를 받을 때가 아니고서야 누군가 함부로 정한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소음은 어떤 상황에선 정한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한은 자신의 능력 뿐만 아니라 영영 소리 자체를 잃을 수도 있었다. 오로지 가이드인 이석민만이 그의 귀를 덮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틋한 두 사람도 정한이 스무 살을 넘기고, 그 뒤로 2년이 흘러 석민까지 스무 살을 넘겼을 때야 공식적인 페어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의 이름으로 가이딩센터 내부의 룸을 사용할 수 있고, 그 안에는 어떤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같은 설명을 들으며 두 사람을 한참 얼굴을 붉히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둘 사이가 유별나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면서 해방을 느끼는 정한을 따라 고요한 센터의 밤 거리를 걷고, 쓸모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귀마개가 나왔다고 하면 구경하러 기웃대고, 정한의 귀에 손을 얹어주기 전에 제 손을 데우다 차가워진 정한의 손에 쥐어줄 핫팩을 묶음으로 사두는 게 석민의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일상이 완전히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석민은 공식적인 정한의 파트너로서 전장에 나가게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은 늘어갔다. 서로 부딪히는 시간도, 알아가는 시간도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한은, 자신이 키스할 땐 어떤 소리가 나는지도 알게 되었다. 외부에서 자신에게 스며드는 소리가 아니라 제게서 나오는 소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듣는 건 낯선 일이었다. 정한은 그런 걸 할 땐 귀를 막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석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꽤 단단해진 등에 정한이 주먹을 내질렀다.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게 까불어. 정한이 그러면 석민이 웃으며 말했다. 가이딩 다 해줬더니 엉뚱한데 힘 쓰네. 점막 가이딩은 꽤 대단한 힘이 있었다. 가이딩을 받을 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게 오로지 가이딩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한은 석민과 닿으면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것 같았는데, 이젠 새하얗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서 두려울 때가 있었다. 그게 뭉툭하게 밀려드는 가이딩에 의한 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부딪혀오는 살갗에서 느껴지는 뜨거움 때문인지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물러나고 싶지 않아서 미끄러지는 손을 들어 몇 번이고 어깨를 붙잡아 들었다. 점점 두꺼워지는 어깨는 이제 정한이 붙잡고 있기도 어려워져서 걔가 손깍지를 끼워주든, 아니면 목뒤에 손을 둘러주든 할 때까지 손톱자국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고, 또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었다 건져 오는 날을 수없이 스치다 보니 지금이었다. 센티넬들을 교육하는 역할로나마 남아주길 바라던 센터의 간절함에 정한은 응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둘이 살자. 밤을 보내고 눈을 가물거리며 잠들기 직전의 정한의 귀를 쓰다듬어주면서 석민이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형이 귀를 열어둬도 들리는 게 바람 소리뿐인 곳에서 살면 좋겠다. 형이 좋아하는 나뭇잎 소리가 막 나는 곳.”
… 정한은 숨을 길게 뱉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의 품에 기대 눈을 꼭 감고 귀를 열었다. 지금 누워있는 곳은 석민이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면서 정한의 능력 범위 안에 거슬릴만한 것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닌 석민이 간신히 발견한 곳. 이곳도 은퇴 전 정한이 마지막으로 체크한 능력 범위가 이전보다 더 좁아지면서 찾게 된 곳이었다.
처음 그 집을 알게 된 정한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네 품에 기대서 눈만 감으면 내 귀에 들리는 건 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 뿐인데. 했더니 석민이 주머니에서 웬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내가 멋지게 프로포즈하려고 했는데, 형이 더 멋지게 말해서 못 하겠어.
“형, 내가 영원히 형의 유일한 귀마개가 되고 싶어….”
멋없는 말에 정한이 까르르 웃었다. 한참을 웃으니 석민이 울상이 되어가는 게 보여서 정한이 그대로 의자에서 내려와 석민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도 너밖에 없어. 하면 앞으로도 계속 유일하고 싶다고…. 하며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한이 냉큼 상자를 뺏어와 손에 반지를 꺼내 들어 제 손에 끼웠다. 석민은 그날 정한이 전투에서 쓰러져서 돌아온 걸 처음 본 날보다는 한두 방울 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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